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눗방울 맨

 

 

비눗방울 맨

 

 

 

김혜진

 

 

삽화-비눗방울맨

 

    미안하다는 말은 사실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손이 시렸고 나중엔 손끝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계속 내가 케이스를 들고 다닌 탓이었다. 그 안에 철수가 있었다. 손잡이가 망가지기 직전이어서 무게 중심은 자꾸 어긋났다. 그래도 더러운 바닥에 케이스를 내려놓고 싶진 않았다. 나는 골목 안쪽을 힐끔거렸다. 거리를 메운 사람들 탓에 계속 떠밀리다가 우리는 어느새 이런 뒷골목에 서 있게 된 거였다.
    일단은 근처 카페로 들어가 계속 이야기하기로 했다. 카페 안은 사람이 많아서 몹시 시끄러웠다. 나는 케이스를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고 잠깐 안을 들여다봤다. 철수와 눈이 마주쳤는데 녀석이 기습적으로 큰 소리를 냈다. 내보내 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케이스를 벽에 바짝 붙인 다음 가볍게 두 번 찼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커피 두 잔을 시켜와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네가 물었다.
    뭐가?
    커피는 뜨거운 데다 지독하게 썼다. 형편없는 커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싸 쥐고 있자니 겨우 손을 녹이려고 만 원도 넘는 돈을 써버렸다는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어떻게든 너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나는 반짝이는 커피 머신 앞을 지키는 종업원들만 노려봤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이냐고?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미 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확인하려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오기, 집착. 혹은 끈기나 집념. 어쨌든 고마움이나 미안함 같은 따뜻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혼잣말을 시커먼 커피 안으로 하나씩 던져 넣으며 침묵을 지켰다. 부주의하게 입을 열고 어쨌든 빌미가 될 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카페 안은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커다란 출입문이 열리면 냉랭한 바람과 함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와 말소리들이 밀려들었다. 똑같은 조끼와 점퍼를 맞춰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고 전단지와 홍보물을 쥔 손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옮기고 자리를 마련하며 소란스럽게 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더 말할 기분이 안 났다. 나는 여기저기 널린 전단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골똘히 그걸 읽는 척했다. 탄압, 졸속, 규탄. 숨바꼭질하듯 그런 단어들 사이로 숨었다가 잠깐씩 너를 훔쳐보는 거였다.
    내가 말했지? 지금 얘는 내가 알던 걔가 아니라고. 원래대로 해놓으면 데려갈게. 그땐 진짜 데려가겠다고.
    너는 답답하다는 듯 검지로 테이블 아래를 가리켰다.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그 지난번에도, 더 지난번에도 너는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빨갛게 충혈이 된 네 눈을 잠깐 확인했다. 어쩌면 밤새 잠 안 자고 나와 철수를 대면했을 때의 대응 매뉴얼 같은 걸 치밀하게 준비했을지도 몰랐다.
    수 쓰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연애가 잘 되고 있는 모양이네.
    너는 잠시만 철수를 맡아 달라고 했었다. 보름에서 한 달 정도만. 그러다가 막상 철수를 데려오던 날에 석 달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러면서 자주 환경이 바뀌면 아무래도 여리고 작은 철수에게 스트레스가 클 거라는 핑계를 댔다.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이어서 그러겠다고 했는데 그게 철수에 대한 게 아니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 무렵 너에게 애인이 생긴 거였다.
    그건 어느 밤에 술에 취한 네가 직접 한 말이었다. 고양이를 무서워하거나 고양이털에 알레르기가 있거나 냄새에 민감하거나. 그런 사람이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너는 문득 이렇게 털어놨다.
    그냥 철수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뭐든 잘 안 돼. 자신감도 없어지고. 뭐 하는 짓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고.
    그리고 석 달이 지난 후부터는 내내 이런 식이었다. 철수가 자기가 알던 철수가 아니라는 거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케이스 안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큰 차이는 없었다. 살이 쪘다 해도 겨우 일이 킬로그램 정도일 거였다. 나는 철수는 여전히 철수고 조금 살이 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어서 그렇다고 얘를 굶길 수는 없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가져가. 나도 이제는.
    힘들고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너는 내 말을 끊고 따지듯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내가 보내준 돈으로 먹이라는 사료 사 먹인 거 맞아? 싸구려 먹인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얘가 이렇게 돼? 어떻게 이렇게 족보도 없는 돼지 고양이가 된 거냐고?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이었다. 일단 네가 매달 보내주는 돈에는 내가 철수를 보살피는 데 드는 노동과 수고에 대한 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다행히 철수는 아무거나 잘 먹었다. 딱히 취향이라거나 입맛 같은 게 없는 고양이었다. 그래서 마트에 갈 때마다 나는 조금 더 저렴한 사료를 고르는 대신 내 몫으로 라면도 사고 커피도 사고 드물게는 휴지나 샴푸 같은 것들도 샀다.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숨만 쉬었을 뿐이지 드디어 제대로 된 핑계를 잡았다는 확신 같은 걸 감추느라고 안간힘을 쓰는 게 다 보였다.
