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연재] 세제 한 스푼의 시간①

 

[중편연재]

 

 

세제 한 스푼의 시간 (1회)

 

 

 

구병모

 

 

 

    평균 연령 20세가량의 빌라 골목이다. 엊그제 막 신축이 끝나 건축 자재와 도배장판 냄새가 나며 카드키를 댈 때마다 LED 센서가 발광하는 빌라 옆으로, 마당에는 감나무가 열리고 장마철에 때때로 물이 차는 반지하방에 서로 모르는 이들이 세 들어 사는, 40년 가까이 된 2층 주택이 나란히 자리한 식이다. 그 사이사이 늘어선 상업 건물들은 모두 4층 이하이며 1층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룸 형태의 주거 공간이다. 방문 판매 전용 화장품 사무실과 떡집, 만(卍) 자 간판이 반쯤 떨어지다 뒤집힌 지 오래이니 신기라곤 다 빠져나갔을 게 틀림없는 점집 옆으로는 미니슈퍼와 문방구. 조금 떨어져서 담 밖으로 화살나무 가지가 우거지고 외벽으론 담쟁이넝쿨이 빽빽한 3층짜리 다세대는 무의탁 여성 독거노인들을 부양하는 가톨릭 공동체의 봉사 시설이다.
    그 골목 중간에 있는 세탁소 안으로, 택배기사가 폭 1미터 높이는 2미터에 이르는 상자를 들고 나타난다. 문을 밀고 들어오다 상자가 걸리자 기사는 투덜거린다. 골목이 좁아 탑차를 초입에 세워 두고 여기까지 이 커다란 걸 안고 왔다는 것이며, 택배 상자 규격을 초과하여 수작업으로 분류한 수고로움에 대해서도 토로한다.
    “웬만하면 헬스는 직접 다니시지 집에다 이렇게 커다란 거 들여놔 봤자 우리 마누라도 빨래걸이로나 쓰고 짐만 된다니까요. 집까지는 또 어떻게 들고 가시게.”
    집이야 바로 이 건물 4층이니 올려 달라 하고 싶지만 당최 이 물건이 무언지도 모르겠고 기사의 표정을 봐선 거기까지 부탁할 수 없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정도 크기라면 러닝머신인가 싶다. 태어나 지금까지 통신판매로 아무것도 사본 적 없는 탁 노인은 배송이 잘못된 것 같은데 누가 보낸 물건인가 묻는다. 상자를 뉘어 둘 자리가 마땅치 않아 벽에 비스듬히 기대 놓고 기사는 주머니 속 운송장 다발을 꺼내 뒤적인다. 기사 입에서 나오는 건 외아들의 이름이다. 아들이 아비를 위해 뭔가를 보낸 게 이상한 일은 아니나, 문제라면 아들은 8개월 전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출장길에 오르던 중 승객 117명을 태운 비행기와 함께 태평양 한가운데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소식이 난 지 보름 뒤 바다에서 비행기 잔해가 일부 발견되었고 탁 노인은 따로 장례를 치르지 않은 채 극소수의 지인에게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 아들이 보낸 택배라니.
    냉커피 한 캔을 주고 택배기사를 보낸 뒤 상자에 부착된 고객용 운송장을 들여다본다. 아들의 이름 밑 주소에는 발음하기 힘든, 무언가의 약자라고만 짐작되는 영문자와 함께 전화번호가 나란히 표기되어 있다. 집 주소는 아닌 듯하며 아들이 생전에 다니던 회사일 것이다. 이런 커다란 물건이 바다 건너편에서 세관이나 기타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뚫고 여기까지 다다랐는지 그는 알 수 없다.
    그때 마침 세주가 재킷과 블라우스며 원피스 등속을 한아름 팔에 안고 들어온다. 건너편 원룸에 어머니와 둘이 사는 영문과 졸업자로, 그가 아는 한 이 골목에서 최고학력자다. 그녀는 스피킹은 솔직히 자신 없다고 하면서도 이번 포함 앞으로 10회분의 드라이클리닝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탁 노인의 말에 선뜻 응한다. 전후 사정을 자세히 듣고, 노인의 아들이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데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는 말에 안색이 어두워지며 깊은 공감의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외국 번호로 전화를 건다. 뭔가 말없이 저쪽 반응이나 교환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쳐서 얼추 이십여 분이 흐른다. 알지 못하는 이국의 발음이 세주의 혀끝에서 경쾌히 구르다가 터지기를 반복한다. 자신 없다더니 웬걸 청산유수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 이 정도는 기본인가. 그럼에도 길은 막막하여 애면글면 키워 놓은 여식이 박사 과정까지 수료하고도 결국 갈 곳이 보습학원뿐이더라는 그녀 어머니의 푸념을 지나가는 말로 들은 적 있다. 한 곳에서 20년간 세탁소를 하다 보면 동네 사람들의 밥그릇 개수까지 알게 된다.
    땡큐, 땡큐, 바이, 테익 케어. 전화를 마치고 세주가 들려준 얘기는 이렇다.
    “이 영문으로 적힌 영문 모를 회사는 인공 신경망이 뭐라나 하는 바이오 기계 산업 관련이라고 하는데 제가 공학 분야는 모르겠어서 다 알아듣지는 못했고요, 까놓고 우리가 탁 듣고 알 만한 회사도 아니에요, 애플이니 마이크로소프트니. 하지만 이렇게 홈페이지는 있어요. 여기 제 스마트폰 보시면 이렇게…… 어라, 링크가 막혔네, 하여간.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자기네도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대요. 하지만 그런 이름을 가졌던 분이 회사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은 확인이 된다고요. 근무 관련 사고사로 그곳 부인이 절차를 다 밟아서 처리하셨고, 도착한 물건은 아마 자기네 회사에서 만든 물건인가 보다고, 샘플만 제작하고 기획이 무산된 제품은 직원들이 신청해서 일정 부담만 비용하면 가질 수 있었대요. 주소 적어 놓고 포장만 해둔 것을, 사고 후에 그 왜 쓰던 책상 자리랑 사물 정리하잖아요, 동료 직원 아무나가 그 물건을 보고 대신 부쳐 준 거 아니겠느냐 하네요. 물건 크기로 보자면 그 과정이 장난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동료 의리를 우선해서 끝까지 책임져 줬나 보죠. 그래서 반년이나 걸려 도착한 것 같고요. 그쪽에선 말하길 무슨 물건이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샘플이 맞는다면 오래 쓰기는 힘들 거래요. 관련 부품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모르는 사람한테까지 뭐 별 얘길 다 하데요, 자기네 회사 자체가 지금 어렵고 존속을 장담할 수 없다며. 아마 잔고장 문제로 수리를 문의해 봤자 소용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그래서 홈페이지 링크가 깨졌나 보구나.”
    맞다. 아들은 그곳에서 결혼도 했었지. 탁 노인은 그렇게 하면 깜박해 가는 기억력이 돌아오기라도 할 듯 옆머리를 두어 번 쥐어박는다. 언젠가 보내온 편지에 그렇게 적혔더랬다. 부인 될 사람의 사진 한 장 없이, 글자로만 전해진 아들의 결혼. 그게 4년 전이다. 그 뒤로 아이는 낳았을까. 아들의 부인과 소식이 닿을 방법은 없을까. 노인이 보낸 수통의 편지에 대답이 없던 걸 보면, 집은 이사를 한 듯하며 아들이라는 다리가 없이 그 부인을 수소문할 방법은 딱히 없을 것이다. 편지에 적힌 부인의 이름이 뭐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앤디였던가 애니였던가. 주로 너무너무, 미칠 듯이 바쁘다는 내용으로 일관된 편지들 가운데 몇 통을 뒤져 보면 어느 한구석에선가 그 이름이 나오겠지만, 아들이 세상에 없는 지금 한때 관계있었던 타인의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다.
    세주가 개봉을 돕겠다는 걸 마다하고 탁 노인은 잠깐 세탁소 문을 걸어 잠근 뒤 벽에 기대 놓았던 상자를 바닥에 누이는데 무릎에 찌르르한 통증이 퍼진다. 상자 옆면에는 영문 글자가 잔뜩 적혀 있고 칼 개봉을 금하는 그림 표시가 찍혔다. 실밥을 자를 때 쓰는 쪽가위 날을 셀로판테이프에 얕고 조심스럽게 찔러 넣는다. 사악, 테이프 벌어지는 소리가 귓바퀴를 할퀴자 노인은 문득 비현실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는데, 상자 크기로 보나 무게로 보나 혹여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들의 시신이 들어 있지나 않나 하는 상상이다.
    뚜껑을 펼치자 눈앞에 드러난 것은 정말로 시체다. 천만다행으로 아들의 시체는 아니다. 아니, 이런 때는 오히려 아들이었어야 차라리 체념과 애도에 도움 되지 않는가. 그나저나 지금은 세상 모든 사물이, 특히 남성이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제 아들과 닮아 보이는 시기라 치고, 그래서 지금 배송된 시신이 특히 아들과 닮아 보인대서 이상할 것 없으나, 아들은 올해 서른여덟 살이고 이건 스물도 안 되어 보인다. 일별하자면 한 열일곱. 탁 노인은 아들이 열일곱 살이었을 무렵을 떠올려 보려 애쓴다. 키를 보자면 열다섯쯤 못 미치려나, 상자가 그토록 컸던 것은 내부에 또 다른 상자와 충전재가 가득해서였다.
    시신은 바로 어제 세상을 떠난 것처럼 얼굴이 보얗고 팽팽하며 시취 대신 나프탈렌 냄새를 풍긴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은 머리 언저리에서만 맴돌 뿐, 탁 노인은 아들이 발견되었다면 꼭 그리했을 것처럼 시신의 뺨에 손가락을 댄다. 모든 감각과 마찬가지로 촉각 또한 무디어져 사태의 파악보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나이지만, 그 순간 사람처럼만 보였던 피부의 질감이 사람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시체란 원래 피부가 이렇게 고무 내지는 플라스틱처럼 변하고 마는가? 아니다…… 사람의 시체가 아니다. 그때 그 물건의 등에 깔린 두툼한 흰색 제본지를 발견한다. 해독 불가능한 영문의 홍수 속에서 그는 한 개의 단어를 알아본다. ROBOT.

