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연재] 겹 (2회)

 

 

겹 (2회)

 

윤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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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8분쯤 걸린 것 같아. 그 책이 안정을 찾는 데는. 넘겨볼 때마다 달라지던 페이지 수가 일정한 숫자에서 멈추고, 책이 구토를 멈춘 사람처럼 잠잠해진 다음 하나의 상태로 수렴하는 걸 난 가만히 보고 있었어. 표지의 사슴뿔 사이에 아주 조그맣게 '겹' 이라는 글자가 숨어 있는 걸 그제야 봤지.
    더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책을 덮었어.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우선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내가 있었어. 참 이상하지. 세계벽을 넘어온 나 자신의 자취를 보는 건 낯선 일도 드문 일도 아니었는데 그 책은 묘할 정도로 거슬렸어.
    그렇잖아. 매일 싱크대에 서서 닦은 적 없는 접시들이 말끔하게 설거지되어 있는 걸 보거나, 꺼내 입은 기억이 없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걸 깨달아도 아무렇지 않은 거, 그게 정상이잖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 이건 내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한 거야,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잖아. 그건 그냥, 우리가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한 일이니까 말야.
    그런데 내가 쓰지 않았지만 쓴 그 책을 보면서는 속이 메슥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거야. 접시나 블라우스와는 다르더라. 난 이제 스물다섯 살이고, 내가 가진 능력 정도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거나 하는 일은 평생 없을 줄 알았어. 너는 왜 이 책을 내게 준 걸까. 비난하기 위해? 수사슴이 영혼 없이 아름다운 두 금빛 눈으로 나를 응시했어. 마치 그 얼어붙은 시선으로 나를 꿰뚫어 심판하려는 것처럼.
    제법 예쁜 표지였어. 정확히 말하자면 안에 든 것에 비해 많이 고급스러운 표지였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은 아닌 말들을 적당히 나열한 것에 불과하지만 포장을 정성스럽게 해서 전혀 다르게 보이게 한 상품. 마케팅에서 치명적인 실수만 하지 않으면 유행을 타고 한 계절 정도는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들겠지. 고등학생이던 너와 나는 그런 책들을 보면 봉지에 질소만 가득 든 감자칩이 생각난다며 웃곤 했는데. 우주 어디선가 내가 펴낸 책은 그런 책들 중 하나인 것 같았어. 그리고 그 나는, 내가 아니지만 실은 나인 나는,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를 하늘로 떠나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글을 쓰기 시작한 모양이었어. 그럴 수도 있구나. 그 일을 그렇게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쓸 수도 있구나. 난 갑자기 무서워졌어. 이런 무서움이 그 책에 씌어 있던 ' 살아 있다는 짜릿한 느낌' 일까.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나를 부러워하는 내가 있었어. 어떤 과정을 거쳐 출판할 기회를 얻었든, 내용이 어떻든 상관없었어. 그 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을 내고, 그게 서점에 깔리고, 신문에 기사가 나는 것. 내게 그런 능력과 수완과 대담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있어서, 덮어버린 책 속 문장들을 기억에 남겨두려고 볼썽사납게 애쓰고 있더라.

 

