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리뷰] 일어난 일을 이르는 이름

 

[문학 신간 리뷰]

 

 


일어난 일을 이르는 이름

– 임승유,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문학과지성사, 2015)

 

 

 

김태선(문학평론가)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 사람에 의한 행위에서든 자연의 운행 중에 벌어진 우연한 사태이든 어떤 일의 일어남은 그것을 겪는 주체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기 이전에 감각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감각이라는 건 해석 작용(sensation)이 이전의 것(sens), 의미 작용(signification) 이전의 징후(sign)다. 감각의 겪음으로 일어나는 최초의 사태는 이처럼 그 힘의 연속적인 파동에 대한 동요다. 그 파동에 대한 의미화는 연속성을 끊어내어 불연속적인 접합(articulation)으로 만들어 범주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때문에 사건을 겪은 주체는 그것을 의미화하기 이전에는 어떤 동요를 겪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직은 확정할 수 없기에 그 감각의 덩어리에 의한 긴장 지평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의미화 되기 이전의, 겪음의 층위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지평 위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언어를 배열하는 시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임승유의 첫 번째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는 어떤 일어난 사건을 겪는 주체가 자신의 겪음을 하나의 의미로 의미화하기보다는 그 이전 단계의 긴장적 지평에 머무르며 그 긴장의 힘을 유지한다. 시의 주체가 던지는 질문은 따라서 겪음의 논리, 감각의 논리를 따른다. 개념화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이기에 시의 발화를 통해 우리에게 현시되는 낱말의 조직들은 비정합적인 것처럼 보인다. 담화와 담화 사이의 맥락이 단절되어 있다거나, 순차적인 흐름의 시간의 움직임보다는 곁에 있는 사물들로의 공간적인 미끄러짐이 나타난다. 연접(連接)보다는 이접(離接)이 주로 나타나며 기묘한 충돌들의 연쇄를 낳는다. 일어난 일의 정체를 밝히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겪은 이의 상태에 더 주목하기에 문장의 이어짐은 객관화된 논리보다는 무언가 내밀함을 감추면서 드러내는 듯한 움직임을 수행한다.
시의 주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로 전하고 있지만, 그 발화는 마치 드러냄을 통해 감추려는 것처럼, 마치 말을 지우기 위한 말처럼 나타난다. 시인은 사물이 스스로 말하는 그 웅얼거림을 포착해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를 전하고 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인 것처럼 시를 쓴다. 자신이 겪은 일을 온전히 전하려는 듯이. 언어의 범주화 작용으로 사물이 살해당하지 않도록, 언어 그 자체가 다시 사물이 되어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쓰고자 하는 노력이다. 주체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은, 그리고 사건과 만나는 방식은 감각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감춰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사건과 마주함이 그것을 겪는 이에게 어떤 일인지 이해하기 위해선 사건에 대한 판단보다는 그것을 겪은 주체가 전하는 정념적 발화의 독특한 양태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할 때도 있다.

 

친척 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그런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일 모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또 모자만 아는 일

        – 「 모자의 효과」 중에서

 

