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_차세대2차_소설] 조커

 

[2015년 AYAF 2차 선정작 / 소설]

 

 

조커

 

 


우다영

 

 

삽화_조커

 

    그날 오후 나는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의 소개였다. 그녀는 손수건이나 실크 양산이 유명한 잡화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어린 나이부터 무용을 했지만 열일곱 살 때 개에게 발목을 물려 진로를 바꿨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나는 약속 장소인 카페에 미리 가서 점심으로 커피와 베이글을 먹고 다음 주에 있을 회의보고서를 정리하며 그녀를 기다렸다. 머릿속으로 이따금 손수건이나 실크 양산 위에 놓는 자수에 대해 떠올리며 대화해 볼 만한 흥미로운 질문들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여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성 독감에 걸렸다는 연락을 해왔다. 괜찮다는 회신을 보내고 시원한 맥주를 주문했다. 하루 중 가장 무더운 시간에 거리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카페는 콘크리트 골조가 드러난 높은 천장과 한쪽 벽이 완전히 개방된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혓바닥처럼 둥글게 밀려 들어와 알루미늄 테이블과 의자를 달궜지만 대부분의 자리에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일찍 자리를 잡은 덕분에 깊숙한 그늘 속에서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그런 카페 안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두 잔째 맥주를 주문했을 때 한 여자가 카페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가냘픈 여자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연회색 원피스를 입고 낮은 굽의 오픈 토우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맵시가 괜찮았다. 머리는 단정한 숏 컷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꺾어 더운 공기를 휘저으며 천천히 돌아가는 천장의 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거둬 다시 회의 자료를 훑었다. 값과 합과 차, 또는 비율이나 확률을 표시하는 단조로운 숫자들이었다. 별달리 읽을거리를 가져오지 않아 혼자 맥주를 홀짝이며 할 일이라곤 그런 것뿐이었다.
    여자는 내 자리로 다가와 테이블 끝에 손을 올렸다. 손톱이 짧게 정리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자 여자는 앉아도 되나요, 하고 맞은편에 비어 있는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앉은 테이블은 양쪽에 각각 의자 세 개가 마주 놓인 육인용 자리였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사람이 앉는다면 일행처럼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카페 안을 둘러보니 모든 테이블이 차 있었고 혼자서 육인용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러시죠, 하고 대답한 뒤 다시 하얗고 빳빳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병에 든 라임 탄산수와 얼음 잔을 주문했다. 얼음물도 한 잔 주문하여 단숨에 들이켰다. 아마도 여자는 3호선 역에서 내려 이곳까지 걸어온 모양이었다. 2호선 역에서는 번화한 거리를 따라 조금만 걸으면 되지만, 3호선 역에서 이 카페까지는 가정집과 가정집을 개조한 사무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상점이나 음식점, 들어가 쉴 수 있는 작은 카페도 하나 없는 그 길은 평평해 보이지만 아주 완만한 오르막이어서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나는 새하얗게 올라오는 반사열을 밟으며 텅 빈 대로를 걷는 여자를 상상해 보았다. 왜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리 이상한 일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았다.
    여자는 거칠게 숨을 내쉬다가 이내 차분한 호흡을 찾았다. 상기되었던 뺨도 창백하고 투명한 색이 되었다. 나는 여자의 목과 쇄골로 이어지는 피부가 부드럽게 들썩이다가 가라앉는 모습을 이따금 서류 너머로 보았다. 여자는 왼쪽 손목에 찬 얇은 가죽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며 출입문 너머로 태양광에 반사되어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입간판을 바라보거나 얼음 잔에 맺힌 작은 물방울들을 캐러멜 색 티슈로 닦아내었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내 쪽을 쳐다보는 일은 없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화장기 없는 입술을 가볍게 다물고 그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지만 멍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여자를 지켜보는 것은 의외로 쉽고 지루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화를 쓸 수 있을까요, 하고 여자가 물었을 때 나는 긴장하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내 시선에 대한 질책이나 경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부탁을 거절할 경우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선선히 휴대폰을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찍한 벽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남겨진 작은 토트백과 멀어지는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자는 파이프가 노출된 회갈색 기둥 곁에 서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지 한 번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여자는 짤막하게 문자를 보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누굴 기다리나요?” 여자가 물었다.
    “네. 그런데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머릿속에 있던 질문을 받아 나는 조금 놀라며 대답했다.
    “일어날 건가요?”
    “그래야죠. 마저 마시면요.” 반쯤 남은 맥주잔을 들어 보이며 나는 여유로운 체했다.
