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상상력이 만드는 역사

[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상상력이 만드는 역사

-대체역사소설

 

 

좌백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상상하는 건 자유가 아닌가. 많이는 말고 조금만 바꿔서 그 후에 역사가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하는 건 재미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들을 해본 일이 있지 않은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고 중국으로 그냥 진군해서 승리했다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기 전에 한국 광복군이 국내에 진공해서 전과를 거두었다면?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상상하는 건 자유가 아닌가. 많이는 말고 조금만 바꿔서 그 후에 역사가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하는 건 재미있지 않겠는가. 역사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의 영향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견고한 피라미드 같아서 그 중 한두 사람, 한두 사건이 달라진다고 크게 변화할 것 같지 않지만 때로는 아주 중요한 때에, 아주 우연한 일로 지금과 같이 고정되어 버린 것 같을 때도 적잖이 있다. 바로 그때 여기를 이렇게 조금만 움직여준다면, 이걸 저렇게 조금만 바꾸어버린다면 그 후엔 어떻게 될까? 바로 이런 궁금증에서 대체역사소설이 나왔다. 역사의 한 순간을 다른 것으로 대체, 즉 바꿈으로써 역사 자체가 바뀌는 것을 상상해 쓰는 소설들이다.
이 계통의 소설 중 최초의 작품은 미국의 워드 무어가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아니라 남군이 승리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1953년에 쓴 『희년을 선포하라』로 알려져 있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미국의 SF작가인 필립 K. 딕(1928~1982)이 1962년에 쓴 『높은 성의 사내』다. 그는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등의 작품을 썼으며 이중 다수가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하다. SF작가로 분류되지만 초능력과 로봇, 우주여행, 외계인과 같은 기존의 SF소재를 이용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가상현실, 음모론, 거대기업, 전체주의 환경오염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미래상과 그 속에서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불안과 혼란을 그린 작가다.

01 『높은 성의 사내』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패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음울한 가상의 1960년대를 그려 보이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역사의 변곡점은 연합군의 패배이다. 그 후에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은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라는 동맹국과 독일, 일본, 이탈리아라는 추축국이 벌인 전쟁이다.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 피를 흘렸지만 전쟁의 중심은 동맹국과 추축국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미, 영, 중, 소라는 4대강국이 연합한 동맹국이 이겼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독, 일, 이의 추축국이 승리하고, 이후의 세계를 나누어 지배한다.
특히 미국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를 나치 독일이,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를 일본이 지배하며 미국민은 노예로 부려지게 된다. 유럽에서 자행된 나치독일의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미국으로 피신한 유태인들은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이런 세계에서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한 주인공들은 지배자와 피지배계층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행되는 차별을 견디며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은 ‘높은 성의 사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활동하는 한 작가의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은 추축국이 승리한 세계라는 가상을 다시 뒤집어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세계다. 가상의 가상, 역의 역이 현실이고 참이 된 것이다. 이 소설에 푹 빠진 피지배계층인 주인공들은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또 어느 것이 가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을 못 하게 된다.

02 한국에서는 복거일(1946~ )이 『높은 성의 사내』와 유사한 발상으로 1987년, ‘만약 지금도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1980년대의 한국을 그린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을 발표했다.

 

03 경성은 서울의 옛 이름이고, 쇼우와는 서기 몇 년이라는 표현 대신 일본에서 사용하는 연호였다. 『비명을 찾아서』의 부제인 ‘경성, 쇼우와 62년’은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1987년 서울’이 된다.
작가의 상상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저격을 시도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상처만 입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존은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방향에 영향을 미쳐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고, 안정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마침내 일본과 한 나라로 동화시키기에 이르는 역사적 진행을 결정한다.
따라서 1945년의 해방도 없고, 당연히 대한민국 건국도 없으며, 한국인, 한민족이라는 자각도 없다.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내지인’이라고 불리는 1등시민인 일본인과, ‘조선인’이라고 불리는 2등시민으로 차별을 받는 것을 불만스러워할 뿐 그 차별의 이유도, 그래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대책도 없이 살 뿐이다.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오는 장교로 군생활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는 틈틈이 시를 써서 발표하는 초보 시인이며 평범한 중산층의 소시민이다. 그런 그가 몇 가지 우연한 일을 통해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는데, 그 주요 계기는 책이다. 특히 조선의 옛 서적들이다. 이를 통해 그는 감추어진 조선의 역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민족의 언어인 조선어를 사용해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2등시민인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식민지 조선에서 더욱 가혹한 일본제국주의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고, 이것은 마침내 저항으로 이어진다.
특히 『비명을 찾아서』는 1987년 당시의 신문기사며 방송 등의 내용을 그대로 사용해 소설 속의 조선이 아닌 현실의 한국이 얼마나 일본시대의 잔재와 일본문화, 그리고 일본경제에 지배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당시 한국을 지배하던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파시즘적 통치를 하고 있는지를 비판하고 있다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역사를 뒤집어서 현실을 다시 보게 하는 작업을 복거일은 이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통해 시도한 것이다.