    시집의 첫 번째 자리에 놓여 있는 「모자의 효과」에는 친척 집에 가는 여자 아이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는 시작에서부터 일종의 감춤이 드러난다. “친척 집에 다녀와라”라고 여자 아이에게 지시하는 인물이 “가족 중 하나”라고 언급되는데, 그가 누구인지 발화의 주체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임승유의 시집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셈인데, 대개 시 쓰기 주체의 발화가 지향하는 곳은 일어난 일의 정체를 밝히려는 것보다는 일을 겪는 이에게 잇따르는 일련의 상태들이다. 가령 친척 집에 가는 일은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일견 어린아이가 친척 집에 가야 하니 자신을 꾸미기 위해 모자를 골라 쓰는 즐거운 정경을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상상 역시 판단에 뒤따른 작용일 뿐이다. “모자를 골라 쓰는 일”은 아직 의미화에 저항하는 긴장으로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 긴장적 층위의 발화는 어떤 일의 일어남에 대한 그림자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이 시는 “사촌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여긴 모르는 곳 구름과 이불 이불과 구름 잘못된 발음을 할 때처럼 죄책감이 들어”라는 담화로 그 일을 제시한다. 친척 간에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여자 아이에게 “잘못된 발음을 할 때처럼 죄책감”을 들게 하는 일이다. 여자 아이에겐 분명 외상적인 사건, 바깥으로부터의 침입이다. 그러나 시를 발화하는 주체는 사건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지 않는다. 일어난 일에 대해 “여긴 모르는 곳 구름과 이불과 구름”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여자 아이가 겪은 일은 아직 그에게 충전적 인식으로 다가오지 않은 어떤 긴장적 상태이기에 ‘모르는 곳’에서 일어난 일로 여겨질 뿐이다. ‘구름’과 ‘이불’이 지닌 ‘무언가를 가리고 덮는’ 속성을 우선 이 사태에 부여해 본다면, 그 일은 어떤 일인지는 ‘모르는’ 것이지만 여자 아이에게는 감추고 싶은 것에 해당할 것이다. 판단 이전에 일어나는 ‘죄책감’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바깥으로부터 침입이 일어난 일, 감추고 싶은 일이지만, 이 일은 여자 아이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될 사건일 수 있다. 행위는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상태는 상태를 겪는 주체의 실존이 된다. 그러나 그 상태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로 인해 만들어졌다면, 그로 인한 불안은 주체의 실존을 위협할 수 있다. 그 위협이 상상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든, 주체의 정념을 형상화하는 층위에서는 현실처럼 기능한다. 이때 주체가 이를 견뎌내기 위한 전략, 즉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행하는 움직임은 의미화 되지 않은 그 사건적 나타남에 의한 겪음으로부터 수반되는 정념에 대한 판단을 지연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풀잎과 꽃잎과 꽃잎과 풀잎 우린 그만큼 가까운가요?”라는 환유적인 움직임을 의미로 분극화되지 않은 긴장적 감응을 계속 인접해 있는 다른 기표로 전위시키는 움직임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짓이겨지는 풀잎과 짓이겨지는 꽃잎 중에 뭐가 더 진할까? 피는 물보다 진할까?” 물음은 계속되지만 그에 대한 판단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을 위해선 어두운 상태로 남아 있는 긴장적 감응을, 연속성의 층위에 머물러 있는 파동을 분절시켜 밝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분절이 일어나면 파동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인 수많은 의미들은 사상될 것이다. “모자 속에서는 나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는 진술처럼 자신이 감추려 하는 일이 ‘죄책감’의 정념에 가까운 까닭에, 일어난 일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의미만 남게 할 가능성이 크다.
    ‘모자의 효과’는 기표의 환유적인 연쇄를 통해 그 실체를 감추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감추고 있는 것은 비단 ‘나쁜 냄새’가 나는 ‘일어난 일’뿐일까. “모자를 쓰고 걸어갈 때 모자 속은 아무도 모르고 모자 속을 생각하면 모자 속이 있는 것만 같다”라는 표현을 살펴보면, 이는 모자 안에 감춰진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그러나 “모자 속이 있는 것만 같다”라는 부분을 살펴보면, 모자 속이라는 건 ‘생각’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가정으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비-존재라는 점을 일깨운다.
    모자는 머리를 가리는 도구다. 가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것으로 바꿔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쓰임은 가면과 유사하다. 시의 주체가 발화하는 지점에서 여자 아이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보다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다. 모자 안에 담겨 있는 건 여자 아이, 그러나 그 여자 아이의 정체성이란 것은 모자로 숨겨야 한다.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드러나게 된다면 자신의 존재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모자를 벗겨낸다면 드러나게 될 것은 결국 여자 아이의 비-존재다. 때문에 그 들켜서는 안 될 것을 그러나 시의 주체는 감춤으로써 드러낸다.

