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여행⑤]알타미라 동굴벽화 이야기

 

[여행에세이_이 또한 여행⑤]

 

 

알타미라 동굴벽화 이야기

– 스페인 산티야나 델 마르

 

 

양재화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주의 작은 산골 마을 산티야나 델 마르, 중세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며 가꿔온 석조 건물과 거리가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이 마을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미술사 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 유적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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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산티야나 델 마르 마을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대한 내용을 잠시 복기해보자.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후기 구석기, 대략 1만 8000년에서 1만 4000년 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한 세기 가까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알려졌다. 비록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기술의 발달로 그 지위는 내려놓았지만, 예술적 성취 면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카르스트 지형으로 생성된 석회암 동굴 곳곳에 검은 숯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적토와 망간 등을 이용한 붉은색 계열의 안료로 채색한 들소, 말, 사슴, 멧돼지 등의 그림이 남아 있다. 1만 3000여 년 전에 발생한 산사태로 동굴 입구가 막힌 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 벽화는, 1879년 아마추어 고고학자 마르셀리노 산스 데 사우투올라가 여덟 살 난 딸 마리아와 함께 나선 조사에서 발견되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딸 마리아가 어른이 들어가기 힘든 낮은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 “아빠, 소예요, 소!” 하면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의 이야기이다.
    이후의 스토리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학계가 순수한 열정을 지닌 한 아마추어가 이루어낸 세기의 업적을 매도하고, 조롱하고, 난도질하여 완전히 매장하는 잔혹사이다. 동굴의 그림들과 관련 조사 내용을 책으로 펴낸 사우투올라는 1880년 리스본 선사학회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명성을 위해 어린 딸까지 이용하는 파렴치한으로 비난받고 심지어 사기죄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그의 조사가 깡그리 무시당한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림이 지나치게 정교하고 사실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프랑스 일대에서 비슷한 그림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1902년에 이르러서야 알타미라 벽화 또한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초기에 사우투올라가 발견한 그림이 가짜라고 발표했던 주요 인물인 프랑스 고고학계의 중진 에밀 카르타야크는 1902년 「한 회의주의자의 속죄」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구석기인들에게는 물론 사우투올라에게 용서를 구했다. 사우투올라가 죽은 지 이미 14년이 흐른 후였다. 카르타야크가 사우투올라를 찾았을 때, 어른이 된 마리아가 그를 아버지의 무덤으로 안내해줄 수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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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최초 발견자 마리아와 마르셀리노 사우투올라

 

    인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자기 선조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폄하하고 불신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나는 이 거대한 역사 이야기에 묻혀버린 한 가정의 비극이 궁금했다. 부유하고 덕망 높은 귀족이자 변호사였던 이가 한순간에 치졸한 협잡꾼으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벽화를 발견한 후 꼭 10년 만에 세상을 뜨기까지, 그가 겪었을 상처와 고통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자신이 발견한 그림으로 인해 아버지가 고통 속에 살다 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을 어린 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어떻게 살았을까.
    숱한 문헌에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발견한 꼬마 아가씨 마리아로만 존재하는 한 여인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역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어왔을 비슷한 이야기에서 개인의 존재는 미미하다. 우리는 어쩌면 후대에 길이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던 선구적인 여성 고고학자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구글에서 찾아낸 정보로는 그녀의 생몰년(1870~1946)과 남편 에밀리오 보틴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에밀리오 보틴 이 산스 데 사우투올라 이 로페스(1903~1993)가 유로존 최대의 은행인 산탄데르 은행의 총수를 역임했다는 사실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세습 경영을 해온 산탄데르 은행은 마리아의 자손들이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업가와 학자의 역사 어디에도 사진 속 짧은 머리에 총명한 눈을 한 꼬마 아가씨의 흔적은 없다.

 

    스페인어로 ‘알타미라(Altamira)’는 영어의 ‘high views’, 우리말로 굳이 풀자면 ‘높은 전망’이라는 의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을에서 알타미라를 찾아가는 길은 경사가 꽤 가팔라서 천천히 걸어도 숨이 찰 정도였다. 그래도 오른쪽으로 저 멀리 펼쳐진 푸른 구릉에 점점이 흩뿌려진 양 떼와 옹기종기 모인 붉은 지붕 집들이 그야말로 근사한 ‘전망’이 되어주어,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 연신 감탄하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천천히 걷다보니 박물관까지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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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4. 알타미라 박물관 가는 길

 

