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_차세대1차_희곡] 태초에 우라늄이 있었다

 

[2015년 AYAF 선정작]

 

 

태초에 우라늄이 있었다

 

 

 

석지윤

 

 

 

    등장인물

 

    단독자
    집행관
    소녀
    아빠
    엄마
    수녀(마리아)
    원장
    인간
    경찰

    *배심원들(아빠, 엄마, 수녀, 원장, 경찰)은 배심원 역할과 실제인물 역할을 병행한다.

 

 

 

어둠. 아득히 들리는 거대한 인파의 환호성과 박수.
환호성 잦아들며 밝아진다.
전기의자. 배경엔 거대한 시계와 거대한 문.
원형단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수감복의 단독자.
멀찍이 떨어진 집행관.
배경엔 어둠 속 희미한 배심원들(아빠, 엄마, 수녀, 원장, 경찰).

 

집행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정적.
집행관 없다면 집행하겠습니다.
단독자 ……끊으실 겁니까?
집행관 뭘 말이죠? 당신 숨통? (키득하곤 헛기침)
단독자 아니…… 내가 남길…… 마지막 말을.
집행관 우린 인도주의자들입니다. 사형수의 마지막 말을 잘라먹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단독자 인간의 숨통은 잘라먹으면서 말이죠?
집행관 (배심원들을 돌아보며) 우린 인도주의자인 동시에 법치주의자들이니까.
엄숙히 끄덕이는 배심원들.
집행관 그래서, 남길 말이 있다는 겁니까.
단독자 끊지만 않으시겠다면.
집행관 끊지 않겠습니다.
사이.

 

아빠 주무시는 겁니까.
단독자 아뇨.

