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선정작 리뷰] 명멸하는 기억과 훼절된 시간

[2015 AYAF 선정작 리뷰]

명멸하는 기억과 훼절된 시간

― 나경화,「번개와 천둥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읽고

이정현 (문학평론가)

    기억은 불안한 물질이다. 축차적으로 누적되는 것처럼 느끼지만 기억의 퇴적은 불균형하게 전개된다. 나경화의 소설은 그러한 기억의 퇴적 작용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에서 뚜렷한 서사적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기억이 편집된 필름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질 따름이다. 삼십대 중반인 ‘나’는 회상한다. ‘나’의 기억 속에서 사물과 공간, 사람은 뚜렷한 연계성 없이 출몰한다. ‘나’는 한 카페에 앉아 있다. ‘로보’가 운영하는 그 카페를 ‘나’가 자주 들르게 된 것은 ‘헤드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의 뇌리에는 골방에 틀어박힌 채 음악에 몰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의 방을 뒤지면서 ‘나’는 일찍 음악에 눈을 뜬다. 성장한 후에도 “팔십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아버지의 거대한 JBL 4343 스피커에 홀린 내 귀”는 보통의 스피커나 헤드폰에 만족하지 못한다. 제약회사의 임상실험에 참가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나’는 고급 ‘젠하이저 헤드폰’을 구하게 된다. ‘나’에게 헤드폰을 판 사람이 바로 카페의 주인 ‘로보’다. 카페의 단골이 된 ‘나’는 몇 명의 여자를 그곳에 데려갔다. ‘나’는 그중에서 P라는 여자만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후로 나는 몇 명의 여자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모두 한때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이였다.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지금, 혀끝에서 맴돌다 어감만 남긴 채 떠오르지 않는 어떤 낱말처럼, 그녀들 대부분은 내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흩어지고 말았다. 나의 말라버린 우물들. P만은 기억에 선명하다. 그녀는 번개와 천둥 사이의 정적을 견디기 힘들다는 여자였다.

    P를 떠올리면서 ‘나’의 회상은 P의 회상으로 대체된다. 공군기지가 있는 남쪽의 도시에서 자란 P는 ‘나’에게 자신의 성장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발진하는 전투기의 진동, 끝이 안 보이던 공군기지의 담벼락, 그 담벼락을 따라서 걷던 날의 호기심과 공포, 주워온 개가 병에 걸려 죽은 뒤에 묻어 준 기억, 죽은 개를 묻다가 발견한 핸드백에 들어 있던 어느 여자의 신분증. 서술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나’는 한때 P를 사랑했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타인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기억할 리가 없을 테니까. 사랑이란 세밀하게 누군가를 기억하는 행위이기도 하니까. ‘나’는 삼십대 중반까지 P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억하면서도 끝내 그녀를 사랑했다는 언급은 하지 않는다. P를 만나던 시절 로보는 ‘나’에게 1920년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의 교회당에 걸려 있던 것이라면서 카페에 걸린 샹들리에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삼십대 중반의 ‘나’는 그 낡은 샹들리에를 이태원 가구 거리에서 발견한다. 그 발견은 P에 대한 회상이 끝나는 시점과 맞물린다. 시간이 퇴적되면 한때 빛나던 것들도 그렇게 누추하게 변할 뿐이라고, 낡은 샹들리에를 발견한 ‘나’는 회상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낡은 샹들리에가 밝게 빛났던 것은 바로 P가 ‘나’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미국의 오리건으로 이민을 간 P가 종양을 앓다가 안락사 했다는 소식을 서른 즈음에 들었다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지금도 ‘나’는 P가 살던 공군기지가 있는 남쪽 도시에 가려는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나는 지금도 시시때때로 P가 살던 공군기지 마을을 찾아가는 계획을 세우고는 한다. 만취해 귀가하는 새벽의 택시 안에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하는 주말의 외식 자리에서, 잠들기 직전의 보드라운 침대 시트 위에서 당장 차를 몰고 시급히 그곳으로 돌진하고픈 욕구를 불쑥불쑥 느끼고는 한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뒷산으로 올라가서 땅속에 묻혀 있는 여자를 끄집어낸 다음 흙을 털어내고 기어이 이름을 묻는 공상에 빠진다.
폭우가 쏟아져서 죽은 개의 냄새가 훅 끼치기 전에 말이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과거는 현재를 한없이 빈곤하게 만들다가도 어느 순간 풍요롭게 한다. 망각이 과거를 불완전하게 폐기한 탓이다. 불완전하게 폐기되었으므로, 과거는 언제든 되살아날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불안한 물질이다. 우리는 우연히 들린 음악을 계기로 잊은 줄 알았던 한 시절을 소환하고, 낯선 골목에서 익숙한 기시감을 느끼면서 ‘당신’을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당신과 전혀 다른 타인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러면서 죄의식, 수치감, 허영심, 부채감,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생성된다. 때로는 그 감정을 온전히 통과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인간은 기억을 편집하기도 한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이 과정을 반복한다.

    나경화의 소설은 과거와 기억, 망각과 회상이 훌륭하게 어우러진 소품이다. 뚜렷한 사건이나 서사 없이도 독자는 이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망각과 기억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마음을 앓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순서 없이, 예고조차 없이 엄습하는 기억의 재생은 늘 우리의 현재를 흔든다. 경험과 생각을 ‘기록’하면서 그 흔들림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과거는 늘 느닷없이 다가온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고통은 축복이자 불행이다. 이런 식이다.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면서 당신을 지금-여기로 소환한다. 아직도 당신은 생생하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멀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실재가 아니기에 덧없는 위안은 빠른 속도로 불행으로 뒤바뀐다. 이 과정을 거듭하다가 우리는 기억의 매개물로부터 멀어지고자 애쓴다. 그러면서 점차 무뎌지고 망각에 익숙해진다. 기억은 파고들수록 날카롭다. 마치 ‘번개’와 ‘천둥’ 사이의 긴장처럼.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과거를 환기시키는 매개체를 회피하지 않고 굳이 기억의 환부를 들여다본다. 우리는 작가라고 불리는 그들의 작업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자신의 기억에 안전하게 다가선다. 어떤 소설과 독자는 그런 식으로 가까워진다. 이 관계에서 위치는 유동적이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서, ‘당신’과 ‘나’의 관계로, 그러다가 ‘나’는 스스로를 청자로 삼는 화자가 된다. 마침내 자신에게 타인이라는 청자가 필요할 때, 인간은 글을 쓰지 않는가. 완전한 망각이 불가능한 인간은 기억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든다. 슬픔을 견디는 데 이야기처럼 훌륭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은 것이다. 기억은 언제나 슬픔을 머금고 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우리는 모두 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까. 망각을 염원해도 기억은 엄습하고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자크 디네센의 말처럼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으므로. ‘나’를 아프게 했던 ‘당신’은 이미 떠났지만, 당신은 여전히 도처에 존재한다. 명멸하는 기억을 앓으면서 과거와 현재가 훼절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작가소개 / 이정현(문학평론가)

1978년 출생.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중앙대 국문과 박사를 졸업하고 한국외대와 가천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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