    어쨌든 원래대로 돌려 놔. 그럼 데려갈 테니까. 이건 누가 봐도 너무한 거야. 진짜 너무 황당한 일이라고.
    한참 만에 너는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 목에 친친 두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후에는 뒤도 안 돌아보고 카페를 나가버렸다.
    커피가 반이나 남았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네 커피를 내 커피 잔 속에 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매번 굼뜨게 있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선수를 치는 너에게 늘 이런 식으로 당하고 마는가를. 나는 기다란 종이컵의 옆면을 찢어내어 납작하게 만든 다음 물을 담아 케이스 안으로 넣어 주었다. 잠깐 철수와 눈이 마주쳤는데 뭐랄까, 몹시 나른한 표정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는 얼굴. 너로 하여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카페를 나오며 나는 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석 달이라고 말했고 처음부터 비만에 관한 주의사항 같은 건 없지 않았느냐. 네가 전화를 받으면 그 말부터 할 생각이었다. 도로엔 차는 없고 사람들만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차량통행을 막아 놓은 탓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시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어서 집까지 갈 작정이었다. 물론 그전에 널 만나서 오늘은 기필코 철수를 넘기겠다고 마음먹은 후였다.
    도로변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다가가 보니 쌀이었다. 성난 사람들이 포대째로 쌀을 부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쌀을 한 움큼 주워 케이스 안으로 조금씩 던져 주었다. 여러 번 반복해도 철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나는 쌀알을 만지작거리면서 걸었다. 사람은 점점 늘었다. 걷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좁은 인도 끝으로 밀려났고 결국 도로로 내려섰다. 거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번 방향을 잡으면 다른 쪽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앞을 잘 보고 걸어야 했고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다. 게다가 플라스틱 케이스는 멍청할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쉬는 꼴을 못 봐요. 쉬는 꼴을. 안 그러냐?
    환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방패를 든 경찰들이 대오를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사열 종대로. 순식간에 나는 틈이 벌어진 이열과 이열 사이에 끼어버렸다. 경찰 하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화가 난다는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빼고 한 번 더 말했다.
    쉬는 꼴을 못 본다고, 쉬는 꼴을.
    원망과 비난의 의도가 선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말투였다. 문득 멈춰 섰는데 뒤쪽에서 곧장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 좀 빨리 가요! 가자고요!
    나 같은 사람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걷다 보니 경찰들과 나란히 걷는 꼴이었다. 번쩍거리는 경찰 조끼 탓에 눈이 부셨다. 걷고 또 걸어도 경찰들이 계속 나왔고 나중엔 내가 앞으로 걷는 게 아니라 저절로 끝도 없이 뒤로 밀려나는 착각이 들었다. 숭례문이 보이는가 싶었는데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멀리 환한 시청 건물이 사람들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착각이 들었다.
    사거리에 이르러서야 겨우 담벼락 쪽으로 붙어 설 수 있었다. 주홍빛 조명을 매단 포장마차와 푸드 트럭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대한문 바로 앞이었다. 멀리 도로 한가운데 연단이 내다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크기와 높이가 다른 연단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여러 개의 연설소리와 한꺼번에 뒤섞인 음악소리와 우비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함성 때문에 도저히 너에게 전화를 걸 엄두가 안 났다.
    나는 가까운 포장마차 천막 아래로 들어갔다. 다리 사이에 케이스를 내려놓고 뜨거운 어묵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곳에서 문자를 보낼 생각이었다. 멈춰 서서 문자를 보낼 만한 데는 거기뿐이었다. 더운 어묵을 크게 베어 물 때마다 한 움큼씩 담배 연기를 들이마셔야 했다. 어디나 담배 피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면서 맥주도 마시고 소주도 마셨다. 담배꽁초와 같이 길 위로 내던져진 것 중에는 막걸리 통도 있었다. 질서도 규칙도 없는 그 거리에서 사람들은 모두 공평하고 평등해 보였다. 사이좋게 똑같은 모자를 쓰고 똑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은 느긋한 얼굴로 술을 먹고 담배를 피다가 느닷없이 구호를 외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럴 땐 집회에 온 사람들이 아니라 축제에 온 것처럼 들떠 보였다. 대체로 노래는 집회와 별로 연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표정에 어떤 의지를 어른거리게 했고 그들을 다시금 연단 쪽으로 불러들여 하나로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었다.