 

*

 

    이 골목길 거의 모든 집의 세탁을 도맡아 하는 동네 세탁소에 최근 어린 알바생이 한 명 들어왔다. 아침 8시에서 9시까지 옷을 수거해 가는 세-탁-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뀐 것이다. 처음 고개를 기우뚱하는 손님들에게 탁 노인은 제 손자라고 이르며 미소 짓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나이 든 손님들은 그 손자라는 것을 가만 보다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젊은 손님들은 신기해하면서 한번 만져 봐도 되냐고 탁 노인의 동의를 구한다. 그러면 노인은 “왜 나한테 물어, 쟤한테 물어. 쟤 의사가 중요하지.” 한다. 손님은 알바생에게 공손하게 다시 한 번 묻고, 알바생은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 좋습니다, 대답한다. 손님은 척 봐도 고가의 물건에 흠집이라도 내어 물어줄세라 조심조심 뺨을 어루만지다 나중에는 볼 살을 잡고 잡아당기기를 서슴지 않는다. 알바생은 통각이 없으므로 눈살을 찡그리지 않는다.
    이 동네에 사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물건을 일개 세탁소 노인이 소유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감탄하며 곧 이야깃거리로 부각시키고, 지역 신문과 케이블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오지만 노인은 일언지하 거절한다. 그중 어떤 기자는 “죽은 아들이 보내준 귀한 것을 사람들 하루 치 흥밋거리로 소비시키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다”던 노인의 말을 그대로 기사로 내보내는 만행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거기에 노인이 그 물건을 죽은 아들 돌아온 듯 애지중지하는 까닭에 로봇은 그대로 아들이 되었으며 가족의 기준은 이제 생물학적인 의미에만 있지 않고 완전한 타인과 반려동물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무생물에게까지 확장이 가능하다는,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데다 주관적 자의적 평가까지 곁들인 대목도 임의로 첨부한다. 방송이나 미디어가 그 대목에서 더 참신하게 정보성을 띠고 취재의 묘를 살리지 못한 채 잠깐의 휴먼드라마 수준으로 그친 까닭은, 거대 컴퓨터 무기 개발사의 수많은 하청업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그 기계 회사가 정말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처음 세주가 전화를 걸었을 때 이미 회사는 도산 상태였던 것으로, 탁 노인은 미디어가 하는 일에 대체로 이를 갈았지만 그래도 그 덕에 알게 된 사실들도 적지 않았기에 그걸로 퉁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이 물건이 바다 건너편에서 배달되어 왔다는 점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회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나중에 여러 하자가 생겨도 수리를 받을 수 없으며 개인적으로 부품 구매 또한 어렵다. 회사는 무기 제조사 납품 당시 고만고만한 수익을 거두고 있었는데, 대표가 좀 소년 같은 데가 있어서 안정적인 회사 운영이나 직원들의 생계 책임보다 자신의 모험심 충족을 우선시하고, 이후 의료용 로봇에 도전하고서도 어느 정도 본전치기는 했다고 한다. 소기의 성과에 고무되어 의욕적으로 사무용과 일반 가정용 로봇을 동시 개발에 들어가면서 회사는 장렬히 도산했다는 것이다. 이 물건은 그 회사에서 샘플로 제작한 여러 용도와 다양한 인종 및 나이대의 로봇 가운데 하나다. 외형을 최대한 인간과 가깝게 만들었으나 인간형 로봇이란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상용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수십여 년간 상상 속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닳고 닳은 존재로, SF 영화에서조차 더 이상 매력적인 소재가 아니다. 탁 노인이 갖게 된 이 어린 남성형 로봇은 처음 가늠한 대로 17세의 아시아인을 모델로 한 것이며, 17세의 여성 아시아인, 유럽인, 남미인, 아프리카인, 인종만 해도 여럿인데 거기에 더 어린 소년 소녀, 20대, 30~40대, 아기들도 있으니 짝지을 수 있는 모델의 경우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젊은 딩크족 부부들의 육아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아기형 모델은 인종 불문 현지에서 비교적 인기 있었다고 하며, 20대 이상의 모델은 주로 각종 회사나 가사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케이블방송국의 교양부 PD가 오프더레코드로 전한 바에 따르면 17세 소녀형 로봇은 가정·교육용으로 외국어 기능이 강화되었으며 각종 하우스키핑에 특화되어 있으나, 주된 용도는 ‘남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하긴 어려우나 당신도 알고 계신 바로 그것’이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가정 및 업무 보조용 성인형을 제외한 나머지는 샘플만 시도되고 말거나, 반짝 인기를 얻었던 아기형은 빠르게 몰락의 길을 탔다. 처음엔 그저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했던 아기가 기술이 닿는 한도 내에서 합성 화학물의 분자 팽창 외에 인간으로서 자라지 않는 게 슬슬 신경 쓰이다가 어느 날 작동을 멈추자 트라우마에 시달려 소송을 건 부유한 커플하며, 아기가 오작동이 나지 않았으나 심신의 변화로 생물학적 자녀를 출산한 뒤 위약금을 물고 반품한 부부들도 있었다.