    “그럼” 여자는 조금 망설였다. “제가 한잔 더 살게요. 그 전화로 연락이 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번에도 여자의 얼굴에는 거절할 리 없다는 단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곤란한 투로 말했다. “읽을거리가 다 떨어져서요.”
    여자는 내 앞에 놓인 숫자로 가득한 서류를 가만히 보다가 싱긋 웃었다. “금융사에서 일하나요?”
    “비슷합니다.” 실은 정확했다.
    여자가 가볍게 팔짱을 꼈다. “숫자에 대해 좀 아시겠네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머리를 굴렸다. “복잡해 보이지만 답은 시시하다는 것?”
    “시시해요?” 여자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습성을 안다면 다루기 쉽죠.”
    “동물처럼 말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들은 불규칙한 방식으로 나열되지만 결국엔 규칙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니까요. 오르거나, 내려가거나. 시시한 습성이죠.”
    여자는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살짝 들어 내게 묻지 않고 맥주 한 잔과 차가운 히비스커스를 주문했다. 나는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물었다.
    “모태신앙인가요?”
    여자는 빤히 나를 쳐다봤다.
    “보낸 문자 페이지가 열려 있었어요. 일부러 보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 성경. 간략한 내용이었다.
    “어릴 때 개명한 이름이에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아팠거든요. 덕분에 부모님은 신실한 신자가 되셨죠.”
    여전히 뜨거운 햇살이 카페 안으로 들이치며 노란 기름처럼 벽과 바닥을 덮고 있었다. 부드러운 역광이 그녀의 둥근 귀와 목덜미에 닿는 짧은 머리칼 아래로 흐르며 완만한 어깨와 탄력 있게 당겨진 허리선을 지나 한쪽 무릎 위에 가볍게 얹은 종아리 윤곽까지 스며들었다. 좀 마르긴 했지만 균형 잡힌 몸이었다. 여자의 몸 어디가 아팠던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종교가 있나요?” 여자가 물었다.
    “아뇨.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지 못합니다.”
    “무서운 것이 없는 모양이군요.” 여자는 시시해진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나도 부러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 “개를 무서워합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덧붙였다. “어릴 때 발목을 지독하게 물렸거든요.”
    여자의 표정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근육이 움직이거나 안색이 바뀐 것도 아닌데 어딘가 달라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몸속에 스며 있던 따뜻한 물기 같기도 했고 부드럽게 피부 위를 흐르던 체온 같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무슨 실수를 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여자가 물었다.
    “어떤 개였죠?”
    이상한 질문이었다.
    “크고 지저분한 개였습니다. 끊어진 목줄이 목을 바싹 조이고 있는 떠돌이 개였죠. 꼬리가 뭉뚝하고 여기저기 털이 빠진 자리마다 붉은 살이 드러난 병든 개였습니다.” 나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말했다. 정말 나의 기억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거침없이 대답이 떠올랐다.
    “아팠나요?” 여자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어릴 때여서 잘 기억나지 않아요. 개의 모습도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거니까요.” 그러고는 고개를 꺾어 내 오른쪽 발목을 바라봤다. 여자의 시선이 따라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통이 좁은 검은색 슬랙스 밑단이 복사뼈를 반쯤 덮고 있었다. “하지만 힘줄과 인대 위에 남은 딱딱하고 누르스름한 이빨 자국을 보면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그 자리가 간지러워집니다. 가끔은 홧홧하게 열이 나거나 마비가 된 것처럼 얼얼해지기도 하고요. 부드러운 살을 헤집고 들어와 검붉은 맥박 위에 닿았던 서늘한 이빨의 감촉이 불현듯 떠오르는 겁니다.” 으스스 몸을 떨며 속삭였다. “이런 무더운 날에 어울리는 얘기죠?”
    그제야 여자는 조금 웃었다. 마침 점원이 긴 잔에 든 에일 맥주와 둥근 얼음을 가득 띄운 붉은색 히비스커스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사용한 티슈와 빈 잔들을 은색 트레이에 옮기고 테이블을 간단히 정리한 뒤 상냥한 표정으로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나도 여자도 고개를 저었다. 점원이 테이블에서 멀어지자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난 개에게 물린 사람을 또 한 명 알고 있어요.”
    여자가 작은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젓자 투명한 얼음들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났다. 찻잔을 들여다보는 여자의 얼굴에서 어떤 기색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게 누구죠?” 내가 물었다.
    “우리 오빠요. 그리고 나는 지금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상한 우연이죠?”
    “정말 그렇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슬쩍 여자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내 휴대폰을 향했다. 아직 그녀의 오빠에게선 아무런 회신도 오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해요.” 여자가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무서운 이야길 하나 해볼게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만 연락을 기다려 줘요.”
    “좋습니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서류를 정리해 멀찍이 밀쳤다. “비명을 질러도 이해해 주세요.”
    여자는 작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붉고 차가운 히비스커스가 여자의 입안에 잠시 고였다가 천천히 목 뒤로 넘어갔다. 입술을 뗀 여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내 병이 사라지게 된 이야기예요.”