    어묵을 하나 더 먹을 때까지도 너에게 답이 없어서 나는 다시 걷기로 했다. 손잡이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으므로 거의 케이스를 끌어안다시피 해야 했다. 우산을 들고 우비를 뒤집어쓴 사람들로 인도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골목길과 샛길은 경찰 버스가 모두 막아 놓은 상태였다. 어쨌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 사이는 더 촘촘해졌다. 가깝게 붙어선 사람들 틈으로 더운 기운이 살아났고 어쩐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됐다. 띄엄띄엄 틈이 벌어진 뒤쪽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모두가 아주 작은 불씨라도 닿으면 금방 타오를 것처럼 바짝 긴장해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걸었다. 다들 좀처럼 길을 내어주지 않았고 떠밀듯 진입하면 불쾌한 얼굴을 했다. 케이스를 내려다보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길이 젖어 있는 데다 발밑을 살필 수 없어서 여러 번 더러운 웅덩이를 밟고 말았다. 이내 신발이 젖었고 바지 밑단이 축축해졌다.
    비가 왔었나.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정말 비가 왔다. 비가 아니라 멀리 서치라이트가 켜진 높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이었다.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머리칼이 젖었고 이내 한기가 일었다. 눈이 따끔거렸고 콧속이 아릿해졌다. 매캐한 탄내가 거리에 자욱했다. 나는 한 팔로 입을 가리며 걸었다. 왜 다들 마스크를 쓰고 점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케이스에 귀를 대보니 자지러지듯 우는 소리가 났다. 나는 케이스 밖으로 삐져나온 철수의 발을 억지로 밀어 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졌고 어떻게든 여길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 모든 소란과 무관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을 따라가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겠지 싶어서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쪽으로 다가갔더니 대뜸 홍보 전단지를 내밀었다. 도로를 거의 뒤덮다시피 한 바로 그 전단지였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커플을 따라갔는데 한참 만에 개 옷에 붙여 놓은 시위용 포스터를 보곤 돌아섰다. 이후에도 나는 몇 번이고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겠지 하고 다가가면 다들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모두 그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내 나는 프레스센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청계천 입구까지 간 다음 뒤쪽에 샛길이 열려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청계천 거대 다슬기 탑 앞에서 그 사람을 봤다.
    비눗방울 부는 사람.
    그 사람은 체구가 아주 작았다. 그것 말고는 나이도 성별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요란하고 기이한 화장 탓이었다. 그건 거의 분장 수준이었는데 멀리서 보면 피에로 같고 가까이서 보면 어린애가 엄마 화장품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정신 나간 사람인가?
    언젠가 아주 맑은 날 함께 걸을 때 네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시청 앞 농성장 쪽을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이후 몇 번이고 더 마주쳤는데 늘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 보기로 했다. 그건 다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노인 서너 명이 여러 전단지를 올려 둔 테이블 뒤쪽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짜고짜 서명을 하라고 했다.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냥 돌아서려고 하자 노인 하나가 플래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그럼 자네들은 반대한다는 거야? 반대야?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나는 한참 만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고 더듬거렸다. 그러니까 반대라거나 찬성이라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노인은 다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런 다음 너를 향해 날을 세웠다.
    그럼 자네가 반대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비눗방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사람을 보러 온 건데 애먼 노인들에게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이내 뭔가 장황하게 설명할 채비를 했다. 야무지게 입가를 닦은 뒤 소책자와 전단지를 몇 개 집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기다란 테이블 너머로 나올 기세였다. 그래서 그냥 서명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만든 피켓과 현수막과 전단지를 훑어보자니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그게 또 딱히 반대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그때 동그란 비눗방울들이 나타났다.
