조춘 외 6편

[2014 아르코창작기금]

 

 

조춘(早春)

 

 

문태준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정류장에서

 

 

언젠가 내가 이 자리에 두고 간 정류장

 

둥근 빗방울 속에 그득 괴어 있던 정류장

 

꽃 피고 잎 지고 이틀 사흘 여름 겨울 내려서던 정류장

 

먼 데 가는 구름더미와 눈보라와 안개의 정류장

 

홀어머니 머리에 이고 있던 정류장

 

막버스가 통째로 싣고 간 정류장

 

 

 

 

 

 

 

 

 

 

망실(亡失)

 

 

    무덤 위에 풀이 돋으니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오늘은 무덤가에 제비꽃이 피었어요 나뭇가지에서는 산새 소리가 서쪽 하늘로 휘우듬하게 휘어져나가요 양지의 이마가 더욱 빛나요 내게 당신은 점점 건조해져요 무덤 위에 풀이 해마다 새로이 돋고 나는 무덤 위에 돋은 당신의 구체적인 몸을 한바구니 담아가니 이제 이 무덤에는 아마도 당신이 없을 거예요

 

 

 

 

 

 

 

 

 

 

소낙비

 

 

나무그늘과 나무그늘
비탈과 비탈
옥수수밭과 옥수수밭
사이를
뛰는 비
너럭바위와 흐르는 시내
두 갈래의 갈림길
그 사이
하얀 얼굴 위에
뿌리는 비
열꽃처럼 돋아오는 비
이쪽
저편에
아픈 혼의 흙냄새
아픈 혼의 풀냄새

 

소낙비 젖어 후줄근한 고양이 어슬렁대며 산에 가네
이불 들고 다니는 행려처럼 여름낮은 가네

 

 

 

 

 

 

 

 

 

 

여시(如是)

 

 

    백화(百花)가 지는 날 마애불을 보고 왔습니다 마애불은 밝은 곳과 어둔 곳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눈두덩과 눈, 콧부리와 볼, 입술과 인중, 목과 턱선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안면의 윤곽이 얇은 미소처럼 넓적하게 펴져 돌 위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객들은 그 마애불에 곡식을 바치고 몇번이고 거듭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깊은 밤에 홀로 누워 있을 때 마애불이 떠올랐습니다 내 이마와 눈두덩과 양 볼과 입가에 떠올랐습니다 내 어느 반석에 마애불이 있는지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온데간데없이 다만 내 위로 무엇인가 희미하게 쓸려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시월

 

 

    수풀은 매일매일 말라가요 풀벌레 소리도 야위어가요 나뭇잎은 물들어요 마지막 매미는 나무 아래에 떨어져요 나는 그것을 주워들어요 이별은 부서져요 속울음을 울어요 빛의 반지를 벗어놓고서 내가 잡고 있었던 그러나 가늘고 차가워진 당신의 손가락과 비켜간 어제

 

 

 

 

 

 

 

 

 

 

이 시간에 이 햇살은

 

 

마른 산수국과 축축한 돌이끼에 햇살이 쏟아지네
묏등과 무덤을 두른 산담에 햇살이 쏟아지네
끔적끔적 슬쩍 감았다 뜨는 눈 위에 햇살이 쏟아지네
나의 움직이는 그림자와 걸음 소리에 햇살은 쏟아지네
서럽고 섭섭하고 기다라니 훌쭉한 햇살은 쏟아지네
외할머니의 흰 머리칼에 꽂은 은비녀 같은 햇살은 쏟아지네
이 시간에 이 햇살은 쏟아지네
찬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앉으니 따라와 바깥에 서있네

 

 

 

 

 

 

 

 

 

 

 

 

 

 

 

작가소개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이 있음.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등을 수상.

 

《문장웹진》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