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연재] 외계인②

[중편연재]

외계인 (제2회)

박상우

bsw-ph「그가 있던 자리」/ 중국 쓰촨성 광원 천불애(中國 四川省 光元 千佛崖) / Photo by 박상우

    눈을 뜨자 희끄무레한 커튼으로 에워싸인 직사각형 공간이 나타났다. 허공은 어둠침침한데 좌우에서 희붐한 형광불빛이 밀려들어 다소간 눈이 부셨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보니 협소한 일인용 침대에 나는 누워 있었다. 사물함 밑의 수납공간에 세워 둔 휴대폰을 눌러 시간을 확인하니 다섯 시 사십 분. 새벽 두 시 사십 분에 입원 처리되고 세 시간도 채 못 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절로 잠이 깬 게 아니라 좌측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런 신음소리 때문에 깨어났다는 걸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자가 아야, 아아, 아학,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만, 그만, 제발, 하며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애원을 하고 있었다. 그르륵 그르륵 하는 가래소리와 함께 발음이 부정확하게 갈라지는 것으로 미루어 남자의 나이가 상당히 들은 것 같았는데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사이사이 여자의 신경질적인 어조가 뒤섞였다. 뒈지지도 않고 아침마다 이렇게 속을 썩이면 도대체 어떤 년이, 이런 썅, 가만 좀 있어, 움직이지 말라니까! 새벽에 입원 처리되어 입원실로 올라온 직후 내가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신데 불을 켜고 지랄이야! 순간, 내 가슴 한복판에 대못이 박히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6인용 입원실 소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커튼을 여는 소리, 변기를 들어내는 소리, 쩝쩝 소리를 내며 뭔가를 먹는 소리, 마시는 소리, 끙끙거리며 간간이 신음을 뱉는 소리, 그리고 남편을 간병하는 나이 든 여자들의 불만에 찬 욕지거리가 한데 뒤섞이며 하루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입원실에서 눈을 뜬 첫 아침이 지옥 같아서 숨을 크게 쉬기도 힘들었다. 얼마간 시간이 더 지난 뒤부터 좌측 침대에서 간병하는 여자와 그 맞은편 침대에서 간병하는 여자가 음성을 낮추지도 않고 함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남편들의 병세, 술을 너무 퍼처먹고 몸뚱어리를 함부로 굴려 애먼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한다는 얘기, 어차피 뒈져야 할 병이라면 단번에 죽는 게 제일이라는 얘기, 허구한 날 병원구석에 갇혀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는 푸념을 들으며 나는 관처럼 협소한 공간에 누워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오랜 간병으로 그악스러워진 여자들은 주변이고 나발이고 도무지 거칠 게 없는 말투로 남편들을 원수덩어리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폭력적인 언사에 진저리를 쳐대며 나는 열 손가락으로 가슴 한복판을 지그시 눌렀다.
여섯 시가 좀 지난 뒤에 간호사가 커튼을 걷고 나타났다. 나의 혈압과 체온을 체크한 뒤에 밤사이 통증은 없었는지, 대소변은 보았는지 물었다. 나는 통증도 없고 대소변도 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체크리스트에 나의 대답을 기록했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지만 허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간호사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오후에 입원실 옮기게 될 거예요.”
“왜요?”
“여긴 새벽에 응급실에서 올라오는 바람에 임시로 지정된 자리예요. 4인실로 가게 될 거예요.”
입원실을 옮기게 될 거라는 간호사의 말이 그 순간 나에게는 결정적인 구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단지 입원실을 옮기게 될 거라는 말 한 마디에 그렇게 큰 희망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옮기게 될 입원실이 어떤 곳이건 여기보다 나쁘진 않을 거라는 확신에 대해 나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6인실과 4인실의 차이 같은 건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단지 직감과 직관만으로 나는 인내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감지하고 있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에너지, 의식하면 할수록 숨통을 조여 오는 에너지, 그런 것으로부터 나는 심리적 통증까지 느끼고 있었다. 세상을 살아오며 이런 에너지를 접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을 나는 극도로 싫어했다.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문제는 죽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지구에서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의 요체였다.