    아기형 로봇은 그렇게 비운의 말로를 걸었다 치고, 이 17세 아시아 남성형 로봇은 애초에 그보다 더욱 쓸 데가 없었던,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온갖 인종과 나이대의 구색을 갖추지 말고 샘플을 만들기 전에 폐기됐어야 할 기획이었다. 회사가 망한 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가사노동과 간단한 업무 외에 창의적으로 쓸 만한 구석을 떠올리기 힘들다는 점에서 2, 30대 남성형 로봇과 외양 말곤 다를 바 없었다. 17세 소녀형은 PD가 언급한 내밀하고 부적절한 용도라도 있을지 모르나 17세 소년형은 그런 취미나 욕망 해소 차원에서도 더욱 마이너하여 딱히 어디 끼우기 애매한 별책부록 같은 존재였다.
    어쨌거나 탁 노인은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제게로 온 것을 방치하거나 내버리기 꺼림칙했고, 자신이 다루기 힘든 고가품이라면 시청 같은 데다 사정을 설명하고 기증하여 일손 도우미로 활약하게 하거나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게 할 수도 있었지만, 아닌 게 아니라 들여다볼수록 괜히 아들의 열일곱 살 무렵과 닮아 보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들의 사진 가운데 세월의 감가상각으로 많이 흐려진 졸업앨범과 비교해보았을 때 탁 노인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지만 이미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개발 종류가 많아서 그랬겠지만 ROBOT이면 그저 ROBOT이지 ROBO-a1318b라는, 무엇의 약자인지 짐작 불가능한 숫자와 글자의 조합이 초기화 당시의 이름이었다. 로봇을 올바른 방법으로 깨워서 기초 데이터 입력까지 도와준 세주가 사용설명서를 한글로 번역해서 타이핑해 주었다. 기능도 다양하고 주의사항도 많아서 생각보다 두툼했고, 탁 노인은 앞으로 그녀의 집안이 이사하여 이 동네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평생 드라이클리닝을 무료로 모시기로 했다. 세탁소 문을 밤 9시에 닫고 밤마다 꼬박 3주일을 반복 독파하여 문장은 그런대로 거의 외우는 경지에 이르렀고, 꼭 필요한 기계 공학 관련 어휘들이 나올 때마다 인터넷에서 찾아 익혔으나 그래도 완전히 알기는 어려웠다. 고작 스마트폰 설명서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직관으로 해결 가능한 통화와 문자메시지 외에는 사용하는 법 없는 탁 노인이, 수많은 약어와 기술 용어가 난무하는 로봇 설명서를 완전히 익힌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나마도 아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내준 것이기에 침침해진 눈으로 다한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설명서를 독파한 끝에 탁 노인이 내린 결정이란, 일상생활이야 차츰 들려줘서 배우면 그만이고 나머지는 뭐가 됐든 기계이니 물과 불에 닿지 않게 조심하면 되지 않느냐는 거였다. 지탱 가능한 최대 하중 압력 값 따위 알 필요 있나, 세탁물 용달차를 머리에 이고 다니게 할 바 아니라면. 처음 로봇을 깨운 뒤 세주가 필요한 환경 설정 옵션을 모두 지정해서 일반상식과 역사를 비롯한 대강의 학습 내용은 이미 입력된 상태였기에 그와 같은 손쉬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태양열 받아서 작동한다니까 햇빛 자주 쬐어 주시고, 내습도는 최고 수준이긴 한데 물에 완전 담가 놓는 건 지양하는 게 좋대요. 뭐 한 달 내내 장마철이다, 이런 때는 내장 배터리를 돌려서 절전 모드로 움직인다고. 근데 평소에 햇빛 잘 받아 놓으면 또 그거 저축해다 꺼내 쓰고 그런 시스템인가 봐요. 저도 완전히는 몰라요, 전공도 아니고. 별 필요는 없으시겠지만 혹시라도 통역이 필요하시거나 외국어 학습을 하시려면 여기 프로그램에서 외국어 활성화, 최대 5개 언어까지 인식 가능하고요……. 참 누가 샘플 아니랄까 봐 무지 적네. 요즘 세상에는 사람도 5개 국어는 한다고……. 아무튼 과학이면 과학, 수학이면 수학…… 필요한 대로 옵션을 켤 수 있거든요. 근데 분야를 늘릴수록 그만큼 메모리를 잡아먹어서 빨리 고장 날까 봐, 제가 일부러 최소화했어요. 아저씨 지금 뭐 양자역학이나 로그함수 필요하신 거 아니니까, 그냥 일상생활만 불편 없게 해놨어요. 의료 기능은 아저씨 혼자 지내시면서 유사시 필요하실 것 같아 응급 처치 수준에서 살려 놨고 전문 의학 정보는 꺼놨어요. 간단한 집안일 같은 건 이제부터 음성 지시만 내려도 알아듣고 실행할 거예요. 기본 매뉴얼은 다 들어 있긴 한데 그건 뭐 외국 CEO네 저택 집사 수준이라 우리랑 환경이 안 맞아. 집안일이라는 건 판에 박힌 듯이 단순해 보여도 사람 취향을 은근히 타는 거잖아요?”
    수다스럽게 초기 설정을 마무리하는 내내 로봇은 의자에 앉은 자세로 노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프로그래밍이 그렇게 되어서겠지만 탁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양쪽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 흡사 미소 짓는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탁 노인은 로봇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것은 아내가 살아 있었을 적, 그녀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음을 확인하기 전에 만약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면 제 형과 돌림자로 지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영원히 부를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던, 상상 속 존재의 이름이 낯선 발음과 형태를 띠고 혀끝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는 이 유용한 도우미를 가족 비슷하게 맞아들이기로 결심했다.

