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KO창작기금 수상작_시] 원근법 외 6편

[ARKO창작기금 수상작_시]

 

 

원근법

 

 

 

이민하

 

 

 

검은 우산들이 노란 장화를 앞지르고 있었다
차도에는 강물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머리가 지워진 사람과 발목이 잘린 아이들이 떠내려간다

 

오후에 떠난 사람과 저녁에 떠난 사람이 똑같이
이르지 못한 새벽처럼

 

한 점을 향해 가는
길고 긴 어둠의 외곽 너머

 

텅 빈 복도에 서서
눈먼 노인과 죽어가는 아이가 함께 내려다보는
마르지 않는 야경 속으로

 

몇 방울의 별이 떨어졌다

 

 

 

 

 

 

 

붉은 스웨터

 

 

 

한 올만 당기면 풀어질 듯
입을 막고 있어서 우리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몸속에 둔 실마리를 들키지 않을 것처럼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에 엮여서
두껍고 따뜻하고 촘촘한 사람이 되었지만
손가락이 닿으면 파르르 떨리는

 

스웨터의 물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손끝에서 맥박이 섞이고

 

눈을 가만히 닫고 있으면
물려 입은 옷처럼 타인의 냄새가 난다
조심조심 숨소리를 헤아리는 호흡이 틀니처럼 박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활용되고 있었던 걸까
깨끗이 빨아 입어도 낡은 슬픔뿐

 

어둠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입가에 붙은 미소를 보풀처럼 떼어 주며

 

스웨터보다 한 뼘 더 기어올라서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
검은 손은 내 것이 아닌데
당신은 내게 애원하는 눈빛이다

 

우리의 실마리를 쥐었다 놓았다
벌거벗은 잠자리까지 파고드는
어둠의 손아귀

 

바닥에 누워 풀썩거리던
한 사람이 밧줄 더미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가볍고 뜨거운 핏방울이 한 코 한 코 솟구쳤다

 

어둠의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핏물로 짠 스웨터가 몸속에서 뒤척거렸다
입을 닫아 주어도 잠들지 않았다

 

 

 

 

 

 

나비論

 

 

 

 

더 많은 색깔이 필요합니다. 닫혀 있는 필통을 참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오색 손톱에 공을 들이고 점심시간마다 연필심처럼 끝을 다듬었습니다.
날카로워진 두 소녀가 서로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렸습니다.

 

극적인 악수란 그렇게 시작되죠.
가장 긴 손가락부터 내민다는 것.

 

발육이 남다른 우리는 가운뎃손가락이 멈추질 않아서 비행소녀가 되었어요.
침을 뱉을 때도 진심을 담아야 합니다.
가래침엔 인격이 없어요. 그러나 끈기와 몰입은 배울 만합니다. 이념 말고 일념,
그것도 아니면 무념.

 

스타킹을 벗듯 머리끝부터 허물을 벗고 싶어요.
턱관절이 나가도록 생고무를 씹는 인생의 맛. 콘돔을 찢고 나오는
아기들은 쓴맛에서 시작합니다. 버림받은 기억보다 무서운 건 반복되는 예감.

 

슬픔의 지식이 쌓이면 더듬이는 탈부착이 됩니다.
거기서부터 길고 긴 독서를 시작하고 싶어요.

 

길고 긴 햇빛이 꺼지고 나면 밤거리를 뛰어다니며 타인의 일기장을 훔쳤어요.
밑줄을 그으며 나를 예습하고 싶어요. 낯선 냄새를 이해한다는 것.
팬티를 빨면서 생각하죠. 누군가를 벗기는 것 말고
빨아 준 적 있었나. 자만과 기만.

 

당신이 부끄러움을 보여준다면 진심을 다해 빨아 주고 싶어요.
혀를 갈고닦아서 손가락의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우리는 왜 손을 씻는가.
손을 자를 수 없다는 깨달음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가르침 속에서

 

까만 게 좋아, 하얀 게 좋아? 그러면 빨간 헬멧을 고르고
오토바이 소년의 허리를 붙잡고 내가 없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일.
거기서부터 길고 긴 걸음마를 시작하고 싶어요.

 

길고 긴 행군을 끝내고 나면 기념일에는 지붕 위의 소녀들과 에어쇼를 합니다.
오토에서 스틱으로 손가락을 바꾸고 좌익과 우익
날개를 맞추는 소녀 비행단의 대열 속에서

 

오색 연막탄을 토하며 유종의 미를 연마하죠.
일필휘지로 하트를 띄우고 요조숙녀로 거듭난다는 것.