 

문장 속에서 살해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시작해야 한다
 
나는 소년을 두 번 만났다

        – 「 소년을 두 번 만났다」 중에서

 

    「소년을 두 번 만났다」는 기묘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다. 위의 인용이 바로 그 도입부인데, 시의 목소리가 말하는 “문장 속에서 살해”당한다는 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여기서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헤겔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전했던 말, “언어는 살해한다.”라는 문장을 떠올린다면 어떨까. 언어가 살해하는 건 바로 실재다. 가령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개를 ‘개’라고 명명할 때, 그 개의 실존을 이루는 모든 것은 사상되고 ‘개’라는 상징만 남게 된다. 구체적인 감각의 덩어리들을 대신해 추상적인 기호만 남게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발화 주체가 만드는 기본적인 문장은 ‘나는 ~이다.’ 혹은 ‘나는 ~한다.’의 형태다. 여기서 ‘나’라는 주어로 인해 그 문장을 발화하는 실존하는 인물의 구체성들은 모두 사상된다. 때문에 시의 목소리는 “문장 속에서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소년을 두 번 만났다”라고 문장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시의 흥미로운 부분은 소년을 두 번 만나는 일로 제시되는 이야기가 하나는 배용제의 「그녀」에서 가져온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보르헤스의 「의회」에서 가져온 문장이라는 점이다. 문장이 다른 문장을 호명함으로써 실재를 살해할 필요가 없는 국면을 연출해 내려는 의도인 것일까. 그런데 두 인용이 그려내는 장면들은 어떤 만남이라기보다는 스쳐서 지나가는 모습이다. 두 번 만나는 소년이지만, 만나서는 안 되었기에 그와 같은 모습으로 제시된 것일까.
    시 안에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작업은 인용 뒤에 이어지는 연에서 열거의 형태로 이어지는 낱말들에 “선유도, 김유정 생가, 땅끝마을 전망대, 대흥사,”와 같은 모습으로 삭제선을 넣는 일이다. 아마도 삭제된 낱말들은 소년과 관계된 현실의 사물들일 터, 이런 사물들을 살해한 뒤에 언어라는 몸을 입고 나타난 것들을 다시 살해한다. 문장 속에서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살해한 셈. 그렇게 소년과의 만남은 구원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살아남고 “구름 끝에 앉은 소년의 목이 대롱거린다”라는 표현처럼 문장 안의 소년은 살해당한다.
    그런데 이 일들은 모두 “시작해야 한다”라는 당위 명제에서 볼 수 있듯이 직접 실행에 옮기기 이전의 정황들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아직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오늘까지만 살려두자/ 이건 오늘까지 하는 다짐”이라는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준 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일어나게 해야 할 일이지만 마치 일어나기를 거부하는 듯한 시 쓰기 주체의 의지가 엿보인다. 무엇을 거부하려는 것일까. 소년을 살해하는 일, 소년과의 만남, 혹은 소년과의 만남 자체가 살해당하는 일…….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시의 주체는 마치 자신이 거부하는 것을 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 쓰기 주체는 이 모든 일이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시 쓰기 주체는 다시 보르헤스를 인용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가 살아오는 동안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커다란 사건이었고, 또한 그것은 계속해서 한없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라는 「엠마 순스」의 문장이다. ‘단 한 번의 커다란 사건’이란 외상적인 사건이자 주체가 실재와 조우하게 되는 사건이다.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아마도 이 시에서 소년과의 만남은 시 쓰기 주체가 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금지된, 복합적인 층위의 어떤 사건을 일컫는 것처럼 보인다. 만나서는 안 되는 소년을 만났다.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일어났다. 금지는 계속 작동하고 있다. 시 쓰기 주체는 그 일어난 일에 앞질러 그 사태를 앞서 반복함으로써 사전에 그 실재의 드러남을 은폐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타난 일은 이미 나타난 일, 이는 냄새를 풍긴다. 냄새는 숨기려고 해도 계속 퍼져 나간다.
    임승유의 시집에는 ‘냄새’라는 시어의 쓰임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데, 대개는 부정적인 것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령 “모자 속에서는 나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모자의 효과」), “나한테서 나는 냄새를 내가 맡는 날엔 태어나던 날의 비명을 뒤집어쓴다”(「묻지 마 장미」) 등의 표현이 그렇다. 냄새라는 건 그 냄새를 가능케 한 것의 원인이 어딘가에 있다는 어떤 흔적, 징후일 뿐이다. 그것의 정체는 분명치 않다. 다만 시 쓰기 주체는 그 냄새를 부끄러워하며 숨기고자 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숨기고자 하는 걸 감추면서 드러낸다는 건 과연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까.

