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연재] 색깔 없는 얼굴_제4회

[중편 연재 소설]

 

 

색깔 없는 얼굴 (제4회)

 

 

이종산

 

 

 

 

 

    낮은 하늘 아래에 콘크리트 상가 건물이 서 있었다. 어둡고 쌀쌀한 날씨였다. 4월 초의 날씨는 변덕스럽고 우울하고 여리다. 봄은 그리 밝게 빛나지 않는다.
    “희생자가 두 명 더 늘었대.”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 지현은 아침뉴스를 보고 있었다. 지현의 입에서 나온 ‘희생자’라는 어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어색한 어감의 단어가 아직도 목 뒤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정혜는 두통을 느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소에 적힌 호수는 B301이었다. 상가는 직사각형 형태의 4층 건물로 제법 컸다. 건물 전체에 칠해진 노란색이 산뜻하기보다는 건물을 우중충해 보이게 했다.
    건물 안은 크기에 비해 활력이 없고 썰렁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이 있는 복도로 나갔다. 복도에 우편함이 있었다. B301호의 우편함은 비어 있었고 다른 우편함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2층과 3층은 형광등 두어 개가 켜져 있을 뿐이어서 어두웠고 비어 있는 가게가 많았다. 빈 상가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혜는 코트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대충 씹어 넘기고 B301호 앞으로 갔다. 역시 비어 있었다.
    잠시 그 앞을 서성거리다가 3층을 한 바퀴 돌았다. 간판이 낡은 중국집 한 곳이 열려 있었다. 정혜는 자장면을 하나 시키고 주문을 받은 여자에게 B301호에 대해 물어봤다. 여자는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가 정혜가 앉은 테이블로 돌아왔다.
    “거긴 빈 지 오래됐어요.”
    “예전엔 뭐가 있었어요?”
    “임대가 안 나가서 여기 건물주가 잠깐 쓰다 말았지, 아마.”
    그리고 여자는 주방 쪽으로 갔다. 음식이 금방 나왔다. “관심 있으면 부동산 가지 말고 여기로 와요. 오래 비어 있던 곳보다는 쓰던 곳이 더 나을 거예요.” 여자가 정혜 앞에 자장면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느낌으로 보아 가게를 내놓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팔리지 않는 가게에서 어쩔 수 없이 적자 보는 장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정혜는 여자가 주는 전화번호를 거절하지 못하고 지갑에 넣었다.

 

    자장면을 반쯤 먹고 가게에서 나오니 밖은 그새 맑아져 있었다. 구름이 움직인 모양이다. 상가 건너편에는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길에는 나무가 많았다. 싹이 돋는 시기였다. 정혜는 나뭇가지에 돋은 파란 싹을 보다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봄이긴 하구나.
    자전거가 스쳐 지나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정혜는 자전거가 멀어진 후에 그 얼굴을 기억해냈다. 짓궂게 웃는 하얀 얼굴. 정혜를 요양병원에서 아파트까지 데려다 준 팔다리가 긴 남자였다. 자전거를 탄 그 애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흰 셔츠에 남색 바지, 나이키 운동화. 순간적으로 본 인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졌다.
    나를 보고 웃었다.
    정혜의 기억 속에서 자전거를 탄 남자애는 정혜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하철역으로 나가는 버스 정류장에 아까 그 애가 입은 것과 같은 교복을 입은 남자애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정혜는 남자애들의 가슴팍에 달린 마크에서 학교 이름을 읽어내려 애썼다.

 

    ─

 