 

    “서너 살 무렵에 그 병이 생겼어요.” 잠시 뒤 그녀는 정정했다. “그때쯤 발견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녀의 아버지는 어느 날 아침 조간신문을 읽다가 문득 블록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 딸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다정하게 딸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왜 어깨를 들어 올리고 있니? 어디가 불편하니?”
    어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신문을 반으로 접어 내려놓고 딸에게 다가왔다. 잠시 어린 딸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그는 아내를 불렀다.
    “여보, 이리 좀 와 봐. 쌕쌕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
    의사는 작은 흡입약을 주었다. 누르면 액상 성분이 수증기처럼 미세한 입자로 분사되는 플라스틱 기구였다.
    “간단한 증상입니다. 때때로 기관지가 수축해서 숨이 가빠지는 건데 그럴 때마다 이 약을 흡입시켜 주세요.”
    기관지를 이완시키기만 하면 해결되는 병이어서 약을 흡입하면 증상은 즉각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약을 조금 늦게 흡입하거나 수면 중에 발작하여 처치가 더 늦어지면 무호흡 상태에 빠졌다. 일단 의식을 잃으면 작고 보드라운 몸은 신기하게도 수축한 기관지 대신 늑골의 뼈를 움직여 폐를 펌프질했다.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고 깨어나면 갈비뼈가 모두 뒤틀려 있었다. 어린 그녀가 처음 수면 중에 숨이 멎은 후로 그녀의 부모는 매일 밤 삼십 분마다 교대로 일어나 딸이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그들 가족 중에 그런 병을 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딸이 뱃속에 있을 때나 자라는 과정에서 그런 병에 걸릴 만한 환경에 노출된 적도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 병의 경로를 짐작할 수 없었다.
    “기관지가 수축할 뿐인데 온몸이 아팠어요. 쇄골과 어깨가 항상 긴장으로 올라붙어 모든 뼈의 균형이 어긋나 있었고 등허리는 비쩍 마르고 얼굴은 새까맸죠. 입을 벌리고 숨을 쉬었기 때문에 입술은 늘 부르터 있었어요. 발작을 피하기 위해 줄어든 활동량과 만성적인 수면부족으로 나는 아주 신경질적인 아이가 되었죠. 그건 악순환이 되었는데, 내 병은 감정 변화에 민감했어요. 너무 화가 나거나 놀라거나 혹은 자지러지게 웃길 때도 어김없이 후두 너머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올라왔죠. 그건 내 기도로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거의 닫혔다는 거예요. 몇 분 안에 약을 흡입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녀는 단조롭게 말했다. “단지 주먹만 한 장기가 쪼그라들 뿐인데도 사람은 죽는 거예요.”
    해가 지날수록 병세는 악화되었다. 의사는 그녀의 몸이 약에 내성을 갖게 되어서라고 했다. 내성이 생긴 기관지는 두 번, 세 번 약을 흡입해야 비로소 이완되며 폐부 깊숙이 공기를 빨아들였다. 발작도 잦아져서 하루에 서른 번을 웃돌았다. 그녀의 어린 몸은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자신의 몸 일부와 싸워야 했다. 틈만 나면 숨통을 조이는 힘센 근육은 늘 그녀의 몸 안에 있었다.
    “부모님은 아직 상용되지 않은 다른 나라의 치료법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전통 민간요법에 정통하게 됐어요. 꼭 같은 증상이 아니더라도 몸에 좋다는 음식이나 약이라면 모두 써봤죠. 연꽃 뿌리나 사슴 뿔, 기와에서 자라는 버섯이나 가을 은행같이 주로 돌기처럼 돌출되고 단단한 것들을 달여 먹였어요. 결국 그분들이 신앙을 찾게 된 것은 조금 뻔하고 자연스러운 수순이지 않나요?” 그녀는 농담을 하듯 물었다.
    충분히 그럴 만하지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부모님은 조금 다른 지점에서 해결책을 찾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식단이나 운동, 거주 환경과 같은 인과적 접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어떤 것들에 주목하기 시작했죠. 가령 신에게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거나, 봉사와 기부로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돕거나, 단순하게 딸의 이름을 바꿔 보는 일들이 병을 낫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종류의 믿음은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게 정말 활력을 주기도 해요. 그들이 무력감에 빠져서 멈추지 않도록 늘 분주하고 고단하게 만들어주죠.”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때요.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나요?”
    “오빠 이야기가 없군요.” 나는 말했다.