엄마 울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단독자 ……공정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녀 공정함이요?
단독자 네, 공정함.
원장 이 집행은 공정한 사법절차에 따른 형 집행으로, 배심원 만장일치의,
단독자 저 역시 응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집행관 본인이 생각해도 죽어 마땅한 인간이군요.
단독자 제가 생각하는 공정함은…… 이를테면 정치적 공정함입니다.
아빠 정치적 공정함?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게 생각납니까.
단독자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건 정치적인 공정함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정치적으로 온전히 중립적일 수 있을까, 모든 차별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져 진정한 공공선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엄마 그 입으로 공정함을 논하기엔…… 악취가 너무 진하게 난다고 생각 안 하나요.
단독자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모두 허울이고 기만이죠.
수녀 위선이란 말이군요.
단독자 맞습니다, 위선. 저의 과거는 모두 위선 탓입니다.
원장 그래서, 위선의 정반대의 지점에 선 거다?
단독자 바로 그겁니다.
집행관 하지만 선을 행했다고 보긴 어려울 거 같은데요, 당신의…… 과거는.
단독자 누가 선을 행했다고 했습니까? 위선의 반대말은 선행이 아닙니다.
집행관 위선이 아니다?
단독자 바로…… 위악이죠.
집행관 …….
단독자 제가 풀려나면 뭐부터 할지 아십니까?
집행관 당신은 이제 사형당할 겁니다.
단독자 하늘이 도와 풀려난다면.
집행관 ……뭐부터 할 거죠, 풀려난다면?
단독자 당신 딸년부터 임신시키고 임산부만 강간하는 부류들에게 팔아버릴 겁니다, 헐값에.
집행관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배심원들.
집행관 ……딸은 없는데.
단독자 걱정 마십쇼. 그들, 임산부만 강간하는 타입들에게 중요한 건 성별이 아닌 태아니까. 그들은 태아 강간의 원칙을 고수하는 아카데믹한 집단이죠. 당신 아들에게 공갈젖꼭지만 물려 놔도 충분할 겁니다.
집행관 ……다 컸는데, 내 아들은.
단독자 옹알이를 하게 만들어주죠, 혀를 도려내서. 아장아장 걷게 만들어주겠습니다, 정강이뼈를 뽑아서.
집행관 ……이제 집행하겠습니다.
단독자 인도주의자들…… 그들 모두는 스스로의 덫에 빠졌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집행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짧아야 하는 법입니다.
단독자 짧아야 하는 법…… 그것도 법치주의입니까? 몇 항 몇 조에 명시되어 있죠?
집행관 …….
단독자 아니라면 내 마지막 말을 끊지 마십쇼. 인도주의에 따라 난 아직 인간이니까.
모두 너 같은 게 무슨 인간이야!
단독자 ……위선자들.
모두 (발끈) 뭐?
단독자 최초의 빛을 따라 도달한 곳 역시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었죠.
집행관 최초의 빛?
배심원단 한쪽에 조명 떨어지면,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들고 있는 엄마와 아빠.
단독자 내 생애를 통틀어 중요했던 건 오직 그뿐이었습니다. 저 빛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저 빛을 따라가면 결국 어디에 도달할까.
엄마 (포대기를 어르며) 얘를 좀 봐요, 웃고 있어요.
아빠 엄마아빠를 만난 게 행복한 모양이오, 우리처럼. 허허허.
단독자 난 빛을 향해 기어갔고 그 근원지를 보게 되었죠. 산부인과 수술대 조명이었습니다.
엄마 까꿍, 까꿍. 얘 웃는 것 좀 봐요, 웃는 게 어쩜 이리 예쁠까요?
아빠 당신을 닮아서 그런 모양이야, 허허허.
단독자 두말할 것도 없이, 제일 처음 만난 위선자들은 생물학적 부모들이었죠. 보자마자 알 수 있었죠. 둘 중 누구도 날 원하지 않았다는 걸.
엄마 세상에 이런 천사가 또 있을까!
단독자 이 여자가 자궁에서 날 밀어낼 때 회음부가 좀 찢어졌다는군요. 그럴 수밖에, 뿔이 달린 악마를 배출하는 건 걸리적거리는 일이었을 테니.
엄마 이름은 뭘로 지을까요?
단독자 악마가 좋겠지, 응애응애.
아빠 음……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소.
단독자 악마가 아니면 괴물? 천재? 아니면 재앙? 아니, 내게 어울리는 이름은 따로 있지.
아빠 결정했소. 이 아이 이름은 (삐이이-)가 좋겠어.
엄마 정말 예쁜 이름이에요!
단독자 하지만 신생아였던 난 그 이름을 거부하기로 했죠.
아빠, 엄마 (정색하며 단독자를 돌아보며) 그럼 어떤 이름이 어울린다는 겁니까?
단독자 ……난 초월을 꿈꾼 것뿐입니다.
사이.
수녀 그래서 뭘 말하겠다는 겁니까. 태어나자마자 악인이었다고?
단독자 언젠간 그런 인간이 등장하리라 생각지 않았습니까. 모든 윤리와 도덕을 저버리는 존재가. 역사를 긍정하는 이들의 발언권을 묵살하는, 그런 존재가.