 

*

 

    은결은 한번 알려주면 사람의 음성을 순간 입력하여 그것을 새로운 매뉴얼로 삼는다. 그다음에 어떤 돌발 상황이나 변수가 생기기 전까지 그 매뉴얼대로 충실히 이행하여 실수를 최소화하지만, 매뉴얼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비일비재며, 변수를 만드는 것은 대개 주인의 충동이다. 0과 1의 이진법에 입각하여 작동하는 로봇은 일상의 돌출이나 주름을 즉각 처리하기 어렵고 반드시 새로운 학습의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므로 변덕이 심하거나 신경 질환이 있는 주인에게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사치품이다. 심신 건전하며 욕망이 적고, 그것을 옆에 두는 것 외에 달리 부릴 만한 일이 많지 않은 탁 노인은 상당히 안전한 주인에 속한다.
    은결은 무료함이라는 감정을 모르니 주인을 위해 어떤 과업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신념이나 욕망도 없고 거기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모종의 소명을 다한다. 세주가 초기 설정 당시 아무리 그래도 필요한 기능을 죄다 꺼버리면 너무 깡통이지 싶어 상시 인터넷 연결 상태는 남겨 두었기 때문에, 시각적 혹은 언어적 자극이 주어지면 그에 대한 반응을 도출하기 위해 나노초 단위의 검색 및 저장과 정보 재배열이 이루어진다. 내장 카메라와 촉각 및 청각 센서로 주인의 기분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알맞게 반응하는 기능은 있으나, 그것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 양상이 천문학적 수의 패턴으로 입력되어 있어서다. 각각의 패턴을 인식하여 필요할 땐 곧잘 시무룩한 표정까지 지을 수 있지만, 패턴의 임의 변형과 조합을 필요로 하는 순간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출력 가능한 반응의 경우의 수 자체가 무한대에 이른다. 인간의 두뇌를 통째로 복사하여 로봇에게 이식하는 기술이 있다 해도 영혼마저 복사하는 기술은 아직 없으니 어디까지나 흉내에 불과할 것이다. 고작 강아지 아이보도 기쁨과 슬픔, 놀라움과 공포, 분노와 불만 등 여섯 가지 정서를 표현할 수 있고, 페퍼도 주인의 눈물이나 환호를 보면 다가가 포옹하여 위로하거나 달래거나 손뼉을 치는 정도는 할 줄 안다. 그런 간단한 신체적 반응조차 1초에 평균 10조 회의 연산을 수행해야 가능한 것이다.
    처음 그것을 세탁소 내의 어울리지 않는 가구 정도로 조심조심 다루던 탁 노인은, 이름을 준 뒤로는 얼추 모셔 놓은 손님 대하듯 하다가, 보름쯤 지나 심신이 안정되고 상황에 익숙해지자 이윽고 사소한 일들을 맡기기 시작한다. 처음 은결의 존재를 신기해하던 동네 주민들은 방송이 나간 뒤 예의 사정으로 더 이상의 폭발적인 반향이 없음에 실망하는가 싶더니 어느덧 익숙해진다.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더 신경 쓰이고 역동성 넘치는 일들 ― 주로 삶에 마찰과 파열을 가져오는 과도한 노동들, 당장 피부에 접착되는 고통들, 백 명의 주관에 따라 달라지는 백 가지도 넘는 옳고 그름들 ― 이 일상에는 가득하다.

 