 

    “오빠는 부모님이 후원하던 수도원에 살았어요. 부모가 없는 다른 아이들과 같은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같은 이불 위에서 같은 시간에 잠을 자며 느리게 자라고 있었죠. 그곳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수도원의 수사가 되곤 했어요. 수도원은 침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해안 절벽 위에 있었어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검은색 암석 절벽 위에 펼쳐진 듬성듬성한 잡목림과 쇠락해 가는 한 무더기 인가뿐이었지만,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 수도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조금 떨어진 곳에 하얀 바닷물이 밀려드는 만의 입구가 해안 도시로 발달하기 전부터 거기 있었죠. 어두운 밤 숨이 차올라 깨면 언제나 길게 펼쳐진 해안의 알록달록한 빛 무리 사이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새까만 어둠이 있었어요.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도 호흡도 잔물결처럼 찰랑이다가 잠이 왔어요. 부모님은 그 수도원에 커다란 소나무를 기증했어요. 후원금을 보내주는 지역 유지들이 그것을 기념하는 관상용 나무나 석상을 하나쯤 세워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죠. 소나무는 절벽 아래서 올라오는 짠 바닷바람을 맞으며 너울거리는 회갈색 그늘을 드리웠어요. 구불구불하고 단단한 가지에 줄이 긴 그네를 매달아 아이들은 그네를 탔대요. 부모님은 그곳에서 그네 타는 오빠를 본 거예요. 한낮의 더운 공기를 가르고 치솟아 오른 그네 위에서 민첩하게 몸을 말고 뛰어내린 오빠를요. 뜨겁게 달궈진 바닥을 구르고 일어나 어깨와 팔뚝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는 남자 아이의 유연하고 단단한 몸을 본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의 짐이라곤 귀퉁이가 뜯어진 노란색 종이 상자 하나뿐이었어요. 상자 안에는 손잡이가 달린 스틸 컵과 검은색 볼펜, 작은 성경책과 적록색 줄무늬가 있는 고무공, 사탕이 든 유리병과 볼록한 가죽 주머니 등이 단출하게 들어 있었어요. 오빠는 나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똑같은 크기의 방을 썼는데, 방 한편에 덩그러니 그 상자를 놓아두었죠. 이제 오빠 이름은 성찬, 내 이름은 성경이라고 부모님은 단단히 일렀어요. 이름과 함께 무언가 바뀔 거라고 믿고 계셨죠. 우리는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서로를 그 이름으로 불렀어요. 그때 오빠의 나이는 열 살이었고 나도 열 살이었죠. 오빠는 몸이 왜소한 나보다 한두 살은 더 많아 보였어요. 모두가 아주 쉽게 성찬을 오빠로, 성경을 동생으로 정했어요. 나중에 오빠는 우울한 목소리로 자기 나이는 수도원에 온 날 수녀님이 네 살로 어림잡아 셈한 것이라고 고백했어요. 나보다 어려서 오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는 얼굴로요. 오빠와 나는 까만 얼굴과 깡마른 체형이 비슷했지만 전혀 다르게 보였어요.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나는 금세 알게 되었죠. 불과 몇 달이 지나자 햇볕에 그을렸던 오빠의 거친 살갗 아래서 뽀얀 피부가 올라왔어요. 까까머리에서는 결 좋은 검은색 직모가 자랐고요. 오빠는 골격도 좋았고 타고난 희고 고른 치아를 가지고 있었어요. 건강한 부모님과 오빠는 잘 어울렸죠. 난 오빠의 하얀 피부가 부러웠어요. 부러워서 울면 오빠가 손을 뻗어 내 볼을 살살 문질렀어요. 자, 봐. 내가 이렇게 만지면 네 얼굴이 하얘져. 나도 손을 뻗어 오빠의 뺨과 광대와 눈썹을, 둥글고 차가운 코와 폭이 좁은 턱을 어루만졌어요. 어때, 내 얼굴이 까매졌지? 하고 오빠가 물으면 나는 끄덕끄덕 그렇다고 했어요.”
    “사이가 좋았군요.” 내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친했어요. 오빠는 다정한 성격이었고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여자애였으니까. 이제는 잘 만나지 않아요. 사실 마지막으로 본 게 육 년 전이에요. 가족 행사 때에야 드문드문 얼굴을 보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별다른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오빠와 여동생이 자라면서 서먹해지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오빠는 기숙사가 있는 사립중학교에 갔고,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먼 곳으로 다닌 뒤, 영영 우리 가족의 생활권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불안과 슬픔에 휩싸여 오빠를 붙잡고 다그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오빠는 난처한 얼굴로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아무 문제 없어요, 하고 말했어요. 하지만 나는 오빠가 우리 가족을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눈을 내리깔고 내 발목을 바라봤다. 그건 영영 확인할 수 없는 흉터를 신중하게 투시하는 일처럼 보였다.

