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무도!] 고룡을 말한다 (上)

[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고룡을 말한다(上)

 

 

진산

 

 

 

    이국적 분위기, 추리적 서사 전개, 인생의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독특한 문체, 그러면서도 기괴한 면에서는 중국 전통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스타일리시한 작가

 

 

    1. 고룡은 누구인가?

 

고룡의 <비도탈명>.1)
이 책을 도서관에서 다시 빌려 봤는데
마지막 장에 어느 이름 모를 이가 이렇게 써놓았다.
고룡, 그는 인생을 아는 자이다.
흠.
그래서 나도 이렇게 써 놓았다.
그대 역시 인생을 아는 자이다.
 
– 옛 PC 통신 시절, 하이텔 무림동 중국무협란에서.

 

 

    고룡이라는 작가는 요사이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일 것이다. 중국무협이 오래 전처럼 거의 유일한 장편 읽을거리의 대명사가 아니게 된 시절, 김용이라는 이름 정도가 일반적인 독자에게 알려진 무협의 대표 아이콘이라 했던 시대이니.
    그렇게 잊혀진, 사실은 한 번도 국내 독서 시장에서 주류는 되지 못했던 작가. 지금은 큰 도서관의 구석자리가 아니면 찾아보기도 힘든 이 작가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를 언급하지 않고 창작무협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1) 고룡 작 <다정검객 무정검>의 번역본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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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오른쪽: 고룡 왼쪽: 와룡생
 
 
 

 

 

    그의 본명은 웅요화(熊燿華). 1936년생이다. 태어난 곳은 홍콩이나, 14세에 대만으로 이주했다.
    18세에 부모 사망으로 생활의 곤란을 겪고, 친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만의 담강대학에서 에스파니아 문학을 전공, 졸업 후에 군 복무. 제대 후에 생활고를 해결할 방편으로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
    처녀작은 <창궁신검>이다. 죽기 전까지 80여 편의 무협소설을 집필했고, 그 중 많은 수가 영화나 비디오로 만들어졌다.
    대표작은 <다정검객 무정검>, <초류향전기>, <절대쌍교> 등이며 그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었고 무협 시장이 그렇듯이 위작들도 많다.
    그는 그의 수많은 주인공들처럼 쉬지 않고 술을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1985년 9월 21일 별세했다. 그의 소설은 그의 삶을 닮았고, 그의 삶은 그의 소설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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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고룡의 처녀작 <창궁신검>. 국내에는 <귀영쌍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 무협은 왜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는가?

 