간호사가 다녀간 뒤에 나는 입원실 입구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요의를 느끼거나 변의를 느껴서가 아니라 그냥 침대에 너무 오래 들러붙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좌변기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앉을까 설까. 나는 몸에게 물었지만 몸은 묵묵부답이었다. 선 채로 성기를 꺼내 변기에 조준했지만 그것도 반응이 없었다. 생물학적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것 같았다. ‘병원’이라는 환경보다 ‘병원에 갇혀 있다’는 의식적 조건에 신체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입원실의 커튼이 모두 걷혀 있었다. 비어 있는 나의 침대를 제외하고 다섯 개의 침대에 여덟 명이 있었다. 가장 안쪽의 좌우 침대에는 새벽부터 남편들에 대한 욕지거리로 핏대를 올리던 육십대 초중반 정도의 여자 둘이 앉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측 침대의 여자는 남편 옆에 붙어 수건으로 얼굴과 몸을 닦아 주고 있었고 내 침대와 이웃한 좌측 침대의 여자는 가래를 긁어내는 석션기의 카테터를 손질하고 있었다. 새벽에 내가 들었던 옆 침대 남자의 애원조 신음이 저것을 사용해 가래를 긁어내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맞은편 침대에는 거의 주검처럼 보이는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 입을 벌린 채 코에 산소를 공급하는 비강(鼻腔) 캐뉼라를 연결하고 있었고, 침대 옆에는 육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왜소한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고 선 채 망연한 표정으로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출입문 좌우의 두 침대에는 간병인이 없는 환자 둘이 있었는데 여적 자는 건지 자는 시늉을 하는 건지 도무지 기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침대로 올라가 내 맞은편에 주검처럼 누워 있는 피골이 상접한 노인을 건너다보았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침대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오른손을 꺼내 느린 동작으로 눈두덩을 닦았다.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줄 알았는데 움직임도 없이 선 채로 울고 있었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눈물을 닦는 걸 본 옆 침대의 여자가 수건으로 남편의 몸을 닦던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거긴 오늘 중환자실로 올라간다면서요?”
“…….”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여자의 건조한 질문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가 감정이 상한 듯한 어조로 혼잣말을 했다.
“몇 년 간병해 보라지. 눈물은커녕 되레 감사하게 될 테니…….”
순간, 침대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상체를 앞으로 접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형님!”
침대 옆에 서 있던 동생은 오열을 자제하지 못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환자의 생명이 다하기라도 한 것처럼 슬프게 오열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보가 터졌다. 그래서 어금니를 악다문 채 어깨를 들썩이며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감정이 완전히 이입되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되살아난 때문이었다.

    내가 할아버지 집으로 살러 간 건 여섯 살 때였다. 지구에 태어나 이천일 정도 살았을 때 부모가 고속도로 터널에서 트럭과 충돌해 현장 즉사한 때문이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나는 죽음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몰려든 일가친족들 때문에 이상한 설렘을 느끼기까지 했다. 뭔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야릇하게 술렁이고 있었는데, 나는 일가친족들이 통곡을 할 때도 다음 순간 그들이 갑작스럽게 얼굴을 뒤로 젖히고 파안대소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끝끝내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무튼 여섯 살의 나에게 죽음은 너무 막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잘 이해되지 않고 실감나지 않고 불가해한 것으로만 굳어져 갔다. 성장하면서도 죽음은 못 보는 것, 돌아오지 않는 것, 만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심화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다소 주관적인 견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자조적인 비유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었다.
스무 살 시절에 나는 내 자신을 ‘책’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부모는 책을 찍어낸 존재, 즉 출판업자였다. 그런데 나를 찍어내고 6년이 지난 뒤에 출판업자가 죽고 출판사가 문을 닫았다. 책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나의 스무 살 시절은 온통 책으로서의 내 인생에 관한 생각으로 점철되었다. 책인 나, 나인 책에 대하여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답을 얻고 싶었다. 답을 얻지 못하면 살아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는 물리학과 연구전담 교수가 된 삼촌에게 물었다.
“삼촌, 이렇게 부조리한 내 존재성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해?”
“부모를 원망하는 거니?”
“아니 논리로 풀고 싶어서 자문을 구하는 거야. 여섯 살 때 나는 죽음이 뭔지도 몰랐으니까, 감정 같은 걸 품을 필요가 없잖아.”
“네가 책인데 출판업자가 죽고 출판사가 문을 닫았으면 출판업자와의 물리적 거래는 자연 종료된 거고 남겨진 건 저작권뿐이네.”
“저작권? 그럼 나를 집필한 저자, 나라는 콘텐츠를 만들어낸 저작권자는 누구지?”