 

    “그땐 해가 지고 있었어요. 수도원이 있는 절벽 뒤로 크고 붉은 해가 수평선을 길게 물들이며 가라앉고 있었죠. 아주 무더운 날이었고 나는 창틀에 턱을 기댄 채 한낮 동안 덥혀진 해변의 모래가 식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사실은 오빠를 보고 있었죠. 오빠는 또래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부드러운 은회색 모래 위를 맨발로 밟으며 공을 차고 있었죠. 일 년 만에 키가 한 뼘 정도 자란 오빠는 다른 아이들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어요. 나는 공을 따라 어지러이 움직이는 오빠의 까만 머리통을 어렵지 않게 쫓아갈 수 있었죠. 입으로는 작게 찬송을 불렀어요. 오늘 이 축복이 모두와 함께한다면 난 기뻐 노래해 노래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영원한 영광 노래해 노래해. 그런 노래였어요.”
    그녀가 리듬감 있게 말했다.
    “공은 오빠의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고무공이었어요. 적록색 줄무늬가 있는 손바닥만 한 공이었죠. 낡고 색이 바랬지만 쓸 만했어요. 오빠는 곧잘 그 공을 가지고 놀았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오빠는 적록 색약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공은 오빠의 눈에 그저 동그란 단색 공으로 보였던 거예요. 개는 분명히 그 공을 향해 달려들었어요. 오빠가 아니었죠.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개의 눈에도 그것은 그저 작은 단색 공이었을 텐데 이상한 일이죠. 오빠는 공을 한쪽 발로 밟은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개를 피했다면, 공을 그 자리에 놓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면 물리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창틀 너머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어요. 개는 저 멀리 해변 끝에서 나타났어요. 나는 그것이 까만 점에서 위협적인 짐승으로 변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어요. 그것은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순진한 아이들 틈으로, 오빠의 등 뒤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내가 어, 어, 입을 벌리고 놀랐을 때는 이미 그것이 광폭한 개가 되어 오빠를 문 뒤였죠. 처음에는 정강이를, 오빠가 넘어진 뒤에는 어깨를 물어뜯었어요. 그 개는 오빠 위에 올라타 포식자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처박았어요. 오빠는 팔을 휘둘러 주먹질을 했죠. 개에게 말이에요. 개의 눈이나 귀가 있는 자리를 북처럼 두들겼어요. 나는 두 손으로 창틀을 잡고 일어나 그 믿을 수 없는 난투극을 지켜봤어요. 사실 그것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거리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고, 네모난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무성의 그림자극 같았어요. 꿈틀거리는 개의 윤곽은 어딘지 불균형했죠. 등 위로 뿔이나 혹처럼 솟은 기형의 골격이 보였는데, 그것 때문에 개의 몸은 이상한 방식으로 움직였어요. 이리저리 뒹구는 개와 오빠의 모습은 한 몸의 불구처럼 보였어요.”
    그녀는 얼음이 모두 녹아 옅어진 찻물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나와 함께 한낮의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저 멀리 해안 절벽이 보이는 석양의 바닷가로 가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어른들이 달려왔고, 개는 도망갔어요.” 그녀가 말했다. “온몸에 약을 덧칠한 오빠는 끔찍하게 보였지만 실은 모두 경미한 상처였죠. 의사는 흉이 좀 남을 거라고 했어요. 흉터는 살아 있는 몸 위에 생긴다는 말로 위로했죠. 부모님은 거기서 그친 불운에 감사했어요. 오빠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감사기도를 드렸죠. 그건 내가 위험한 고비를 넘긴 새벽, 머리맡에서 듣던 길고 지겨운 기도였어요. 오빠는 손들의 무게만큼 고개를 수그리고 다 큰 어른처럼 웃고 있었죠. 한 번도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평소처럼 흥얼흥얼 찬송을 불렀죠.”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내 병에 차도가 생긴 거예요. 나는 한 번도 그런 세계에 속하지 않았던 몸처럼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었죠. 부모님은 오빠가 축복을 가지고 왔다고 여겼지만, 글쎄요. 언제나 우리 머리 위를 떠다니며 내려앉을 곳을 선택하는 것은 불운이죠. 나는 불운이 피해 간 자리에 겨우 서게 된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오빠는 만날 필요 없는 개를 만난 거죠. 나의 어떤 마음이 수평선 끝에서 까만 점을 끌어와 사나운 개로 만들었을지도 몰라요. 그날 창가에 기대서서 오빠를 바라보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제는 정말 기억나지 않으니까요.”
    “정말 병이 사라졌습니까?”
    “말끔히.” 그녀가 말했다. “부드러운 살처럼 부풀다가 하얀 파도 거품처럼 사라졌죠. 그런 분명한 형태도 없는 무언가가 사람의 몸을 아프게 했던 거예요.”
    카페 안은 입을 크게 벌리고 죽은 짐승의 뱃속처럼 더운 공기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입으로 부패하는 열기를 조금씩 들이마시며 나를 바라봤다.
    “왜 병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게 내게 온 이유를 몰랐던 것처럼요. 내가 당신에게 해준 이야기 어딘가에 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내 병에 대해서라면, 그리고 오빠에 대해서라면 이런 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이해할 수 있나요?” 그녀가 웃었다.