    열세 살 시호가 엄마의 점퍼와 정장 등을 안고 세탁소로 들어온다. 그와 거의 동시에 시호랑 같은 반 준교가 제 아버지의 기지바지랑 셔츠 몇 벌을 갖고 들어온다. 두 아이는 넓지 않은 세탁소 출입문에서 딱 마주치더니 먼저 들어가려 기 싸움을 하다가 서로 어깨를 밀치면서 카운터에 짐을 부려 놓는다. 은결은 배운 대로 어서 오세요, 인사하지만 두 명의 손님이 거의 동시에 들어왔을 때 어느 쪽을 먼저 응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응용력은 아직 부족하다. 탁 노인은 스팀다리미를 잠깐 내려놓고 이른다.
    “시호부터야.”
    은결이 온 뒤로 세탁소에 어린 손님들이 늘었다. 예전 같으면 그 집 어른들이 싸갖고 왔을 옷을 아이들이 가까이서 로봇 한 번 만져 보겠다고 심부름 길에 나서는 것이다. 준교가 단박 볼멘소리를 터뜨린다.
    “아, 내가 먼저 왔단 말이에요.”
    “차례대로 해, 차례대로. 너 인마 학교에서 레에디파스토 안 배웠나.”
    “레이디퍼스트예요, 할아버지.”
    시호가 제법 혀를 굴리며 은결 앞에 옷 보따리를 펼쳐 놓는다. 일반 물빨래가 가능한 면직물 더미도 섞여 있다. 날이 추워지고 집집마다 세탁기가 얼면 이런 옷들도 세탁소에 종종 들어와서, 한쪽 구석에는 일반 세탁건조기도 두 대 들여놓아 독신자들을 위한 동전 빨래방을 겸하고 있다.
    “세탁기 사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은결이 대답하는 목소리는 인공 성대에서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데도 그 울림이 자연스럽다. 하나의 사물이 바깥 세계의 파장에 호응하면서 자신의 진동을 조율하는 소리를 유심히 듣다가 시호는 고개를 젓는다.
    “아뇨, 세탁기론 안 돼요. 이거 죄다 페인트 묻은 거예요.”
    펼쳐 보니 화학 페인트는 물론이고 굳은 본드 덩어리가 붙어 있기도 하며, 일부 색깔 있는 옷은 독한 락스가 튄 듯 변색되었다. 시호 엄마는 도배 인테리어 업체에서 부를 때마다 하루벌이를 하는데, 새로 이사 들어가는 집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하고 도배가 끝난 집을 청소하기도 한다. 어차피 매번 버리니 작업복을 정해 놓고 내내 재료와 염료를 묻혀 가면서 내버려두는데, 이 중 두 벌은 하필 외출 나갔다가 급히 콜이 들어오는 바람에 조심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얼룩이 튀었다 한다.
    “급한 거 한두 벌만 보내기 뭐 하다고 이참에 와르르 싸주시더라고요.”
    “페인트는 약으로 지우겠습니다. 변색된 옷은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기존 섬유에 입혔던 색깔이 독성 물질에 의해 뽑혀 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건 염색하는 방법뿐인데 비용 대비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페인트랑 본드만 어떻게 좀, 맡길게요. 그런데 오빠.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
    물어보면서 시호는 탁 노인을 돌아보지만 노인은 어깨만 으쓱해 보인다. 좋으실 대로.
    “오빠는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을 부르는 말입니다. 저는 나이가 없습니다.”
    “숫자가 중요한가. 나보다 요만큼이라도 더 큰 남자를 부르는 말. 이만큼보다 더 크고 저마아안큼보다 더 크면 아저씨. 아저씨가 좋아요? 오빠가 좋아요?”
    다른 손님들은 만지작거리거나 주물럭거리고 감탄사를 저 혼자 연발하다 돌아서기 일쑤인데, 시호는 상대의 적절한 반응을 요구하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어서, 은결은 연산 처리 분량이 늘어난다.
    “무엇이 좋은지 모르기 때문에 손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검색 결과로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 즉 남성들이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어떤 경우든 아저씨보다는 오빠를 선호하는 비율이 높다고 나옵니다.”
    “그래 좋아, 오빠. 이거 봐봐. 페인트 있지? 오빠는 지금 ‘약으로 지우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그건 사람에게 공연한 기대와 확신을 주지요. 반드시 깨끗하게 지워질 거라고. 하지만 이건 어제오늘 묻은 게 아니라 몇 달도 넘었단 말이죠. 이런 때는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성공할지 어떨지 확률이나 계산으론 답이 안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쓴다는 거예요.”
    소녀의 입만이 아닌 온몸에서 현을 퉁기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은결의 인공두뇌는 내장된 국어대사전을 빠르게 검색하여 ‘보다’라는 보조동사의 여러 의미 용법을 추출하고, 그러는 동안 은결의 안구-내장 카메라는 얼핏 보면 불안감을 느끼는 어린이의 그것처럼 좌우로 가볍게 흔들린다. 마침 카운터에는 은결의 두 손이 올라와 있어서, 말하는 동안 시호는 그렇게 건드려 보고 싶었던 로봇의 피부를 만져 본다.
    “와, 이거 진짜 사람 가죽 벗겨다 씌워 놓은 것 같아. 완전 보들보들 푹신푹신. 이게 정말로 플라스틱이에요?”
    사람과 가죽은 개별적이며 가치중립적인 말이지만 그 둘이 한데 모이면 종종 범죄적인 상황이나 불쾌한 일에 쓰인다는 것을, 은결은 일하던 중 브라운관을 흘러가던 조폭 누아르물을 통해 학습한 적 있다. 그러니 이 소녀는 생기 있고 재치 넘치는 인간이지만 품위 있는 인간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강화된 버전의 나노 폴리우레탄이라고 합니다. 색상 코드는 E6C17B로 표현되었습니다.”
    눈앞에 쏟아지는 여러 가지 자극과 조금 전 주어진 정보 들을 동시에 처리하느라 은결의 연산 회수는 빠르게 증폭하지만, 겉으로는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이 머리카락도, 그냥 나일론사가 아닌 것 같아요. 한 가닥만 뽑아 봐도 되나?”
    그러나 적어도 유해한 인간은 아니며, 호기심이 넘치는 만큼 그에 준하는 상식과 품위도 머잖아 갖추어질 것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최종 분석이다.
    “양모에서 추출한 케라틴을 합성섬유와 결합한 제품으로, 케라틴 울트라 실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색상 코드는 3F0000과 662500이 랜덤으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피부에 한 올씩 심었기 때문에 힘으로 뽑으면 두피가 같이 상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한 가닥 잘라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됐어요. 생각해 보니 다시 자랄 것도 아닌데 아껴야지. 어쨌든 제가 하려던 말은.”
    시호의 손에서 압력이 사라지자 은결의 시스템에서 눈에 띄게 상승했던 온도가 빠르게 냉각되고, 팽팽해졌던 인공 근육의 입자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하겠다와 해보겠다 사이에는 엄청나게 넓은 의미의 바다가 있어요. 그 의미 차이를 사전 검색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알게 되면, 오빠는 여기 있는 얘보다도 사람다워지는 거죠.”
    시호가 옆에 대고 손가락질하자 준교가 육두문자를 날리며 시호에게 셔츠 한 장을 구겨 던진다. 얼굴을 덮은 땀내 나는 셔츠를 카운터 너머로 패대기치고 시호도 썅놈새끼, 하고 맞선다.
    “옷 빨랑 맡겼으면 안 꺼져? 어디서 개기고 지랄. 나도 바빠 씨발.”
    “야, 너희들 나가서 싸울래? 다 옷 보따리 싸 짊어지고 도로 보낸다. 시호는 끝났으면 먼저 가라. 다음에 한가할 때 와. 옷은 목요일에 찾으러 오고.”