원장 역사를 입에 올리지 마시길. 당신은 지금 엄숙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 역사에게.
단독자 모든 영웅들처럼, 나 역시 시대의 세례를 받으며 태어난 것뿐입니다.
원장 영웅들이라…….
단독자 대량학살자들, 전쟁범죄자들, 근친상간자들, 문화파괴자들…… 난 그들의 마지막 후예입니다.
집행관 본인을 과대평가하고 있군요. 당신은 그저 이들의 자식입니다.
단독자 (아빠를 보곤) 사실 이 남자는 동성애자였죠.
아빠 ……지금 부친의 부정으로 본인을 정당화시키려는 겁니까. 우린 성소수자들에 대한 어떤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단독자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말이죠.
아빠 …….
단독자 하지만 이 남자는 뭔가를 소유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전적 남성상에 가까웠고, 그 위선이 이 남자를 미치게 만들었죠.
엄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요, 당신 부친이?
단독자 그것보다 육체적인 문제가 컸죠.
엄마 육체적이라면?
단독자 이 남자는…… 개미좆이었으니까.
엄마, 아빠 가랑이 사이를 보며 피식.
단독자 내가 태어났을 때 그가 먼저 확인했던 것도 내 가랑이 사이였죠. 그는 절망했고 동시에 자부심을 느꼈죠. 자신에게도 우월적 유전자가 존재했었다는 자부심. 다만 자기 다음 세대에 발현됐을 뿐일.
집행관 우월적이라…….
단독자 맞습니다, 우월적! 우월적인 좆! 우월적인 두뇌!! 우월적인 인간!!!
사이.
집행관 당신의 그 과대망상은 결국 이렇게 당신의 목숨을 빼앗게 되었죠.
단독자 (듣지 않고) 우월적 성기를 달고 태어난 내게 하루하루는 고통의 나날이었죠. (자기 가랑이를 보며)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죠.
집행관 손 하나로 충분했을 텐데?
단독자 (고개 저으며) 도저히 사정할 수 없었습니다. 성생활에 불만족을 느낀 생물학적 모친이 숨겨 둔 포르노를 봐도, 사창가를 기웃거려도…… 도저히.
집행관 사창가라…… 몇 살 때 얘기죠?
단독자 열 살이었을 겁니다. 열한 살이 되던 해 나는 마침내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니까.
집행관 자유로워졌다?
단독자 그전까지 내게 있어 성은 오직 몽정뿐이었죠. 해소할 길 없는 욕망이 꿈나라까지 뒤쫓아 오곤 했죠.
집행관 가톨릭 재단에서 만든 학교를 다녔었죠?
배심원들, 단독자를 수감복에서 교복으로 갈아입힌다.
집행관 성가대 여학생들을 강간하는 꿈이라도 꿨나요?
단독자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의 두뇌는 우월적이라고. 그런 통속적인 로맨티시즘은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습니다.
집행관 그럼 어떤?
단독자 교실 모든 저능아들을 불태워 죽이는 욕망…… 그 욕망에 몽정은 끊일 날이 없었죠. 꿈나라 전체가 잿더미가 되는…….
집행관 ……성욕이란 게 있긴 했던 모양이군요.
단독자 애석하게도, 그때까지 난 아직 인간이었죠.
집행관 욕망에선 어떻게 자유로워졌죠?
일어서서 배회하는 단독자.
단독자 아침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은 너무도 고요했고, 은은한 햇살로 가득 차 이루 말할 수 없이…… 경건했죠.
은은한 빛살이 한줄기 떨어진다.
단독자 그리고 전 성모마리아상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갸름한 턱선, 오똑한 콧날…… (어린 목소리 톤) 이런 여자가 동정녀라고? 그걸 믿으라는 거야?
집행관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당신의 욕망을 구원해 줬나요.
단독자 비슷하죠. 사정에 성공했으니까.
집행관 ……뭐?
단독자 자위를 했고 사정을 했습니다. 성모마리아상 얼굴에.
집행관 …….
단독자 그리고 그때 전교생 예배가 시작됐죠.
등장하는 수녀.
수녀 여러분, 하느님께서 최초에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지요? 또, 또 잊어버렸어요? 하느님은 말씀하셨죠. 빛이 있어라! 그렇게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죠. (양팔을 벌려) 이 모든 세상이 그 태초의 빛에서 만들어진 거랍니다. 자, 우리 이제 마리아님께 인사드릴까요? 안녕하세요, 마리아님.
마리아상에 기도하는 수녀.
단독자 그리고 그때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건!
수녀 여러분! 성모마리아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단독자 울지 마요, 마리아님…… 우리가 잘못했어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죄를 사해 달라고 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집행관 즐거웠겠어요, 당신이라면.
수녀 자, 우리 모두 마리아님의 눈가에 입을 맞춰 드리자꾸나.