 

    선배가 소개한 여자와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일이 밀려들었고, 그녀의 개인적인 여러 사정은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들과 겹쳤다. 나는 우연의 축적이 유도하는 지점으로 떠밀려 정해진 것처럼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래로 흘러 들어왔다. 개에게 발목을 물려 잡화 디자이너가 된 여자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어느 날 아내가 양가죽으로 된 연회색 앵글 부츠를 사와 내게 어떤지 물었다.
    “당신 스타일이 아닌데.”
    나는 어린 딸과 도넛을 나눠먹으며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내가 신을 게 아냐.”
    친구에게 줄 송별 선물이라고 했다. 몇 번이나 본 적 있는 아내의 친구였다. 그들 부부는 근린공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아파트에 살았다. 함께 술을 마시거나 서로의 집에서 다과를 먹은 적도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전근을 가게 되어서 곧 먼 도시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친구가 송별 인사를 하고 싶어 하니 그녀의 집에서 주말에 저녁을 먹자고 아내는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부츠는 더워 보여.”
    아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부츠를 좋아해. 발목에 개한테 물린 흉터가 있거든.”
    놀랐지만 아내에게 이것저것 캐묻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퍼즐들의 중요한 조각은 아내가 무심히 건네주었다. 아내의 친구는 새 도시에서 작은 무용교실을 열 것이라고 했다.
    주말에 아내와 나는 그 집에서 살이 통통한 민어 요리를 먹었다. 아내의 친구가 직접 만든 레몬버터 소스를 모두의 접시 위에 조금씩 덜어 주었다. 와인도 괜찮았다. 누군가의 잔이 비기 전에 그녀의 남편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잔을 채워 주었다. 저녁을 먹으며 나는 새삼 그녀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녀는 뼈대가 가는 체형에 대칭이 완벽한 두상을 갖고 있었다. 등과 어깨에 붙은 군살이 보였지만 한때는 마르고 유연한 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몸에 붙지 않는 올리브색 셔츠와 통이 넓은 검은색 팬츠를 입고 있었다. 발목 흉터를 보고 싶었지만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그녀가 다정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은 아주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녀들은 이따금 서로의 팔이나 무릎을 건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남편이 내게 트럼프를 하자고 해서 그와 나는 앉은뱅이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거실에는 깨끗한 리넨 커튼과 새것처럼 윤이 나는 가죽 소파가 있었다. 블랙우드로 통일된 서랍과 협탁, 독특한 각도로 기울어진 폭이 좁은 선반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보니 전체적인 가구 배치에 제법 신경을 쓴 집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설치했다가 뗀 듯한 못과 고리가 벽 곳곳에 남아 있었고 오랫동안 한자리에 있던 가구를 치웠을 때 생기는 벽지의 변색이 보였다. 그것들이 집 안의 공기를 붕 띄워 올려 사람이 머무는 곳에 생기는 안락함을 훼손시켰다.
    “금융사에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그녀의 남편이 물었다. 두 손으로 카드를 섞고 있었다.
    “한 육 년?”
    “나도 그쯤 됐습니다. 이번 전근으로 생활공간이 크게 바뀌겠죠.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기회가 오지 않는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없이 카드에 집중했다. 내리 두세 게임을 했다. 트럼프를 하면서 그는 빠른 속도로 와인을 마셨다. 덩달아 나도 많이 마셨다. 그녀와 아내는 식탁에 앉아 작은 무드 등만 켜둔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얼마 전에 당신을 봤습니다.” 그가 말했다. “근린공원에서 아이와 놀고 있었죠.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그런 기억이 잘 떠오르진 않았지만, 가끔 가족들과 공원에서 산책을 한다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슬쩍 그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는 별다른 기색 없이 다시 자신의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와 비슷한 키에 좀 더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가 같은 방향인지 출근할 때 나보다 앞서 진입로를 빠져나가는 그의 차를 자주 보았다. 가끔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도 똑같았다. 그와 나는 서로의 차를 알고 있었지만 차창을 내리고 인사를 건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카드를 내려놓으며 게임을 끝내자 그가 투덜거렸다.