 

소녀들이 차례로 폭발하고 남아 있는 군번줄처럼
길고 긴 더듬이를 어루만지며
한 쌍의 어른이 거울처럼 앉아 꿀차를 마시는 저녁,

 

손톱을 깎으며 연필을 깎으며 우리는 경청하죠. 탈피 후에
날아다니는 농담에 대해.
고독의 만찬이 끝나면 동면의 계절이 옵니다.

 

 

 

 

 

 

야행夜行

 

 

 

    어느 날 한 사람이 담장을 넘어와서 나를 몰래 데려갔다 누구냐고 묻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입을 찾을 수 없었지만 묵음으로도 알 것 같았다 손을 잡고 있었지만 세상에 없는 피부 같았다 우리는 골목을 벗어나 들판으로 달려갔다 잠옷이 더러워지고 발바닥에서 피가 나는데 웃으면서 달려갔다 드문드문 눈앞이 끊겼지만 웃음의 낱알이 진주처럼 꿰어져 목에 걸려 있었다 (걱정 마, 아프진 않아) 그가 속삭였다 (그래, 보이는 건 아픔이 아니니까) 내가 끄덕였다 끄덕끄덕 머리가 굴러가면서 새알만큼 작아졌다 (잘하면 날 수도 있어) 그가 부추겼다 (그래, 멈출 순 없으니까)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벼랑 끝에서 사라졌다
    그가 나를 데려다 놓지 않아서 내가 그곳으로 찾아갔다 양말도 신지 않고 벽돌담을 끝없이 기어올랐다 발바닥에서 피가 흘렀지만 벽돌이 빨아 먹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얼룩진 붉은 벽돌담 끝에는 잡목 숲이 거꾸로 펼쳐져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흰 토끼들이 듬성듬성 풀을 뜯었다 공중에 물구나무를 서서 숲을 딛자 나도 걸음이 빨라졌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담장을 스칠 때면 일행도 생겼다 셋이서 걷다가 둘이서 뛰다가 혼자서 날았다 야근을 하고 귀가하는 골목의 사람들은 나를 못 알아봤다 어떤 이들은 토끼풀밭에 매달려 절반의 삶을 묻었다 다음날 밤에도 나는 다른 담장을 더듬었다 내가 나를 못 알아볼까 봐 더러운 잠옷을 입고 갔다 빈집을 터는 기분이어서 한 사람은 늘 꿈 밖에서 망을 봤다

 

 

 

 

 

 

그루밍 패밀리

 

 

 

 

1

 

차에 치여 납작해진 기분이야.
이것은 폭설 속에서 그들이 내게 들려준 최초의 인사.
그리고 식구가 된 그들이 내 머리털 속에서 우울한 날씨를 핥으며 합창하는 밤의 노랫말.
귀를 막던 대머리 애인은 운동선수가 되었고,

 

2

 

귓속말을 좋아하는 당신은 고 씨 성을 가졌습니까.
나랑 평생을 살아요.
삼색 무늬 딸도 낳을래. 이름은 양희.
나의 청혼이 시작되었다. 부케는 흰 고양이로 하자.

 

3

 

암고양이들의 쉰 목소리가 천 미터를 기어갈 때
나도 따라 천 개의 담장을 넘었다.
기운이 넘치면 땅 끝까지 갈지도 몰라.
나의 유언이 시작되었다. 상주는 검은 고양이로 부탁해.

 

4

 

깨지 못할 잠에 이르면 낯설지 않도록
잠을 한 알씩 늘려 갔다.
아홉 알을 복용한 날엔
턱뼈가 으스러지고 입이 찢어진 다음에야 잠이 들었다.
닭뼈를 입에 물거나 악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양이가 입을 최대치로 벌리는 순간은
하품을 하기 위해서다.

 

5

 

그리고 키스.

 

6

 

입안에서 꼬이는 두 개의 혀로
외국어를 배우는 연애의 시간.
엄마가 생선을 발라 주듯 새들을 죽죽 찢어 주는
고양이의 눈빛을 경청하는 것. 목덜미 색깔이 달라도
혀로 살살 핥으면 말은 필요 없는데
추운 나라에서 온 당신은 혀 짧은 소리로 어린애처럼 말한다. 벗을까? 그건 털목도리야.
혀를 잠시 떼고서 내가 말한다. 그래, 목털이 참 따뜻하구나.

 

7

 

어차피 돌아올 거면서 가출은 왜 했니.
집이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깜박하고 거리를 헤매게 될까 봐.
몸이 젖는 줄도 모르고
비만 오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창턱에 내 뒷모습이 앉아 있다.