    하나 둘 나타나는가 싶더니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저쪽에 서 있던 비눗방울 사람이 부는 거였다. 조그마한 대롱에서 투명한 방울들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그 사람 목에 앙증맞은 비눗방울 통이 걸려 있었다. 라면을 먹던 노인들이 방울들을 터트리며 저쪽으로 가라고 그 사람을 내몰았다. 그 사람은 멍한 얼굴로 멀리 떠가는 비눗방울들만 봤다. 어떤 표정이라 할 만한 게 읽힐 것 같았는데 다시 보면 요란스런 분장 아래로 죄다 가라앉고 없었다.
    뭘까?
    돌아서서 걸을 때 내가 중얼거렸고 네가 대답했다.
    아나키.
    내가 실소를 터트리자 다시금 네가 덧붙였다. 어쨌든 저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아나키 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저 사람을 자극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한마디로 정신이 나갔다는 이야기였다.
    멋있네. 훌륭해. 아줌마. 아저씬가? 뭐 아무튼 그렇다고.
    그러면서도 내게는 빈말이라도 그런 듣기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네 생각대로 따라 주기만 원했다. 돌이켜보니 그 노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너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이미 몇 분 전에 수신된 것이었다. 긴 문자였지만 어쨌든 경복궁역 근처에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신문사 건물 뒤편으로 걸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진입했다.
    골목 끝에서 내가 마주한 건 끝도 없이 늘어선 경찰 버스였다. 버스에 가려 광화문 광장도 맞은편 교보빌딩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크고 두꺼운 벽돌로 길게 벽을 세워 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불 꺼진 우체국 앞에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서너 명씩 모여 서서 버스와 버스 사이의 애매한 틈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달라붙다시피 주차된 다른 곳과는 달리 거긴 어떤 틈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다.
    길이 없다니까. 나가야 하는데. 다들 어디 있어? 어디냐고?
    목소리를 키우며 통화를 하던 청년 하나가 깃대를 옆 사람에게 건네고 차와 차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렵겠다 싶었는데 결국 몸이 끼어버렸다. 이쪽에 선 서너 사람이 손을 뻗어 끌어당기고 나서야 청년이 튕겨지듯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청년은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급기야 엎드린 채 몸을 차 밑으로 밀어 넣더니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신호처럼 청년의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렸다.
    야! 빨리 가야 돼. 빨리 나와, 나오라고!
    한 사람이 차 밑으로 들어가고 또 한 사람이 들어갔다. 차가 갑자기 출발할지도 모르고 저 너머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 철수 때문이었다. 아니, 철수를 담은 케이스 탓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묘하게 나를 경계했다. 일행이 있다거나 합류해야 한다거나 어떻게든 자기가 먼저 가야 한다는 식의 핑계를 대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케이스를 버린다면.
    철수를 보내고 바로 뒤따라가거나. 목에 끈을 묶어 같이 기어 나가거나. 가방에 넣어 끌고 가거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경찰이 왔다. 하나가 오고 둘이 오고 서너 명이 더 오더니 아예 그 틈을 가로막고 섰다.
    길이 다 막혀 있잖아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죠.
    경찰들은 나와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대답도 안 했다. 모여선 사람들이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왜 통행을 가로막느냐, 이렇게 길 막는 거 불법이다, 목소리를 키워 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서로를 부르며, 방향을 정하고 멀어지는 동안 나는 멍하니 주변만 둘러봤다.
    근데 그거 고양이에요? 엄청 크네.
    누가 말한 것 같았는데 다시 보니 경찰들은 또 멍하니 멀리를 내다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광화문 사거리 쪽으로는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크고 환한 불빛이 번쩍거렸고 세차고 맑은 물줄기가 뻗어 나가는 게 보였다. 사람들의 함성과 경고 방송이 힘겨루기 하듯 어둔 공중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나는 종각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종로3가까지 가서 그곳에서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까지 갈 생각이었다. 같은 라인인 데다 두 정거장이니까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였다. 보신각이 내다보이는 곳에서 나는 너에게 한 번 더 문자를 보냈다. 집회 때문에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걸을수록 사람이 줄긴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길을 막은 경찰도, 경찰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큰 무리에서 빠져나와 작은 무리를 만들며 이리저리 흩어지는 중이었다. 거의 해산 분위기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또 달라졌다. 종로2가 사거리를 앞두고서였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응급차 한 대를 에워싸고 있는 게 보였다. 다급한 사이렌 소리와는 달리 응급차는 그 사람들을 밀어내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찰 오토바이 한 대가 박살이 난 채 쓰러져 있는 건 나중에 봤다.
