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연재] 탑의 시간②

 

[중편연재]

 

 

탑의 시간 (제2회)

 

 

 

해이수

 

 

 

    네 사람은 게스트 하우스 앞에 대기한 4인용 마차에 올랐다. 차양을 두른 마차는 외관이 빅토리아풍이었다. 마부는 챙이 좁은 모자를 쓰고 와이셔츠에 푸른 체크무늬 론지를 입고 있었다. 여성 둘은 정방향에 앉고 남성 둘은 역방향으로 앉았다. 마부가 휘파람을 불며 말고삐를 흔들자 타이어를 덧댄 네 개의 크고 둥근 나무 바퀴가 서서히 움직였다.
    “하이, 호스 드라이버? 에야와디 리버, 오라이!”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C가 익살스럽게 소리쳤다. M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L은 살짝 치아를 보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늘에 커다란 뭉게구름이 꽉 들어찬 날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시원했다.
    C와 마주 앉은 Y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렸다. 오후 3시의 햇빛에 마차 바퀴살의 그림자가 바닥에 부채꼴을 그리며 굴러갔다. Y는 C와 단둘이 보트를 타고 싶었다. 에야와디 강을 타고 흘러가다가 물살의 한 가운데서 해넘이를 보는 일은 그녀가 이번 여행에서 손꼽은 하이라이트였다. 세상이 온통 붉고 보트가 잔잔하게 흔들리는 순간이 오면 C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난 밤 C는 옥상 레스토랑에서 함께 보트를 타러가자고 제안했다. 맥주 몇 병을 비우는 동안 C는 Y의 얘기에 집중하기보다 옆 테이블에 말을 거는 횟수가 늘어났다. 휴가지에 모인 여행자들의 여유와 호의 때문인지 그들도 C의 접근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C는 술에 취했는지 아니면 흥에 겨웠는지 갑자기 명함을 꺼내 돌리고는 호기롭게 외쳤다.
    “내일 에야와디 강에 보트 타러 가시지요. 제가 쏘겠습니다.”
    C의 돌발적인 제안에 두 사람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자기도 참, 두 분 일정이나 계획도 모르고 막 그러면 어떡해요?”
    Y가 조심스레 만류했으나, C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유들유들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배 한 척 띄우겠습니다. 재벌은 아니지만 뭐 그 정도는 됩니다.”
    C가 취해갈 무렵 Y는 옥상에서 그를 거의 끄집어내듯 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약간 나무라듯 말했다.
    “아니, 처음 본 사람들한테 그렇게 막 함께 가자고 하면 어떡해요?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우리 둘이 온 여행인데.”
    “괜찮아. 어차피 보트 값은 똑같아. 두 사람이나 네 사람이나 만 오천 짯이라고. 한국에서 어디 만 오천 원 내고 배 한척 띄울 수나 있나?”
    Y는 답답하다는 듯 C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 돈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 그래? 같은 한국 사람끼리. 이런 비수기에 한 호텔에서 묵는 게 보통 인연인가! 현지 반응 조사가 필요한 거라고.”
    C는 여행사 개발 팀장으로 바간을 방문한 한국인들의 인상과 반응, 선호 코스를 조사하는 것도 출장업무의 일환이라고 했다.
    “우리 둘만의 시간을 뺐기는 건 왜 생각 안 해요?”
    도무지 양보도 모르고 타협도 없는 Y의 태도에 C는 난감했다.
    “누가 감히 우리의 시간을 빼앗나? 지금부터 우리 둘만의 밤인데. 삐친 게 더 예쁜, 요, 요, 예쁜이!”
    C는 Y를 와락 끌어안고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Y가 자신의 행동을 움켜쥐려할 때마다 신경이 거슬렸지만 사랑해서 그러는 거겠지, 하며 요령껏 넘겨버렸다. Y는 꺅, 소리를 지르며 그의 힘에 못이기는 척 넘어갔다. Y는 C의 넓은 가슴에 안기면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마차는 올드 바간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방울을 울리며 달려갔다. 군데군데 푸른 숲이 울창했다. 아카시아, 님 트리, 코코넛 나무, 보리수 등의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크고 작은 석탑들이 보였다. C는 갑자기 마차의 속력을 줄여달라고 외쳤다. 그러고는 몸을 던지듯 뛰어내려 길가의 나무에서 꽃을 따서는 다시 올라탔다.
    “귀에 꽂아봐.”
    C는 숨을 몰아쉬며 Y에게 흰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꽃은 별처럼 예쁘고 향기로웠다. 엄지와 검지로 꽃대를 잡고 팽그르르 돌리는 Y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잡혔다.
    “이거 이름이 뭐예요?”
    C는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짧게 대답했다.
    “거 참, 꽃이면 됐지. 이름이 뭐가 중요해?”
    M이 Y를 보며 설명했다.
    “프랜지파니예요. 하와이 원주민들이 귀에 꽂는 꽃.”
    마부가 웃는 얼굴로 돌아보며 “사까와”라고 말했다. 그가 채찍 끝으로 가리킨 곳에 꽃이 활짝 핀 프랜지파니 나무 몇 그루가 보였다. Y는 손을 들어 오른쪽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귀 뒤로 빗어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 꽃을 꽂았다. C가 엄지를 척 세워 올렸다.
    “좋아, 아주 좋아!”
    스물아홉 살 여인의 연분홍빛 귀가 드러나자 M은 잠깐 어지러웠다. Y의 가슴골에서 흔들리는 홍옥의 목걸이와 귀에 꽂은 흰 꽃은 잘 어울렸다. Y가 M에게 다시 물었다.
    “향이 굉장히 좋네요.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죠?”
    “‘프렌치파이’라고 기억하세요. 아무리 향이 좋아도 막 뜯어먹진 마시고.”
    Y가 쑥스럽게 웃자 L도 따라 웃었다. C가 소리 내어 말했다. 마치 중고생들이 시험 전 암기과목을 외우는 방식이었다.
    “프랜지파니, 사까와. 프렌치파이 사서 까와.”