    무협 소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한국 대중소설 시장을 장악해 왔다. 단순하게 보면 그 통속성이 독자에게 호소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겠지만 자세히 풀어 말하자면 꽤나 질긴 문화의 한 단면이다.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좋은 놈(이라고 생각되는 쪽)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되는 쪽)을 혼내주고 승리를 거머쥐는, 소위 사필귀정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좋은 놈/나쁜 놈’의 구별은 깊이 있는 윤리적, 철학적 가치 판단에서만 이루어지진 않는다. 요컨대 독자가 느끼기에 그러하면 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대중의 판단이라는 면에서 옳기도 하고, 혹은 얄팍하기도 하다.
    어쨌든 작가의 필력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좋은 놈/나쁜 놈’에 대해, 그리고 그 승리 방식의 흥미진진함과 타당함에 대해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느냐, 동의를 얻어내고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세계가 복잡해져갈수록 이 설득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이 설득의 단계를 쪼개 보고 그 진의에 대해서 궁구하는 방식으로 목표를 바꾸기도 한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좋은가?’ 당신이 지금껏 ‘옳다’고 생각한 그것이 정말 옳을까?
    이런 화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말해주는 것 역시 ‘이야기’의 새로운 도전이 된다. 많은 진지한 소설, 영화, 드라마들이 그걸 시도한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보다 좀 더 단순하고 확연하게 그것을 들려주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이 대중적인 이야기, 통속적인 이야기들이 다스리는 영역이다.
    무협은 흔히 ‘무(武)로써 협(俠)을 행하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바로 이 영역의 필두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무협이 오래도록 그 영역의 패자로 자리 잡았던 것은, 그리고 지금 현재도 여전히 약간의 외피만 변형되었을 뿐?‘이기어검(以氣御劍)’이 ‘파이어볼’로, ‘절대고수’가 ‘9서클의 고위 마법사’로?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얼핏 보면 기이하게 왜곡된 뜬구름 잡기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래부터 사람들의 마음이 끌리는 이야기의 단순성, 저항성, 사필귀정의 미덕에 덧붙여, 유희 문화에 대한 인정불가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가 한몫을 했다.
    만약 수십 년 전부터 무협이 아닌 우리 고유의 ‘노는 이야기’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가 있었다면 현재의 통속소설계는 전혀 다른 모양새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류’의 이야기들은 버젓한 서재에 자리 잡을 수 없었고,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이야기를 필요로 했고, 독재정권의 그림자 속에서는 현실을 배경으로 자칫 삐딱한 이야기를 했다가는 바로 쇠고랑을 찰 수 있었다.
    다만 정치적인 저항의 문제만은 아니다. 문화의 억압은 협소적 의미의 정치적 억압을 넘어 보다 폭넓고 심층적인 억압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들은 조용히 숨어들어갔다. 한국의 현실 배경이 아닌 중국에도 없는 가상 중국의 협객담 속으로, 어둑한 만화 대여점으로. 무의식적 저항이 아닌 의식적 회피와 도락의 세계로.
그렇게 한국의 독자들은 무협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갔다.

 

 

 

    3. 한국무협에 드리운 고룡의 그림자

 

    한국무협에 영향을 끼친 중국의 무협 작가는 대표적으로 김용, 와룡생, 고룡을 들 수 있다.

 

    신파무협의 대가 김용의 경우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지경이지만, 실질적으로 독자 대중에게 어필한 정도에 비해 창작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보다 표층적이다.
    서구적인 인물과 세계 구성의 정밀함이 김용의 장점인데, 그 중 인물과 주제의 깊이는 모방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세계 구성의 아류는 너나 할 것 없이 무협 세계에 대한 하나의 공리로 자리 잡아서 그것을 김용만의 것으로 인지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즉, 김용의 영향은 외피의 모사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와룡생은 장개석군의 정보장교였고, 그가 무협에 손을 댄 것도 공산국가 중공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다 대중적인 안보교육문화운동을 펼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다.
    와룡생의 작품에서는 정과 사의 대결 구도가 뚜렷하다. 대만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인 북한과 적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초기 무협 독자들에게는 와룡생의 그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굉장한 흥미를 유발했을 것이다.

 

    반면 고룡의 경우에는 외국문학 전공의 영향 탓인지 이국적 분위기, 추리적 서사 전개, 인생의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독특한 문체, 그러면서도 기괴한 면에서는 중국 전통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스타일리시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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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 영상화된 대표작 <다정검객 무정검>의 한 장면. 분위기 있는 작가의 분위기 있는 세계

 

 

    이런 작가는 다른 작가의 마음을 쉽게 흔들어, 김용이나 와룡생처럼 세계관과 외피보다도 오히려 더 밑바닥에서 그를 닮고 싶게 만든다. 하여, ‘고룡류’ ‘고룡풍’이라는 분류가 가능할 정도다.

 

 

 

    4. 낯선 시작, 추리적 탐구

 

    『고룡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특이하고 낯선 장면 전개 방식이다.