    정혜는 피로를 느끼며 집으로 들어갔다. 요즘은 옅은 피로감이 항상 몸 전체에 달라붙어 있다. 마사지라도 받아볼까. 병원에 가면 마사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약을 더 받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검진 정도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면 그만인데 내키지 않아서 미뤄두고 있었다.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그대로 다시 입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안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밖이 정말 병원보다 나을까. 점점 확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왔어?”
    정혜는 낯선 목소리에 신발을 벗다 말고 허리를 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게 벌어진 남자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동생의 남편이었다.
    “민우 씨?”
    “소파 정도는 사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들어왔어요?”
    “열려 있던데.”
    이 사람이 이렇게 뻔뻔했던가. 지현이 문단속을 잊었을 리 없다. 어떻게 들어온 걸까. 정혜는 우선 안으로 들어갔다.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요. 잠시만.”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동생의 남편이 일어났다.
    “동우는 어디 있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반말도 존대도 아닌 말이 거슬렸다. 병원에서 두어 번 본 게 다였고 대화라고 할 만큼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도 없었다. 동생의 남편은 자신보다 아홉 살 어린 처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동우는 지현이가 학교에 데려갔어요.”
    “끝났을 시간인데.”
    “알아서 하세요. 전 피곤해서.”
    “하여튼 그 여자.”
    동생의 남편은 말끝을 흐렸다. 조금이라도 말을 받아주면 불평을 쏟아놓을 기색이었다.
    “전 모르겠어요. 나가세요.”
    정혜는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정혜가 단호해지자 동생의 남편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지금까지 무대에서 뻔뻔한 사람을 연기하다가 극이 끝난 것 같았다. 동생의 남편은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어깨에는 힘이 빠졌다. 전보다 연극배우답게 보였다.
    “그 여자한테 완전히 질렸어요. 이게 마지막입니다. 노력은 끝났어요.”
    이 사람은 어디서나 이렇게 연극 투로 말하고 행동할까? 지현과 결혼할 때만 해도 버는 돈이 거의 없는 무명 배우였던 남자다. 결혼 뒤에 오랫동안 엄마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생의 남편이 집에 수입을 가져오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두어 번 들어왔던 영화 출연 제의도 거절하고 연극만 고집할 수 있었던 건 지현의 공이 컸다. 지현은 남편이 처가의 덕을 본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신경질을 부릴 때가 있다는 하소연을 가끔 했다. 남편이 자리를 잡은 일이 년 전부터는 바빠져서 부딪치는 시간도 적어지고 시비를 거는 일도 줄어서 편해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동생의 남편이 처가 덕을 본 건 사실이다. 지현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저 남자가 배우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동생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이다.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금방 피곤해져요. 지현이 오면 왔었다고 전할게요. 이만 가주세요.”
    “동우만 데려가면 돼요. 더 이상 그 여자에게 맡겨둘 수 없어요.”
    이제 연극계에서 제법 잘 나가는 인사가 된 훤칠한 남자가 정혜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정혜는 지현에게 진 빚을 떠올렸다. 7년 동안 진 빚은 무거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와서 언니를 간병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생의 남편도 힘들었을 테지만. 정혜는 동정심을 눌렀다. 나는 동생 편이어야 해.
    “지현이는 민우 씨랑 결혼하고 자기 인생 없이 살았어요. 동우랑 나를 돌보고 집안 살림하면서 숨 쉴 틈도 없이.”
    “나를 신경써주지는 않았죠.”