 

*

 

    마부는 간혹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 세월 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얼굴은 인상이 선했다. 손님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20년 말을 몰았다고 하니 서른 중후반으로 짐작됐지만 콧수염을 기르고 잔주름이 깊어서 외모로는 나이를 가늠키 어려웠다. 쉬운 단어만으로도 영어를 능숙하게 잘 했다.
    C가 말의 이름을 묻자 마부가 대답했다.
    “마돈나.”
    잠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C가 다시 물었다.
    “마돈나? 아메리칸 싱어?”
    “그래, 섹시 가수. 라이크 어 버진.”
    곧 네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의 시선은 일정한 리듬에 맞춰 좌우로 흔드는 마돈나의 엉덩이로 향했다. Y가 물었다.
    “마돈나는 점심에 뭘 먹고 나왔어요?”
    “건초와 콩을 먹고 나왔지요.”
    마부가 대답하자 C가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굉장하네요! 마돈나의 엉덩이에 밤낮 채찍질을 하는 남자는 당신뿐일 거예요.”
    M은 매일 불경을 들으며 탑을 도는 마돈나를 생각했다. 말이라고 해도 보통 말이 아니었다. 마부는 말몰이에 독특한 소리를 냈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다루듯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경쾌하게 휘파람을 불거나, 입술을 여닫거나, 혀를 굴리고 튀기면서 속도를 조절했다.
    마부는 한 사원을 가리키며 저곳을 가봤느냐고 물었다. 네 사람이 고개를 젓자 그는 말을 그쪽으로 몰았다. 그리고 뽀뽀를 하듯 입술을 여러 번 여닫는 신호를 보내자 말은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해가 지기엔 이른 시간이니 둘러보라고 하고는 이곳은 벽화가 유명하다고 덧붙였다.
    구바욱지 파고다 안으로 네 사람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밝은 곳에 있다가 들어서니 눈앞이 캄캄했다. 고개를 들자 입구의 천정에 커다란 부처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L이 먼저 본존불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엎드렸다. M도 옆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삼배를 올렸다.
    천 년 전에 지어진 탑 안은 침침하고 퀴퀴했다. 벽에 뚫린 구멍으로 바깥의 바람과 빛이 들어왔다. 네 사람은 앞서거나 뒤서며 사원의 벽화들을 감상했다. 검은색과 흰색, 노란색의 삼색을 주로 사용했는데, 자연광이 닿는 부분에만 그 형체가 겨우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벽화는 빛이 전혀 미치지 않는 바닥과 천장 부근까지 빼곡했다.
    M은 천 년 전 어둠 속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붓을 든 화공을 떠올렸다. 벽화는 방문객이 찾지 않는 이상 어둠 속에 있을 게 뻔했다. 방문객이 찾아와도 빛이 닿는 부분만 보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을 구석까지 세밀화를 그려 넣은 화공의 정성과 수고에 생각이 미치자 M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숨겨진 그곳이 M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보이는 곳은 오히려 숨겨진 곳의 일부분이었다. 그 숨겨진 곳으로 인해 화공은 시력을 잃었을 것이다.
    Y는 사원의 복도에서 절을 하는 M을 보았다. 불상도 없는 그곳에서 M은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먼지 낀 바닥에 이마를 댔다. 불교 설화를 옮긴 듯한 벽화는 Y에게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곳에서 한 번도 절을 하지 않은 자신에 비해 마치 죄인처럼 땀을 흘리며 절을 하는 M이 궁금했다.
    M이 사원을 나서자 Y는 그 뒤를 따라 나갔다. M과 Y 앞에 현지인 10대 소년이 다가왔다. C와 L은 저만큼 얘기를 하며 앞서 걸어갔다. 마르고 키가 큰 소년은 책 한 권을 들고서 웃으며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한국어로 인사를 받자 소년은 영어로 말했다.
    “이거 특별 가격으로 드릴게요. 당신은 나의 친구니까요. 이 책을 사면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조지 오웰이 쓴 『버마의 날들』이었다. M이 물었다.
    “가격이 얼마지?”
    “7천 짯!”
    M은 책이 어떤 내용인지, 재미있는지를 물었다. 소년은 쑥스럽게 웃고는 아직 못 읽어봤다며 대답을 흐렸다. M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년은 가격을 5천 짯으로 금방 내렸다. M은 지갑에서 5천 짯 지폐를 꺼냈다.
    “나를 영원히 기억할 필요는 없어. 대신 이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 이건 읽어보라고 주는 돈이야. 내 말을 기억해 줘.”
    M은 2천 5백 짯을 더해서 주며 차분히 소년의 눈동자에 시력을 모았다. 마침 날개가 크고 색이 화려한 나비 한 마리가 M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나비는 너울너울 거리며 M과 소년과 Y 사이를 날아다녔다.
    Y는 M이 영어로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리 대단치 않은 행동에서 시작되는 야릇한 감정이었다. M의 사소한 몸짓이나 말투, 표정이 그의 전 생애와 사람됨을 다 설명할 만큼 아주 크게 눈앞에 다가왔다. 책의 페이지를 주르륵 넘기며 걷는 M에게 Y는 말을 걸었다.
    “책을 읽으라고 2천 5백 짯을 더 주는 건 좀…….”
    “미얀마가 영국 식민 지배를 받은 기간이 62년이에요. 독립한지 65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식민지 시절 외국 작가들이 쓴 책을 팔고 있어요. 이거 이상하지 않아요?”
    M은 물음표로 말을 마치고는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네 사람이 앉자 마부는 원숭이가 그려진 벽화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아예 마부석에서 돌아앉아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독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걸로 봐서 단골 스토리인 듯 보였다.

