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세이_5회] 말의 무게, 말의 향기를 생각하는, 당신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말의 무게, 말의 향기를 생각하는, 당신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루쉰 소설전집』, 을유문화사, 2008.

 

정여울

 

 

 

 

사람을 먹어 보지 않은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
– 루쉰, 「광인일기」 중에서

틀림없어요! 틀림없이 나을 거요. 그렇게 뜨거울 때 먹었으니.
사람의 피를 묻힌 만두는 어떤 폐병이든 즉효야!
– 루쉰, 「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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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날마다 이토록 수많은 언어들을 쏟아내는 것은 자신의 고독과 진정으로 마주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나 또한 강의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도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문장들을 쏟아낸 뒤, 집에 돌아오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 쇠로 만든 방에 갇힌 듯 적막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타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날이 차라리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시간일 때도 있다. 루쉰은 적막의 슬픔 속에서 글을 쓰지만 나는 소음의 비애 속에서 글을 쓴다.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만 같은 철저한 고독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의 말과 글 또한 소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온갖 광고와 주장으로 난무하는 매스미디어만이 소음의 온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공들여 쓴 언어조차도 시끄러운 소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글을 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조심스럽고 무거울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사람은 루쉰이다. 내게 루쉰은 차마 인용하기조차 어쩐지 두려워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힘들 때마다 그의 책 속으로 방문해서, 나는 자발적으로 혼쭐이 나곤 한다. 지친 발걸음으로 책갈피를 펼치면, 그는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외롭더냐. 힘겹더냐. 하지만 너는 아직 멀었구나.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알려면.’

 

    내가 아끼는 후배 Y는 얼마 전 기록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났다. 도서관학과 기록학의 차이도 몰랐던 나에게 Y는 친절하게 기록학의 의미를 설명을 해주었다. 도서관의 책들은 일단 한 번 인쇄되면 수백 권 이상의 복사본이 존재하지만, 기록학에서 다루는 문서들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경우가 많다고. 바로 이런 유일한 기록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훌륭한 정치가와 비겁한 정치가를 구분하는 방법도 알려줬다. 지저분한 야합과 온갖 기상천외한 술수를 숨기고 싶은 정치가는 도처에 문서세단기 등을 준비해 놓고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마다 해당 문건을 없애버린다고. 어떤 기록이든, 그것이 설령 부끄러운 기록이라도, 대중과 역사를 위해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정치가는 모든 기록을 남김없이 기록학의 몫으로 돌려준다고. 기록학의 일차적 임무는 폐기해도 좋을 자료와 반드시 남겨야 하는 자료를 구분하는 감식안을 기르는 것이라고. 요컨대 백 년 후 천 년 후에도 남겨질 가치가 있는 기록을 가려내는 것이 기록학의 임무라고 나는 이해했다.

 

    그의 보석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두 가지 상념에 빠졌다. 우선 내가 쓴 글들 중에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몇 개나 될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기록의 욕망보다 중요한 것은 기록의 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나에게 루쉰은 ‘기록되는 일의 두려움’을 뼛속 깊이 아는 사람이다. 기록되는 것은 물론 두렵지만, 기록해야만 한다는 믿음이 자라나기까지의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거쳐야 할 인식의 관문일 것이다. 온갖 폭정과 패륜을 일삼던 연산군마저도 ‘내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은 역사다’라고 했을 정도이니. 루쉰은 절망을 기록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글에는 희망의 빛 속에 도둑처럼 스며드는 절망의 낌새가, 절망의 칼 속에 품은 희망의 향기가 공존한다. 그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절망을 예비해야 할 것만 같고, 그가 절망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안에서 반드시 희망의 틈새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절망할 줄 아는 사람은 쉽게 희망에 몸을 내어주지 않으며, 희망에 쉽게 자신을 넘겨주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더욱 굳건히 홀로 설 수 있음을, 나는 그의 글을 통해 느리고 아프게 배웠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 루쉰, 「고향」 중에서

