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읽을래?] 내가 사랑한 고독

 

 

내가 사랑한 고독

–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을 읽고

 

김가현(고양예고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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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를 떠올려보자. 당신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꿈과 현실의 방 사이를 떠다닌다. 당신의 눈꺼풀 위에는 여전히 푸른 햇빛이 아닌 꿈속 어둠이 내려앉아 있고 귓가에는 알 수 없는 낱말들이 오간다. 그것들은 꿈속에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시차를 가진 언어이다. 당신은 그 가늠할 수 없는 시차에 홀로 남겨진다. 그 세계에서 선명한 것은 당신의 감정뿐이다. 햇빛이 어둠으로 변모하는 세계 속에서 당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감정뿐인 것이다. 황병승 시인의 『육체쇼와 전집』 역시 이러한 시차 속에서 시를 시작한다. 이 시집의 제목이자,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라 할 수 있는 시 「육체쇼와 전집」을 보면 알 수 있다.

 

저는 방금 꿈에서 깨어났고 당신은 아름다울 정도로 착해보인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제 손을 잡아주던 늙은 여인의 다정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군요, 당신은 아름다울 정도로 착해보인다……
왜요 저는 꿈속에서 착한 녀석이었습니다
없는 아내와 아이들을 걱정하고
아침 식탁의 즐거운 소동과 휴일과 가족 여행을 떠올리는
저는 누구입니까 이 육체와 전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별을 모르면서 이별한다고 말하고
살아 있으면서 지난 새벽에 죽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개새끼들
욕조의 자라들처럼 계속해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거죠
햇빛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그리스 해변에서 빛나고 있는데……
고독은 무엇입니까, 고독 속에서
당신도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고독 속에서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깊은 시간이
바지를 적시는 흙탕물처럼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고 있습니까