    넘어진다, 넘어진다, 넘어진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었다면 발에 걸려 넘어졌을 게 분명했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비눗방울 사람이었다. 꽤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한두 걸음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케이스를 내려다보며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화답하듯 철수가 야옹거렸으므로 나는 얼른 돌아섰다. 그런 다음 걸음을 빨리했다. 뒤쪽에서 사람들의 고성이 따라붙었다. 화가 난 목소리와 놀란 목소리와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들이 계속 일렁거렸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뒤돌아봤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더 빨리 걸었다.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철수를 넘기고 신속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평소에는 마을버스를 타고 오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이렇게 멀리 에둘러 가야 하는 이런 상황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걸어서는 갈 수조차 없고 멀리 떨어진 지하철역까지 가서 지하철을 타야 하다니. 젖은 발끝이 시렸다. 목구멍이 간질거렸고 기침이 나오려고 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 내려가며 나는 네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어디냐는 짧은 내용이었는데 어딘가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는 이제 지하철역에 도착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어쨌든 십 분 안에는 도착하겠다는 말이었다.
    십 분은 금방 지났다. 일단 개찰구까지 가는 데만도 십 분이 넘게 걸렸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개찰구까지 이어진 사람들 때문에 나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한꺼번에 움직이는 사람들에 휩쓸렸다.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달아올랐고 콧물이 흘렀다. 나는 멍청하게 코만 훌쩍거렸다. 앞뒤로 빽빽하게 서 있는 사람들 탓에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다가 개찰구 앞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고 철수의 울음이 또렷하게 솟구쳤다.
    손잡이가 떨어지며 플라스틱 케이스가 반으로 갈라진 거였다.
    질서도 순서도 없었다. 배려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객차가 들어오고 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일행의 손과 가방, 몸을 안고 한 덩어리로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덩어리를 점점 크게 키우고 막무가내로 돌진해 왔다.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하면 어디선가 손이 나타나 다른 사람을 끌어당겼다. 나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거의 위협적으로 동료나 친구나 가족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런 식으로 지하철을 네 대나 보냈다. 다섯 대째 열차가 들어온다는 방송이 나오고 둘러봤더니 나와 내 점퍼 속에서 얼굴을 내민 철수, 목탁을 든 스님과 비눗방울이 있었다. 혼자인 사람은 나를 포함한 그 세 명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다 빠진 게 아니어서 나는 객차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다. 타고 보니 스님과 비눗방울이 앞뒤로 있었다. 몸이 거의 딱 붙다시피 했다. 어떻게든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나는 출입문에 이마를 박고 눈을 감아버렸다. 철수의 손톱이 셔츠를 파고들어 목덜미를 할퀴는 게 느껴졌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팔과 어깨가 끊어지듯 아팠다.
    경복궁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서였다. 나는 늘 나가던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서 있었고 벽에 기댄 채 주저앉은 사람들이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행을 기다리는 거라고 짐작했고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나 용무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출구가 막혀 있다는 건 작동이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다 오르고 나서야 알았다.
    거기 방패를 든 경찰들이 벽을 만들고 서 있었다.
    한 계단 아래서 경찰들에게 항의를 하던 몇 사람이 내려갔다. 다음 계단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비슷한 항의를 했고 그 다음 계단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식으로 나도 경찰들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런 다음 거의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저는 집에 가는 길이거든요.
    점퍼 속에서 철수가 자꾸 꿈틀거리며 나오려고 했다. 경찰들은 재미있다는 듯 내 점퍼를 내려다보면서도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 대답도 안 했다.
    그냥 집에 가는 길이라고요.