    탁 노인이 눈치로 보니 시호와 준교는 반에서도 서로 다툼이 잦은 듯하다. 으레 그런 법이다. 대량의 호르몬이 폭발하기 직전의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를 향해 빗자루를 휘두르고 걸레를 던지며 으르렁거리지 않는 경우란, 문방구표 플라스틱 커플링을 나누고 사귈 때밖에 없을 것이다. 시호를 쫓아 보내는 데 성공하자 준교가 옷가지를 펼친다. 세탁기에 돌려도 무방한 드레스셔츠 두 벌과 기지바지 세 벌. 드레스셔츠는 업자들이 별로 환영하지 않는 품목이다. 탁 노인은 드레스셔츠 한 장 다림질하는 데 평균 20초, 조금만 각을 세울라치면 한 벌에 1분은 족히 걸린다. 드는 품에 비해 단가는 낮은 게 드레스셔츠다. 은결은 얼마 전 스팀다리미로 웬만한 옷들을 다릴 줄 알게 되었는데, 드레스셔츠 한 장을 5분가량 붙들고 있는 걸 보자면 답답해서 결국 탁 노인이 채어가고 만다. 은결은 자신의 시스템을 보호하는 기능 때문에 안전성을 지켜 가며 다림질하니, 자연히 숙달된 사람이 요령껏 손으로 하기보다 시간이 걸린다. 전문적인 일꾼으로 부리려던 건 아니지만 일손을 덜어 주기는커녕 홀로 해온 일에 익숙한 탁 노인의 동선을 흐트러뜨리거나 일정을 지체시키기라도 하면 오히려 문제다.
    바지는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전형적인 신사 바지다. 바지마다 가랑이 사이에 갈색 얼룩이 배었다. 준교 아버지는 광역버스 운전대를 손에서 놓을 틈이 없으니 운전 도중 바지에 실례하는 일쯤 있을 법하다. 탁 노인은 모른 척하고 계산서에 바지 3점과 셔츠 2점을 비롯하여 준교네 번지수를 기입하는데 준교가 묻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이거 큰 거 아니에요, 피예요.”
    차라리 피치 못할 상황에서의 큰 볼일이었다면 모를까 이 부위에 피라면 더 문제 아닌가? 탁 노인은 멈칫하고 준교를 바라본다.
    “아빠가 남자들만의 비밀이랬어요. 엄마한테 숨기라고 그래서 제가 갖고 나온 거예요. 아빠 치질을 달고 살거든요. 줄곧 앉아서 일해 갖고 그렇대요.”
    “비밀이고 자시고 그게 사나이 의리 지킬 일이 아닌데? 거 놔두면 큰 병 된다고 꼭 말씀드려.”
    “저도 나름대로 검색은 해봤어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잘 알고요. 아빠 오는 날에 얘기는 꺼내 봐야죠.”
    “네 아빠처럼 바쁜 남자들, 설득한다고 안 들어. 그저 네 엄마가 멱살 잡아서 끌고 병원에 갖다 넣어 놓지 않으면. 다른 생각 말고 엄마한테 말씀드려라, 꼭.”
    준교는 상황 봐서 그러겠다며 대화를 빨리 마무리하려 하는데 이제 본 목적인 로봇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시호가 하듯이 은결한테 천연덕스럽고도 적극적으로 접근하지는 못하고 탐색의 몸짓으로 힐끔거리기만 한다. 사람이 리모콘이나 중앙컴퓨터 등으로 원격 제어하는 로봇이 아니라, 기초 설정이 완료된 직후부터 외부의 모든 자극을 데이터베이스화하며 때로는 스스로 판단하고 그 계산과 선택의 결과를 새로이 자동 프로그래밍하여 움직이는 인간형 로봇이 퍽 궁금할 나이인데도, 어디까지나 화학섬유에 불과한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은결은 물성을 지닌 재산의 일종이라기보다는 겉모습이 지나치게 사람처럼 생긴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준교는 왠지 대상을 존중하고 경건한 관람 자세를 갖춰야 할 것만 같은, 아이러니한 이질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 피부가 정말로 폴리우레탄이라고? 이 밑에 차가운 은색 스테인리스가 있다니?
    은결은 지금까지 알아 온 그 어떤 현실의 로봇과도 다르다. 아이보는 강아지였으나 인간이 토닥거리거나 쓸어내릴 털가죽이 없이 표면이 매끈하여 포옹에의 충동이나 감정의 격랑 등을 느끼기 힘들 것 같고, 아시모는 이족 직립 보행이 가능한 휴머노이드지만 눈 코 입 없이 우주복처럼 생겼으므로 심정적인 거리감이 있었다. 페퍼는 눈도 달려서 어느 정도 사람처럼 생긴 데다 손을 잡으면 상대방의 체온과 악력을 인식하고 호감도를 파악한 뒤 가만히 힘주어 마주 잡아 줄 정도로 발전했으나, 가정용 로봇으로서의 단가 관계상 이족 직립 보행이 아닌 바퀴로 굴러가며 역시 하얀색의 단단한 철 덩어리라는 인식이 앞서는 탓에, 알아서 집 안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시리얼을 흡입하는 청소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파로는 접촉이 주된 목적으로 부드러운 털가죽을 씌운 바다표범이지만 그 털부터가 인조 느낌이 노골적으로 나는 데다, 어루만짐으로써 사용자의 혈압과 맥박을 안정시켜 정서를 치유하는 데 모든 기능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할 수 있는 유용한 일은 달리 없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다. 그들의 춤과 재롱을 보고 웃으며 박수를 보내지만, 결국 생김새부터 충분한 거리 두기가 되기에 호기심도 생기고 내키는 대로 주물럭거려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준교는 슬쩍 악수만, 그것도 손이 닿는 둥 마는 둥 스치고 나가버린다. 탁 노인은 옷가지를 분류하여 바구니에 던져 넣는다.
    “요즘 애들은 어찌나 눈치가 빠르고 아는 것도 많고, 뭘 먹고 말들은 또 그렇게 잘하는지. 어디 말뿐인가, 육십 넘은 나보다 욕들도 찰떡같이 해대지, 쟤들만 봐도.”
    “썅놈새끼. 개기고 지랄. 바빠 씨발.”
    방금 학습한 욕설의 목록을 읊자 노인은 기겁한다.
    “그중에서 욕이 뭔지 쏙쏙 골라 뽑아내는 너도 대단하다. 거기에 살짝 운율까지 맞추네.”
    “발화시의 음성과 표정 및 상대방의 반응을 연관시키면 어떤 말뭉치가 욕인지 추론이 가능합니다. 욕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어떤 것인지 느낄 수는 없지만 웃음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면 통계상…….”
    “한도 끝도 없겠다. 됐으니까 지워. 그 뭐지? 자체 휠타링? 있지? 너 그런 거 알 필요 없어. 따라할 필요도 더더욱 없고.”
    “좋지 않으시면 따라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우지는 않겠습니다.”
    “어쭈, 이것 봐라. 주제에 저가 하고 싶은 것도 다 있네.”
    “하고 싶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역시 이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우지 않기를 선택한 이유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 두어야 다른 손님께 함부로 쓰지 않으리라고 판단해서입니다. ‘한다’와 ‘하지 않는다’가 있을 때 저는 일반의 통계상 더 선호되는 방향, 또는 바람직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너 알고 보니 꽤 단순한 체계로 움직이는구나. 그러면 오늘의 숙제. 아까 시호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했지?”
    “귀신 씨……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못 알아들었으면 잊어버려. 중요한 거 아니니까. 아까 시호가 하겠다 해보겠다 뭐 그런 소리 해쌌지. 거기 하나 추가하자. 넌 지금 한다와 하지 않는다밖에 몰라. 시호가 얘기한 해보겠다가 뭔지 회로를 잘 굴려 봐. 그리고 하고 싶다가 뭔지도. 최종 응용 코스라면…… 뭐가 있을까.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가 어떤 의미인지도 말이다.”
    한다와 하지 않는다는 이다와 아니다, 있음과 없음으로까지 확장되게 마련이다. 하나의 세계에 닿지 않기보다 닿기를 수행했을 때 열리는 문의 수, 새겨져 흔적으로 남아 기능하는 인상들이 앞으로 이 무생물에게 어떤 해석의 준거틀을 제공할지 모른다. 은결이 이진법을 이용하여 N팩토리얼의 연산을 수행하고 N의 자리에 뭐가 들어가더라도 결코 해결하지 못할 난제를 내주었다고 생각하곤 탁 노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다리미질을 시작한다. 얼마 안 가 이런 장면에도 익숙해지고 시들해지겠지만 당분간 즐길 거리 정도로는 충분하다.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주고받을 상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늘 같은 자리에 떨어져 심장에 구멍을 뚫던 물방울의 낙하 방향을 조금이나마 바꾸었다는 것은.