04『젊은 날의 초상』, 『필론의 돼지』, 『사람의 아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이문열(1948~ )도 2012년 어린이를 위한 소설로 『25년 전쟁사』를 썼는데, 대체역사소설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이문열은 ‘한국 광복군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전쟁을 벌였다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후 미국과 소련의 지원도 없이 25년 간에 걸쳐서 국토를 수복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해방되면서 우리나라가 이후 남북으로 분단되고 6.25전쟁을 거쳐 현재까지 남북이 대치하는 고통을 겪게 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가정에 기반한 소설인 것이다.

 

05 미국의 킴 스탠리 로빈슨(1952~ )의 소설 『쌀과 소금의 시대』(2002년)도 대체역사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중세 유럽을 덮친 흑사병으로 인구의 99%가 사망하고 세계의 패권이 중국과 이슬람의 손에 쥐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가정에 근거한 이 소설은 유럽과 기독교가 없는 세계를 7세기에 걸쳐 그려나가고 있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라 몇 차례고 죽었다가 다시 환생하는 세 사람의 주인공 K, B, I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작가는 이들 세 사람의 삶을 통해 세계와 세계사를 다시 그려보는 작업을 함으로써 부의 축적과 불평등의 기원, 페미니즘 등의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살펴보려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체역사소설은 상상력, 그 중에서도 SF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SF의 하위 장르로 분류된다. 이는 엄밀히 따져서 대체역사소설은 아니지만 과거의 어떤 사건에 개입해 역사를 바꾼다는 아이디어, 혹은 모티브가 SF에서부터 탄생했으며, 여러 차례 반복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06 폴 앤더슨(1926~2001)이 쓴 『타임패트롤』이 그 대표적인 작품인데, 타임머신으로 시간을 여행하며 고의적으로 시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역사를 바꾸려는 범죄자들에 대항해 시간 관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타임패트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작품 속에서 타임패트롤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사건들을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만약 이들이 실패해서 역사가 바뀌면, 그리고 그 바뀐 역사를 기록하면 그것이 바로 대체역사소설이 되는 것이다.
한편 요즘 한국에서는 또 하나의 경향을 대체역사소설이라 부르고 있다. 즉, 주인공 개인, 혹은 단체가 어떤 이유로건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이동하여-이를 타임 슬립(time slip)이라 부른다-역사를 바꾼다는 내용의 소설들이다.

07 한국에서 가장 먼저 이런 이야기를 시도한 것은 윤민혁이 2002년에 쓴 『한제국건국사』인데,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시리아에 파견되던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변으로 시간을 거슬러 흥선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1866년의 조선으로 가는 것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이후 조선 말의 역사에 깊숙이 개입하여 당시의 열강이었던 미국, 프랑스 등을 물리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는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작가는 구한말 열강들의 침략 속에 속수무책이었던 분한 과거를 고쳐 쓰고 싶은 염원을 담아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로 『제국의 역사』, 『제국의 계보』, 『불멸의 제국』, 『대한제국 연대기』 등 유사한 내용의 작품들이 대체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표방해 출간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역사의 특정 시점에서 변화가 시작되어-변곡점이라고 부른다-그 영향으로 이후의 역사가 바뀌는 전통적 의미의 대체역사소설과 달리 작가가 투입한 주인공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역사를 바꾸는 장르의 소설들이다.

08이러한 소설들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통적으로 SF의 하위 장르인 타임 슬립 소설로 분류되어 왔는데, 그 최초의 작품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1835~1910)이 1889년 쓴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를 꼽는다.
19세기의 미국인이 전설에 등장하는 아서 왕의 궁전으로 타임 슬립해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현대 과학의 힘으로 놀라게 한 다음, 그 까마득한 과거 세계에 19세기적인 공화국을 건설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불행히도(혹은 다행히도) 이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지만 현대인이 과거로 가서 당시 사회와 역사를 바꾸려 한다는 모티브는 한국 대체역사소설의 전형과 흡사하다.

 

09 이 장르는 이미 소개한 복거일도 『역사 속의 나그네』라는 소설에서 시도한 바 있으며, 원래는 전통적인 의미의 대체역사소설이었던 『비명을 찾아서』가 영화화될 때 각색을 통해 현대인이 일제시대로 타임 슬립해 겪게 되는 일을 그린 영화『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되기도 했다.
원래 대체역사소설은 역사의 한 부분을 비틀어 가상의 역사를 그리되, 그것을 통해 현재를 다시 보게 하려는 의도로 시도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현재 유행하는 대체역사소설 장르는 이미 진행된 역사에 대한 불만과 한을 타임 슬립이라는 SF적 도구를 사용해 마음에 드는 쪽으로 고쳐서 다시 만드는 대리만족의 장으로 오, 남용되고 있다는 우려를 하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원하는 대로 역사를 바꿀 때는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좋겠지만 결국 도움이 되는 것은 없는 ‘정신승리’의 한 형태가 아닐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글틴 웹진》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