거기서 삼촌은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팔짱을 끼고 턱을 쓰다듬던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빙그레 웃어 보이며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일주일 뒤에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얘기하자.”
일주일이 되기 전, 그러니까 5일쯤 지난 뒤 새벽 두 시경에 삼촌이 내 방으로 왔다. 나는 그가 5일 전에 나와 주고받은 대화 때문에 왔다는 걸 단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침묵하는 나를 향해 그는 몹시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지금도 너는 그것의 근원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거다. 너의 말대로 책에 비유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책이야. 그럼 그 책의 내용을 집필한 저작권자는 누구인가. 내 말은 그 문제가 비단 너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문제라는 거야. 인간의 삶을 도대체 어느 누가 저작하는가 혹은 집필하는가? 그건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노골적으로 묻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 안 그러냐?”
진지한 기운이 충만한 삼촌의 크고 검은 두 눈동자를 올곧게 응시하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문제는 내가 답할 수 없는 것이다. 네 질문이 도저히 답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알고 난 뒤에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특별한 조카이고 너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 떠난 너의 아버지, 즉 나의 형에게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기를 쓰고 이 문제를 풀어 보려고 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부터 건네는 말은 철저하게 사적인 견해, 다시 말해 삼촌이 조카에게 지극히 개인적으로 전하는 생각이니 그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참고나 하라며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당부했다. 내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이자 그도 눈시울을 붉히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는 세상에 태어난 저작물이고 너를 출간한 건 돌아가신 너의 부모님이 맞다. 하지만 너의 부모님은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기능을 행사했을 뿐이지 책의 내용을 집필한 저작권자는 아니다. 너를 만들어낸 저작권자는…… 바로 너 자신이다. 네가 네 자신의 저작권자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들, 그들 인생의 인과성은 모두 자신에게서 근거한다고 보는 견해다. 물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견해를 되새기며 내린 결론이다. 자업자득 자작자수(自業自得 自作自受)! 네 인생을 채우는 콘텐츠는 모두 네가 기획하고 네가 프로그래밍한 것이라 믿고 살면 부질없는 한탄이나 원망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주어진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지 그것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거나 원망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냐?”

    여섯 살 때 할아버지 집에 가서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공간과 정적이었다. 그것이 내가 여섯 살까지 살던 집과 다른 점이었다. 양쪽 모두 아파트였지만 공간과 정적 때문에 도무지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부모와 살던 집은 항상 어지럽고 어수선했다. 아버지는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고 엄마는 집안일을 귀찮아했다. 관심이 없는 것과 귀찮아하는 건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도 괜찮다는 방임이자 무시였고 그것 때문에 엄마는 자극을 받아 더욱 집안일을 귀찮아하고 바깥일에만 관심을 쏟았다. 시간강사였던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엄마는 방 안으로 들어가 전화기부터 잡았다.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하는 동안 깔깔거리며 웃거나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거나 언성을 높여 누군가를 욕하기도 했다. 8층 아줌마네 집에 나를 맡기고 외출했다가 밤에 돌아오거나 새벽에 돌아와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일언반구 간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벽에 술에 만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돌아와 나를 깨운 적도 있고 어떤 날은 아예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내가 여섯 살 때까지 살던 아파트에는 부모가 대학 시절에 찍은 사진 액자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학과 동기였고 졸업하던 해에 결혼을 해서 나를 낳았다고 했다. 스물넷 동갑내기의 결혼과 서른의 사고사 사이에 남겨진 건 나 하나뿐이었다. 그들의 추억도 그들의 애증도 증발하고 오직 나 하나만 남겨진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그들은 오직 나를 세상에 찍어내기 위해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미워하고…… 그러다가 어느 비 내리던 일요일 아침 최초로 언성을 높여 싸우고 나서 어디로인가 뭔가를 확인해 보자며 함께 나갔다가 불귀의 객이 된 것이었다. 나를 찍어내는 역할, 나를 세상에 버려두는 역할, 그리고 사이좋게 함께 떠나는 역할.