 

    강가에 열매가 많이 열리는 잠보나무가 있었고, 여기에 원숭이 한 마리가 살았다. 원숭이는 자주 찾아오는 악어에게 열매를 던져 주었고 둘은 곧 친구가 되었다. 악어는 남은 열매를 돌아가서 여자 악어에게 주었다.
    어느 날 여자는 그렇게 맛있는 열매를 먹는 원숭이의 심장을 먹으면 오래 살 거라며 그의 심장을 빼내오라고 했다. 악어가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여자는 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고 질투했다. 애인이 아니라면, 당장 심장을 가져와서 그 사실을 증명하라고 재촉했다.
    악어는 어쩔 수 없이 원숭이에게 가서 거짓말을 했다. 망고가 많은 섬을 알고 있다고 원숭이를 꾀어내 등에 태우고 강으로 나아갔다. 강 한 복판에 이르자 악어는 사실을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자 친구가 심장을 먹고 싶어 해서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그러자 원숭이는 그런 사연이라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악어를 탓했다.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느라 심장이 깨져서 잠보나무의 구멍에 숨기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뭍으로 가서 그 심장을 찾아오자고.
    악어는 다시 강변으로 돌아갔다. 강변에 닿자 원숭이는 나무로 뛰어오르며 말했다. “믿지 못할 상대는 아예 믿지 말라. 설령 믿을 만한 상대여도 어느 이상은 믿지 말라. 이 경고를 무시하면, 반드시 낭패를 당할지니.” 조롱을 받은 악어는 슬퍼하며 우정을 회복하려고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원숭이로부터 매몰차게 외면을 당했다.

 

    마부는 때로 원숭이로, 남자 악어로, 여자 악어로 목소리를 바꾸며 열심히 연기를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네 사람은 박수를 쳤다. C가 머리를 긁으며, ‘이건 뭐 재밌는 얘기가 아니라 거의 설법 수준’이라고 중얼거렸다. M은 우리 구토설화龜兎說話의 원형인 인도의 용원설화龍猿說話라고 짐작했다.
    마차가 타라바 게이트 앞의 갈림길에 이르자 C가 오른쪽으로 난 큰 길을 가리키며 마부에게 물었다.
    “이 쪽이 아나라따 로드지요? 아직 시간도 있는데, 우리 이 길 조금만 달립시다. 팁 드릴게요.”
    마부는 고삐를 튀기며 경쾌한 고음으로 마돈나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님 트리 그늘 아래 시원하게 펼쳐진 대로를 향해 마차가 반 바퀴 크게 회전했다. 쭉 뻗은 말의 목 위로 날선 갈퀴가 보이고 쫑긋 선 두 귀 사이의 소실점을 향해 마차는 미끄러지듯 달렸다.
    M은 사실 오늘 혼자 뽀빠산에 갈 계획이었다. 자전거로 달려서 그곳의 칠백칠십칠 계단을 오르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낯모르는 투숙객들과 섞여 마차를 타고 강으로 가고 있었다. 이번 여정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리드미컬한 말발굽 소리와 속력에 감탄하며 M이 말했다.
    “아, 오늘 일정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의 연속이네요!”
    Y가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인데, 멋있어요!”

