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에세이_사랑의 정치, 사랑의 윤리] 나만 그런가

 

[특집 에세이_사랑의 정치, 사랑의 윤리]

 

 


나만 그런가.

 

 

 

서효인

 

 

 

    나는 사랑을 한다. 아내를 사랑하고 딸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열심히 산다. 새벽에 눈을 뜨고 밤늦게 퇴근하며 집안일에 많이 참여하지 못해 미안해한다. 아이들이 아프면 내가 더 아프지만 아이를 눈에 넣으면 별로 안 아플 것만 같다. 나만 그런가. 나만 팔불출인가.
    사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한다(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모를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한다. 많은 이들이, 딱 여기까지 사랑한다. 가족을 사랑하기에도 우리의 시간은 모자라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활활 불태워야, 가족과 안정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가족의 부양을 위해서 일하는 아빠 또는 그것을 실패해 의기소침한 아버지. 가족을 위해서 무엇이든 다하는 엄마, 그것에 압류된 어머니의 삶.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 그런데도 온전히 행복하지 않은 청소년들. 사랑이라는 이름의 거울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절로 인해 왜곡현상이 생긴 듯하다. 거기에 서서 본 우리의 얼굴은 별로 아름답지 않다. 어딘가는 과장되거나 돌출하였고, 어떤 곳은 축소되거나 숨겨졌다. 우리의 사랑은, 가족에 의해 왜곡되었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가족은 혈연에 의한 사랑으로 강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는 상관없이, 개인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작용한다. 진학에 실패해도, 사업에 실패해도, 연애에 실패해도 가족에게 기대며, 죽을병에 걸렸거나 뺑소니 사고를 당해도 돌아갈 곳은 결국 가족이며, 가족이 없는 개인은 홀로 쓸쓸히 실패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끝이 죽음이라고 해도, 가족이 없는 그를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보건복지부? 시청? 동사무소 직원? 이웃? 빚쟁이? 아무도 없다. 가족은 결국 가파른 절벽 앞에 세워진 사랑이라는 이름의 펜스다. 우리의 안전 펜스는 가족이라 불리는 최소한의 연대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으며, 심지어 시혜나 배려에 대한 관용적 표현으로 ‘가족 같은’, ‘내 아들처럼 생각하고’, ‘너는 부모도 없느냐’ 따위의 말이 쓰인다.
    가족의 사랑은 그것의 본질은 모두 같겠으나 그것의 표출은 가정의 사정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진다. 개인의 노력 여하가 아닌, 태어난 가정의 경제 능력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너무 잘 알아서,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유행어가 생기자 그것에 대한 부차적 설명 없이도 직관적으로 대부분이 알아들을 수 있다. 거기에 딸려오는 생각, 나는 흙수저구나. 내가 흙을 퍼먹고 살았구나. 가족으로 나누어진 계층에서 탈출하는 일은 어지간히 쉽지 않다. 사다리는 끊어졌고 유리천장은 높고 완고하다. 이것이 다 사랑으로 해결될 일인가. 대한민국이라는 정글에 노출된 개인이 숨을 곳은 가족의 품뿐이지만, 우리 가족이 지금 이 꼴이 아니었더라면, 정글의 먹이사슬에서 상위에 위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보다는 좀 나을 텐데, 나보다 못한 사람들 잡아먹어 가면서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우리 부모님은 참 돈도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몇몇뿐인가. 그들만이 불평불만 분자에 부모(가족)의 사랑도 모르는 천하의 불효자인 것인가.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절박하고 절실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가족. 가족의 품에서 개인은 타인을 살펴볼 여유도 필요성도 없다. 타인이 없는 철저한 개인, 타인이 아닌 유일한 연대체인 가족. 결국 우리가 기댈 곳은 가족밖에 없으며, 우리가 원망할 것도 가족이 유일하다. 이쯤 되면 가족을 사랑해야 할 명분은 충분하다. 같은 이유로 가족이 아닌 타인을 사랑할 이유도 찾기 어려워진다. 그들에 대한 관심은 그저, 내 가족에게 해가 되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나 쓰이기 십상이다. 사랑이 충만한 가족 안에서 우리는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어깨를 걸지 않는다. 3~4인이 주고받는 내밀한 정서,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깊고도 좁은 것이다. 가뭄에 찌든 마을에 있는 유일한 우물과 같은 사랑. 사랑이 나올 우물은 거기뿐이기에 가족은 결국 가족을 위해 소모된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기저에는 마모된 사랑이 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자연스레 전이된다. 충과 효가 같은 단어로 묶이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초대 대통령은 국부가 되고, 지금의 대통령은 비판이 불가능한 신성한 존재가 된다. 