    남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정혜는 그 커다란 어린애가 정신을 차리도록 패주고 싶어졌다. 당신은 내 동생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데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애의 아버지라고. 지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어린애야.’ 지현이 보기에는 나도 저 남자 같을까? 멋대로 굴면서 한편으로는 의지하고 투정부리고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상대가 한 명씩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저는 제 동생하고는 좀 달라요. 예전부터 그랬어요. 그 애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워서 제 변덕이나 응석을 잘 받아줬어요. 저는 좀 달라요. 떼쓰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금방 피곤해져요.”
    예전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쪽은 나였고 내 동생은 정반대였어. 나는 참는 데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만 꺼지고 투정은 그 애한테나 부리라고. 정혜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입을 다물었다.
    “그만하죠. 내 아내가 어떤 여자인지는 처형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민우가 두 손을 들었다.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두 손을. 그 연극적 제스처는 그 남자에게 잘 어울렸다. 꼴 보기 싫을 만큼 잘. 처형이라. 나는 저 나이 많은 동생의 남편을 어떻게 불러야 하더라. 정혜는 호칭을 생각해내느라 바닥을 봤다.
    “그 여자는 내 아이를 방치했어요.”
    동생의 남편이 말했다.
    “그쪽보다는 아닐걸요.”
    그쪽, 그게 적절한 호칭이었다. 정혜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동생의 남편을 봤다. 그 남자는 체크무늬의 갈색 모직 재킷에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정혜는 그 짜증나는 재킷을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 남자가 재킷을 따라 밖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면.
    “그 여자에게 남자가 있는 거 알아요?”
    “그거라면 지나간 일이라고 알고 있어요.”
    “남자는 지나가고 돈은 계속 나가고, 그렇죠?”
    동생의 남편이 되물었다. 정혜는 죽을 만큼 피로해졌다. 이 신경전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잠시 가라앉았던 두통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면 안 될까요?”
    정혜는 자기가 듣기에도 거슬릴 만큼 부탁조로 얘기했지만 동생의 남편은 정혜를 보내주지 않았다.
    “오늘 밤에라도 신촌이나 강남에 가 봐요. 어디든 클럽이 있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그 여자를 만나게 될걸. 그 시간에 동우는 불 꺼진 집에 혼자 있을 거고.”
    “배우들은 다 그렇게 상상력이 좋아요? 상상이 지나치면 병이 돼요.”
    정혜는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고 있었다.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현이 그 남자와 아직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밤에 놀러나가는 지현을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상상력에 문제가 있는 쪽은 지현의 남편이 아니라 자신인지도 모른다. 어제까지만 해도 은호나 지현을 은밀함과는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은호가 무언가를 훔칠 수 있다는 것이나 지현이 남편 말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해봤어야 했던 걸까? 누구든 간에 그 사람조차도 자신이 할 줄 몰랐던 일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혜는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일들을 겪어봤고 그 일들은 대부분 자신이 해보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한 일들이었다. 어떤 일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어떤 일은 단지 사고였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거대한 사건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사소한 결정들이 연속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발이 걸려 넘어진다. 정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운명이라고 느껴본 적도 없었고 벌어진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전 시간을 낭비하는 걸 싫어해요.”