성장하는 동안 나는 문제의 일요일 아침 부모 사이에 있었던 트러블에 대해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일을 수천 번도 더 되풀이했다. 내가 모르는 남자의 이름, 그리고 아버지의 욕설, 엄마의 항변과 이혼하자는 말, 그리고 뭔가를 확인하자며 집에서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 황급히 함께 나가던 일…… 그 일요일 아침의 일이 나에게는 강렬하지만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연극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나를 세상에 버려두고 떠나기 위해 삼류 막장 드라마의 연기를 내 앞에서 펼친 것은 아닐까, 혼자 생각할 때도 있었다. 사고가 나던 날 집에 왔던 친척 중에 아버지가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자신의 말이 아니라 사고 후에 트럭 운전자가 경찰에서 진술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했던 기억까지 남아 있었다. 정말 빌어먹을 파국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여섯 살까지 살던 집과 달리 할아버지 집에는 거실에 소파도 없고 TV도 없었다. 정년퇴임을 한 대학교수의 집이라고 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학문적인 책도 거의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할아버지가 곁에 두고 마르고 닳도록 보는 책은 십여 권의 불경이 전부였다. 함께 살았던 12년 동안, 그러니까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할아버지는 오직 그 책들만 되풀이 읽었다. 왜 저렇게 무료하고 단조로운 짓을 되풀이하는가, 내가 읽은 동화책만 해도 백 권이 넘는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왜 이 책들만 자꾸 읽어요? 왜 다른 책은 읽지 않나요?”
“할아버지가 궁금해 하는 게 여기에 다 있기 때문이란다.”
그로부터 십 년 뒤,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할아버지에게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불경을 날마다 읽으면서 절에는 가지 않나요?”
“그건 부처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란다. 가르침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부처의 가르침은 자기수양을 위한 것이지 종교를 만들라는 교리가 아니었단다. 지구에 끊임없이 태어나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에 대한 자비와 연민 때문에 도처를 떠돌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깨어나게 한 것 아니겠느냐.”
“그럼 부처는 할아버지에게 무엇인가요?”
“부처는 신도 아니고 종교를 만든 교주도 아니고, 그저 죽는 날까지 불쌍한 사람들을 가르친 선생이었을 뿐이다. 부처 선생.”
스무 살이 넘은 뒤에야 나는 할아버지의 말뜻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읽던 경전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한자 번역경전이 아니라 부처 당대의 언어를 제자들이 구전한 빨리어 경전들이라는 것도 그 무렵에야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삼촌은 물리학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지녔던 카필라 성의 왕자가 우주적인 깨침을 얻은 뒤에 중생에게 가르친 내용이 2천 년이 지난 뒤에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며 나에게 양자역학과 프랙탈 이론에 대해 상세하게 비교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부처가 선생이라고 했는데 삼촌은 부처가 과학자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할아버지 집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나를 동네 유치원으로 데려가 원장을 만나고 아이들이 이미 저희들끼리 친할 대로 친해진 반에 편성을 시켜 주었지만 나는 그곳에 동화되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의 스크럼 바깥에 우두커니 서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았다. 아이들도 나도 서로의 거리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걸 조금도 의식하지 못한 존재는 오직 선생뿐이었다. 선생은 ‘네 스스로 아이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나의 왕따 신세에 관여하지 않았다. 누리라는 명찰을 단 여자애가 다가와 같이 놀래? 하고 나에게 묻자 종식이라는 명찰을 단 돼지 같은 녀석이 다가와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리며 욕을 했다. 저리 가 새끼야! 누리는 나하고 놀아야 돼!
그 첫날 나는 눈물을 흘리며 유치원에서 나왔다. 선생도 나를 보지 못했는지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내 상가 건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단지 뒤편으로 접어들자 호젓한 산길이 나타났다. 길은 세 갈래로 갈려 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와 둘레길, 그리고 건너편 자연부락으로 가는 길로 나뉘고 있었다. 그 세 갈래 길 앞에서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등산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분 정도 걷자 잡초가 무성하던 평지가 오르막으로 바뀌며 좌우로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낮이었지만 숲길은 어둑어둑하고 그늘로 인해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심장이 아프고 눈물이 날 것 같고 뭔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걸음은 되돌려지지 않았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길이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곧게 오르는 등산로 좌측으로 샛길이 나 있었다.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 길로 접어들었다. 처음과 달리 그 무렵부터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나를 당기는 듯한 인력이 느껴졌다. 십여 분쯤 그 길을 따라 걸어가자 산비탈에 돌로 지어진 집 한 채가 나타났다. 마당에는 울긋불긋한 깃발과 여러 종류의 석상, 그리고 덩치 큰 개 세 마리가 있었다. 개를 보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지만 신기하게도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 않았다. 세 마리 모두 줄에 묶여 있었지만 선 채로 꼬리를 흔들며 물끄러미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겁도 없이 개들을 향해 다가갔다. 아파트 단지에서 작은 애완견들을 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 자연스런 환경에서 꼬리를 흔들고 서 있는 덩치 큰 개들을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들은 꼬리를 더 심하게 흔들어댔고 내 가슴 속에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감동이 샘솟았다. 겁이 나기는커녕 너무 좋아서 개들의 목이라도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쪼그리고 앉자 개들이 일제히 나를 에워싸고 앞과 옆과 뒤에서 혀로 내 손을 핥아대거나 옆구리로 머리를 들이밀거나 겅중거리며 앞발을 들어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화평한 분위기를 일순에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고성이 들렸다.