물론 우리는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국가대표 축구팀을 사랑하고, 어쩌면 국가도 진정 사랑할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치킨 따위를 배달시켜 먹으면서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다, 대한민국이 이기거나 골을 넣으면 가족끼리 부둥켜안는 그 모습이 사랑이 아니라면, 과연 이 땅에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가족을 사랑하기에 가족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처럼, 국가를 사랑하기에 일본군이 저지른 성노예 사건에는 크게 분노하고 베트남에서 우리나라가 저지른 만행에는 눈을 감는다. 내 집에 불쑥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듯이 외국인 노동자를 혐오한다. 안정적인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마음으로 선거마다 여당을 선택하고, 정책과 정부에 대한 비판에는 가족을 위해하는 듯한 위협을 느낀다. 사랑은 이렇게 움직인다. 효에서 충으로, 충에서 효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욕망과 불안이라는 모래주머니를 양발에 차고서.
    사랑은 그 아름다움만큼 실패하거나 추악해질 확률도 높다. 한민족이나 신토불이 같은 말을 낯부끄러움도 없이 쓰던 사람들이 가족(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 바다에서 떠난 아이들을 두고 그만 잊자고 말한다. 지겹다고 말하고, 이젠 진짜 잊어버린다. 진짜 가족이라면 그게 가능한 일인가. 누군가는 그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보상금이나 보험금의 수치를 가늠하면서. 가족애가 전이된 애국심은 그 확장의 폭이 어마어마했던 만큼 연결고리가 약하다. 애국이라 말하면서 사랑할 대상을 찾아, 아니 스스로의 사랑을 확인할 대상을 찾아 핏줄이 터진 듯 벌건 눈으로 광장을 헤맨다. 너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너는 이제 우리 가족이 아니다. 너는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너는 이제 우리 국민이 아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더구나 사랑이라는 게 확인과 판별이 가능한 그 무엇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서울 어느 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중학교 내 발달장애인 직업센터 건립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이 있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혹은 그들의 의견을 듣기 위한 설명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에 의해 설명회는 파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발달장애인의 부모들이 단상에 올라 무릎을 꿇었고, 지역 주민에게 호소했으며, 상대 주민들은 맞절을 하듯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서 제발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지으라고 통사정했다고 한다. 인터넷 기사로 노출된 무릎 꿇은 부모들의 사진은 기이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그 무엇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였다. 여기에 사랑이라니, 가당치 않은 생각이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가족을 사랑했던 것 같다. 장애인의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서 그들의 사랑을 실현시키기가 더 어렵다. 그들의 요구는 장애를 가진 자녀가 직업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가는 것일 테다. 반대편 부모의 요구는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부동산 값을 떨어뜨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은 흔들리는 땅처럼 마음에 지진을 일으킨다. 땅과 아파트의 값을 유지시키면서 떨어지는 사람의 값어치를 보며 사랑이라는 단어의 위치를 생각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제일은 사랑이요’라는 것이다. 가족 바깥에서 우리는 타인과 사회가 나를 지켜줄 것이란 믿음을 갖기 어렵고,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소망은 망상에 가까우며, 사랑은 퇴근길에 딸아이 먹을 아이스크림 살 때에나 잠시 피어오르다 만다. 겨우 그 정도 사랑을 우리는 공기인형처럼 부풀려 올린다. 공기인형이 춤을 춘다. 새로 생긴 족발집 앞인 것처럼, 세일 행사를 하는 통신회사 대리점 앞인 것처럼……. 그렇게 영원할 것 같은, 깨지기 쉬운 약속을 한다. 우리는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폭신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락하다. 우리와 가족이라는 울타리 바깥에서 사랑이라는 안정제는 없다. 말라빠진 족발처럼, 부가서비스만 그득한 계약서처럼. 그냥 그럭저럭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한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밖에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나만 미친 건가.

 

 

작가소개 / 서효인(시인)

– 1981년 출생.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이 있음. 제30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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