    대혼돈 이후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누구나 하는 생각이 있지. 우주의 중심은 나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 말이야. 세상의 기준은 엄마나 아버지나 친구나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국회나 법원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 남을 믿는 건 자유지만 누구도 자신 이상으로 신뢰하면 안 된다는 것.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실은 비눗방울이나 다름없이 곧 없어질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기적이거나 유아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홑겹인들은 비난할지도 모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세계는 한 겹이 아니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여대는, 서로 다른 겹에서 온 수많은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한 한 겹의 세계를 그들은 살아갈 뿐이니까.
    하지만 우리 같은 겹겹인은 다르잖아. 여긴 말하자면 홀로그램들의 전쟁터나 다름없고, 모든 게 문자 그대로 시시각각 변하니까. 저 앞자리에서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기사 아저씨나, 방금 가방에 넣은 책이 30초 뒤에도 존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교차점이 와서 세계벽이 다시 열려버리면 모든 게 끝이고, 다시 그 현실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 객관' 의 기준을 자신 이외의 곳에 두는 건 미친 짓이니까. 예전에 쓰이던 의미로서의 객관이란 건 이젠 없고, 우린 그리니치 표준시처럼 신뢰할 만한 기준이란 오직 나뿐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그래도 난 비교적 무리 없이 지내온 것 같아. 율, 네가 그 책을 주기 전까지는. 내가 아는 나, 객관적 기준으로서의 ' 나' 에 너의 죽음을 팔아 유명해진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너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어. ' 잘 말씀드려줘. 널 믿을게.’
    약속해, 이건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열여섯 살 때 넌 내게 그렇게 말했지. 율,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 나를 보던 너의 표정, 네가 신고 있던 니삭스와 파란 운동화, 네 뺨에 나 있던 작은 뾰루지, 긴 머리에 꽂혀 있던 물고기 모양 머리핀 같은 것들이 아직도 가끔씩 떠올라.
    스물다섯 살의 너는 내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하지 않았어. 밝고 투명한 햇빛 아래로 가서 모든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 그 뒤에 쏟아질 몇 송이의 꽃,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을 오물과 멸시와 고통을 나와 함께 온전히 받아내는 것, 그게 네가 원하는 것이었지. 나를 시험하려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마치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려는 것처럼, 지난번을 기억하지 못하는 너는 그것을 원했어. 이 세상이 얼마나 정신 나간 모양으로 뒤틀려 있는지, 왜 약속 같은 걸 하면 안 되는지, 그런 건 아예 너의 관심사가 아닌 것 같았지.
    알았어, 이따가 연락할게! 난 그렇게 답신을 보냈어. 결국 다시 너와 대화할 수는 없었지만. 반신반의하고, 두려워하고, 나를 이토록 혐오하면서도 마음을 다잡고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건 그래서야. 왜 내가 그 연락을 하지 못했는지, 그 뒤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는 알아야 하니까.

 