    “늘 내가 지는군요.” 그도 손에 있던 카드를 내려놓았다. “역시 숫자를 잘 아시네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새 와인을 따고 잔을 채웠다.
    카드를 섞었다. 같은 무늬와 가까운 숫자가 겹치지 않도록 여러 번 풀어 뒤섞었다. 쉰세 장의 카드는 무수한 조합과 순서를 만들었다. 작은 우연이 의외의 패를 만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굉장한 패가 너무 많이 나오면 게임이 시시해졌다.
    “새로 일하게 될 곳은 어떻습니까?” 나는 물었다.
    “아주 멋진 바다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새로 지은 맨션에서 지낼 예정입니다. 그곳은 새우나 굴이 아주 좋더군요. 아내와 나는 그런 음식을 좋아합니다. 여행을 가면 항상 바다로 가죠. 드넓게 펼쳐진 물을 보는 건 정말이지 질리지 않는 일이니까요. 사람은 가끔 그렇게 거대한 것 속에 파묻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한테는 그런 변화가 필요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아주 좋은 패가 들어와 있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가 말했다. “제 아내는 아이를 유산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나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아내에게 이미 들은 이야기였다.
    “얼마 전에 두 번째 아이를 유산했죠. 이번에는 삼 개월도 채 못 살았습니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그는 손에 들린 카드를 신중히 문지르며 와인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내와 그 아이들은 모두 건강했습니다. 이번에는 특히 더 조심했죠. 세심한 주의와 보호 속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우리는 두 아이를 잃은 겁니다.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내에게는 살면서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불운들이었죠. 세상의 법칙과 순서에서 동떨어져 작용하는 운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변수일 때도 있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리는 순간일 때도 있죠. 이제 아내는 스스로를 어떤 구멍처럼 여기게 됐습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구멍 말이죠. 그 구멍은 아내 스스로가 빠질 수도 있고, 곁에 있는 사람, 가령 나 같은 사람이 빠질 수도 있다더군요.” 그가 말했다. “이런 얘기가 불편한가요?”
    “전혀.” 내가 말했다.
    “공원에서 당신을 본 날, 나는 아내와 싸우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싸우기도 하는군요.”
    “물론입니다.” 그가 웃었다. “무수히 많은 전투를 치렀죠.”
    우리는 남은 와인을 털어 넣고 다시 한 잔씩 가득 채웠다. 그녀와 나의 아내는 여전히 오렌지색 무드 등 불빛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채, 작고 기묘한 입 모양으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날은 품에 얇은 과도를 하나 숨겨 나왔는데, 그 술을 다 먹으면 돌아가서 아내를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그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때는. 남자들은 가끔 터무니없는 객기를 부리죠. 내게는 바로 그날이 그랬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당신이 딸을 목마 태우고 부러 비틀비틀 걸어오더군요.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도 그걸 아는지 즐거워 보였습니다. 나는 당신과 아이가 내 벤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가 슬쩍 빈 술병들을 피해 어두운 길 끝으로, 당신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남은 술을 마저 마신 뒤 그 길의 반대편으로 걸었죠. 불 꺼진 이 집으로 돌아온 겁니다. 자, 그리고 상상해 보세요. 이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나는 말했다. 그때 나는 그가 등진 벽에 불규칙한 간격으로 걸린 액자들을 보고 있었다. 부부의 자연스러운 일상이나 어린 시절 사진들이었다. 가장 작은 액자 속에 몸매가 아름답게 드러나는 크림색 레오타드를 입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어린 그녀가 있었다.
    “아내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자는 척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내가 다가가자 아내는 천천히 돌아눕더군요. 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화가 나 등을 돌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누울 자리를 내어준 것인지 알 수 없었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도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아내를 죽이고 싶은 기분이 사라지더군요. 결국 하얗고 포근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잠이 들었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싱거운 이야기죠.” 그가 말했다.