 

허공, 저들끼리 부딪치며 아우성치는 것들
무수히 반짝거리는,아버지의 입안에서 맴돌던 냄새가
내 입안에서 맡아진다
자꾸만 내 이빨이 무시무시해진다

        – 「 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중에서

 

    시집의 마지막에 자리한 「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의 화자는 “저기 대문을 잠가 줘요”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분명 대문 밖에서 뭔가 화자가 두려워하는 것이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의 정체에 대해 화자는 “말랑하고 빨갛고 냄새가 나고 손으로 문대면 으깨지는 산딸기의 성장이 두려워”라고 전한다. 이 말은 그 정체를 알려주는 듯하면서도 그로부터 비껴나 있다. 그렇다면 그 곁에 있는 아버지는 어떠한가. “잇몸을 드러내며 아버지는 웃었다 나는 왜 고함을 쳤다라고 적지 않고 웃었다, 라고 적는지 모르겠다”라는 구절에서는 미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분명 아버지는 고함을 치는 사람, 그러나 “잇몸을 드러내며 아버지는 웃었다”라는 문장의 차원에서는 그 고함을 치는 장면은 은폐되어 있다. 고함치는 아버지의 존재가 아마도 두려움을 작동시키는 기저 중 하나일 수 있겠다. 문제는 아버지라는 두려움의 상징이 문장의 차원에서 조작된다는 점이다.
    임승유의 시집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시는 많지 않지만, 그 이름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그려내는 모습은 어딘가 의뭉스러운 느낌을 안겨 준다. 가령 “아버지는 집에 오다가 엄마랑 닮은 여자와 했다// 구름과도 하고 빈집과도 했다 맞아 죽는 개도 있었고 불쑥불쑥 자라는 애들도 있었다”(「건강하고 안전한 생활」)라든가 “하루 종일 어디 갔다가 아버지/ 한꺼번에 아버지가 되려 하는 아버지”, “만져줘요 한 번 더 태양/ 이런 말은 늦었지만 뺨은 얼얼해요”(「저녁」)라는 식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모자」에 등장하는 삼촌이나 사촌처럼 여성에게 바깥으로부터의 어떤 폭력적인 침입의 상징처럼 쓰인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에서도 그 폭력의 흔적은 “저기 대문을 나서면/ 어디서나 짙푸른 멍처럼 풀들이 자라났다”라고 나타난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행위를 저지르는 상징을 두고 시의 주체가 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일보다는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끌어안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잇몸이 가려우면/ 아버지를 뜯어 먹었다”라는 표현처럼 아버지는 ‘나’의 실존, ‘나’의 성장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그런 성장에 대해 시의 주체는 “징그러워요”라고 말한다. 그런 폭력적인 기원에 자신도 동참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는 분명 기묘한 연관이다. 대개의 경우라면 희생자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을 만한 이가 자신을 그 사슬의 기원처럼 엮고 있는 셈이다. 더 기묘한 건 그럼에도 시의 주체가 발산하는 정념은 어떤 패배감이나 체념에 젖어 있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불온함을 끌어안으며 그다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성장을 징그러워하면서도 “나는 잘 크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주체는 자신이 속한 세계에 기묘한 연루를 통해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를 쓴다.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잘 말하기 위해 가공하기보다는, 그 말할 수 없음을 말할 수 없음 자체로 드러낸다. 이로 인해 상징적 질서에 기묘한 파열이 일어난다. 그렇게, 갇혀 있고 닫혀 있던 것으로 간주되던 세계가 열린다. 시인의 언어가 이접, 즉 충돌의 형태로 배열됨으로 인해 상징적 질서에 틈이 생긴다. 외상적 사건을 그와 같은 형태로 다시 반복함으로 인해 감춰져 있던, 그러나 감추고 싶은 사건을 현시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틈의 드러남으로 인해 폭로되는 건 단순한 아픔보다는 상징적 질서라는 어떤 폭력적 기원의 은폐 작용이다. 폭로자는 자신이 그 기원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임승유 시의 주체에게 독특한 자리를 마련한다. 임승유의 시에서 발화하는 이는 자신을 아프게 한 그 사건의 책임으로부터 ‘나’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런 기묘한 자리의 주체다.