    버스 종점에서 10분쯤 걸어가면 초등학교가 하나 있고, 그 옆에 우리 엄마네 집이 있어. 그 동네는 모든 겹에서 한결같이 개발이 되는 그런 노른자 동네는 아닌가봐. 패턴이 제법 종잡을 수 없는 게, 때로는 주상복합 건물 5층에 있는 오피스텔이고, 때로는 코딱지만 한 네일숍에 붙은 쪽방이고, 때로는 복도 구석마다 거미줄이 대롱거리는 낡은 빌라의 반지하층, 또 때로는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의 12층일 때도 있거든. 그날 엄마네 집은 아파트였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고, 거기 아버지가 있었어.
    왔냐? 왜 이제 와. 마치 아침에 보고 저녁에 또 보는 사람처럼 아버지가 말했어. 난 꽤 오랜만에 엄마네 집에 간 거였는데. 꽃게는 사 왔냐? 아버지가 물었어. 잠시 머뭇거리다 가방을 열었더니 비린내가 훅 끼쳤어. 비닐봉지가 있고, 그 안에 큼직한 집게발을 아직 슬슬 움직이는 꽃게가 세 마리 들어 있더라. 노량진에서 산 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노량진 수산시장에 들렀다 왔다는 걸 깨달았어. 엄마가 방에서 나와 꽃게탕을 끓이는 동안 난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
    그 집에서 아버지가 존재하는 현실과 마주칠 확률이 50퍼센트쯤 되는데, 하필 그날이 그런 날이더라. 내가 전에 얘기했지? 우리 친아버지는 아니라고. 엄마보다 열다섯 살쯤 나이가 많고, 은발을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네모난 금테 안경을 끼고 있어. 오래된 할리우드 스파이영화에 국장급으로 출연할 것 같은 이미지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을 만한 얼굴은 아니야.
    아버지는 건설회사 부사장이고, 독실한 종교인이기도 해. 돈을 좀 만지고, 좀 밝히기도 하고, 자신의 폐쇄회로 속에서 경건하고 선량하게 살면서 그 이기주의의 회로를 가족 중심으로 확장 겸 리모델링하고 있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한국의 중산층 중년 남자. 홑겹인.
    그가 설교대에 올라 하는 기도를 꼭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어. 이 나라를 걱정하는 기도였어. 가난을 무기로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 있다고, 그들을 돕는다는 미명 하에 우리가 낸 세금이 엉뚱한 복지 예산으로 다 새어나가지 않게 위정자들의 마음을 바로잡아달라고, 학문에 힘쓰고 국가경쟁력을 높여야 할 대학생들이 그릇된 가치관에 사로잡혀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폭력 시위에 가담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영혼을 보살펴달라고, 아버지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어. 엄마는 그때 내 옆자리에서 눈을 감고 묵묵히 듣고 있었고.
    그때 난 엄마 얼굴을 보면서 엄마가 대학 시절 몸담고 있었다던 어떤 모임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자본주의 그 다음을 생각하는 세계 청년들의 모임이라던가. 내가 알기로는 엄마가 바로 그런 학생이었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는커녕 사회에 대한 불만만 늘어놓으며 이틀이 머다 하고 시위에 나갔고, 나가서 전경들 방패에 꽃만 꽂아놓고 온 게 아니라 돌도 던지고 제법 몸싸움도 했다고, 엄마 친구들이 찾아올 때마다 듣던 고정 레퍼토리가 그런 후일담이었거든.
    하긴 그렇게 셋이 교회에 간 건 대혼돈 전이었구나. 그땐 그런 게 좀 신경 쓰이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랬지. 엄마와 아버지를 보면 채도가 극과 극으로 달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색깔을 써서 만든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보는 것 같았어. 지금이야 아버지가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았다 하고, 내가 몇 명인지도 알 수 없게 돼버린 마당에 그 정도는 신경 쓰이는 축에도 못 끼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간간이 나직한 한숨만 뱉어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아버지가 꽃게 다리 하나를 발라 엄마 숟가락에 놔줬어. 좋은 남편,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 친딸도 아닌 내가 대학을 다니는 4년 내내 등록금을 대주고 독립 자금까지 보태준 사람. 엄마 입에 들어가는 게살을 눈으로 좇으며 흐뭇하게 웃는 그를 보면서, 난 나라면 저 사람만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 잘 모르겠더라. 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사랑했어. 우리를 대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배려심이 배어 있지 않을 때가 없었고.
    하지만 아버지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엄마는 언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지. 말할 마음만 먹으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었으니 내가 알기로 실어증 같은 진짜 병은 아니었어. 다만 엄마는 언제부턴가 말이라는 걸 할 마음을 별로 먹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 엄마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어. 내게 관심도 없는 것 같았고.
    얼른 밥만 먹고 그냥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국물을 후루룩 들이킬 때였어. 아버지가 말을 걸더라. 처음엔 별 얘기 안 했어. 아르바이트는 여전히 하고 있는지, 월세 내면서 생활하기 힘들지는 않은지, 뭐 그런 늘 하는 얘기들.
    -넌 계속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거냐.
    -글쎄요. 직장을 다닐 마음이 별로 없어요. 지금 하는 것도 꾸준히만 하면 페이가 꽤 돼요.
    -그래도 정상적인 직업을 가져야지. 여기저기 이력서는 내보고 있는 거야?
    -그게, 낸다고 그쪽에 제대로 접수가 될 가능성도 별로 높지 않고요. 접수가 된다고 해도 내가 적은 내용이 그대로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요. 설령 어디 취업이 된다 해도 계속 유지가 될지 안 될지 몰라요.
    -참, 그것도 그렇겠구나. 난 그런 일을 직접 겪어보질 못했으니. 하긴 우리 회사 직원들도 그런 얘기 많이들 하긴 하더라.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는데 도저히 회사에 닿을 수가 없더라고. 그런 건물 자체가 없든지,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사람들이 전부 자기를 못 알아보든지 그랬다는 거야. 그래서 자꾸 지각을 한대. 그런데 좀 꾸며낸 거짓말 같기도 해서 말이다.
    -거짓말 아닐 거예요. 정말로 그래요, 겹겹인은.
    -그러냐.
    -네. 그리고 그런 일에 비하면, 아르바이트는 있다가 없어져도 심리적 충격이 적죠.
    -그래도 말이다, 수인아. 매사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해. 없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취업을 하고 그 자리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려.
    -…….
    -수인아.
    -네?
    -넌 이상하지 않았냐?
    -뭐가요?
    -대혼돈 시작됐을 때.
    -아아.
    -아버지는 처음에 너무 이상했다. 왜 사람들이 모조리 미쳐 날뛰다 죽지 않을까? 세상이 왜 무너져 내리지 않지? 이렇게 질척거리는 혼란 속에서 다들 어떻게 계속 살아 있는 일이 가능한 건가 싶었지. 그랬는데, 그게 주님의 뜻이더라. 이렇게 우리가 혼란에서 정신을 수습하게 하시고, 이 상황에 잘 적응하며 살아 있게 하신 게 기적이 아니면 뭐겠니.
    -…….
    -대혼돈은 구원으로 가는 길에 놓인 시험 문제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거란다. 우리를 더 큰 도구로 쓰시려고 말이다.

