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외 1편

 

 

스물

 

 

 


김재현

 

 

 

 

    여름숲의 끝을 알려온 것은 가지 끝에서 뎅뎅 울던 붉은 종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갔을 교정의 언덕을 올라 떨어진 종을 쥐어들었을 때 나는 왜 이토록 많은 그늘이 학교에 필요한지 아직 몰랐다 스승이 알려준 건 오직 써선 안 될 단어들뿐이었으므로 술과 담배, 어머니와 나, 꽃과 피, 구름과 삶. 세련된 것들은 끊임없이 도망쳐가고 가진 것들은 모두 촌스런 것이었으므로, 예술가 흉내를 내던 내게 젊음은 가누기 힘든 의무였다 그러나 땡볕이 내려꽂히는 강의실 앞자리에선 숨 막히는 목화만 자욱했고 붓통 속에 그 꽃씨를 훔쳐 달아났던 어느 옛날 사내처럼 나는 마냥 흰 뒷덜미에 손을 대고 싶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면 영화관에서 죽치거나 동물원에 갔다 허옇게 핀 팝콘을 주워먹고 배우의 대사를 흉내내고 깃털을 부풀린 공작새들에게 돌을 던졌다 가을이 익을 무렵, LP를 긁는 턴테이블처럼 빙빙 비슷한 시위장을 맴도는 사이에도 칠판에는 “사명감은 쓰여있는 것이 아니라 써나가야 할 것이다” 따위의 문장이 남아 있었으나 해가 갈수록 그 문장 앞에 서있는 자들이 줄어들었다 서울에 지독한 혹한이 찾아올 거라는 뉴스가 있었고 왜 혹한엔 눈발이 치지 않을까 여름만큼 선명한 것은 없을까 나는 그저 발끝을 들어 내 종아리나 긁어댈 뿐이었고 촛불을 든 긴 행렬의 끝이 끝내 허름한 술집으로 부려놓았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낯선 사람에게 몸을 빌려달라고 청하는 것밖엔 없었다 그리곤 가난한 반지하처럼 습기 찬 마음을 싸짊어지고 쓸쓸한 이사를 계속해갔다

 

 

 

 

 

 

 

병동 L

 

 

 

    날이 갠다 병원장은 턱을 괴고 파랗게 익은 정원을 바라본다 배수관을 타고 온 물방울이 버려진 피아노로 떨어진다 손가락에 닿았던 소년의 젖니는 덤벙 빠질 듯 무른 것이었는데, 건반이 밀어올린 음계의 부력이 허공마다 맑은 기포를 터뜨린다

 

    진디가 들끓는 정원에는 맨발의 환자들이 병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다 정원에 심긴 것은 내생의 약속이다 나무에 과일이 열리면 돌아와 붉은 과즙이 넘쳐흐르게 깨물겠다고, 무른 흙 속에 모종삽을 꽂아넣던 소년의 손에선 홑씨같은 솜털이 오르는 중이었다 앙증한 손이 연주를 시작하면 어린 코끼리는 연한 상아를 들어올려 밑동만 남은 나무에 제 뿔을 들이받는다 뚝뚝 끊어 삼키고 싶던 봄나물 같은 가닥들 검댕처럼 짙은 머리칼에 코를 박고 들이마셨던 냄새들

 

    소년에게 임종을 선고한 것은 병원장이다 죽은 자의 얼굴을 흰 천으로 덮는 것은 그 하얀 스크린 앞에서 당신의 기억을 상영하라는 뜻이다 소년의 홉뜬 눈에서 눈꺼풀을 내려준 날 그의 눈에서도 점점의 목련이 피기 시작했다 상여가 묘로 가는 찰나에만 피는 꽃, 비문(飛蚊)을 얻으며 제 비문(碑文)을 읽을 수 없는 몸이 되는 게 눈 달린 짐승의 지는 법이라면 피부 고운 호스피스들이 고름 자욱 가득한 이불을 빨아 넌다 간밤의 고통이 말라가는 것이다 펄럭이는 이불 사이로 예기치 못한 시간이 빛살처럼 쏟아진다 초혼은 가슴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불가능한 앙각, 떨어지는 햇살 속에서 병원장의 눈이 뜨겁다 호스피스 여자들이 뛰쳐나와 땡볕 아래의 환자들을 거두어갈 때

 

    너는 깔깔댔구나
    펄럭대는 흰 치마들을 들추며
    웃던 입 속으로 들이치는
    빛과
    숲과
    숨이여

 

    배수관 속을 타고 흐르던 비의 흔적이 마르기 시작한다 버려진 피아노로 떨어져내리는 마지막 중력
    허공에 떠오른 기포들이 폭죽처럼 터져나간다

 

 

작가소개 / 김재현(시인)

– 1989년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3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SBS 드라마 PD로 재직 중.

 

 

   《문장웹진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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