–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우선 이 시의 화자는 잠에 취한 모습이다. 그의 독백 역시 혼란스럽다. 그는 ‘저는 지금 숨을 헐떡거리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헐떡거리며, 흐릿한 눈빛으로 써나가는 이 글은 과연 꿈의 이야기일까? 현실의 이야기일까? 어쩌면 그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꿈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던 게 아닐까? 혹은 그가 꿈에서 걱정하던 아내와 아이들은 사실은 현실의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는 그가 보고 있는 현실을 현실이라고 할 수도, 꿈을 꿈이라 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그는 ‘저는 누구입니까 이 육체와 전집은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그의 육체가 떠다니는 곳은 그만이 다다를 수 있는,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이다. 그는 ‘자 저는 조금 더 누워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독백을 이어나간다. 꿈과 현실의 시차 사이에서 그는 ‘어린 시절의 향과 단물이 그리워지는 시간’을 겪고 ‘불현듯 몇 백 년 전의 일들’을 기억한다. 육체를 잃은 그에게는 기억, 그리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감정만이 남아 있다. 이제 그는 그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별을 모르면서 이별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욕한다. 사랑도, 이별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모르는 이들이 아는 감정은 무엇일까? 바로 고독이다. 사랑에도 이별에도 죽음에도 속하지 못한 감정을 시인은 ‘고독’이라 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독 속에 있지만 자신들이 그 감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조금씩 조금씩 스미는 고독에 대해 고독이 무엇입니까, 자꾸만 질문을 던지며 사랑과 이별을 가장하고 있다. 즉, 시인은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지 않은 곳-사랑과 이별, 죽음-에 대해 아는 체하고, 이 때문에 우리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고독의 상태에 속하게 되지만, 이 역시 우리가 부정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직시하지 못한다. 화자는 칠일밤낮을 누운 채 이러한 고독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화자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육체쇼는 무엇일까?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습이다. 즉, 화자가 보여줄 수 있는 육체쇼는 죽음뿐이다.
    어째서 화자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육체쇼는 죽음뿐이라는, 자신은 칠일밤낮을 누워 있다는 진술을 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이렇게 무력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시 「목마른 말로 2」에서 찾았다. 이 시의 화자는 프랑스에 있다. 그는 프랑스어를 전혀 모른다. 매일 밤 옆집 여자의 목소리에 그는 의문을 가진다. 그는 밤낮 사전을 펼쳤고, 그 여자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는 그녀가 하는 말들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괴롭고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심정은 ‘마치 늙은 광부가 숨겨둔 상자를 열었을 때, 다이아몬드가 한 방울의 찬물이 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나는 우리들의 감정 역시 이러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가 다이아몬드처럼 소중하고 아름답게 여기는 ‘사랑, 이별’과 같은 일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한 환상은 쉽게 깨져버린다. 우리는 한 방울의 찬물만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낭만적이라고 혹은 가치 있다고 여기던 일들이 사실은 한 방울의 찬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시 「스무 살의 침대」에서 언급했듯이 이는 ‘좀도둑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무엇인가? 우리는 대체 어떤 감정에 속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는 시 「세상의 멸망과 노르웨이의 정서」를 들여다보자. 이 시의 주인공은 바로 소년과 소녀이다. 소녀는 소년의 침울한 낯빛을 사랑했다. 그녀는 소년의 어깨에 기대 ‘이런 게 노르웨이 정서지, 노르웨이 정서지’ 생각한다. 이 시에서 노르웨이 정서는 노르웨이 사람조차 알 수 없는 정서이다. ‘손을 맞잡고 걸을 때에도 입을 맞출 때에도 두 번 세 번 그 짓을 할 때에도 우리의 부모가 죽어 검은 관 위에 지루한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도!’ 노르웨이 정서가 소년과 소녀를 지배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소년은 둘의 사랑을 환각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말하며 누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품한다. 노르웨이 정서가 물씬 풍기는 그를 바라보며 소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 시 속 소년의 모습은 의문스럽다. 어째서 그는 지난날들을 그렇게 쉽게 저버리고, 심지어 사랑조차 부정하게 된 것일까? 우선 나는 이 노르웨이 정서가 ‘고독’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키스를 할 때에도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도 ‘노르웨이 정서’가 그들을 압도한다. 그들은 그 모든 보편적인 사건, 감정들로부터 동떨어진 고독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차이가 있다. 바로 소년은 자신과 고독을 공유한 이와의 사랑조차 부정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소년은 하나의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 자체를 형상화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순수한 ‘고독’이다. 반면 소녀는 고독을 통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소년은 고독 그 자체일 뿐, 그 어떤 감정도 사건도 그에게 침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은 지상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우울한 정서이다. 소녀가 사랑했던 노르웨이 정서 역시 고독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독이 우리의 사랑은 환각이라는,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자 소녀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녀 역시 다이아몬드가 차가운 물 한 방울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게 바로 노르웨이 정서이다.
    고독은 사랑, 슬픔 그 모든 감정의 침입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왜곡할 수 없는 정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 「육체쇼와 전집」에서 역시 당신 속에 있는 것은 고독뿐이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고독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사랑 이별 따위의 사건들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 즉 고독을 제대로 들여다본 이는 ‘사랑 이별 죽음’ 그 모든 보편적인 사건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시 「부식철판」에는 자신이 ‘프랑스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믿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에서 왔다고 말하는 동시에 프랑스의 춤과 노래, 말과 풍습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아마 그는 프랑스인이라기보다는 ‘프랑스식’ 사람에 지나지 않다. 그는 ‘쏟아지는 팔월의 태양 아래’ 목격했던 프랑스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그것이 모두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당신은 꿈에서 깨어났지/한국에서였다’.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즉 프랑스의 풍경, 정서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프랑스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위안하며 프랑스적인, 즉 우리가 낭만적이라고 여기는 풍경들을 즐길 수 있다. 반면 자신은 프랑스에도, 사랑에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고독한 이는 어떠한가? 그는 시 ‘세상의 멸망과 노르웨이 정서’에 나타난 소년처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그는 그 누구와도 완전히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오로지 ‘고독’한 상태에 남겨진다. 이 쓸쓸함, 이 완전한 고독. 그는 사랑을 모르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욕하지만 그런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독한 쓸쓸함 속에서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점령당했다’ ‘나는 승리했고 완전히 패했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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