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의 귀환④]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

 

[세이렌의 초상④]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

– 네 번째 이야기

 

 

 

김이듬

 

 

 

    트램에서 내렸다. 그랑플라스 광장까지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내린 거다. 창밖을 구경하다가 민이 말했다. “저 언덕에 가보자. 달리는 속도가 이렇게 느리니 뛰어내릴 수도 있겠다, 그지?” 축축한 아스팔트 위를 조금 걸었다. 숲에 닿았다. “저 새 이름이 뭔지 알아?” 민은 바닥에 앉은 검은 새를 가리키며 물었다. “부리가 감귤색인 거 보니, 음 까마귀는 아닌 것 같고, 글쎄?” “암젤이란 새야. 지빠귀라고 번역하지만 우리나라 지빠귀랑은 조금 달라.” “그새 비가 왔나?” “비가 아니라 안개 때문에 길이랑 숲이랑 축축하게 젖은 거지. 하루 종일 안개가 짙으면 밤엔 비온 것 같대” 민은 아는 게 많다. 지식이랄 건 아니지만 뭔가 아는 게 많아질수록 자기주장도 강해지고 조금씩 나와 멀어지는 느낌이다.
    사이프러스 숲 속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왕족이나 예술가 묘지는 아닌 것 같다. 민이 묘비에 적힌 이름들을 부르며 걸었다. 안개 자욱한 나무 사이로 죽은 이들이 날아다니는 것 같다. 민이 초록색 긴 의자에 앉는다. 나는 서있다. 물기와 먼지가 있는 의자에 앉고 싶지 않다. 민은 유리병에 든 커피를 흔들어 마신다. “너, 치약 갖고 왔니?” “아니, 호스텔에 있겠지” “아냐, 아까 트렁크 갖다놓고 욕실에 갔는데 그게 없더라. 하나 사야겠어. 이 나라엔 좋은 치약이 뭐가 있지?” 민이 휴대전화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추워죽겠는데 아무 거나 사서 얼른 들어가자” “기가 막혀. 미친 자식!” “뭐가?” “이것 좀 들어 봐. 성탄절 전날 밤 한 40대 남성이 이별을 통보한 여자 친구 얼굴에 염기성 액체를 뿌리고 도주한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추적에 나섰다. 최근 연인이 헤어지자고 한다는 이유로 범죄까지 저지르는 이른바 ‘이별 범죄’가 갈수록 증가 추세다. 이런 기사가 말이 돼?”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오래 벼려온 여행을 왔는데 쓸데없이 인터넷이나 보며 시간을 죽이는 민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평소답지 않게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면도 뭔가 이상하다.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 나는 민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분홍색 리본 장식은 내가 직접 사서 묶은 거다. “이거 오르골이네. 이 안에 발레리나는 또 뭐야? 내가 아직도 네 누이동생 같은 소녀로 보이니? 종이 인형 옷 입히기, 그런 거 이젠 안 해. 그리고 난 널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 못 했어. 그리고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괜찮아. 같이 여행하는 지금이 내겐 큰 선물이야. 고마워” 나는 민이 태엽을 감으면 춤추는 소녀처럼 움직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내 마음의 상자를 열고 뛰쳐나가려는 낌새가 불안할 따름이다. 오늘밤 나는 침대에 누워 민을 안고 청혼할 것이다. 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행복감에 상기된 표정으로 내 가슴에 얼굴을 묻기 바란다. 디저트만 남았다. 민이 검색하여 찾은 카페에서 우리는 와인 한 잔하고 스파게티를 먹었다. 아멜리 노통의 단골 카페라고 했다. 백 년쯤 전에 르네 마그리트가 남긴 사인이 벽에 붙어있다. 나는 예술가들이 드나든 커피집이나 식당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민의 취향을 존중하므로 웃고 있다. 아무리 유명한 카페라지만 포크에 얼룩이 묻어 있어 나는 웨이터를 불러 교환을 요청했다. 민은 입술을 삐죽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냥 닦고 먹으라든가 손은 왜 그렇게 오래 씻고 오냐는 등의 참견은 하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으려는데 리퀴드솝 케이스에 비누가 안 나와서 카운터로 가서 비누를 채워달라고 말한 뒤에 웨이터가 비누를 갖다 줬고 깔끔히 손을 씻고 핸드드라이어에 말라고 나왔을 때 민은 옆자리의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왔다고 했다. 혼자 여행 중인 독일 남자와 무슨 대화를 한 걸까?

