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F 선정작 리뷰] “너라고 다른 줄 알아” 그렇지만 “우리 탓이 아니라고”

 

[2015년도 차세대 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리뷰 ]

 

 

“너라고 다른 줄 알아?” 그렇지만 “우리 탓이 아니라고”

― 박송아의 「빅매리」를 읽고

 

 

이재원(문학평론가)

 

 

 

 

    여기 도착한 크레인이 끌어올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숨이다. 그리고 여기 도착한 많은 사람은 하나의 목숨이 마치 헐어버려야 하는 건물이거나 쓰레기처럼 다루어지는 순간을 구경하고 있다. 박송아의 소설 「빅매리」에서 ‘매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불행을 접하다 보면 우리는 그런 불행한 삶이 과연 존재하는지, 사람이 이렇게 무섭도록 무감한 존재인지 묻게 된다.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지적 능력이 모자라기도 하는 인물 매리는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에게, 이후에는 가출한 또래의 무리에게 계속해서 이용당하고 만다. 매리에게 삶이란 고통스럽고 위험하고 치욕스러운 순간들을 감수하고 견뎌내어야 가능해지는 종류인 것이다. 그렇게 마침내 매리는 지금 마치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상관없는 짐짝처럼, 크레인에 들어 올린 채 뼈가 부서지게 되어버렸다. 매리는, 매리의 사탕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 소설은 하나의 목숨이 망가지거나 끊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다루어지고,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듯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사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소설이 1916년 미국에서 일어난 동명의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는 사실을 굳이 짚어내지 않더라도, 이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것만 같은 장면들이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이미 안다. 그렇다면 이 비극적 사태는 누구 탓인가. 소설 「빅매리」는 매리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 참혹의 책임을 묻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매리를 크레인으로 끌어올린 자는 누구인가. 매리에게 깔려 죽은 컨테이너 주인이 말했듯, 이 모두는 매리가 자처한 일일까. 매리는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의 순간 속에서 ‘어째서’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그것은 금세 사라져 버린다. 매리가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사람들은 매리에게 ‘사탕’을 쥐어주기 때문이다. 매리의 주변인들은 매리가 사탕의 달콤함에 기대어 고통을 잊고 견디기를 바라며, 매리는 그 바람에 순순히 부응한다. 그렇다면 제게 닥친 비합리적이고 비참한 일들을 두고도 분노할 줄 모르니, 사탕을 핥을 뿐이니, 이 모든 일은 정말로 매리 탓일까. 그러나 매리가 사탕을 빠는 대신 질문을 끈질기게 붙들어 자신에게 또 사람들에게 던져두었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이때 중요한 점은 매리라는 인물이 주변인에게 이용당하고 고통을 감내하기를 강요받는 것이 그가 다수인 ‘우리’와는 구분되는 타자의 자리에 위치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매리가 타자로 구분되는 것은 우선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점이나 모자란 것으로 여겨지는 지적 능력 때문일 것이다. 즉 사전을 통해 직접 언어를 습득해야 했으므로 매리의 사유 구조와 방식은 보통의 교육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흐름으로 존재한다. 가령 봄이 사라진 ‘삼계절’ 같은 단어를 만들어내고 마음에 들어 하는 인물이어서, 매리는 주변인들로부터 쉽게 배제당하거나 이용당한다. 어린 시절에는 왜소했으며 이후에는 지나치게 거대해지는 매리의 외형 역시 타자로서의 매리의 위치를 가시화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매리가 타자의 위치에 놓인 일이 매리를 두고 일방적으로 판단하여 배제하는 외부적 시선에 의한 것임을 잊지 않는다. 이 소설은 매리의 비극에 대해 익명의 군중에게도 책임을 묻는 것이다.
    매리가 그의 아버지처럼 왜소하던 시절, 차에 뛰어든 그들을 두고 운전자는 화를 내는 대신 돈을 쥐어준다. 운전자가 이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잘못을 묻는 대신 돈을 쥐어주는 특수한 상황은 매리와 그의 아버지가 특수한 위치에 있다는 외부적 인식과 관련된다. 매리와 그 아버지의 외모를 두고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판단, 즉 사회적 약자로 구분하는 판단에 의해 운전자는 이들에게 돈을 쥐어준다. 그러니 이 행위는 일종의 동정과 연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민의 출발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저 타자의 고통을 떠나갈 수 없는 마음보다는 타자를 일방적으로 소외된 약자로 자신과 구분 짓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이 불러내는 연민의 감정이란 자발적이기보다는 기성의 논리와 체계에 의해 이미 정해진 ‘도덕’이 부른, 어떤 강제적인 책임에 가깝다. 이 소설에서 운전자가 자신을 지켜보는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한 뒤 돈을 건네었듯, 도덕이라는 틀을 거친 연민의 감정이란 정해진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굴레 내부에서 선과 옳음의 영역을 좇는 일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연민이란 기존의 시스템에 안착하고 그것의 일부로 안전하게 자리 잡기 위한 것이어서,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 채” 우리가 이토록 쉽게 사과하도록 만든다. 