    사실 시간낭비는 정혜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에 하나였다. 동생의 남편은 더 할 말이 없어 보였고 정혜도 그 남자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윗집 남자가 계속 맴돌았다. 윗집 남자의 거실에서 수다를 떨고 싶었다. 윗집 남자와 마주앉아 대화를 시작하면 할 얘기가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정혜는 살풍경한 거실에 동생의 남편을 내버려두고 화장실로 갔다. 손을 씻고 손에 수돗물을 받아 약과 함께 삼켰다. 약을 먹은 즉시 두통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중독도 일상에 속해 있다. 약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로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 편안함이 두려움을 이긴 지 오래됐다. 편안함에서 벗어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동생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갔구나. 정혜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침실로 들어갔다. 코트를 벗어 침대에 걸쳐놓고 검은색 블라우스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청바지를 마저 벗은 후에 허리를 굽혔다. 블라우스를 줍기 위해서였다.
    대충 벗어놓은 블라우스는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침대 시트 위에 허물처럼 말려 있었다. 블라우스가 약간 움직인 것 같았다. 정혜는 블라우스를 들었다. 밑에 무언가가 있었다. 정혜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침대 시트 밑으로 작은 손이 삐져나와 있었다. 정혜는 용기를 내어 침대 시트를 들추고 안을 들여다봤다. 움직이지 않는 작은 손을 건드릴 용기까지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얼굴이 보였다. 동우였다. 정혜와 눈이 마주치자 동우가 웃었다.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동우가 곧바로 기어 나왔다. 침대 밑에서 나온 동우는 먼지 범벅이었다. 정혜는 동우를 화장실로 데려가 옷을 벗기고 얼굴과 손과 발을 씻긴 뒤 새 옷을 입혔다. 동우는 웃고만 있었다. 정혜는 동우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뭐 하고 있었어?”
    동우는 대답이 없었다. 정혜가 동우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동우는 웃으며 정혜의 손가락을 잡았다.
    “말 안 할 거야?”
    정혜가 동우의 엄지를 잡았다.
    “보물을 찾았어.”
    동우가 말했다. 어두운 침대 밑에서 하얀 얼굴을 마주쳤을 때 돋았던 소름이 정혜의 몸에 아직 남아 있었다. 애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정혜는 나이 든 사람들에 훨씬 익숙했다.), 애들은 원래 이렇게 잘 웃을까?
    정혜가 요양병원이나 길에서 본 아이들은 웃는 얼굴일 때보다 찌푸리거나 울상일 때가 더 많았다. 그게 아니면 장난감이나 먹을 것에 몰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며칠간 본 동우는 언제나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동우야, 엄마는 어디 갔어?”
    정혜가 물었다. 동우는 정혜가 보물이 아니라 엄마에 대해 묻는 게 의아한 것 같았지만 대답은 했다.
    “엄마는 볼일 있어서 나갔어. 이모, 내가 보물을 찾았다니까.”
    “동우는 용감하네. 원래 혼자서도 집에 잘 있어?”
    정혜가 다시 묻자 동우가 한숨을 쉬었다.
    “이모! 보물!”
    동우가 정혜의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정혜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동우가 정혜의 손가락을 슬며시 귀에서 떼어내고 속삭였다. 이모, 내가 보물 꺼내올까?
    정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남편의 말대로 지현이 동우를 방치하고 있는 거라면? 다시 머리가 쑤셔왔다. 동우가 침대에서 뛰어내려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말릴 기운이 나지 않았다. 옷을 한 번 더 갈아입혀야겠네.
    침대 밑에서 상자가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 동우가 나왔다.
    “이리 와.”
    동우가 손짓했다. 정혜는 침대에서 내려가 동우 옆에 앉았다.
    “열어 봐.”
    정혜는 동우의 재촉을 받으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는 봉해져 있지 않았다.