 

    뭐 그런 얘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그만 교차점이 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서 그때 생각도 나더라. 세계가 이 꼴이 되어버린 걸 깨닫고 한동안 충격에 빠져 있다가, 처음으로 마음을 좀 추스르고 뭔가 할 기력이 생겼을 때. 율, 넌 그때 네가 뭘 했는지 기억해?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대학 네트워크에 접속해 졸업증명서를 떼려고 시도한 거였어. 고작 그런 일이었다는 게 지금 와선 좀 슬픈데, 그때는 안 될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면서 너무 무서웠거든. 예감대로, 안 되더라. 떨면서 교무처에 전화를 걸었어. 나는 그 학교에 입학한 적도 졸업한 적도 없대. 순간 머리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라. 이게 세상의 끝이구나 싶었어.
    우습지. 복면을 쓰고 야구방망이를 든 한 무리의 남자들이 대낮부터 상점 유리를 깨고 가게 주인을 끌어내 때리는 걸 보면서도 조금 겁이 날 뿐, 끝이라거나 종말이라거나 하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고1 때 담임이랑 면담한 내용부터 이력서에 한 줄 더 넣으려고 냈던 그 많은 공모전들까지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차르르 스쳐가더라. 내 점수들. 내 스펙. 그렇게 아등바등 악다구니를 쓰고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간신히 따낸 타이틀들이 다 사라져버렸어. 그러고 나니까 정말 전부 다 끝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물론 나중에 알게 됐지. 내가 그 대학을 졸업한 현실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더라. 다만 내 패턴엔 다른 대학이 세 군데 더 있었고, 나는 내 출신학교를 한 곳으로 유지할 수가 없었어. ' 어떻게 하면 취업 면접을 보는 동안 계속 특정한 대학 출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면접에 붙은 뒤에는 어떻게 그 회사 신입사원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걸 진지하게 고민하며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알게 됐어.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돼도 아무 상관없다는 걸 말이야.

 

    응, 정말 상관없더라. 어떻게 해도 이 일련의 경험들을 삶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어. 아버지 말대로 마음을 다해 기도를 한다고 이런 게 삶이 되지는 않지. 나는 끊임없이 툭툭 끊어졌다 다시 붙어야 했어. 내가 아는 나로 일관성을 지니고 존재할 수도 없었고, 겹쳐지고 싶지 않은 현실을 피할 수도 없었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면서 희한하게도 모든 게 괜찮아지더라. 난 다짐했어. 극장 의자에 사지가 묶인 채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데다 재미라고는 없는 이 괴상한 영화를 며칠이고 몇 달이고 봐야 한다면, 최선을 다해 재미있는 척을 하기로.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는 아주 많이 어렵지는 않았어. 체념이 빨라서일까.
    그 다음부터는 잘 지내온 편인 것 같아. 신경증에 걸리거나 분노조절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토할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긴 하지만 어디에 불을 지르거나 누굴 칼로 찌르거나 하는 짓도 아직은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자신을 속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그래서 처음엔 당장 종말이 찾아올 것처럼 길 가는 사람을 두들겨 패고 관공서를 때려 부수고 도둑질을 하고 유리창을 깨다가, 그래봤자 몇십 분, 길어야 몇 시간 뒤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현실을 다시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최초의 폭주하는 감정, 아니면 자포자기의 심정이 점점 시들해지면서 일상으로 돌아간 것 아닐까. 우린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 어떤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였어. 아닐 줄 알았는데, 그렇더라.

 

    그러다 너를 다시 만났지.     겹과 겹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한가한 토요일 오후였어. 자주 가던 동네였고, 자주 가던 카페였어.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보고 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건 너였어. 네가 살아 있었어. 넌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어. 목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말이야.
    난 일어서지도 못했고, 감히 눈을 돌리지도 못했어. 율, 기억나? 내가 온몸에 깁스를 한 사람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으니까 네가 내게 먼저 걸어왔잖아. 깜짝 놀란, 그렇지만 반가워하는 얼굴을 하고, 햇빛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네가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고 난 내 커피를 조금 흘렸지. 너와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
    네가 살아 있는 겹. 그 겹에서 넌 아무 일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와 똑같이 나이를 먹으며 대학에 간 모양이었어. 나와는 뭔가 사소한 일로 다투고 멀어진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지. 가끔씩 내가 생각났다고 너는 말했어. 그리고, 종종 보자고도.
    난 두려움과 싸웠고, 결국 그걸 밀어내는 데 성공했어. 그날 집에 오는데 길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 나쁜 눈물이 아니었어. 두터운 묵은 얼음이 녹아 흘러나오는 것 같았고, 널찍한 가슴을 지닌 선한 거인이 아주 조그만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 같았어. 그제야 무언가를 느끼는 게 가능했어. 네가 살아 있어서, 참 좋더라.
    욕심이 생긴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다시 삶이란 걸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 난 비록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지만 다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 새하얀 눈으로 덮인 벌판 위에 글씨를 쓰듯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깨끗하게, 처음부터, 새로.
    그 욕심이 잘못이었을까.
    깨끗하게, 처음부터, 새로. 새하얀 거, 다시 시작하는 거. 그런 것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난 그때는 알지 못했어.