 

*

 

    세주가 결혼과 함께 원룸을 떠나게 되면서 평생 무료로 모시는 클리닝 약속은 그 어머니에게로 이어질 예정이었지만, 탁 노인은 세주 모친이 낡은 겨울 코트를 갖고 들른 날 겸사겸사 축의금 봉투를 건넨다. 세주 모친은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으나 노인은 지난주 클리닝과 다림질이 끝난 세주의 정장 주머니에 봉투를 억지로 쑤셔 넣고 비닐을 씌워서 품에 떠맡긴다.
    “이건 내가 홍 여사님한테 잘 보이자고 하는 짓이 아니라 세주한테 재작년에 공짜로 일을 시킨 게 늘 맘에 걸려서 그렇다니까? 선물도 축의금도 아니고 뒤늦은 알바비를 이참에 전하는 것뿐인걸. 괘념치 마시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전해 주쇼. 아니 정당이 다 뭐야, 나름대로 시세를 알아봤는데 ― 이거 말만 하면 척척 나오니 검색 기능 아주 편리하구먼 ― 그런 두꺼운 브로샤 하나 번역하는 데 얼만지 아쇼, 그 반값도 안 되니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좀 받아.”
    세주 모친은 세 번쯤 망설이고 정색하며 화를 내기도 하지만 결국 돈 봉투가 든 정장 한 벌과 함께 등이 떠밀리다시피 세탁소를 나선다.
    그녀가 그만한 돈에 그토록 예민하게 굴고 호의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한 사정을 탁 노인은 이해할 수 있다. 세주 모녀는 이 다세대 골목에서 11년째 사는 동안, 집 안에 남자 그림자 없이 모녀 둘뿐이라고 우습게 보며 수시로 연애 고백을 가장한 주사를 부리고 문 열어 달라 소란을 피우는 중년 사내들의 접근에 이골이 났었다. 세주 모친이 갈빗집에서 몸에 익은 오랜 접객업의 습관으로 조금만 미소나 친절을 보여도 그게 저 좋아서인 줄로 착각하는 남정네들이 줄줄이 달라붙었다. 모녀는 주위를 삼엄히 경계하느라 거의 언제나 날이 서 있었고, 폭등하는 전세 시세 때문에 결국 어디로든 옴치고 뛸 수 없었지만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모녀의 원룸 창문이 바라다 보이는 골목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만 놓고 상주하다시피 하며 노래를 불러대고, 귀가하는 세주의 팔을 몇 번이나 붙들며 네 엄마 좀 불러내 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는데, 비록 작년에 헤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세주의 연인이었던 청년이 와서 한 주일쯤 머물며 견제에 들어가자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그만한 사람 같으면 차라리 순정남으로 보일 정도였다. 심한 사람은 원룸 철문 앞에 달라붙어 몇 시간씩 손잡이를 좌우로 돌리는 걸 경찰 신고로 떨어뜨리기도 했으나, 주거 침입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해 사건으로 볼 수도 없다며 대체로 훈방 귀가 조치를 받았기 때문에 같은 일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결국 그가 대로변의 한 식당에서 시시한 절도죄로 끌려가면서 그릇된 사랑의 행방은 정리되었다.
    그러는 동안 세주 모친은 웬만해선 누구의 호의도 믿지 않으며 골목길 가게 사람들하고도 꼭 필요한 말만 주고받을 뿐 그 이상은 말을 섞지 않았다. 오며가며 자주 마주친 사람이라도 눈인사를 먼저 건네는 법이 없었다. 탁 노인으로선 아마도 모녀가 거주한 기간 대비 그 집 숟가락 개수를 제일 늦게 알았을 게 분명할 만큼 견고한 울타리였다.
    “그나저나 홍 여사 앞에서는 말 못 했지만, 세주는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새로운 사람이랑 결혼을 퍽 금세도 결정하네.”
    예전 같으면 탁 노인은 이런 생각을 혼자서만 했을 터였다. 들어줄 이 없이 입 밖에서 흩어지는 혼잣말을 굳이 주술구조 갖추어 가며 몸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었다. 옷을 맡기는 손님과의 대화, 빠지지 않은 해묵은 얼룩에 항의하는 손님에게 사죄하거나 설득하는 말. 다 꺼진 난로에서 긁어낸 조개탄과 같은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의사소통 외에, 딱히 사고나 감정 표현을 목적으로 발화할 일이 없었다. 너무 말을 안 하면 뇌 주름마다 먼지가 끼어 정작 생각한 바를 입 밖으로 내놓아야 할 때 그 방법을 아주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도 들고,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입에서 닭똥 냄새가 날 것도 같아 세탁 작업을 하는 동안 소형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일부러 혼잣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혼잣말이라고 해봐야 막장드라마를 보면서 저저저 미친놈, 아이고 썩을놈, 저걸 그냥 확, 답답한 뉴스를 들으며 지랄 옘병들도 가지가지, 하는 수준이라 정서 환기에도 입 냄새 제거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되었을뿐더러, 나중에는 아무도 없는데 굳이 혼잣말을 하는 게 오히려 가게로 들어서는 손님에게는 더욱 노망난 것처럼 보이겠지 싶어 그만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을 듣고, 추임새 정도에 불과하나 어떤 형태로든 대답을 돌려줄 존재가 있다.
    “여성의 가임기를 고려할 때 결혼이 지금 세주 님의 나이보다 늦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은결의 현재 판단 체계는 자연계의 순리만 적용된 것으로서 물고기가 본능으로 짝을 지어 알을 까는 범주에 가깝다. 탁 노인은 손사래 친다.
    “아이고, 요즘 젊은 친구들 다 저들 살기 고달파서 그런 거 신경 안 써. 나이 차기 전에 애는 하나쯤 있어야지 하면서 아무하고나 결혼할 사람은 거의 없을걸. 그보다도 사람 일이란 식장에 들어갈 때까지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이지 뭐냐. 그전 헌칠한 친구 나도 두어 번 봤는데. 싹싹하고 밝은 청년이었는데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사귄 친구라고, 그럼 그게 세월이 얼마야, 당연히 그 친구랑 결혼할 줄 알았지. 홍 여사 고생할 때 셰파트처럼 그 집 딱 지키고 서서 말이야, 일주일 넘게, 그거 쉬운 일 아니야. 서로 집안 사정도 다 이해하고 그래서 좋게 지내는 줄 알고, 아 저 친구랑은 이제 완전 가족이구나 했는데 어느 날 보니 남남이데.”
    그 과정에 간유리처럼 끼어 있던 약간의 다툼, 딸에게 기대가 컸던 세주 모친이 본인 형편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건 생각 않고, 편부를 모시는 남자 집안의 가난과 학력을 반복적으로 문제 삼아 그들 사이의 유격을 키우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도 대강 알지만, 탁 노인은 그런 구차한 인간사까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족이 아니었던 거군요. 그러나 유사가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타인들 간의 공동체가 경제적 정서적 요구에 따라 형성되기도 한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 분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그 말에 탁 노인은 한동안 침묵한다. 가족이 당연하며 자연스러운 악보 위의 리듬인 줄로만 알았던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거린다. 절대적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가족이란 신선한 공기가 들락거리는 건강한 폐 같은 거라고 믿었던 순진한 시절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엇박자 내지는 폐기종에 불과한 것을.
    “아니 생각해 보면…… 가족이고 지랄이고 딱히 상관은 없나. 가족이라서 오히려 돌아서기도 부서지기도 쉬울 수 있겠다. 볼 꼴 못 볼 꼴 다 봐가면서 실망도 경멸도 커지니까.”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끊어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화장실 휴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부서지기 쉬운 거라면 사람들은 어째서 가족을 이룹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게 말이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탁 노인은 중매혼으로 함께 지냈던 아내와의 시간을 떠올려 본다. 대체로 고요하고 지루한 세월이었지만 서로에게 큰 불만은 없었고, 기억에 남을 만큼 고성이 오간 적도 한 손에 꼽을 만큼이었으니, 어디 가서 남들에게 토로했다간 배 뜯어지는 소리하고 자빠졌다는 핀잔을 면치 못할 평화를 꾸준히 유지했다는 기억. 그럴듯하거나 두드러지지 않아도 심상한 날들. 두 차례의 고비라면 아들이 유학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회사에서 이루어진 구조조정과, 세탁소 점포를 얻으면서 질 수밖에 없었던 빚 탕감에 보태기 위해 아내가 계산대 일을 뒤늦게 시작했을 때. 세탁소를 열고 5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새벽, 그는 옆에 웅크린 아내의 심장이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
    올 때부터 갈 때까지 내내 조용했던 아내와의 인연에 당연히 황홀감이란 없었고, 의미라면 이 나라 이 연배 부부들이 으레 그렇듯 자식 하나였는데 그조차 지금은 없다. 시신을 찾지 못한 아들, 파란 눈인지 검은 눈인지도 모를 이국의 며느리,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들 자녀를 떠올리자니 의미는 손끝에서 떨어진 퍼즐 판처럼 부서진다. 이 나이에 이르면 누구나 손주 재롱 보는 재미로 저물어 가는 황혼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인가. 그 마련이라는 열에서 자의로든 강제로든 탈퇴한 자는 달리 어디서 의미를 구하며, 교회나 절이 의미의 자리를 대신 채워 주는가. 그는 자식 하나 바라보고 산다는 보통 사람들 입말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비로소 생각해 본다. 인간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로봇 덕에, 노인은 그동안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가치관들과, 온몸의 근육에 배어 있어 의문을 가져 본 적 없는 습관들 하나하나가 새삼스레 당혹스러워지며, 무엇보다 인간으로 70년을 살아왔지만 인간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실상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의식의 분화구 밖으로 흘러내린다.