 

    윗집 남자의 차는 은색 폭스바겐이었다. 시간은 자정이 넘어 있었고 하늘은 차가운 비를 뿌려댔다. 정혜는 숨결에 섞여 피어오르는 입김을 보며 코트에 목도리, 부츠로 무장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깐 들고 있어요.”
    윗집 남자가 지팡이를 정혜에게 주고 우산을 접었다.
    “운전 할 수 있어요?”
    차에 올라탄 남자에게 정혜가 물었다.
    “운전을 할 줄 아냐고 묻는 겁니까? 그런 건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기 전에 물었어야죠.”
    “도와달라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차가 있는지 물었지.”
    정혜의 말을 듣고 윗집 남자는 기가 찬 듯 웃었다.
    “타기나 해요.”
    정혜는 남자가 앉은 쪽 차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남자의 지팡이는 무거웠다. 정혜는 차를 타기 위해 조수석 쪽으로 걸어가면서 지팡이를 거꾸로 들어 팁을 만져봤다. 팁은 쇠로 되어 있었다. 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묵직했다. 상식에 어긋나는 물건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제대로 걸어 다니려면 팁이 그렇게 무거워서는 안 된다.
    “지팡이가 무겁네요.”
    정혜는 차에 타 남자에게 지팡이를 넘겼다. 잠깐 사이에 머리가 젖었다. 정혜는 대답 없는 남자를 보며 머리를 털었다. 이번에는 변명을 준비하지 않았나 보네.
    “어디로 간다고 했죠?”
    남자가 물었다. 정혜는 동생의 남편에게 들은 장소를 말했다. 상자를 열었을 때 뒤에서 동생의 남편이 나타나 동우를 데려갔다.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나간 척하고 어디엔가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 정혜가 동우를 데려가지 못하게 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동생의 남편은 지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물었다.
    “그쪽은 알아요?”
    “아는 사람이 있겠어요. 밤에는 어디 있을지 알죠. 새벽 두 시에 매그넘에 가 봐요. 분명 거기 있을 테니까.”
    동생의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 동우의 손을 잡았다.
    “아빠랑 가고 싶어?”
    정혜는 동우의 의사를 물었다. 어느 정도는 비겁했다. 동우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동우가 싫다고 했더라도 동우의 남편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부족한 완력 때문이 아니라 당장 침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은 피곤 때문에. 혼자가 되고 싶었다.
    동우와 동생의 남편이 간 후에 정혜는 침대에서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동생이 아니라 동우 때문에 정혜는 윗집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극배우의 말대로 지현이 동우를 혼자 내버려두고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안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정혜는 와이퍼에 지워지는 빗방울들을 보며 회의를 느꼈다.
    “우울한 생각을 하고 있죠? 거기 열어보면 초콜릿이 있어요. 하나 먹어요.”
    윗집 남자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치며 말했다. 남자의 핸들에는 기어와 브레이크 기능을 하는 스틱이 달려 있었다. 정혜는 남자의 불편한 다리가 어느 쪽인지 궁금해졌다.
    “오른쪽이었나요? 아니면 왼쪽?”
    정혜는 불편에 대해서 별로 조심스럽지 않았다.
    “왼쪽이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기어나 브레이크 중 하나는 발을 써도 되지 않아요?”
    “한쪽이 약해지면 다른 쪽이 세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죠. 시력이 떨어지면 청력이 좋아지거나, 한쪽 팔을 못 쓰게 되면 다른 쪽 완력이 강해진다든가. 그런데 나는 아니더라고요. 나는 한쪽을 못 쓰게 되면 두 쪽 다 망가지는 경우예요.”
    남자의 말에 정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을 봤다.
    “초콜릿 안 먹어요?”
    신호등에 걸렸다. 남자는 차를 멈추고 초콜릿을 꺼내주려고 팔을 뻗었다.
    “우울한 생각이 아니라 동생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제 곧 만날 텐데 너무 그리워하지 말아요.”
    “여동생 말고 동생이 하나 더 있어요. 정우라고, 남동생이에요.”
    “그 친구는 차가 없나요?”
    차가 다시 출발했다. 싸늘했던 차 안은 어느새 따뜻해져 있었다. 정혜는 머플러를 느슨해질 정도로만 풀었다.
    “글쎄요.”
    “만난 지 오래됐어요?”
    “십 년 전에 사고 나기 전 날 본 게 마지막이었어요.”
    “무정한 게 어느 쪽이죠?”
    남자가 고개를 돌려 정혜를 봤다.
    “지현이랑 내가 싸우면 정우가 항상 말리는 역할을 했어요. 정이 많은 줄 알았는데 떠날 때는 미련이 없더라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없어졌대요. 그때 저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어요. 가족들은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소식이 없어요, 그 애.”
    “초콜릿을 먹어야겠네요.”
    다시 건널목 앞에서 차가 섰을 때 남자가 초콜릿을 꺼내 정혜에게 줬다. 정혜는 껍질을 까서 초콜릿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위스키 봉봉이었다.
    “잘 먹네요. 술 들어간 건데 괜찮아요?”
    “이름만 말하지 마세요. 순음 공포증이 있거든요.”
    요양병원의 언어 재활 치료사는 자주 사람이 바뀌었다. 정혜에게 순음을 연습하게 한 언어 재활 치료사는 나이 든 여자였는데 그간 오고갔던 치료사 중 최악이었다. 재활을 치료가 아니라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자신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바보 취급했다. 그 여자 앞에서 정혜는 자신이 말을 배우는 개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 여자의 쪼글쪼글한 입술이 맞부딪히며 ㅂ, ㅁ, ㅍ 따위의 소리를 낼 때 정혜는 비위가 상해서 도저히 그 여자를 따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곧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그 후 몇 명의 새로운 치료사가 왔다가 떠나는 일이 반복되는 동안 정혜는 순음을 이겨냈지만 가끔 그 여자가 떠올라 소름이 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 더 먹어요. 봉봉”
    남자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정혜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정혜는 쓴 맛이 날 정도로 단 위스키 시럽을 삼키고 새로 받은 초콜릿을 남자에게 던졌다.