 

    “너, 북해 알지? 그 남자는 북해에서 고래를 구조해서 엘베강 근처에 있는 보호센터로 옮긴다고 해. 거기서 고래를 돌보며 훈련도 시키는 조련사라더라. 해양 동물조련사라는 직업이 멋진 것 같아. 다쳤거나 병들어 북해 연안으로 떠밀려온 고래들, 태어날 때부터 불구라서 어미한테 버림받은 고래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더라. 잘 성장하여 헤엄도 자유롭게 치게 되면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민은 흐릿하게 웃는다. 실은 이른 어둠이 내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기를 꺼리는 듯 자꾸만 밖에서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엘베 강가는 말야, 테오도어 슈토름이라는 소설가가 최후작을 쓴 곳이야. 북해의 개펄, 바다풍경. 제방공사로 희생된 가족사 등이 잘 묘사되어 있는 책인데,「백마의 기수」라고 들어봤니?” 민은 내 직업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일 나는 18세기 윌리엄 오렌지공의 계몽주의 치하에 지어진 건물을 찾아갈 것이다. 그 건물은 러시아의 공공다세대주택처럼 최소 면적에 다수의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형식을 보여주는 형태로, 건축 역사에 기념비적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책으로 봤을 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구조, 시멘트 누드 콘크리트 외관이 신기해서 직접 보고 싶은 맘이 강렬했다. 아직 한국의 건축학계에는 그 도면도 없을뿐더러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가서 건물 안팎을 면밀히 들러보며 사진도 찍고 논문에 참고할 점도 찾아낼 것이다. 그런데 민은 같이 가지 않겠다고 했다. 추운데 도시 변두리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 싫다는 이유로. 자신은 아까 갔던 그 카페에서 책이나 일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함께 가겠다고 말한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갑자기 왜 그만 뒀어? 출판사 일”
    “더는 못 참겠더라”
    “뭐가? 좋아하는 작가들도 직접 만나고 재밌다더니”
    “이중적이고 권위적인 사람들한테 지쳤어. 책이나 칼럼에는 정의니 윤리의식이니 정확히 구현하면서 지들 인생은 안 그래. 유명해지려고 글 쓰는 사람들 같아. 게다가 자기와 맞닥뜨리는 사소하다 싶은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해. 나한테도 그랬어. 마치 허접한 편집 기계 대하듯…”
    “그래. 당분간 다른 직장 찾지 마. 네 방 정리해서 나한테로 와. 구체적인 건 숙소 가서 얘기하자.”
    “조금 더 걸을래. 난 말이야. 이제 예전처럼 살지 않을래. 연약하게 고개 숙이고 묵묵히 관습이나 관계를 감내해내는 방식으로는 더는 안 되겠어. 나는 변할 거야. 너도 날 억압하려고 하지 마. 난 네 편집증적 결벽증을 도저히…”
    “내가 언제? 난 널 존중해. 넌 내 첫사랑이야. 나의 모든 것이라고. 내가 너고 네가 나야. 우린 둘이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자전거를 타고 한 노인이 왔다. 그는 긴 막대기로 수은등의 불을 켰다. 고전적이고 아름다운 저녁이라는 사실을 얼핏 깨달았다. 불빛 아래에서 보니 민의 뺨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우리의 밤은 아름다울 것이다. 호스텔 방은 요금에 비해 굉장히 만족스럽다. 순결한 흰빛의 시트가 깔린 넓은 침대와 엔틱풍의 긴 나무 테이블, 테이블 위엔 백합 몇 송이가 꽂힌 꽃병이 있다. 중세 분위기의 벽장과 조명도 맘에 든다. 벽에는 잠의 신, 히프노스의 조각상이 걸려 있다. 민은 테이블에 앉아 일기 같은 걸 쓰고 있다가 나를 쳐다본다. 부드러운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머리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이고. 풀어 늘어뜨린 머리칼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날 것 같다. 초점을 잃은 듯한 고혹적인 눈빛에 나는 매료된다. 순수와 열정을 가진 여자.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저 여인은 나의 것이다. 너는 나다. 나의 분신이다. 나는 너를 내 안에 가두고 영원히 지킬 것이다. 내게 소중한 건 오직 너뿐이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다. 죽음의 신이 검은 날개를 펄럭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 민을 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지만 그 전에 이를 닦아야지. 나는 옷을 벗는다. “조금만 기다려. 씻고 나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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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페르낭 크노프’의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I Lock My Door Upon Myself. 1891)’

 

 

작가소개 / 김이듬 (시인)

2001년 계간『포에지』로 등단. 시집『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달렘의 노래』『히스테리아』,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가 있음.

 

   《문장웹진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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