 

8

 

누군가 뒷덜미를 덮치고 뺑소니를 쳤다.
납작하게 뻗은 그림자가 이리저리 차이며 밟힌 부위를 자꾸 밟혔다.
구경하는 사람이 있고 무심히 지나는 사람이 있고 주저앉아 우는 사람이 있고
어둠이 달려와 모두를 쓸어갔다.
핏줄을 줄이려고 개복을 하는 달빛이 있고
실밥이 가려워 종일 핥다가 저녁마다 헤어볼을 토하는 태양이 있다.
밟히고 감추고 삼키고 토하고,

 

9

 

    우리는 꼬리를 문다. 서로의 꼬리를 잡으며 우리는 논다. 자신의 꼬리를 잡으며 우리는 돈다. 이야기는 꼬리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의 꼬리도 보여줄래?

 

 

 

 

 

 

육체의 비밀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은 어디에 있나
눈꺼풀의 안쪽과 바깥

 

한 사람이 옷을 훌훌 벗는다면
부끄러움은 누가 뒤집어쓰나
벗은 몸의 안쪽과 바깥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나는 당신 안에서 빠져 있는데
서로를 향하여 끝없이 멈추는 움직임 속에서

 

정지한 사람의 두 발은 어디에 있나
한 뼘과 천 길 사이

 

굳게 닫힌 눈과 입
실금이 간 얼굴로 시체처럼 누워
당신은 가장 가깝고

 

나는 가장 먼 곳에서
껍질과 수염을 벗겨내고 옥수수알을 씹는다
천 개의 알갱이를 입안에서 터뜨리며
당신을 자꾸 귀에 대본다 깜깜한 백지처럼

 

입을 다문 사람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나
입술의 안쪽과 바깥

 

배시시 눈을 비비며 마주 보는 당신은
멀리서 불빛을 보고 숙소로 찾아든 이방인 같다

 

모호한 발음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다
눈빛을 껐다 켰다
유리문을 열고 닫으며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 같다
가장 투명한 곳에서

 

 

 

 

 

 

에로스

 

 

 

어떤 사람은 물로 만들어졌단다. 칼로 찌르면
물이 빠져나와서 죽어버린다.
그녀 앞에서 불쑥 혀를 꺼낼 땐 조심해야 한다.
번쩍이는 빛을 함부로 휘둘러도 안 되지.

 

아침저녁으로 쏟아지는 장맛비는 이상한 죄책감에 젖게 한다.
오돌토돌 솟아오른 감정의 돌기들을 집어넣어야 한다.
소금으로 만든 사람이라면 위험천만.
그가 뿌리는 눈물 한 줌이면
그녀의 내장은 민달팽이처럼 오그라든다.

 

어떤 사람은 활활 옮겨 붙는 불로 만들어졌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 동반자살이 유행하는 이유.
화상을 입은 사람들은 물새처럼 떠다니고
해변에 집을 짓는 시인들은 불의 아이를 키우기 때문이야.

 

기꺼이 목숨을 털어 불꽃을 피워 주는
나무로 만든 사람도 있다.
나이를 먹을 줄 아는 유일한 종족이다.
그들은 성숙해서 열매와 그늘을 자꾸 내려놓지만
폭풍을 타고 다니는 유랑민과는 상극이다.
가령, 머리채가 휘어 잡히는 이런 날.

 

파랗게 찢긴 몸을 쓸어내리며
기억의 뿌리가 뽑히다 만
저 사람은 뼈다귀가 드러난 목발로 황혼에 이르렀다.

 

어둠의 도끼가 찍어대는 줄도 모르고
나무 꼭대기로 올라간 고양이는 어디로 숨었을까.
꼬리를 더듬어 끌어내리고
남은 가닥의 뿌리로 묶은 매듭이 죽음이다.

 

죽음의 매듭으로 만든 사람도 있다.
매듭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굳었던 피가 흐르는 가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쪼아대는 새의 부리 같은
연필로 만든 사람이 있다.
뾰족한 입술에 침을 발라 가며 게걸스럽게 이야기를 씹어대지만
대부분은 고무로 만든 항문을 갖고 있다.
몸 전체가 항문인
고무로 만든 사람도 있다.

 

음악으로 만든 사람에 대해서라면
사계절의 뜬구름을 쏟아 부어야 하리.

 

물의 악기와 소금의 살과 불의 피와 나무의 뼈와 바람의 꼬리와 죽음의 목소리를 지닌
투명인간이 계단으로 만든 사람 위에
구불구불 엎드려 있다.
승천하는 구둣발의 물결 속에서

 

관절이 하나씩 밟힐 때마다 계단의 떨림이 정수리까지 기어올랐다.
허공 끝까지 들썩거리는 음악의 둔부 아래로
외마디 침묵과 함께 첫눈이 쏟아졌다.

 

 

작가소개 / 이민하(시인)

–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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