    “가령 말일세, 쇠로 된 방인데 창문도 전혀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것이라 하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지 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겠지.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므로 결코 죽음의 비애 같은 걸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크게 소리를 지른다면 비교적 정신이 돌아온 몇 사람은 놀라서 깨어날 걸세. 자네는 이 불행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 미안하지 않다고 여기나?”
    “그러나 몇 사람이 깨어 일어난다면, 이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걸세.”
    그렇다. 나는 비록 내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나, 희망이라고 한다면, 그건 지워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희망은 장래에 있는 것이므로 결코 나의 틀림없이 없다는 증명으로, 그의 있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결코 설복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이것이 최초의 작품인 「광인일기」다.
    – 루쉰, 「자서」 중에서

 

    날이 갈수록 우둔해지는 내 뒤통수에 스스로 죽비를 내리치고 싶을 때마다, 루쉰의 첫 번째 소설집 서문, 「자서」를 읽는다. 아무리 대단한 개혁을 부르짖어도 귀를 단단히 틀어막고 앉아 있는 당시 사람들에게 염증이 나버린 루쉰은, 옛 비석의 비문을 베끼며 고독한 은둔생활에 심취해 있었다. 청년들을 위한 잡지를 만들자며 간절한 마음으로 루쉰에게 원고를 청탁하러 찾아온 친구에게, 루쉰은 ‘쇠로 만든 방’의 비유를 들려주었다. 자신은 편안히, 아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민중들을 괜스레 깨워 ‘불려 깨어난 자의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글을 처음 읽었던 스물여섯 살의 나는, 평안히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을 모른 채 죽는 것보다는, 결국 죽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궁리해 보고, 할 수 있는 모든 안간힘을 써보고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장 아름다운 길은 함께 애쓰고, 함께 고민하고,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상태에서, 쇠로 된 그 캄캄한 방을 다 함께 탈출하는 것일 테지만. 탈출할 수 없더라도, 탈출을 위한 모든 안간힘을 써보고, 스스로의 마지막을 투명하게 인식하며 죽어가는 것이 훨씬 나은 죽음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닥쳐올 죽음을 모른 채 편안히 죽을 수도 있었던 내가,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려 깨어난 자의 고통’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예전보다 더욱 부끄러워진다. 살아가면서 그 고통의 깊이를 점점 더 절실히 느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의 추악함을 차라리 몰랐다면, 내 안의 부끄러움을 차라리 몰랐다면, 훨씬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자문해 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궁리 속으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루쉰의 눈치가 보인다. 아직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반드시 알아야만 할 그 모든 것들을 여전히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절망하기엔 너무 이르고, 희망을 갖기엔 더더욱 이르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도대체 이 사태로 이익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페어플레이’ 운운하면서 갑과 을의 착취관계를 은폐하는 사람들의 음침한 속내를 읽어내는 법도, 모두 루쉰에게서 배웠다.

 

    나는 쓰라린 고독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자꾸만 미디어의 화려한 스펙터클이나 낭만적인 환상 속으로 숨어들곤 했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적막’ 그 자체를 대면할 용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루쉰은 꿈과 희망으로 가슴 부푼 청년들에게 자신의 참혹한 적막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바로 그 가혹한 적막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멋진 걸 해보자!’, ‘저게 바로 대세지!’ 하며 우르르 몰려가기에 앞서, 각종 온라인 네트워크의 떠들썩함을 잠시 내려놓고, 나 자신의 적막과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해진 것은 아닐까. 요즘 나는,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억지로 생산해 내려 하지 않고, 어떤 구구절절한 자기계발의 욕망조차 내려놓고, 아무 의미부여도 할 수 없는 적막 그 자체와 대면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 텅 빈 적막이야말로 절망이나 슬픔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고통임을 깨달아 가는 중이다. 고독은 두렵다. 하지만 함께하면서도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반강제적인 소셜 네트워크보다는, 내 안의 두려움과 맞서면서 홀로 있기를 택하는 것이 훨씬 소중한 시간임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는다. 말의 향기와 말의 무게, 침묵의 두려움과 침묵의 가치를 아는 당신에게, 루쉰은 최고의 벗이 되어 당신의 고독을 함께 견뎌 줄 것이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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