    내 목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점퍼를 빠져나온 부드럽고 가는 털들이 입술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난간에서 무전기를 들고 이쪽을 내려다보던 남자 하나가 지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만 내려가요. 여기 열한 시까지 통젭니다.
    여기서 두 시간을 더 있으라는 말이었다.
    왜요?
    저희도 정보가 다 있어요. 이 지역은 집회 신고가 안 되어 있잖아요. 엄연히 불법이라고요, 불법.
    나는 불법이든 합법이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아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개를 쳐들고 내내 그 사람을 올려다봐야 했는데 문득 그런 상황이 몹시 짜증스러웠다. 무엇보다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나를 다른 사람들과 싸잡아본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내 분노와 적의 같은 단단하고 뜨거운 감정으로 바뀌었다.
    저는 뭘 하려고 온 게 아니고요. 집이 이 동네라고요!
    그만 내려가세요. 위험합니다.
    경찰들이 위협하듯 방패로 사람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내 뒤쪽에서 건장한 청년 몇 사람이 올라왔고 방패를 온몸으로 떠밀기 시작했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험한 말들이 커다란 방패를 때리고 튕겨져 나왔다. 나는 몇 계단 아래로 물러서서 청년들의 모자와 티셔츠, 가방 사이에 끼워 놓은 우비와 플래카드 같은 걸 올려다보다가 그만 내려왔다.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주변을 에워싸고 둥글게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나는 다른 출구 쪽으로 걸어가며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길게 이어졌고 마침내 전화를 받은 너는 다짜고짜 화를 냈다.
    밤새도록 기다리게 할 거니?
    내 기분도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나는 지하철역 출구가 막혀 있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경찰들이 막고 있어서 나갈 수가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경찰이 널 왜 막는데? 왜 널 막느냐고?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그냥 해. 할 말 있다며. 전화로 하라고.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용히 통화를 할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려는 거였다. 역사 내 문 닫은 작은 카페 앞은 모여 앉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화장실 안도 마찬가지였다. 에스컬레이터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벤치 근처엔 자리가 나면 앉으려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몰려드는 중이었다.
    철수 말이야. 이제 데리고 가.
    나는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채우며 소곤거렸다. 점퍼 속에서 뜨겁고 묵직한 게 꿈틀거렸다. 가슴팍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처음에 석 달이라고 했고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런 다음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통에 나중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너 진짜 이러기야? 꼭 이런 식이어야 하느냐고.
    너는 그렇게 쏘아붙였다가 이내 달래는 투로 제안했다.
    그럼 두 달만 더 봐줘. 아니, 한 달만. 내가 돈을 조금 더 보낼게.
    내 말을 안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고 너 역시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참 만에 나는 데려가지 않으면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했다. 하고 보니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라니? 알아서라니. 그렇게 협박을 해야 속이 시원해? 그럼 금액을 말해. 얼마든 보낼게. 다짜고짜 이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나한테도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냐.
    울먹이는 것 같은 너의 다음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넌 항상 그런 식이고, 매번 네 입장만 내세우고 불리해지면 눈물이나 찔끔거리고 도무지 책임이나 의무라거나 양심이라거나 그런 건 손톱만큼도 없고 늘 비겁하게 굴고 있다고 소리쳤다. 나중엔 너무 흥분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너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 그건 맞아. 정말 네 말이 다 맞아. 돈은 지금 당장 보낼게.
    무전기 남자의 말대로 출구는 모두 막혀 있었다. 주민증까지 내보이며 집이 바로 여기 앞이라고 애원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이 계단 저 계단을 오르내리며 경찰이 정한 두 시간을 천천히 허비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고 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종합 상가와 연결된 출구 쪽이었다.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출구를 빠져나간 뒤였고 뒤따라가려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 수십 명이 몰려와 있었다. 사람들은 방패를 잡고 흔들며 본격적으로 몸싸움을 벌였다. 어쩌다 보니 나도 사람들 틈에 끼어 힘을 보태게 됐다. 다른 사람들처럼 언성을 높이고 체중을 실은 다음 앞사람을 밀었다. 어떻게든 나가고 싶었다. 몹시 지친 데다 목이 말랐다. 속이 미식거리고 열도 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녹초가 되었을 게 분명한 철수의 발버둥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지금부터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연행합니다.
