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_에세이_벽] 푸른 벽

 

 

푸른 벽

 

함성호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서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잣대가 하나 있다. 어느 마을에나 오리 바위와 십리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바위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아이들의 수영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오리와 십리는 지금 척도로 얘기하면 각각 2킬로미터와 4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거리다. 물론 그 기준이 되는 지점은 해변이다. 해변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바위가 오리 바위고, 그 보다 먼 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것이 십리 바위다. 그러나 누가 자로 재 본 것도 아니어서 실제로 그 바위가 해변에서 오리나 십리 거리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바다는 특히나 육안으로 그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눈으로 볼 때는 가까워 보이지만 정작 헤엄을 칠 때는 턱없이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십리는 뭍에서 걷는 데도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먼 거리다. 그 먼 거리를 십대의 소년들이 헤엄쳐서 닿았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좀 무리다. 그러니까 십리 바위와 오리 바위는 실제의 거리보다는 순전히 심정적인 거리였던 게 분명하다.
    낚시꾼들의 허풍만큼 헤엄에 대한 아이들의 자존심도 하늘을 찔렀다. 모두가 십리 바위까지 헤엄칠 수 있었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 해변에 몰려든 아이들은 얼굴에 비장감까지 서렸다. 왜냐하면 모두들 바다의 무서움을 잘 알았으니까. 자존심 때문에 경주에 끼어들었지만 중간에 힘이 빠지면 어디에 쉴 곳도 없고, 누구의 도움도 받기 어려운 곳이 바다다.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
    바다는 외로운 곳이다. 모두들 사력을 다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돌볼 겨를이 없고, 사실 바다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경주에 나선 아이들은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친구들이 이미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일찍부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경주에 나섰던 것이다. 도저히 십리 바위에 닿을 수 없는 아이들은 오리 바위까지는 가야 했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고, 오리 바위도 멀었지만 그것이 가장 안전한 판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 아이의 헤엄 실력은 오리 바위까지로 정해진다. 십리 바위에 닿은 아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라고 해서 마냥 득의양양할 수는 없었다. 다시 돌아와야 했으니까. 그 돌아오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기에 십리 바위를 붙잡고 쉬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 있었다. 그렇게 십리 바위를 붙잡고 숨을 진정시키고 나서 다시 돌아갈 곳을 바라보면, 거기는 너무 멀었다. 해변은 아득하고, 아무도 없는 바다의 사위는 고요했다. 그 막막함. 모든 풍경들이 소리를 죽인 채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 해변에서 안전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내가 왜 저 대열에서 벗어나 여기에 있는 걸까? 그래서 오리 바위까지 닿은 아이는 십리 바위에 닿은 아이를 추켜세울 수 있었지만, 십리 바위를 붙잡고 숨을 헐떡여 본 아이는 결코 우쭐할 수 없었다. 바닷가 아이들의 서열은 그런 식으로 정해진다.
    바닷가 아이들이 바위가 많은 해변으로 놀러갈 때는 항상 솥을 들고 나간다. 물론 쌀이나 밥도 가지고 간다. 바위에 붙은 섭이나, 전복, 맨손으로 잡은 물고기 등을 잡아 솥에 넣고 끓여 먹는 게 아이들의 점심이다. 아, 그럴 때 우리는 얼마나 조직적으로 움직였던가? 작살과 수경을 쓰고 바다에 들어가는 아이들이 있고, 땔나무를 구해 오는 아이들, 요리를 하는 아이들, 낚시를 하는 아이들, 그저 헤엄치며 놀다 먹을 때 나타나 정말 잘 먹어주는 아이들, 그렇게 바닷가에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밤바다는 무서웠다. 잘 보이지 않는 검은 움직임이 소리만 가지고 있었다. 그 바다가 사람을 예사로 삼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지금 놀에 물든 길을 같이 가는 아이의 아버지도 그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이 길을 같이 걷던 친구도 그랬다. 바다는 솥에 넣고 끓일 것도 많았지만 자주, 안에 들어 갈 육신도 없는 무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해변에서는 징소리와 비나리가 이어졌고, 아무개의 혼을 부르는 굿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그 굿판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새겨야 했다. 뭐라도 하나 먹거나, 그곳에서 물건을 가져오면 망자가 그것을 따라 집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눠주는 떡도 받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단지 울긋불긋한 색(色)만 눈에 넣고 왔을 뿐이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색이 들어온다. 무엇인가가 따라와 아직도 내 곁에 머물고 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어긴 탓이다.
    매해 점쟁이들은 같은 점괘를 보여주었다. 올해는 물에 가까이 가지마라. 어머니는 그 말을 다시 내게 끝없이 강조했다. 나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바다로 도망쳤다. 방학 때 받은 주의사항에도 안전한 물놀이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바다에서 노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 바다는 그런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피난처는 감옥이기도 했다. 내가 살던 바닷가 마을은 서쪽에는 백두대간의 준령이 북에서 남으로 달리다 해발 1708미터로 솟아 오른 설악이, 동쪽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병풍이라 하고, 그 바다를 망망대해라 했지만, 나에게는 오도 가도 못 하는 벽이었다. 그래도 산은 몇 번 넘어서 다른 도시에도 가봤지만 바다는 건널 수도 머물 수도 없었다. 바다는 마을 어디에서도 보였다. 거기로 목선들이 드나들었고, 갓 잡은 물고기들이 공판장 바닥에서 퍼덕이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도 바다가 있었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도 바다가 보였다. 길 끝에 있었고, 언덕 끝에도 있었다. 바닷가 마을은 온통 푸른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바다를 보고 꿈을 키운 소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바다를 보며 꿈을 키우지는 않았다. 꿈 대신 언제나 죽음이 더 가까이 있었고, 언제나 바다는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곳은 갈 수 없는 먼 벽이었다. 오리 바위와 십리 바위 너머에도 펼쳐진 푸른 벽. 나는 언제나 그 벽 너머를 상상했지만, 나는 그 벽 안에서 놀았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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