“저리 가!”
나는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몇 걸음 뒤쪽에 검은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과 목을 칭칭 감은 노파가 지팡이를 들어 올려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리 가!라는 말이 나를 향한 것인 줄 알고 나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속수무책의 상황이 너무 두려워 본능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노파가 지팡이를 들고 다가오자 개들도 꼬리를 사루고 끙끙 소리를 내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침부터 손님 괘가 떨어져 웬일인가 싶었더니…… 또 길 잃은 조무래기로구나. 난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아파서 걷지 못하니 네가 왔던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든가 예서 누군가 널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든가 해라.”
그러면서 노파는 허리를 굽히고 내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 깊게 팬 미간의 세로 주름과 이마의 가로 주름이 검은 수건 안쪽으로부터 나의 시야로 쏟아지듯이 밀려들었다. 아, 마귀할멈!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지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물리치지 못한 채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순간, 노파가 내 손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우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누가 널 데리러 오겠냐? 너는 천애고아 팔자다. 어디로도 오갈 수 없게 되거든 여기서 나하고 같이 살자꾸나.”
노파는 낄낄거리며 나의 손을 잡아끌고 돌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온갖 잡동사니들이 차지하고 있어 할아버지 집의 텅 빈 공간성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산만하고 불온한 기운을 느끼며 나는 노파가 이끄는 대로 안방으로 들어가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발적으로 앉은 게 아니고 노파의 완력에 이끌려 앉혀졌다고 하는 게 옳을 터였다.
잠시 뒤, 노파가 쟁반에 담아온 따뜻한 꿀물과 고구마를 먹고 아랫목에 앉아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다. 바깥뿐 아니라 집 안에도 불이 모두 꺼져 사방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다시금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죽인 채 누워 있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할머니가 방 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바깥에서 밀려드는 밤바람 소리 때문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완전한 어둠, 완전한 정적, 완전한 고립 속에서 나는 온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는 걸 느꼈다.
다음날 오후에 나는 돌집으로 찾아온 몇몇 경찰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산을 내려가면서 보니 곳곳에 경찰들이 흩어져 무성한 잡풀을 헤치며 나를 찾고 있었다. 하산하는 동안 경찰은 내가 그곳으로 가게 된 경위를 세세하게 물었다. 혹시 할머니가 나를 돌집으로 데려간 건 아닌지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나는 시종일관 “내가 갔어요”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아파트 단지로 접어들어 경찰관과 함께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단지 상가 앞에서 누리를 보았다. 상가의 정육점 앞에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곤 잠깐 미소를 지었지만 내가 경찰관과 함께 가는 걸 보곤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밝은 햇살 속에 서 있는 그 아이의 흰 얼굴과 구슬처럼 검고 커다란 눈망울을 주시하는 동안 가슴 속으로 강렬한 전류가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때는 그것이 각인이라는 걸 까맣게 몰랐지만 그 순간 내가 본 그녀의 얼굴은 삼십대 중반이 된 지금도 좀 전의 장면처럼 생생하게 되새겨진다. 뿐만 아니라 전류가 흐르는 듯하던 가슴의 통증도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날의 가출로 나는 유치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할아버지의 강권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할아버지가 나의 의사를 존중한 결정이었다.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그곳에 가기 싫다고 단순하게 대답했고 할아버지는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로 나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여섯 살 시절부터 할아버지 집의 텅 빈 공간성과 정밀한 정적 속에 파묻혀 사는 일상을 몸과 마음으로 익혔다. 새벽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불경을 읽은 뒤, 식사 준비와 집안 정리를 마친 파출부 아줌마가 돌아가는 오전 열 시경부터 할아버지는 나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었다. 상형문자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어 나는 잠잠하게 앉아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뒤에 그날 배운 한자를 칸막이 노트에다 그림처럼 그려 넣곤 했다.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근 2년 사이에 나는 키가 엄청나게 자랐다. 