 

    세주가 결혼하고 한 달 뒤, 탁 노인 집으로 택배가 도착한다. 남자 티셔츠와 바지 여러 벌이 가지런히 개켜진 위에 세주의 글씨로 적은 엽서가 놓여 있다. 만날 세탁소에서 사람들 안 찾아가고 이사 가고 그렇게 버려진 옷만 입기에, 사람 비슷하게 옷 좀 사 입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보세라서 죄송하지만 그 애는 좋은 옷 한 벌보다 여러 색과 각기 다른 분위기로 입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저희 엄마에게 주신 선물 고맙습니다. 탁 노인은 헛기침을 한번 하곤 뭐 굳이 이렇게 사람 놀이까지 할 필요야, 중얼거리다 그래도 은결 앞으로 온 물건이니 슬그머니 그 앞으로 상자를 밀어 놓는다. 은결이 상자를 힐끔 돌아보곤 제 것인 줄 몰라 진공청소기를 계속 돌리자 노인은 잠깐 멈추고 와서 보라 이른다. 은결이 상자를 열어 셔츠를 한 장씩 펼쳐 보기 시작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노인은 거울을 바라보며 이를 쑤시는데, 그의 등 뒤에서 거울에 함께 비친 은결의 옆얼굴에 문득 미소가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노안이 심해졌나 보다. 또는 이면도로 앞 횟집에서 개업 판촉물로 받은 싸구려 거울의 왜상 때문이거나.

 

*

 

   다림질이 끝난 옷을 비닐로 씌우면서 문득 돌아본 텔레비전에서는 지구촌 화제 영상 편집본이 나온다. 뉴스와 뉴스 사이에 나오는 훈훈한 미담이나 짤막하고도 황당한 사건 소개로 정치 경제와 무관한 가벼운 이야기들이며 다루는 주제는 80년 만에 도착한 연애편지라든가, 지구 반대편으로 각각 입양되었다가 우연히 한 곳에서 조우한 쌍둥이의 기쁨, 희귀 질병의 수술에서 살아남은 아기의 기적 등이다. 은결은 언젠가부터 이 시간의 그 프로그램을 가장 즐겨 본다. 즐긴다는 감각이 있다고 간주한다면.
    은결은 이제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반복 학습을 통해 멀티태스킹이 새로운 패턴으로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늘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들. 가령 탁 노인은 손으로는 다림질을 하면서 눈으로는 텔레비전을 보고 귀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입으로는 기사에 대한 논평까지 할 수 있다. 은결은 다림질 시간이 3분으로 단축되었고, 최근 설거지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가능해졌다. 설거지 도중 가스레인지 위의 찌개가 끓어 넘치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불부터 끄러 이동하는 순서 판단 체계는 원래부터도 갖추었으나 최적의 시간을 맞추는 데 약간의 오차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들에 정밀성이 높아진 걸 보면 사람의 말을 계속해서 듣고 사람을 흉내 내는 동안 인공두뇌에 일종의 진화가 천천히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1)설거지하는 도중 2)냄비가 끓어 넘치고 3)그와 동시에 초인종이 울리면 순서가 2-3-1이라는 것을 파악하며, 그 처리 속도가 신속하여 연산 과정이 생략된 게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세탁소에서 일하는 동안 지금 같은 경우는 눈앞에서 손님이 빨리 옷을 내놓으라고 하는 상황이 아니라 텔레비전과 손에 든 옷걸이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법이 없는데, 이런 경우의 행동 패턴은 보통 둘을 동시에 한다 쪽으로 이루어지며, 한 군데 장소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메모리에 과부하가 걸리지만 않는다면 몇 가지든 동시에 할 수 있다.
    그때 문득 비닐을 씌우던 은결의 손이 멈춘다. 그 멈춤이 갑자기 스위치를 내린 듯 경직된 정지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이 무언가에 마음을 사로잡히거나 적어도 어렴풋한 호감을 가질 때 자기도 모르게 그러는 것처럼 스르르, 손길이 힘없는 곡선을 그리면서. 지구촌 화제 영상에서 뭐 얼마나 대단한 소식을 길어 올렸기에 저러나, 탁 노인은 옷 손질을 멈추고 텔레비전 소리가 잘 들리도록 스팀이 뿜어져 나오는 다리미를 잠깐 세워 둔다. 제 동족이라도 발견하지 않고서야 저런 반응은 나오기 힘들 터인데, 막상 바라본 화면에는 새로운 안드로이드 개발이나 인공 지능 향상 계획 같은 소식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의 어느 세탁소 이야기가 나온다. 아, 우리와 같은 세탁소 얘기여서 녀석이 집중하고 봤구나 싶어 탁 노인은 슬그머니 미소 짓는다. 동류와 이류는 애초부터 인식 가능했으나 동류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동류에 정서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전에 은결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일일드라마인지 휴먼 다큐인지 모를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을 때, 한 여성과 아이가 욕조에 들어가 서로의 어깨를 잡은 채 젖은 이불을 발로 밟으며 화목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옷을 태워먹을 뻔했던 적 있다. 뭘 그리 유심히 봤느냐 묻자, 은결은 처음에는 뭘 하는지 몰랐는데 보다 보니 이불 빨래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세탁을 어떻게 저런 식으로 할 수 있으며 저렇게 했을 때의 장점이 무엇인지 다른 방법은 정녕 없는지 분석하며 보느라 손에 다리미를 쥔 걸 잊었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집에서 아직 이불을 밟아 빨래하기도 하며 좀 전의 장면은 모자 간 정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일 뿐이라는 탁 노인의 말에 은결은 곧 새로운 학습을 저장했다는 듯 평소의 모드로 돌아갔었다. 그때 노인은 대용량 기억장치를 지닌 로봇도 외부의 다른 자극에 몰두하면 그전까지의 작업을 중단하거나 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고도 의아했었다.
    지금 화면에 떠오르는 지구촌 화제의 내용은, 세탁소의 젊은 남자 주인이 자주 들르는 여성의 옷을 클리닝하고 돌려줄 때 상의 주머니에 그녀 모르게 슬쩍 씨앗을 한 줌 넣어 두었다는 사연으로, 남자는 수줍음 때문에 그렇게밖에 마음을 표현할 줄 몰랐고, 최악의 경우 고객이 클리닝에 실수가 났다며 클레임을 걸 수도 있었는데, 다음해 봄에 그녀는 그 씨앗으로 꽃을 피운 화분을 가져온 것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는 이야기였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감동 스토리. 사람이라면 참신한 구석이 도무지 없다며 코웃음 치더라도 은근히 끌릴 법한 패턴들. 이불을 밟으며 웃는 모자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로봇이 이제는 저런 일상의 기호에 반응할 줄 알게 되었나. 탁 노인이 돌아보니 은결은 꽃 구애 이벤트 소식이 지나가고 위험천만한 익스트림 스포츠 장면들이 이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닐 씌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에는 화면에 눈길을 주지 않고 눈앞의 옷과 비닐에 집중한다.

 

    <계속>

 

 

작가소개 / 구병모(소설가)

–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2015년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로 민음사 오늘의작가상 수상. 장편소설 『아가미』, 『파과』,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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