거기에는 매리와 그 아버지의 고통이나, 그들을 소외된 약자로 규정짓는 시선의 작동 원리 같은 일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 매리의 아버지가 돈을 쥐고서도 한숨처럼 “이렇게 쉽다니”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크레인이 매리를 끌어올리기를 기다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존재는 한결 심각한 사태로 다가온다. 매리 앞에 몰려든 이들 중 왼편에 있는 이들은 이 사건을 일종의 축제나 서커스를 대하듯 흥겨운 분위기에 빠져 있다. 이 소설은 그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흥분감” 속에서, “무엇이 끌어올려지는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관하지 않”은 채 이곳으로 몰려와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 오른편에 있는 이들은 그 폭력 사태에 반기를 들기 위해 모였다고 말하지만, 소설은 이들 역시 이 비극에 대해 구경꾼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즉 그들이 관심 두는 것 역시 매리의 고통이라고는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여기 몰려든 사람들은 매리를 끌어올리는 일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입장과는 무관하게, 매리의 고통에 대해 짐작하거나 관심 두는 일과는 멀리 있다. 매리의 위치에서 이들은 모두 같은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이 소설은 매리라는 인물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 매리 자신에서부터 익명적 군중에 이르기까지 책임의 문제를 질문하며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소설이 그렇게 파고들면 들수록 우리는 매리의 비극이 매리 자신을 비롯해 그 사태를 방관하는 모든 이들과 연루된 것임을 새삼 기억해야 한다.
    타자의 고통에 한결같이 무감한 이 소설 속 군중을 보며, 우리는 한 사람의 불행이, 여기 멀리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겠다는 자기반성에 닿기가 쉽다. 그러나 소설은 이러한 자기반성 역시 너무 쉬운 논리를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야 한다. 즉 우리가 느껴야 하는 이 책임이 도덕을 기반으로 한 당위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 물어야 한다. 우리의 책임이 기존의 시스템 내부에 주어져 있는 선과 악의 굴레를 오가며 발생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차에 뛰어든 매리에게 돈을 쥐어주는 식의 연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그 문제 제기 방식은 많은 경우 아직 도덕과 당위의 문제를 벗어나고 있지 못해 보인다. 매리라는 순진한 인물과 거기 대립되는 영악한 주변인들, 그리고 이 모두를 소외시키며 관람하기만 하는 군중의 존재는 여전히 전형적인 이분법과 도덕의 굴레를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삶은 선과 악이라는 자명한 구분이 불가능한 순간 속에서 더욱 우리를 죄어 오고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가. 삶이 그런 것이라면, 문학 역시 이미 주어진 기준에 의해 선과 악을 가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적 기준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는 모두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마음들, 이성적 판단과는 별개로 타자를 떠나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마음 같은 것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가치를 두고 우리는 윤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윤리와 도덕을 구분 짓게 될 때,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양을 비롯한 열쇠, 번개 등의 무리에게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이들은 매리와 함께 성매매를 이용해 지낼 곳을 구해 다녔으며 매리를 자신들의 복수와 장난에 이용하기까지 하지만, 막상 자신들 장난의 결과로 매리가 컨테이너에 갇히자 더없이 불편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매리라는 존재는 이들에게 의도와는 다르게 벌어진 비극이자 그럼에도 분명히 자신들이 연루된 비극이어서, 이들은 컨테이너를 완전히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매리에게 뛰어들지도 못한 채 매리의 주머니에 사탕을 계속 채워 넣을 뿐이다. 이들은 매리를 구경하러 몰려든 관중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스스로에게 “너라고 다른 줄 알아?”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다가도, 그 비극이 “우리 탓이 아니라고” 되뇌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비극을 초래한 자로 자신을 위치 짓다가도 그것이 내 탓이 아니라고 변명해야 할 때,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그 비극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이들은 선과 악이라는 굴레로는 규정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 규정되지 않는 위치가, 사탕을 쥐어주다가도 다시 그곳의 어둠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마음이, 우리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몰아넣는다.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고 그것의 책임을 묻는 일은 이런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박송아의 소설이 우리를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게 더욱 짓누르기를 기다려 본다.

 

 

 

작가소개 / 이재원(문학평론가)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2012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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