몸집에 살이 없는데 키만 너무 자라니 내가 보기에도 기형적인 느낌이 들어 거울 앞에 서는 게 싫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이미 165cm가 되어 다른 아이들이 가슴팍 밑에서 어른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키 때문에 나는 다시 곤경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가 큰 놈을 이긴다는 것, 키가 큰 놈을 때릴 수 있다는 것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영웅담을 만드는 일과 다를 게 없었다. 학교에 입학한 다음날부터 나는 맞기 시작했다. 내가 무저항적인 상태에서 맞았다는 얘기를 들은 다른 아이들이 날마다 건물 뒤쪽의 협소한 공터로 불러내 나의 정강이와 허벅지와 가슴팍과 머리통을 때렸다. 처음에는 무표정하게 맞다가 며칠이 지난 뒤부터는 가만히 서서 울면서 맞았다. 어떤 아이는 때리다가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곤 기분 더럽다며 가방을 들고 먼저 가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맞은 뒤부터 나에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맞을 때나 맞지 않을 때나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린 때문이었다. 한번 열린 눈물샘은 도무지 닫힐 줄 몰랐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아 베개와 이불까지 흥건해지곤 했다. 사람의 몸속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수분이 담겨 있는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지만 의사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할아버지가 물었다.
“네 마음에 슬픔이 있느냐?”
“……몰라요.” “눈물이 나게 하는 생각이 있는가 말이다.”
“……그냥 흘러요.”
“어떻게 하면 눈물이 멈출 것 같으냐?”
“……한 가지…….”
“그게 뭐냐? 말해 보거라.”
“……학교 가기 싫어요.”
그렇게 해서 나는 제도권 교육과 인연을 끊었다. 할아버지가 같은 반 아이들을 탐문한 결과 내가 일주일 내내 무저항적으로 맞기만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나도 모를 특단의 조치를 취해 학교와의 인연을 끊게 해준 것이었다. 서류상으로 나는 특수교육을 받을 대상으로 처리됐지만 할아버지가 실질적으로 취한 내적 조치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의 교육을 전적으로 삼촌에게 일임한 때문이었다. 그것이 내 홈스쿨링 인생의 출발점, 검정고시 연대기의 배경이었다. 그 무렵 삼촌은 물리학도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지만 나의 홈스쿨링을 위해 연애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늦은 밤까지 기꺼이 나를 가르치곤 했다. 부모라는 출판권자들이 나를 찍어내고 사라진 뒤, 할아버지와 삼촌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는 차원을 넘어 저작권자인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생으로서의 부처’와 ‘과학자로서의 부처’는 나에게 할아버지와 삼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뒷날 나로 하여금 사진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한 『시(時)/공(空)/불(佛)』이 바로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일흔여덟이 되던 해 봄에 자다가 세상을 떠나고 삼촌은 서른여덟 가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잠자는 사람처럼 평화로운 얼굴로 정말 자는 것처럼 세상을 떠났지만 결혼도 못 하고 연구전담 교수 생활을 하던 삼촌은 과로로 인한 폐렴으로 입원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단순한 감기와 몸살인 줄 알고 버티다가 너무 늦게 병원으로 간 게 화근이었다. 죽기 전, 중환자실에서 삼촌은 나에게 자신의 가슴을 눌러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무엇이 왜 미안하냐고 나는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갓 스물, 그해 봄에 삼촌은 나의 존재성을 저작권자로 격상시켜 주었지만 그해 가을에 나는 그를 잃었다. 저작권을 얻고 ‘과학자로서의 부처’를 잃은 것이다. 삼촌이 세상을 떠난 직후 나는 대학을 자퇴했다. 대학이란 나에게 도무지 맞지 않는 시공간, 내가 살아 숨 쉴 수 없는 패턴의 제국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도권 교육의 패턴에 길들여진 아이들과 나는 근원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패턴은 강철보다 견고한 벽이었으므로 그것을 깨거나 그것에 길들여질 가능성에 대해 나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와 삼촌의 죽음을 거친 뒤 나의 존재성은 다시 여섯 살 시절로 되돌아갔다. 여섯 살 때 산중에서 만난 마귀할멈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걸 나는 비로소 알아차렸다. 천애 고아의 팔자.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 삼촌과 함께 살던 아파트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그림자라도 느끼며 살고 싶어서였다. 부모, 할아버지, 삼촌이 모두 죽어서 떠나갔지만 살아서 성장하는 것도 나는 지켜보았다. 상가 정육점 앞에서 늘 어정거리던 누리. 그녀가 성장하고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나에게는 가장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어디 먼 곳으로 유학을 떠나기라도 했는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그녀는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성장하는 동안 그녀도 나의 시선을 의식했지만 나는 끝끝내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다가가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내가 다가가면 그녀도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켜보기만 하는 사랑,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완성되는 기이한 사랑법을 나는 익혔다. 덕분에 여섯 살 때 각인한 그녀의 모습을 나는 원형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고 부처는 가르쳤지만 변하지 않는 것 한 가지를 가슴에 고이 품고 살게 된 것이었다.