    우리는 시의 주체가 전하는 사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완전한 서사를 그려낼 수 없다. 시의 주체가 발화하는 사건들은 여전히 비밀스럽고 은밀한 정황들만 나열할 뿐이다. 문장과 문장은 서로 충돌하고 있으며, 많은 정황은 마치 억압된 것처럼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런 숨겨진 것들이 있음을 드러내는 발화 작용은 우리를 사건의 내밀함에 연루케 한다. 이때 우리는 사건을 겪은 주체의 정서를 다시 겪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도 그러한 외상적 사건의 반복에 연루되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물론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 사건을 다시 이 시간으로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돌이킬 수 있는 건 없다. 이 세계는 분명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난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사건은 우연처럼 일어난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을 겪는 주체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은 그런 무력함을 통해서 어떤 할 수 있음을 구현하는 데 있다. 시의 주체가 행하는 일은 그러한 사건을 명명하거나 해석하려는 일 대신,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한 감각을 전하고 질문하는 일이다. “구름 옆에 또 구름이 있는 것처럼”(「병원 앞으로 와」) 이 세계는 감춰진 것 옆에 계속 감춰진 것들이 있는 것처럼 있다. 의미의 지평 속에서 분절되지 않은 감각들은 어둡고 모호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시의 주체는 어둡고 모호한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거대한 사건을 계속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 던져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온몸으로 번지는 저 언어들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나”(「수화(手話)」), 시인은 자신을 수동적 상태에 처하게 만든 사건을 겪고 난 뒤에도 그 안에서 능동적인 지점을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때문에 자신의 겪음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시의 언어를 사물의 언어가 되도록 쓴다. 시의 말이 사물의 말이 된다는 것, 이는 아이를 낳는 일과도 같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모자의 효과」)라는 말, 어떤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나 갖고는 부족할” 것이다. 일어난 일을 이르기 위해선 이름이 필요하다. “아이와/ 아이와/ 아이를” 낳듯이 언어를 계속 태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인접한 사물들의 이름을 따라 이어지는 환유적 연쇄는 바깥에 있는 ‘나’의 아이들을 낳는 일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임승유의 시에 나타나는 외부 텍스트의 인용으로도 나타난다. 문장과 텍스트, 현실의 차원을 넘나드는 교통이다. 감추면서 드러내는 일은 그런 교통과 함께하면서 ‘나’를 가로막는 어떤 일어남에 틈을 내어 열림의 차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수동적 겪음에서 능동적인 나아감을 모색한다. 시인의 윤리는 자신이 수동적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는 실존 조건에 대해 부끄러움을 안고 있음에도, 이를 실증적인 역량으로 구현하려는 노력의 모습으로 움직인다. 그 노력으로 인해 우리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연루됨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소개 / 김태선(문학평론가)

–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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