 

*

 

    선착장은 부파야 사원 옆이었다. 강가에 내려서자 M은 밧줄에 묶인 채 몸부림치며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못하는 여러 척의 배들을 보았다. 그 광경 앞에서 M은 고개를 저었다. M은 당장 뛰어다니며 그 배에 묶인 밧줄들을 전부 도끼로 끊어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강물은 진흙이 섞인 갈색이었고 유속이 상당했다.
    네 사람이 보트에 올라서 구명조끼를 걸치자 스크루가 돌아가는 굉음이 울렸다. C와 Y는 카메라 앞에서 온갖 포즈를 다 취했다. 두 사람은 뺨을 맞대고 찍고, 어깨를 포개고 찍고, 마주 보며 찍고, 먼 곳을 보며 찍었다. 가까운 강과 먼 산을 밀고 당기며 찍었다. 이 순간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듯했다.
    L은 아까부터 Y의 가슴골에서 흔들리는 목걸이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단지 붉다고 할 수도 없고 자줏빛이라 할 수도 없는 핏빛의 보석이었다. L은 자신도 모르게 그가 숨겼으나 사라진 목걸이를 떠올렸고 그러자 그에 관한 생각을 피할 수가 없었다.
    L은 문득 그가 자신의 인생에 매우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도를 하거나 살인을 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었다. 접촉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데,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서 지우기 힘든 낙인을 남겨놓고도 그 사실을 본인만 까맣게 모르는 죄야말로 중죄였다.
    보트는 강의 한 가운데로 나아갔다. L은 처음에 그가 기혼임을 몰랐다. 반년쯤 지나서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정이 깊이 들어서 쉽게 돌이킬 수 없었다. 물살이 거센 강의 한복판에서 계속 움직이던 방향을 바꿔 반대편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어찌 됐든 계속 앞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그런 관계는 일 년 반이나 더 지속되었다.
    강의 한 가운데에서 보트는 엔진을 껐다.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지며 물결이 뱃전에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해가 떨어지며 하늘에 붉고 푸른 기운이 섞이자 강물의 빛깔과 질감이 묘하게 변하며 물비늘을 세웠다. 건너편의 텐지다오 산이 거대한 검은 새처럼 날개를 펼쳤다.
    M은 Y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붉은 계열의 독특한 색감을 가진 그 보석은 미얀마에서 많이 생산되는 루비였다. M은 그녀가 오늘 밤이라도 이곳으로 온다면 그런 목걸이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고 새롭게 시작하자며 끌어안고 싶었다. 산불이 난 듯 보라색 구름들이 연기처럼 일어나 해가 지는 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한편 M은 그녀에게 왜 아직 오지 않는지 이유를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자신을 졸렬하고 비참한 인간으로 만드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을 믿었던 약혼녀를 배신하게 만들고는 이렇게 매몰차게 버리는 까닭이 궁금했다. M은 약혼녀의 고등학교 단짝 친구인 그녀가 대범하게 다가온 날을 기억했다. 그녀는 사랑을 고백하고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했다. 독이 든 열매인 줄 의심하면서도 M은 그것을 달콤하게 깨물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마른 짚단에 불이 붙듯 거세게 타올랐다. 백일이 지나자 그녀는 약혼녀와 헤어지라며 밤낮 그를 붙들고 애원했다. 전화를 받으면 몇 시간씩 흐느끼는 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녀 앞에서 M은 수천 번 단호한 칼 한 자루가 되고 싶었으나 촛불일 수밖에 없었다. 입김을 불면 무조건 흔들렸다. 세게 불면 꺼질 듯 심지 쪽으로 몸이 오그라들었다. 도무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M의 길에 급격한 회전이 일어났다.
    좀 더 예쁜 사진을 찍느라 구명조끼를 벗은 Y는 차가와진 강바람에 한기를 느꼈다. C는 구명조끼를 벗어던지며 애정을 과시하듯 Y를 끌어안았다. 엔진을 끈 배는 천천히 흔들리며 어디론가 떠내려갔다. Y는 한 남자의 품에 안긴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C는 깜빡 잊었다는 듯 몸을 떼어내며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자, 우리 단체사진 한 장 찍으시죠. 배가 이동하면 사진이 흔들리거든요.”
    L과 M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Y는 L이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초라한 구명조끼를 꼭꼭 동여매고 물살에 홀린 듯 우울한 표정을 짓는 L을 보며 Y는 나이 들어서 절대 혼자 이런 곳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반면에 M은 왠지 가여웠다. 유능하고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대체 무슨 말 못할 사연 때문에 이 아름다운 순간에 저리 풀이 죽었는지 다독이고 싶었다.
    C가 카메라를 흔들며 한 번 더 소리치자, L은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가 언제 에야와디 강에서 이렇게 함께할 수 있겠어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L은 손바닥을 펼치며 고개를 저었다.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도 아니고 이곳에 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카메라 이리 주세요. 제가 찍어 드릴게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전부 이쪽으로 모이세요.”
    C는 Y의 손을 잡고 L과 M 사이에 앉더니 보트를 모는 청년에게 사진기를 넘겼다. 렌즈를 들이대자 네 사람은 팔을 벌려 서로의 어깨를 둘렀다. 플래시가 몇 번인가 번쩍거렸다.
    해가 텐지다오 산 뒤로 순식간에 떨어지자 주위가 캄캄했다. 청년이 엔진을 가동시키자 다시 스크루가 돌아가는 굉음이 일었다. 그 와중에 M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 탑이 아니라 등대네요. 부파야 파고다는.”
    “부파야가 어디 있어요?”
    Y가 묻자 M은 팔을 뻗어 검지 끝으로 가리켰다.
    “저거 보여요?”
    Y는 시력을 모으며 M의 어깨 옆으로 얼굴을 바싹 붙였다.
    “어디요?”
    “저기요, 저거.”
    M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Y와 M의 시선이 한 점으로 모였다. 그러자 금빛으로 돌올한 탑이 보였다. 어두울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금탑은 그 자체로 방향을 가리키는 등대였다.