 

    차를 매그넘 건너편에 세우고 두 사람은 밖을 살폈다. 클럽이 내뿜는 빛으로 거리는 초저녁처럼 밝았고 밝은 거리에는 외제차들과 여자들, 남자들이 있었다. 모피를 입은 여자가 남자 둘 사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현일까? 정혜는 당장 차에서 내려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고민하는 사이 여자는 남자들과 클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볼 거예요?”
    윗집 남자가 물었다.
    “같이 갈 거 아니었어요?”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듯이 정혜를 쳐다봤다. 여기에 오기 전,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면서 정혜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물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갔는데 남자는 순순히 차 키를 챙겨서 나왔다. 여기까지 와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불평할 수는 없다.
    “기다려 주실래요? 일단 차에서 지켜보고 싶은데.”
    정혜는 남자가 자신을 내려주고 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대답 없이 라디오를 켰다. 재즈 트리오 연주가 흘러 나왔다. 남자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워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있을게요. 도울 일 있으면 깨워요.”
    남자는 곧 잠이 들었다. 정혜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목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움직여서 남자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면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남자의 얼굴을 마주봤을 때 결국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은 정혜의 마음 안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예상했던 것보다도 크게 마음을 뒤흔들었다. 정혜는 놀라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정혜는 그 생각에 사로잡힌 채로 거리를 감시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새벽 2시가 가까웠고 지현처럼 보이는 여자는 없었다. 클럽에서 나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정혜는 라디오를 껐다.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이 덜 깨서 근육이 풀어진 얼굴이었다. 방심한 얼굴.
    정혜는 차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돌아보고 올게요. 제 동생이 없나 좀 봐주세요. 얼굴 알죠?”
    여기로 오기 전에 윗집 남자에게 핸드폰으로 지현의 사진을 보여줬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혜는 클럽과 카페, 불 꺼진 빌딩들로 빽빽한 거리를 걸었다. 목적을 잊어버릴 정도로 걷다가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두 캔 샀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물류가 들어 있는 플라스틱 상자에 무릎을 부딪쳤다. 얼어 있던 다리에 감각이 돌면서 고통스러워졌다. 정혜는 편의점 밖으로 나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봤다.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걷고 있었다. 초조함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그만 하자. 다 헛수고야.
    정혜는 길을 되돌아 나왔다. 건물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다. GPS를 켜서 현재 위치를 찾았다. 정혜는 지도를 보며 걸었지만 자꾸 다른 방향으로 빠졌다. 빌딩 사이에서 헤매던 중에 윗집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방금 클럽에서 나온 여자가 있는데 정혜 씨 동생 같아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정혜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털어놓고 GPS에 뜬 위치를 말했다. 얼마 후에 남자가 나타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토바이를 가져올 걸 그랬네.”
    남자에게 오토바이가 있던가? 피로 때문인지 판단력이 약해졌다.
    “멍하니 있지 말고 얼른 가요.”
    남자가 앞서서 걸어갔다. 정혜는 지팡이를 짚은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 애가 가버리기 전에.
    클럽은 헤맨 것이 우스울 만큼 가까이 있었다. 남자보다 정혜가 더 빨리 도착했다. 클럽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혜는 클럽 주위 골목들을 뒤졌다. 세 번째로 들여다본 골목에 지현이 있었다. 어떤 남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정혜가 골목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갔을 때 윗집 남자가 뒤에서 정혜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을 때 골목 쪽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 없는 거리에 소리가 울렸다. 정혜는 차 안에서 지현이 골목에서 나와 달려가는 것을 봤다. 지현이 멀리 가기 전에 골목에서 한 남자가 휘청거리면서 나왔다. 남자는 병을 들고 있었고 지현을 따라가려는 것 같았다.
    “도와줄까요?”
    남자가 물었다. 정혜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남자는 차에서 내려 휘청거리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윗집 남자가 휘청거리는 남자의 등을 지팡이로 내리쳤다.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윗집 남자가 쓰러진 남자에게 지팡이를 한 번 더 휘둘렀다. 어디를 내리쳤는지 정혜는 보지 못했다.

 

    ─

 