    도미노처럼 사람들이 와르르 넘어지고 나서야 상황은 진정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사람의 엉덩이가 내 발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뒷사람의 허벅지를 깔고 앉은 채였다. 갑자기 점퍼 안이 허전해지는가 싶더니 하얗게 살찐 엉덩이가 날렵하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철수였다. 다시 보니 투명하고 둥근 보호막에 둘러싸여 멀리멀리 떠가는 것처럼 보였다. 서둘러 몸을 일으켰는데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올록볼록해지고 희미하게 겹쳐지다가 느닷없이 선명해졌다.
    비눗방울이었다.
    저쪽에서 그 사람이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다. 역사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두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하루 종일 갇혀 있어야 한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다가갔더니 아예 내 얼굴 쪽으로 비눗방울을 불었다. 동그란 방울들이 내 얼굴을 때리고 펑펑 터졌다.
    저기요. 그거 불지 마요. 불지 말라니까요. 근데 고양이 봤죠? 고양이요. 여기로 지나갔잖아요. 이쪽으로요.
    나는 그 사람을 다그쳤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 사람은 대롱을 잘근잘근 씹으며 내내 바닥만 내려다봤다. 어쩐지 또 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뭐랄까.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뭐든.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마주하는 게 짜증스럽고 화가 났다. 그 사람은 내가 돌아서자 또다시 비눗방울을 불었다. 방울들이 나를 따라오다가 종아리 아래로 가라앉는 게 보였다.
    나는 역사 내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철수가 갈 만한 곳을 찾아보는 거였다. 철수의 이름을 부르고 목소리를 키우면서 비슷한 곳을 맴도는데도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대답하기도 웃기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고양이를 찾고 있다니. 그래서 처음부터 도움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경찰은 경찰대로 경찰이 아닌 사람들은 또 아닌 사람들대로 별로 기대할 만한 게 없었다.
    한참 만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역사가 한산해지는 동안에도 나는 내내 역사 안에 머물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철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어둡고 차가운 이 역사 내 어딘가에서 겁을 집어 먹고 몸을 떨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차츰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 철수를 데리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몸을 일으켰을 땐 막차가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네가 보내겠다던 돈은 정말 입금되어 있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나는 내내 그 숫자를 노려봤지만 결국 아무런 답장도 하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후에 보니 슬그머니 화해를 청하는 듯한 문자가 와 있었다.
    잘 지내고 있어. 철수도 너도.
    나는 길 위에 있었다. 사람들로 어디나 꽉 막힌 어젯밤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거리는 한산하고 고요했다. 나는 한쪽 겨드랑이 사이로 전단지 뭉치를 밀어 넣고 내내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전단지 뭉치가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머릿속에선 아나키 철수와 비눗방울 철수 같은 섞일 수 없는 단어들만 둥둥 떠다녔다. 결국 형식적으로 짤막한 대답만 하고 말았다.
    시청 뒤편에 작은 국수가게와 게시판이 있는 커다란 카페 두 곳을 제외하곤 모두 전단지를 붙여 줄 수 없다고 했으므로 나는 전봇대와 담벼락, 버스정류장과 자판기 같은 곳을 기웃거렸다. 테이프를 알맞게 뜯어내어 전단지를 붙이고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십자가 모양으로 널찍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 그 사람을 봤다.
    길쭉한 전봇대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었는데 내가 붙여 둔 전단지를 읽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거기에는 네가 기억하는 아주 작고 연약한 철수의 모습과 아주 기본적인 정보가 있고 네 전화번호가 있었다. 누구라도 날씬해진 철수를 발견하면 너에게 연락할 수 있고 비로소 철수가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작성한 거였다. 그럼에도 신호가 바뀌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문득 돌아봤는데 그 사람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 사람이 부는 동그란 비눗방울들이 너울거리며 나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작가소개 / 김혜진(소설가)

– 1983년 대구 출생.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치킨런」으로 등단. 장편소설 『중앙역』이 있다.

 

   《문장웹진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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