 

    선착장을 떠난 마차는 바간-차욱 로드를 내려와 뉴 바간 강변의 시뚜 레스토랑에서 멈췄다. 레스토랑에서 게스트 하우스까지는 충분히 걸어갈 만한 거리여서 마차를 보내야 했다. C가 M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두르며 말했다.
    “형, 보트비는 제가 댔으니 마차비는 형이 처리하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을까요?”
    C는 어느새 호칭을 ‘형’으로 바꾸며 유들유들하게 굴었다. M이 마부에게 비용을 물으니 2만 5천 짯이라 했다. 네 사람이 움직였으니 과한 금액은 아니지만, 비수기의 현지 교통비로 적은 것도 아니었다. C는 M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생색도 내고 실속도 챙기는 일에 능숙했다.
    “형, 이와 주시는 거 팁도 살짝 얹어주시고요”
    L이 눈치를 챘는지 지갑을 꺼내들며 다가왔다. M은 서둘러 돈을 더 얹어서 지불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부에게 ‘제조삔따레’라고 인사했다. 고생한 마돈나의 목을 어루만지면서도 ‘제조삔따레’라고 말했는데, 손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땀이 묻어났다.

 

*

 

    시뚜 레스토랑은 처마만 있고 벽이 없는 개방형 구조였다. 대나무로 맵시 있게 짠 의자에 앉자 옆으로 강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넷은 땅콩을 안주로 ‘미얀마 맥주’를 마시며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땅콩은 크기가 작지만 단단하고 고소했다. 맥주 맛이 훌륭해서 네 사람은 잔을 내리며 모두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맛이 상당히 좋네요. 근데 나라 이름을 브랜드로 쓴 게 독특해요. 우리로 치면 ‘대한민국 맥주’ 이런 식인데.”
    M이 말을 꺼내자 C가 대답을 했다.
    “1989년 군사정권이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꿨어요. 새로운 국호를 빨리 국민들에게 인식시키는 방안으로 그렇게 지었다는 설이 있어요. 이 술이 벨기에와 독일 맥주 대회에서 트로피를 여러 번 받았어요.”
    C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미얀마 투어 루트를 개발하는 여행사 팀장답게 그는 해박했다.
    “미얀마는 우리에게 익숙한 태국, 베트남 바로 옆인데도 이상하게 먼 나라로 취급됐어요. 남방불교 벨트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불교유적을 간직해서 좋은 관광 상품 개발이 무한하거든요. 중국, 라오스, 타이, 인도, 방글라데시 다섯 나라와 국경이 닿아서 연계 상품도 가능하고……”
    M은 이 나라가 인접 5개국과 서로 살갗을 맞대고 오랜 세월 뒤엉켰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레스토랑에 가면 늘 다섯 나라의 음식이 골고루 메뉴판에 등장하는 것도 이해됐다. Y는 그 얘기를 여러 번 들은 듯, 포크 손잡이로 맥주 뚜껑을 문지르는데 열중했다. 뚜껑 안에 얇은 피막이 벗겨지며 감춰진 미얀마 글자가 드러났다.
    와이셔츠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내오자 Y가 맥주 뚜껑 두 개를 웨이터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웨이터가 환하게 웃으며 영어로 말했다. 하나는 ‘꽝’이고, 다른 하나는 ‘맥주 두 병이 무료’라고 했다. 갑작스런 횡재에 네 사람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백인 관광객들도 웃으며 엄지를 세워 올렸다.
    “미얀마 정말 좋은 나라 맞네요.”
    이제껏 가만히 있던 L이 환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테이블에 뜻하지 않은 활기가 돌았다. 네 사람은 잔을 부딪쳐 남은 술을 전부 비웠다. 곧이어 차가운 맥주 두 병이 들어오자 잔을 채우고 즐겁게 식사를 했다.
    접시를 반쯤 비울 무렵, M이 스푼을 먼저 내려놓으며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끝은 비극일까요, 희극일까요? 악어연인 말이에요.”
    “그야 물론 비극이죠. 여친 악어는 원숭이의 심장을 못 먹은 대신 우리 불쌍한 악어의 심장을 먹었을 거예요.”
    C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Y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물었다.
    “그 무슨 엽기적인 결말이에요?”
    C는 Y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맞은편의 M과 L을 향해 팔을 뻗으며 어필했다.
    “왜 그런 여자들 있잖아요? 남자에게 매번 힘든 요구를 하고 계속 곤란한 숙제를 내주는. 안 봐도 뻔해. 다음엔 사자 심장이 먹고 싶다고 징징댔을 거라고. 남자는 내내 뺑이 치다가 결국엔 심장을 잃어요.”
    곧장 Y가 반박했다.
    “여자 마음을 모르시네요. 여자 악어는 남자 악어가 자신을 위해서 뭔가 특별한 걸 해주길 바란 거예요. 여자는 늘 남자가 자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니까!”
