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을래] 난민입니까? 여행자입니다!

[함께 읽을래]

 

 

 

난민입니까? 여행자입니다!

– 장이지 시집 『라플란드 우체국』

 

 

이강진(문학평론가)

 

 

 

    영화 <가디언즈(Rise of the guardians, 2012)>는 재미있는 상상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각각의 기념일들을 상징하며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수호하는 정령들이 있고, 그들은 저마다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믿어주는 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설정이지요. 만약 반대로 아이들이 그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이 ‘가디언’들은 순식간에 가지고 있던 힘을 잃은 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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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직 자신의 존재를 납득시킬 수 있는 이들만이 타인과의 소통의 장에 나설 수 있으며, 나아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저 상상은, 과연 동화 속의 정령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일까요?

 

    부대의 자원이 FRMS에 기입되는 것이 아니라 FRMS에 맞추어 부대의 자원이 조정되었다. 해가 저물 무렵 나는 연병장을 열 바퀴씩 돌고 편성 부대 창고에 올라가 공구들을 망가뜨렸다. 가끔은 군무원과 함께 공구를 망가뜨렸다. 세계가 엑셀에 기입되는 것이 아니라 엑셀에 맞추어 세계가 조정된다. 그것은,
 
    세계가 꾸는 꿈이 플랫이 아니라 세계는 플랫의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사는 그림자 세계」 부분

 

 

    여기에 대해 장이지 시인이 내놓는 답변은 ‘아니다’로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 시인은 우리가 품었던 의문 이상으로 도발적인, 혹은 어쩌면 더욱 비관적인 상상에 가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 인용된 시의 제목으로부터 이미 알 수 있듯이, 장이지 시인에게 있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세계는 어쩌면 단지 ‘그림자 세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는 불완전한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림자 세계’라니, 대체 무엇의 그림자라는 것일까요? 자연히 우리는 시의 말미에 제시된 ‘플랫’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쉬운 독해를 원한다면 ‘플랫의 꿈에 지나지 않는 세계’의 이미지에 플라톤의 동굴 우화를 끼워 맞춰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고의 이상을 상정한 뒤 그것에 반대되는 허상의 세계를 폄하했던 플라톤의 태도와는 달리, 시인이 제시하는 ‘플랫’과 ‘그림자 세계’는 좀 더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플랫’이 시집 곳곳에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내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혹은 어떤 형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모호함이야말로 플랫(이라 칭해지는 존재)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진정한 공포를 구성하는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진실로 존재하는지를 확신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근거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셈이니까 말이죠. 게다가 더욱 섬뜩한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느끼는 혼란과는 전혀 상관없이, 플랫은 여전히 이 세계를 규정하고, 구성하며, 자신을 본딴 ‘그림자 세계’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존재는 이 세계의 질서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그저 빈자리를 메울 뿐인 도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시인은, 그리고 그의 시를 읽는 우리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물음에 도달합니다: 전산상의 자료를 정리하는 프로그램인 FRMS에 맞추어 ‘조정되는’ 실제의 공구들처럼, 어쩌면 우리 각자의 존재들 또한 어떤 정리된 데이터들 속에서 알게 모르게 ‘조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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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말할 것 없이, 이러한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매트릭스(The Matrix, 1999)>가 그려내던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미래세계를 떠올리게끔 합니다. 알맞은 위치에 삽입된 ‘데이터’로서의 삶이라는 것은, 자연히 그것을 통제할 프로그램-기계의 의지에 복종하는 존재의 방식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다만 『라플란드 우체국』이 <매트릭스>와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있는 지점은, 영화 속의 기계문명이 명확한 실체를 지니고, 또 직접 맞서 싸울 수 있는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반해, 시집에 드리운 ‘플랫’의 그림자는 앞서 말했듯이 그 존재여부조차 불투명한 음영이라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언제부터인가 자고 일어나면/플랫이다.//격멸해야 할/아무런/적(敵)도 없다”(「지워진 사람:플랫」)는 시인의 당황스러움이 현실이 되는 세계인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종류의 상상이 단지 장이지 시인의, 그리고 『라플란드 우체국』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우리에게/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그것이 비극이다”(진은영, 「70년대산(産)」, 『우리는 매일매일』)라는 식의 허탈한 술회는 이미 우리 시에서 익숙한 모습들이 된 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만약 이것이 정말로 ‘매트릭스’의 세계라면 능히 ‘네오’가 되어야 할 존재―은 이 세계와 끊임없이 대결하려 하지만, ‘플랫’은 단지 “그러한 흔적들을/무(無)로 돌려주고” 조용히 이곳에-있을 뿐이니까요. 이 무시무시한 ‘아무것도 아님’의 상태에 대해, 무력한 열정만을 가진 우리는 그저 “조금 슬프다”고 말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마흔두 살. 미혼. 나름대로 문학박사.
 
    (…)
 
    지인들은 가끔 그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통해 나타나는
    자신들의 무능을 향한 증오였다.
    거의 제도(制度)가 된 증오였다.
 
    ―「어떤 무능: 기계들」 부분

 

 

    그리하여 「기계들」연작에 이르면, 시인이 느끼는 이 무력감은 한계까지 치닫게 됩니다. 평생을 바쳐온 시라는 것이 극도의 ‘무능’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증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이 현실 속에서, 그러한 ‘플랫’의 기획에 휘둘리지 않고 살리라는 선언을 ‘비어(beer)’에 엉망으로 취한 채 ‘비어(非語)’로 내뱉을 수밖에 없는 삶이라니! 이제는 그러한 자신을 증오하는 것조차 너무나도 반복적인 일이 되어버리고, 마침내 ‘거의 제도(制度)가 된 증오’로 변해버리는 이 형벌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사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고통”(「지워진 사람:플랫」)이라는 시인의 고백을 상기하게 됩니다. 왜 나는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묻게 되는 참담함, “텔레비전에/떠들썩한 자살 사건이 나오면/어김없이 친구들에게서 전화가”오는,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못내 “면목이 없습니다…….”(「안부」)라며 고개를 떨구어야 하는 생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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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시 라플란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라플란드 우체국, 그곳은 산타클로스에게 보낸 편지가 모여드는 곳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무도 믿지 않게 되어버린 바로 그 우체국 말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잃어버린 우체국’에 편지를 보내는 중입니다. ‘플랫’의 세계가 만들어낸 인터페이스에 삽입되지 못한 생의 시간들을, 그 모든 버려진 ‘로그 파일’들을 하나씩 꺼내보고 정리하면서,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의 방에 비밀 일기장을 숨기듯 그것들을 머나먼 라플란드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미 눈치를 채셨을 테지요. 시집의 전반부에 배치된 「우편」연작들은 바로 그 편지들의 일부입니다. 언뜻 이것은 절망에 사로잡힌 자가 스스로를 폐기하려는 마지막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동시에 실낱같은 희망을 남겨두기 위한 애틋한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처음 동화 속 정령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라플란드 우체국』 역시도 우리가 그것을 믿어주지 않은 까닭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면서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허황된 꿈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 허황되면 또 어떤가요. 시인은 그렇게 꿈을 꾸고 있는 것을요. 이렇게 모아둔 편지들이, 언젠가는 라플란드 우체국과 함께 되살아나, 마침내 ‘플랫’의 프로그램 속 데이터로서의 ‘나’를 대신해줄 그날을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 꿈과 희망의 수호자들이, 단지 우리의 믿음만으로 부릴 수 있었던 저 수많은 마법들을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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