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여행⑨] 프랭크와 트릭시

 

[여행에세이_이 또한 여행 ⑨]

 

 

프랭크와 트릭시

– 런던에서 보낸 6개월

 

 

양재화

 

 

 

    대학교에 들어가서 3년 내내 기본적인 학업 외에도 광고 연합 동아리 활동, 각종 공모전 준비와 기업의 대학생 마케터, 도서관 근로 등으로 정신없이 살았다. 재미도 있었고, 나름의 재능도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의문은 없었다. 이게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인지,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을 보낸 뒤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가기로 했다. 영어가 부족하니까, 많이들 가니까, 집안 형편이 되니까, 또 별 의문 없이 선택했다. 드럼통만 한 이민가방을 끌고 런던 히스로 공항을 빠져나오던 순간까지도 앞으로 몇 달간 내 가치관과 삶의 틀이 완전히 뒤바뀌리라는 것을, 모든 게 의문투성이가 되리라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물리법칙이나 영화 대사를 빌리지 않더라도, 인생에서 어떤 1분은 다른 1시간보다 길다는 것, 마찬가지로 어떤 6개월은 이전의 3년보다 길다는 것,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깨달았다.
    템스 강 남서부의 배터시,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2층짜리 주택이 벽을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통적인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6개월을 살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말에도 거의 매일같이 홈스테이를 하는 집을 나서 큰길에 나가 버스를 타거나 부지런히 걸어 ‘ASDA’라는 거대한 창고형 할인 마트를 지나 클래팜정션 역에서 기차를 탔다. 목적지는 어학원이 있는 곳이자 교통의 중심지여서 런던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빅토리아 역. 아침이면 어두운 색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과 조간신문을 든 채 출근하는 무표정한 직장인들 틈새에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템스 강과 그 유명한 배터시 화력발전소를 새삼스러워하는 눈으로, 늘 약간 감탄하며 바라보던 일상이었다.

 

    유학원을 통해 배정되는 홈스테이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안 들지는 순전히 ‘운’에 달려 있어서, 보통은 첫 한 달 정도만 살다가 다른 집을 알아보거나 다른 어학연수생들과 방이 여러 개인 ‘플랫’을 얻어 거실과 주방 등을 공유하며 함께 생활하기 마련이다. 나처럼 어학연수 기간 동안 내내 한곳에서, 그것도 홈스테이로 지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그 드문 행운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호스트 가족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던 머리가 새하얗게 센 노부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예감이 좋았다고 해야겠다.
    ‘아빠’ 프랭크는 은퇴하기 전까지 배관공으로 일했다. 수업 시간에 영어 단어로만 배웠던 그 ‘plumber’였다. 늘 웃기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농담을 좋아하고, 실패에 아랑곳없이 작은 거짓말들을 늘어놓아 날 놀리는 데 재미를 들인 귀여운 할아버지였다. ‘엄마’ 트릭시는 비어트릭스라는 고전적인 이름을 싫어해 늘 애칭인 트릭시로 불렸다. 은퇴하기 전까지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친 경력답게, 엄격함과 자상함이 공존하는 사람이었다. 평생 성실하게 일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몸에 밴 성실함) 적당한 집을 장만하고 두 딸을 키운 부부는 자녀들이 분가하고 남은 방 두 개를 홈스테이 숙소로 제공해 세계 각지에서 온 또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노년의 소일거리 겸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그 집을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향기’다. 늘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말라 있는 욕실에서 나던 라벤더향 청소 세제 냄새, 내 방 침대 위에 항상 정갈히 빨아 다려 놓여 있던 병아리색 면 시트의 냄새, 일주일에 한 번 저녁에 특별 메뉴로 먹었던 오븐에서 갓 구워낸 로스트비프 냄새…… 트릭시와 프랭크의 손을 거친 집안은 언제나 반듯하고 향기롭고 포근했다. 수백 년 된 저택도 아니고 값비싼 골동품도 없지만,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대를 이어 물려받아 소중하게 간직하고 세심하게 관리해온 가구들은 가족의 역사 그 자체였다. 집 뒤편에 딸린 자그마한 정원에는 계절별로 꽃들이 만발했다. 그곳에서는 특별한 기념일이면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소박하고 정겨운 파티가 벌어졌다. 나도 기꺼이 초대받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프랭크와 트릭시의 결혼 40주년 파티였다. 아침에 두 딸이 거실 창가에 장식해놓은 플래카드와 풍선을 보고 나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지만 나도 딸이므로 무언가 해줄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수업이 끝나고 빅토리아 역에서 당시 내 생활비에서 사나흘 점심값이었던 거금을 주고 탐스러운 꽃다발을 사 집으로 달려갔다. 내가 큰 소리로 “축하해요!” 인사하며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 때 트릭시의 얼굴에 놀람과 기쁨이 번지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직업과 가족과 집에 대한 내 모든 관념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어떤 직업이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꾸려나가는 삶의 세부, 어디에 있는 얼마나 좋은 집이냐가 아니라 그것을 가꿔가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고 또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디테일을 가능케 하는 큰 틀, 곧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연금을 비롯한 사회제도의 수준과 역할도 가늠할 수 있었다. 하루는, 딸을 출산하고 집에 와 있던 이 집안 둘째 딸 멀리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늘 ‘of course’(물론, 당연하지)라는 말을 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을 마치면 뭘 할 거야?” 멀리사가 물었다.
    “‘물론’ 취직을 해야지.”
    내 대답을 듣고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하던 멀리사는 그건 ‘of course’ 한 게 아니라고,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궁금했다고 부드럽게 일러주었다. 아찔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 말하는 줄도, 곧 그렇게 생각하는 줄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보낸 한철 이후, 내가 그리던 삶의 방향에 의문부호가 붙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답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남부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기 전 런던의 집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낼 때, 프랭크가 자신이 일했던 시티 지역을 안내해주겠다고 해서 함께 길을 나섰다. 사실상 런던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기에 더욱 애틋했다. 런던 대화재 기념탑과 14세기에 지어진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실내 시장인 레든홀 마켓, 주요 은행과 구 왕립 증권거래소 등이 밀집한 금융가 구석구석을 거닐며 프랭크는 자신이 배관 작업을 했던 건물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프랭크의 표정에 묻어나던 자부심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프랭크는 그날 조금 상기되어 있었고, 조금 무리한다 싶게 많이 걸었다. 오후 4시면 해가 지기 시작하는 런던의 음침한 겨울 저녁, 우리는 찰스 디킨스 생가가 있는 동네의 어느 퍼브에 저녁을 먹으려고 들어갔다. 프랭크가 이 지역에서 일할 때 자주 들르던 곳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또는 놀라운 인연의 힘으로, 프랭크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다. 20여 년 만이라고 했다. 백발의 두 남자가 얼싸안고 반가움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런 삶이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 이미지와 다짐만큼은 잊히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양재화
 

– 대학에서 언론정보학 등을 전공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편집자로 1년 중 10개월은 돈을 벌고 2개월은 여행하며 살고 있다. 홈리스의 자립을 돕는 잡지 《빅이슈》에 ‘여행의 뒷모습’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blog.naver.com/moodforlife

 

   《글틴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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