    C가 포크로 허공을 찔러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늘 남자는 시험에 들지. 여친의 말을 매번 들어서는 안 돼요. 그게 그 얘기의 교훈이에요. 아흐, 사랑에 속고, 우정에 속은 가여운 악어!”
    C는 넓적한 쌀국수를 크게 떠서 볼이 미어지도록 입에 밀어 넣었다. Y는 졌다는 듯이 맥주를 홀짝이고는 덧붙였다.
    “맞아요. 우리는 누군가의 심장을 먹고 싶어 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L이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원한 건 어떤 약속 아닐까요?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남자가 어떤 시도를 하고 애쓰는 태도를 보려한 거 같은데. 그만큼 했다는 걸 알았으니까 해피엔딩일 수도 있어요.”
    C가 포크를 접시에 내던지듯 놓으며 반발했다. 채 다 삼키지 못한 국수 가닥 몇 개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약속은 그렇게 일방적인 게 아니죠! 그리고 왜 남자만 애를 씁니까? 왜 여자는 늘 갑이냐고요?”
    L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M이 차분하게 끼어들었다.
    “남자 악어가 원숭이 심장 대신 들고 간 건 스토리 아닐까요. 일종의 꽃이죠. 스토리가 때로는 사람을 감동시키잖아요. 약속을 지키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는.”
    C가 고개를 돌리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받아쳤다.
    “에이, 형, 그건 대체 몇 살짜리 동화야? 어떤 여자가 그런 구차한 변명을 들어줘요? ‘됐고, 그럼 니 심장 내놔!’ 하지!”
    그 말에 모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M도 졌다는 듯 두 손을 반짝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아이고, 어쩌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다가 제 심장은 깨져서 줄 수가 없는데.”
    그런 M을 Y는 눈 여겨 보았다. 그리고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었다. 그의 음성은 크지 않았지만 왠지 둥글고 따뜻했다.
    테이블에 늘어선 미얀마 맥주병이 탑처럼 보였다. 음식을 먹고 나서도 네 사람은 여유롭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접시가 치워지자 희고 얇은 미농지에 싼 타마린 사탕이 디저트로 나왔다. 혀끝에 달콤하고 신 맛이 돌면서 입안에 박하향이 퍼졌다. C는 여행사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고 L은 화장실에 가려는 듯 일어났다.
    아기 고양이가 테이블 아래에서 아주 작게 울었다. 짙은 회색에 검은 줄무늬, 커다란 눈, 흰 수염이 앙증맞았다. M이 테이블 밑으로 허리를 숙여 잡으려 할 때마다 번번이 손아귀를 벗어났다. Y가 중얼거렸다.
    “싫은가 봐요.”
    “그러게요. 요즘은 손에 잡히는 게 없어요.”
    어두운 강 위로 별이 빼곡히 돋아났다. Y가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물었다.
    “어떻게 바간에 왔어요?”
    M은 잠시 뜸을 들이다기 힘없이 대답했다.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
    “언제 오는데요?”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M의 귀에 이제껏 들리지 않던 로카난다의 독경 소리가 갑자기 가까이서 크게 들려왔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제 본 로카난다의 금탑이 검은 강물 위로 길게 누워있었다.
    “온다고 했으면 곧 오겠죠?”
    “근데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로 간 것 같아요.”
    Y가 뭔가를 더 물으려 할 때, L이 돌아왔다. L은 계산서를 접어서 지갑에 넣으며 오늘 일정이 즐거워서 자신이 저녁을 대접했다고 말했다. 약간 놀란 듯 M과 Y의 두 눈이 잠시 마주쳤다. 곧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모은 채 ‘제조삔따레’ 하고 미얀마 식 인사를 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Y가 레스토랑 밖이 너무 깜깜하다며 돌아가는 길이 안전한지를 걱정했다. 뒤늦게 돌아와 앉은 C가 말했다.
    “뭐가 무서워? 내가 있는데.”
    M이 밖을 살피니 정말 불빛이 없어서 칠흑 같았다. M은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웨이터에게 밖이 너무 어두운데 큰 길까지 안전한지를 물었다. 네 사람의 여권과 지갑이 모두 털리는 불상사가 벌어질까 염려됐다. 웨이터는 걱정하지 말라며 활짝 웃었다.
    넷이 레스토랑을 나설 때 말쑥한 셔츠를 입은 웨이터 두 명이 오토바이를 몰고 나왔다. 웨이터들은 넷이 걷는 양 옆으로 전조등을 환하게 밝히며 천천히 달렸다. 오토바이 두 대의 호위를 받으며 넷은 예상치 못한 친절 덕에 밤길을 흥겹게 걸었다. 큰 길에 이르자 웨이터들은 손을 흔들고는 전조등의 불빛을 둥글게 뿌리며 돌아갔다.