    힘들게 올라왔지만 실제 동굴벽화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반에 개방되었으나, 한 해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찾으면서 한꺼번에 뿜어내는 이산화탄소와 체열로 벽화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1977년부터 개방을 중단했다. 박물관에서 동굴이 개방되던 당시의 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 더블브레스트 슈트에 베스트, 중절모까지 멋지게 차려입은 학자와 예술가 들이 관람을 용이하게 하려 깊게 파놓은 동굴 바닥(원래는 천장이 매우 낮으므로)에 놓인 의자에 앉아 만면에 순진하고 멍청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요 얄미운 인간들은 벽화를 직접 봤단 말이지! 파블로 피카소도 고 얄미운 인간들 중 한 명이다.
    1982년에 한 해 입장객을 8500명으로 제한하는 조건으로 다시 문을 열기도 했으나, 전 세계에서 쇄도하는 연구자들의 요청으로 3년 이상을 기다려야 볼 수 있었으며 그마저도 얼마 못 가 중단되었다. 2010년 말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칸타브리아 지방 정부의 요청으로 동굴을 재개방한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학자들의 강력한 반대로 스페인 문화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 스페인 정부가 올해 또 다시(지치지도 않고!) 동굴을 일반에 공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다시 한 번 학자들은 정부가 관광 수입에 눈이 멀어 전 인류의 유산을 망치려 든다며 필사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발견 당시부터 이래저래 우여곡절이 많은 유적이다. 이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구석기인들로부터 인간의 정신이 과연 얼마나 나아갔는지 자문하게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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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6. 알타미라 박물관 입구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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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박물관 내 인공동굴 내려가는 길

 

    이런 논란과는 별개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꾸준히 늘어왔다. 동굴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오랜 기간 철저한 고증을 거쳐 동굴 메인 홀을 재현한 박물관을 2001년 개관했기 때문이다. 인공 동굴 외에도 유럽 선사시대의 각종 유물과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았다. 입장료 3유로를 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우선 인공 동굴을 관람하기 위한 대기 공간에서 기다리게 된다. 15분에 한 번 반드시 가이드를 동반하고 소수의 인원만 입장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북적이는 마을과 달리 박물관은 한산한 편이어서 잠시 기다린 뒤 돌아오는 시간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은 금지다. 위의 사진 한 장 찍고 안내원에게 바로 제지당했는데, 동굴이 쩌렁쩌렁 울리는 바람에 무안해졌다. 들어오기 전에 대기석에서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하던 게 사진 찍지 말라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노 포토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알아들었을 텐데, 진짜도 아닌 가짜 동굴로 엄청 유세 떤다, 쳇.’ 잘못은 해놓고 머쓱해서 괜스레 투덜대며 지그재그로 이어진 어두컴컴한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랬는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전율’이란 말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신체의 반응을 동반하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실제로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머리칼이 쭈뼛 섰다. 검은 숯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붉은색 안료로 칠한 수십 마리의 동물들은, 각기 생김새도 자세도 심지어 ‘표정’도 달랐다. 특히 이차원의 사진으로 볼 땐 전혀 알 수 없었던 양감 표현이 압권이었는데, 동굴의 지형을 이용해 바위가 불룩 튀어나온 부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리고 있는 들소를 그려 넣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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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9. 알타미라 동굴의 메인 천장화. 아래 몸을 둥글게 만 들소는 천장이 불룩 튀어나온 부분에 꼭 맞게 그려 입체감을 살렸다.(자료 사진)

 

    오랜 시간 이 그림들을 하나하나 그려 나갔을 인류 최초의 창조적 천재(들)를 떠올리니, 경외감과 더불어 코끝이 찡해지는 아릿한 감동이 전해왔다. 교과서에서 이 그림들이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한 주술적 의미로 그려졌을 것이라고 배운 기억이 있다. 그러나 꾸준히 제기되어온 의문처럼,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가볍게 취급하는 것 같다. 자신의 ‘먹이’를 이토록 숭고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인적이 드문 동굴 깊숙한 곳에 무릎을 꿇거나 엉거주춤하게 서는 불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운 후 따로 모아둔 숯과 애써 구한 적토와 망간, 거기에 섞을 기름을 준비하고, 동물들의 생김새와 자세와 표정까지 각기 다르게 도안해서, 저녁으로 먹을 소고기를 그린다는 건 좀 억지스럽지 않은가.
    그보다는 대단히 섬세한 감각을 지닌 누군가(들)가 어느 날 들소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보며 ‘좋은 기분’을 느꼈고, 오늘날 우리가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그 상태를 ‘기억’하고 ‘재생’하고 싶어서 그리기 시작했다는 편이 훨씬 그럴듯하지 않은가. 실제로, 박물관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당시 스페인 북부 구석기인들의 주요 식량은 사슴이었고 들소는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사슴이 단 두 마리뿐이고 들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곧, 이 그림을 그린 ‘목적’이란 걸 굳이 찾는다면, 피카소나 이중섭이 소를 즐겨 그렸던 바로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피카소는 실제로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았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 점의 그림을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선 그것에서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는 것이다.
_폴 발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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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 폐쇄된 실제 알타미라 동굴 입구

 

 

양재화
 

– 대학에서 언론정보학 등을 전공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편집자로 1년 중 10개월은 돈을 벌고 2개월은 여행하며 살고 있다. 홈리스의 자립을 돕는 잡지 《빅이슈》에 ‘여행의 뒷모습’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blog.naver.com/moodforlife

 

 

   《글틴 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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