    마침내 집으로 들어갔을 때 정혜는 윗집 남자와 자신이 커다란 동물의 컴컴하고 따뜻한 입 안에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욕조 안에서 그런 기분은 더 강해졌다. 정혜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잊고 오래 욕조 안에 있었다.
    골목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던 지현은 젊고 아름다워 보였다. 지현은 스물일곱이다. 정혜는 지현의 나이를 잊고 있었다. 정혜가 병원에서 의식을 찾았을 때 지현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열일곱 여자애에서 결혼을 앞둔 스무 살 여자가 되어 있었다. 요양병원에서 정혜를 돌볼 때 지현은 화장을 하지 않았고 얼룩이 있는 티셔츠를 입었다.
    지현이 골목에서 달려 나올 때 코트 속으로 금색 니트로 짠 탑이 보였다. 탑 밑으로 매끈한 배가 드러나 있었다. 그 매끈한 배가 정혜에게 동생의 나이를 생각나게 했다. 지현은 어릴 때부터 자기 나이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남편과의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나이 들어 보였다.
    휘청거리는 남자에게서 달아나던 지현의 얼굴은 어리고 위태로워 보였다.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에 어려 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정혜는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진 배를 연보라색 가운으로 감추고 욕실에서 나왔다. 윗집 남자는 식탁 위에 있는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샹들리에는 화살을 든 아기천사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조각은 수정으로 된 것이었는데 화살촉에만 색이 들어가 있었다. 빨강이었다.
    “큐피드네요.”
    윗집 남자가 샹들리에 한쪽을 만지며 말했다. 정혜는 윗집 남자에게 다가갔다. 윗집 남자의 몸에서 땀과 비 냄새가 났다.
    “남편이 깜짝 선물을 했어요. 침대 밑에 숨겨놨더라고요.”
    정혜가 윗집 남자에게 수건을 건넸다. 윗집 남자는 남편이라는 말에 웃었다. 거실은 비어 있었고 벽에 걸린 사진이나 남자 물건도 없었다. 정혜는 은호의 냄새를 상상했다. 은호와 함께 살았다면 이 집의 냄새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 냄새는 지금 윗집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윗집 남자는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렸다. 정혜는 침대에 앉아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의 지팡이가 욕실 문 옆에 기대 세워져 있었다. 남자는 지팡이를 능숙하게 휘둘렀다. 정혜는 윗집 남자가 쓰러진 사람을 두 번째로 내리쳤을 때를 생각했다. 한 번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두 번째는 쾌락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팡이를 들고 차로 들어와 시동을 걸 때 남자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뱉었고 야만스러워 보일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정혜는 입을 열 수 없었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대화 없이 아파트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윗집 남자는 정혜가 사는 층만을 눌렀고 정혜는 거기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남자가 욕실에서 나왔다. 남자는 벌거벗고 있었다. 남자는 정혜를 만지지 않고 시트를 봤다. 시트의 파란 나비 그림을. “프시케.” 남자가 말했다.
    정혜는 남편일 수도 살인자일 수도 둘 다일지도 모를, 혹은 자신이 아는 누구도 아닐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운을 벗었다. 남자가 정혜의 허리를 붙잡았다.

 

  ─

 

 

    거실 쪽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정혜는 일어나서 가운을 입고 문을 열었다. 아직 어두웠지만 아침이 가까워져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람소리가 들렸다. 순간 코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서 정혜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남자가 어두운 거실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이 잡혔다네요.”
    남자가 말했다. 정혜는 텔레비전 속 범인의 얼굴을 봤다. 범인은 검은 잠바를 머리에 쓰고 있었고 범인의 얼굴이 드러난 작고 흐린 사진이 뉴스 하단에 있었다. 경찰과 취재진들로 북적였지만 소리가 나지 않아서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소리를 켤까요?”
    남자가 물었다. 정혜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그 사람 죽었을까요?”
    침묵이 흘렀다. 남자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닐 겁니다. 서툴렀으니까.”
    남자는 그리 서투르지 않았다. 정혜는 의심했다. 쇠로 된 팁을 단 지팡이를, 쓰러진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던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정장을 입고 운전을 하다가 다음에는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있던 팔 다리가 긴 남자애를, 클럽 골목에서 위태로운 얼굴로 달려 나오던 자신의 여동생을,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숨어 있는 자신의 유령 같은 남편을.
    정혜는 서서 뉴스를 봤다.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그동안의 범죄 행각이 날짜별로 정리되었다. 어느 학교 교수가 살인용의자의 범죄 동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용의자가 체포된 장소가 나왔다. 살인자는 지방 여관에 있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 어수룩한 인상의 잔혹하고 가난한 남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여관 장롱에서 피해자의 신체 일부가 든 가방이 발견됐다. 남자를 체포한 경찰은 남자가 그런 끔찍한 것을 가까이 두고 태연하게 자고 있던 것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살인자가 다시 나왔다. 살인자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정혜는 그 시끌벅적한 원을 봤다. 그 세계와 정혜의 거실 사이는 멀었고 두 세계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정혜는 어떤 두려움이나 분노, 혹은 감동도 없이 뉴스를 보다가 집에서 나왔다. 윗집 남자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비는 몇 시간 전에 그쳤고 거리는 얼어붙어 있었다. 정혜는 얼어붙은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정혜는 시트에 기대어 생각했다. 병원에 갈 것이다. 의사를 만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약을 받을 것이다. 동우를 데려올 것이다. 지현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정혜는 택시 기사에게 다른 동네의 학교 이름을 댔다. 팔 다리가 긴 남자애가 다니는 학교의 이름을. 은호는 거기에 있다. 그럴 것이다.

 

 

 

작가소개 / 이종산(소설가)

1988년생. 중장편 『코끼리는 안녕』(문학동네 대학소설상, 2012년 출간).

 

 

   《글틴 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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