 

*

 

    L이 조용히 물었다. 지난 밤 옥상 테이블의 같은 자리였다.
    “보고 싶나요?”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생각나요. 아무 것도 못하겠어요. 머릿속이 하얗고 방에 있는 엄지발가락 슬리퍼 두 켤레만 봐도 눈물이 나요.”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자 C와 Y는 방으로 들어가고, L과 M은 옥상으로 올라왔다. 저녁식사 때 마신 술이 좀 부족했고, 행복한 시간이 끝나자 혼자 방에 갇히는 게 싫었고, 아름다운 곳에서 함께 하지 못한 연인에 대한 아쉬움이 은연중 둘 사이에 통했다.
    M은 답답한 심정을 더는 감출 수가 없어서 기다리는 여자에 대해 털어놓았다. 오늘도 다른 손님은 없었다.
    “잊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떻게 잊어요? 그녀가 준 프랑스제 립밤이 남았어요. 손수건도 주머니에 있어요. 그걸로 입술을 바르고 이마의 땀을 닦아요. 아니,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머릿속에 온통 한 사람으로 꽉 차 있어요.”
    “괜찮아요. 한 한 달만 정신병자처럼 살면 되니까.”
    M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우울하게 말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서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랑을 하셨다면 그 말을 믿을게요.”
    L도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옥상을 넘어서 길게 가지를 드리운 코코넛 나무의 넓은 이파리가 바람에 너울거렸다. L은 M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서 채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한 사람은 열두 살이 많았고 15년 전 얘기니까 이젠 할 수 있겠다며 입을 열었다.
    M은 머릿속으로 나이를 계산했다. 서른 살의 여자와 마흔 두 살 남자의 관계였다. 그러자 여러 개의 물음표가 연이어 떠올랐다. M의 생각을 읽었는지 L은 잔을 만지작거리며 쓸쓸히 웃었다.
    “갑자기 궁금한 게 많아지죠?”
    M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내가 그를 사랑할수록, 그가 나를 사랑할수록 서로가 고통스러워지는 사이였어요.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 다음이 없는 관계.”
    M은 잔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늘 헤어질 준비를 해야 했어요. 사소한 인사도 그만 만나자는 말로 들렸어요. 알고 보면 아무 뜻도 아닌데, 가벼운 표현에도 비참하고 서운해서 울었어요. 깊이 사랑하는데도 늘 불행했어요.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저쪽 관계를 정리하라고 요청하지는 않았나요? 사랑하는 동안 계속 그렇게 불행할 수만은 없잖아요.”
    “하찮은 노리개가 된 기분이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남이 가진 보석처럼 그가 너무 멋지고 훔치고 싶었어요. 이 상태로는 더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죠.”
    이야기는 정해진 수순으로 가고 있었다. 늦은 밤이어서 독경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침 미얀마에서 활동 중이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정리를 하겠으니 바간으로 오라고 했죠. 여행을 하며 새로운 인생 계획을 짜고 소원을 빌자면서.”
    M은 자신의 잔에 남을 술을 끝까지 들이켰다.
    “그런데 나는 가지 않았어요. 가질 수 있다는 걸 안 순간 갖고 싶지 않았어요. 그와 새로운 곳에서 시작한다 해도 그건 다른 일상의 시작일 뿐이니까요.”
    순간 M은 L의 이 대목이 진실일까, 잠깐 의심이 들었다. 의심은 그녀도 그런 이유에서 지금 오지 않는 걸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순간에 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2년을 만났으니까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오래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어요.”
    그것이 과거에 L이 바간에 가지 않은 이유였다. 그녀도 오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을까, 왜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인지 M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억울함이 오래갔어요. 헤어지면 그 사람은 돌아갈 데가 있잖아요. 나는 돌아갈 데가 없고요. 내가 아니어도 그는 다른 누군가의 옆에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으니까 화가 나더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갑작스런 M의 반론에 L은 말을 멈췄다.
    “한 사람을 잃는 아픔의 중량은 모두 같아요. 어느 한쪽이 돈이 더 있어도, 친구가 더 많아도, 설령 그가 제국을 소유하더라도…. 지위고하,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돌아갈 곳의 유무를 떠나서 한 사람을 잃는 아픔은 모두 같아요.”
    L은 매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M은 이어서 말했다.
    “한 사람을 잃으면 그 사람의 형질이 전과는 달라져요. 그 달라진 형질이 어디로 돌아간들 회복되겠어요? 양쪽 모두 평등하게 달라지는 거예요. 사람을 잃는 일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없는 거죠. 그걸 모르실 리가 없잖아요.”
    “맞아요. 그 때는 그걸 몰랐어요. 그걸 모를 만큼 사랑에 눈이 어두웠어요.”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빈 잔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속에 감춘 이야기를 한꺼번에 풀어낸 탓인지 L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바간에 가지 않은 것으로 끝이었나요?”
    “바간에서 쓴 편지가 한 통 날아왔어요. 나도 그에게 답신을 썼지만 부치지 않았어요. 그걸로 끝이었죠. 해피엔딩인가요, 새드엔딩인가요? 나는 그를 잊기 위해 다른 남자와 선을 보러 다녔어요.”
    M은 깊은 숨을 내쉬며 ‘아직 엔딩이 아닌 것 같아요.’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 사랑이 의외로 오래 갔어요. 그 뒤로 저는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한 것 같아요.”
    “이상한 부탁처럼 들리겠지만, 쓰셨다는 그 답신을 꼭 한번 봤으면 좋겠네요.”
    “누가 글 선생 아니랄까봐. 틀린 문장 찾아서 빨간 펜 긋고 싶나요?”
    “아니에요. 편지가 그 당시의 복잡한 심사를 모두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그 당시의 어떤 진심을 엿보고 싶은 거예요.”
    “어디 15년 전에 쓴 편지가 남아있을 턱이 있나요.”
    M은 쓸쓸하게 웃으며 ‘그렇겠죠.’ 하고 중얼거렸다. 머릿속에는 L의 말과 그녀가 엇갈리며 지나다녔다. M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이제 12시가 막 넘었으니까 저는 내일 아침이면 떠나요. 오늘 그녀가 올 리가 없겠죠. 문자라도 한 통 보내준다면……. 여기서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오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건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무겁게 잠긴 M의 그 말에 L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가 보내는 간절함이 L의 마음을 울리며 지나갔다. 그가 보내는 애절한 신호를 M의 그녀가 모를 리 없을 것 같았다. L은 M을 보며 새삼 과거의 그가 어떤 고통 속에서 자신을 기다렸는지 짐작됐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 할 시간이어서 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L은 팔을 뻗어서 축 늘어진 M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시간이 가진 치유력은 상상이상이에요. 어쨌든 하루를 보내면 그 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아요. 전과는 달라져요. 그게 내일이 될 수도 있어요.”
    “15년 전의 사랑을 잊지 못해 찾아온 분의 위로라고 여겨지지 않는군요.”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근데 사람은 변하니까 그게 가능해요. 빨리 변하면 되요, 아이처럼.”
    적막 속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키 큰 코코넛 나무 이파리 사이로 걸러진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옥상 바닥으로 가늘고 길게 늘어졌다. 코코넛 열매가 둔탁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작가소개 / 해이수(소설가)