    대학을 자퇴한 뒤 나는 대학병원의 치과를 찾아가 십 년 동안 미뤄 오던 사랑니 네 개를 삼 개월에 걸쳐 뽑았다. 열 살 무렵부터 시작된 아래쪽의 와치 두 개 때문에 해마다 여름이면 열흘에서 보름 정도 끔찍스런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하룻밤에 삼십 분 간격으로 진통제를 스무 알 이상 복용하고 혀가 마비된 적도 있었다. 깊은 밤이나 새벽에 무작정 택시를 타고 응급실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 진통주사를 놔달라고 요구했지만 의사의 처방전 없이는 주사를 놔줄 수 없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며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영등포나 인천, 파주까지 달려가 허름한 변두리 병원에서 바랄긴이나 모르핀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잇몸의 가장 안쪽 깊은 곳에 고래등처럼 파묻혀 있던 좌우 두 개의 와치를 나는 해마다 엑스레이로 확인했지만 병원에 갈 때는 이미 잇몸이 부어오르고 통증이 시작된 뒤라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이나 열흘 혹은 보름 뒤에 통증이 가라앉으면 그때 발치하리라 다짐했지만 기이하게도 통증이 가라앉은 뒤에는 발치에 대한 생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십 년을 보내는 동안 송곳이나 드릴로 좌우 양쪽 볼에 구멍을 내고 내 손으로 두 개의 와치를 뽑아내고 싶다는 끔찍스런 충동에 시달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제로 새벽 두 시경에 송곳을 들고 거울 앞에 서서 오른쪽 턱을 겨냥하며 거울 속의 존재를 노려본 적도 있었다. 그때 거울 속의 존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 진통제 과다복용의 혼미한 정신으로 들은 기억이 난다.
까불지 마, 넌 아직 멀었어.
신장결석 때문에 겪은 통증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깨끗하게 제거했지만 그것도 이 년 이상의 통과의례를 거친 뒤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치통이나 신장결석 같은 건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한 육체적 통증을 불러왔지만 그것과 근원적으로 다른 종류의 통증도 많았다. 스무 살 무렵 나의 수첩에 기록된 통증의 분류는 다음과 같았다.

   ● 마음 통증 : 원인불명 내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 느껴지는 예리하고 견디기 힘든 전류적 자극. 외부로부터의 물리적·언어적 자극으로도 나타난다. 가슴에 대못이 꽂혀 있는 듯한 불편함 때문에 고통스럽다. 자연 소멸 이외 다른 치유 방도가 없다.
육체 통증 : 가장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통증. 두통, 복통, 치통, 요통, 생리통 등등. 대부분 약으로 치료 가능.
관계 통증 : 불온하고 불안한 통증. 안 아픈 곳이 없는데 어느 곳도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가 없다. 부모 자식, 부부, 애인, 친구 등등의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심리적 통증. 가해자가 되는 경우나 피해자가 되는 경우나 비참한 통증이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시간이 약.

작가소개 / 박상우 (소설가)

–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사랑보다 낯선』『인형의 마을』『호텔 캘리포니아』『내 마음의 옥탑방』『가시면류관 초상』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혼자일 때 그곳에 간다』『작가』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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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

저작권 얘기가 인상 깊습니다. 그나저나 누리가 큰 역할을 할 것 같네요. 다음 편이 어서 나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