 

    보통 무협 소설에서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다만 그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은 대체로 단계적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길을 가다가,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가고, 가보니 여자가 남자들에게 겁탈을 당하고 있고, 주인공이 나서서 구해주고. 이런 식이다. 소위 말하는 클리셰적 전개다.
    또는 숲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 한 노인이 피를 흘리며 악당들에게 쫓기고 있고, 그를 도와 악당들을 물리치자 노인은 주인공에게 절세의 비급을 넘겨주면서, 무림의 앞날을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고룡의 장면은 절대로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느닷없이 나타난 기괴하게 생긴 새를 따라간다. 도착한 곳은 묘지이고, 새는 사라진다. 대신 그는 관 안에 앉아 있는 창백한 얼굴의 노인을 본다.
    노인은 ‘무림의 앞날을 부탁한다’든가 ‘이 물건을 소림사의 누구누구에게’라든가 하는 무협 소설의 지극히 기본적인 대사를 하지 않고 느닷없이 ‘혈앵무를 아느냐?’라고 하며 저주어린 마계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인은 죽는다. 자신이 한 그 신비스러운 이야기의 분위기에 알맞은, 기괴하고 이상한 방식으로.
 
    -<혈앵무>에서

 

    한 사람이 시장통을 걸어간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호기심에 다가가보니, 덩치가 큰 애꾸눈 여자가 멀쩡한 생사람을 탁자 위에 눕혀놓고 사람고기를 판다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 여자는 구경꾼들 틈 사이에 낀 그 사람의 원수이고, 탁자 위에 누운 사람은 그의 은인이기 때문에 그는 꼼짝없이 여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된다.
 
    -<다정검객 무정검>에서

 

    두 젊은이가 내일의 결투에 대해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고 있다. 외딴 술집 마당에 갑자기 만두 장수가 나타난다. 이어서 엿 장수, 떡 장수, 무슨 장수, 무슨 장수 등 그 자리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장사꾼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조용하던 술집 마당은 갑자기 저자거리처럼 북적거린다. 알고 보니 그들은 이 젊은이들에게 내일의 결투에 참가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으러 온 사람들이다.
 
    -<육소봉 전기>에서

 

    한 젊은이가 큰 집에 들어간다. 호화롭게 꾸며진 방문이 있다. 그 방문 너머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젊은이로 하여금 문을 열도록 유혹한다. 호화로운 방, 아름다운 여자. 그러나 그가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아름다운 방이 아니라 더러운 마구간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목에 쇠줄을 감은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절대쌍교>에서

 

 

    위 예시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낯선 장면’이라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이어져온 그림과 전혀 이어지지 않는, 무척 엉뚱하고 생경한 장면이 불쑥 튀어나와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 호기심으로 다음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방식이다.

 

    시장통에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구경한다.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산 사람의 고기를 팔겠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여인이 있다.
    외딴 술집 마당은 조용하다. 시장이 아니다. 이건 자연스럽다. 그런데 갑자기 장사꾼들이? 그것도 하나 둘도 아니고 여럿이 연달아? 무엇인가 흉계가 있음직하다.
    호화로운 문 뒤에는 호화로운 방이 있어야 정상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자는 그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갑자기 나타나는 마구간? 엉뚱하고 난데없는 장면이다.
    이런 난데없음은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답을 얻는다. 괴이한 짓을 한 자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jinsan-4그림 4) 검과 부채의 대결이라는 모순된 멋, 고룡의 세계

 

    서양 추리소설의 고전적 전통 중에는 중국인은 추리소설에 등장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있었다.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 비논리적이고 신비해 보이는 존재들은 논리와 합리성을 생명으로 하는 추리문학의 정신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고룡의 기이한 무협들은 딱 그 말의 반증처럼 보인다. 모든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의 이야기들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전개된다.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신비한 안개 뒤편에 숨은 인생의 격정과 씁쓸함을 낱낱이 드러내준다.

 

   추리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논리가 아닌 직관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는 반추리, 반무협.
    고룡의 세계는 서양문학과 중국 전기문학의 사생아를 닮았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사생아인 한국 무협에도, 그 이국적이면서 동시에 무국적인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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