– 1973년 수원에서 태어나 2000년 《현대문학》 중편 부문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과 『젤리피쉬』, 장편소설 『눈의 경전』과 『십번기(十番棋)』가 있다. 심훈문학상과 한무숙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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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자 슈뢰딩거가 떠오르네요 '왜 내가 나의 형이 아니고, 또 내 형은 내가 아니었고 친척의 아무개는 내가 될 수 없었는가..' 한 마디로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가라는 원초적인 물음 뚜렷한 성격의 C,Y,M,L.. 선명한 관계이면서 매개의 관계인 C,Y,M,L.. M이 Y를 읽고, Y가 M을 관찰하고, L이 Y를 바라보고, Y가 L을 연민하고.. 은은한 독경소리 사이로 야자수의 그늘 흔들리는 소리 이어 덮히고, 우정과 사랑사이에서 균형을 상실한 악어의 스토리가 익어가는 동안, 위태로우면서도 혼란스러운, 그러나 묘한 질서가 잡혀가는 그들 4인 또는 3인 먼 시간과, 동일한 공간, 비슷한 사연의 사람들, 그 사이에 매개가 되는 사람.. 뱃머리에서, 카페 2층 옥상에서, 조용히(?) 울려퍼지는 인연의 확성기.. "한 사람을 잃은 슬픔의 질량은…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