 

    그들은 사흘 후에 떠났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 그들의 세간을 기묘한 모양으로 실은 트럭이 근린공원을 돌아 그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어두운 회색 도로로 빠져나갔다. 분리된 소파와 텅 빈 침대 프레임이, 식탁과 엇갈려 겹쳐 놓은 등받이 의자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는 화장대 거울과 옷장이, 거꾸로 뒤집힌 앰프와 상아색 식기가 든 장식장이, 차곡차곡 쌓인 균일한 크기의 상자들이 하나의 길고 튼튼한 끈으로 묶여 있었다. 한쪽에는 질긴 천으로 덮인 울퉁불퉁한 더미가 있었다. 중요하거나 부서지기 쉬운 물건들일 터였다. 그 안에서 어린 아이 키만 한 것이, 끝이 뭉뚝하고 대중없이 아무 방향으로나 꺾인 도무지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이, 어긋난 뼈처럼 솟아 있었다. 나는 그 집 안의 모든 것이 불구의 형태가 되어 멀어지는 모습을 창틈으로 지켜보았다. 트럭은 서서히 작아지다가 까만 점이 되어 사라졌다.
    나는 담배를 마저 피우고 아내가 깼는지 확인했다. 부드러운 이불 속에 잠긴 아내의 눈꺼풀은 도자기 인형처럼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나는 딸의 방으로 가서 작고 낮은 침대를 향해 귀를 기울이고 아이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확인했다. 아이의 입에서는 달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모두가 주문에 걸린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불 꺼진 거실에 앉았다.
    사실은 그 집 벽에 걸려 있던 크고 작은 크기의 액자들을 생각했다. 흔하고 단순한 무늬의 투박한 나무 액자들. 이상한 일이지만, 그 액자들 사이에 내 사진이 있었다. 멋지게 그을린 얼굴로 처음 보는 셔츠를 입고 이름 모를 해안을 등진 채였다. 어쩌면 그것은 내 머릿속의 상상이었다. 그녀가 나의 아내가 되고 그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그곳에서 그녀는 독감에 걸리지 않고 나는 마음껏 손수건이나 실크 양산에 대한 어설픈 농담을 늘어놓는다. 대화는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지독한 열기가 모두 식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날을 떠올리면, 아내와 나는 얼마간 행복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가 천천히 일상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한번쯤은 어두운 공원에서 그를 만난다. 삶의 여유가 있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배가 불룩해진 그를. 그는 목에 어린 아들을 태운 채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얼굴이 새하얀 그의 아들이 가끔 마른기침을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아이의 배를 간지럼 태운다. 아이는 숨이 넘어갈 듯 웃는다. 그들은 유유히 내 곁을 지나친다. 마치 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그의 아이를 따라 나도 꿈을 꾸듯 멍하니 고개를 돌린다. 아무런 의미 없이, 품안에 든 작고 딱딱한 과도를 만지작거리며.

 

 

< (선정평) [소설] 조커 >

 
    나는 소설을 읽다 좋은 대화를 만나면 탁구 경기가 떠오른다. 메달을 따기 위해 하는 그런 경기가 아니라 산책하다 우연히 탁구장을 만나 커피 내기로 가볍게 치는 그런 경기. 이쪽에서 한마디 던지면 저쪽에서 한마디 받아치고, 이쪽에서 서브를 날렸는데 저쪽에서 못 받기도 하고, 때론 스무 번이 넘게 랠리가 오고가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 소설 「조커」의 장점은 소설 초반의 대화에 집중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날 오후,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내 앞에 낯선 여자가 앉는다. 그리고 둘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종교가 있나요?” “아뇨,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지 못합니다.” “무서운 것이 없는 모양이군요.” 따위의 대화들. 그러다, 여자는 자신의 병과 오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그러고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이 소설에서 해결해야 할 서사는 타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 이야기가 ‘나’에게 어떤 파문을 남겼는가. 그 지점을 조금 더 치열하게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는 좋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좋은 에너지. 그것이 신인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윤성희 / 소설가)

 

우다영 (소설가)
 

– 1990년 서울 출생. 2014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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