 

    -그 친구 이름이 율이라고 했지?
    꽃게 껍데기에 입천장을 찔렸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더니, 아버지가 다시 말하는 거야.
    -무슨 일을 한다고?
    그건 대답이 요구되는 질문이었어. 대답해야 하는 사람은 어째선지 나였고. 난 한참 생각하다가, 네 장례식에서 본 사람들을 떠올렸어.
    -회사, 다니는데요.
    -무슨 회사?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는데요.
    -그걸 왜 몰라? 한 번 집에 데려와라. 어떤 앤지 나도 봐야 할 거 아니냐.
    -……왜요?
    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어.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어떤 교차점을 거쳐 온 건 분명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버지가 너를 알고 있다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어. 내가 무슨 얘기를 했을까? 대체 무슨 얘기를? 힌트를 얻으려고 엄마 얼굴을 봤지만, 거긴 낯익은 피로와 무력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왜라니. 너 결혼하려는 애 맞냐. 하겠다며, 결혼.
    -……네?
    -오백 일을 꼬박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드렸다. 내 딸의 영혼이 성령을 받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고. 율법이 금하고 인간 사회에서도 금기인 그릇된 길에 들어서서 힘겨워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
    -바로 응답을 주시지 않아서 괴롭고 막막했다. 마음 같아서는 네 엄마랑 의논해서 너를 어디 기도원에라도 보낼까, 그 율인가 하는 애를 데려와서 혼쭐을 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달래도 안 되고, 타일러도 안 되는 너를 슬프지만 당분간 우리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네 발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 하나,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어.
    난 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았어.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어.
    -그러고 있는데 몇 달 전에, 새벽에 나 홀로 울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말이다. 목소리를 들었다. 그릇된 길이 아니다, 네가 사랑하는 딸이 선택한 길이다, 그러시더라. 너를 내치시거나, 나를 탓하시는 목소리가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가슴이 사무쳐서 한참을 울었다. 그 말씀만 하시고 더 이상은 응답이 없으셨어.
    -…….
    -그래서 오랫동안 생각해 봤다. 마음을 추스르는 게 쉽지 않았어. 그래서 말인데, 수인아.
    -……네?
    -데려와. 네 엄마랑 나한테 정식으로 소개를 해라. 동성 결혼이라는 게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너희도 서로 그런 얘기까지 나눴으면 오랫동안 생각하고, 마음 상하고 앓았을 거 아니냐. 그렇게 오랫동안 아픈데도 네 마음이 안 변했으면 주님께서 너의 그런 마음을 통로로 뭔가 역사하시려는 바가 있을 거다. 이런 세상이 온 것에도 이유가 있으니, 내 딸이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
    집에 오라고 해. 대신, 준비를 좀 해서 와야 할 거야. 앞으로 생활하는 거며 사람들의 시선이며, 이 험하고 매몰찬 세상 풍파를 어떻게 헤쳐나갈 건지, 어떻게 평생 너만을 사랑하고, 반려자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건지, 아버지가 좀 들어야겠다.

 

    난 물을 마셨어. 그러고는 컵을 내려놓고, 너에게 전화를 하려고 욕실로 갔지.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이 거울 속에 있더라. 수없이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한데 섞여 머릿속에서 팝콘처럼 터지고 있었어. 네 목소리를 들어야 진정이 되고, 후들거리는 무릎이 멈출 것 같았어.
    네 번호를 누를 수 있게 된 건 욕실 벽에 기대 선 채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어.
    신호가 가고, 조금 뒤에 없는 국번이라는 안내 메시지가 나올 때만 해도 난 당황하지 않았어. 교차점이 와서 잠시 현실이 교란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뒤로 족히 천 번쯤은 더 전화를 걸었을 거야. 아니, 어쩌면 이천 번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너는 받지 않았어.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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