단독자 전교생이, 일곱 살에서 열세 살까지의 모든 전교생이 차례를 지켜 내 정액에 입을 맞추는 장면은…… 내 학창 시절 가장 소중했던 추억입니다.
아빠 더없는 즐거움이었겠군요, 당신에겐!
단독자 그리고 수녀님은 마리아상의 눈물을 닦아 주었죠. 그런데 멈칫하더라 이겁니다. 익숙한 감촉이었을 테니. 아멘.
엄마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쓰레기야.
단독자에게 돌아서는 수녀.
단독자는 아이 톤으로 대답.
수녀 넌 왜 입을 맞추지 않니?
단독자 제정신이세요? 내가 반출한 걸 다시 반입하게?
수녀 ……너구나. (구역질)
단독자 헛구역질이라는 데 내 꼬추를 걸죠. 역겨운 척은.
수녀 (뚝 멈추며) 너, 뭐가 문제니?
단독자 문제적 인간에게 뭐가 문제냐고 물어봤자 헛물켜시는 거예요.
수녀 문제적 인간……? 꼬맹이가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들어 갖고…… 너지? 신부님께…… 몹쓸 짓을 한 것도.
단독자 몹쓸 짓이 아니라 볼 만한 짓이었죠. 소년소녀 가장에게 사제복을 입히고 유린하는 건 혼자 보기 아깝잖아요. 기자들도 좋아하던데요.
수녀 ……너 문제가 아주 심각하구나.
단독자 내 문제요? 내 문제가 뭔데요?
수녀 넌 아주…… 나쁜 아이란 거지.
단독자 그게 다인가요?
수녀 뭐?
단독자 그냥 나쁜 아이로 끝인가요? 그거면 시시한대요.
수녀 넌 나쁜 아이고 벌을 받아야 할 아이야.
단독자 그러니까 왜요!
수녀 넌! 넌…… 나쁜 아이니까.
단독자 세상에. 기도문만 반복하다가 모든 말을 반복하게 되신 건가요?
수녀 나쁜 아이야, 넌!
단독자 그러니까 왜요!
수녀 그냥 그런 거야!
단독자 왜 나쁜 아이가 됐고 또 어떤 나쁜 인간이 될지 상관없이?
수녀 그래! 그냥 그런 거야! 자, 마리아님께 사죄 드리거라.
단독자 사죄? 대리석 조각한테?
수녀 그냥 내 말대로 좀 해! 묻지 좀 말고!
단독자 묻지 말라구요? 그럼 어떻게 알죠? 어느 사상가가 그랬어요. 의심은 불쾌하지만 확신은 꼴통 짓이라고. 전 불쾌한 아이지만 꼴통은 아니에요.
수녀 엉덩이 맞기 전에 내 말대로 해!
단독자 아시죠? 그 수녀복 때문에 모든 말이 음탕해지는 건. 그걸 노린 건가요?
수녀, 죽일 듯이 노려본다.
주눅 드는 단독자.
단독자 그, 그럼 사죄는 어떻게 하는 건데요.
수녀 ……기도를 드리거라.
단독자 두 손만 모으면 되나요? 저 차가운 여자 입을 벌리려면?
수녀 (신성모독에 기겁하곤) 길들지 않은 혀는 쉬지 않는 악이니라…… 매일매일 기도를 드리거라.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매일매일.
단독자 집엔 성모상이 없는데요.
수녀 (성모상을 내밀며) 가져가거라.
단독자 자위에 쓴 휴지를 누가 집에 가져갑니까? 변기에 버려야지.
수녀 (이를 악물곤) 가져가렴…… 이걸로 한 대 맞기 전에.
단독자 하지만 우리 집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예요. 난 최고 신 아후라 마즈다의 사악한 자식 앙그라 마이뉴구요.
살기등등해지는 수녀.
공손히 두 손을 내미는 단독자.
물러서는 수녀.
마리아상을 전기의자 머리에 올려놓는 단독자.
단독자 난 말을 걸고 또 걸었죠.
집행관 말을 걸었다구요? 순진한 구석도 있었군요.
단독자 어쨌든 열한 살이었으니까. (아이 톤으로 마리아상에게) 마리아님, 오늘의 죄는 별거 없어요. 길 잃은 다섯 살짜리를 다른 도시로 보내버렸죠. 제 죄를 사하여 주실래요?
침묵.
단독자 하지만 도통 말씀이 없으셨죠. (아이 톤으로) 마리아님, 애들은 모두 장래 희망이 있어요. 군인, 가수, 부동산 투기업자…… 하지만 전 고를 수가 없어요. 연쇄살인범, 폭탄테러범, 유아강간범…… 뭐가 돼야 자아를 찾을 수 있을까요?
침묵.
단독자 (빈정 상한다) 아시죠? 당신 때문에 모든 남성의 성의식이 뒤틀렸단 건. 여성 혐오증도 모두 당신 때문이잖아요. 어떻게 책임질 건데요?
침묵.
단독자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집행관 대답을 하던가요.
단독자 하더군요.
집행관 그때부터였나 보군요, 당신의 과대망상증은.
단독자 과대망상, 정신분열, 반사회적 인격장애…… 그 무엇으로도 날 진단할 순 없을 겁니다.
집행관 그럼 당신의 문제는 뭐죠?
단독자 문제적 인간. 그리고…… 단독자.
집행관 단독자?
단독자 마리아님…… 열한 살짜리 단독자의 정액 맛은 어땠습니까. 네? 제발 대답해 주세요…… 언제까지 날 혼자 두실 거예요…….
무대 뒷면으로 성스러운 빛살로 그어지는 십자가.
배심원 쪽에서 조신하게 등장하는 성모마리아(수녀).
마리아 열한 살은…… 처음이었단다. 열두 살은 있었는데.
단독자 거짓말이죠? 동정녀라는 건.
마리아 처녀막 수술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단다. 그 수술은 인간의 역사를 상징하지. 인간 따위는 태어난 적 없어야 한다는 단 하나의 역사를.
단독자 왜 무가 아니라 유일까요. (집행관에게) 네?
집행관 나한테 물은 겁니까?
단독자 왜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존재함일까요?
집행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단독자 표준물리학에 따르면 이 우주는 존재하지 않아야 옳다는군요.
집행관 갑자기 무슨 물리학 얘기입니까.
단독자 어쩌면 모든 게 환상이란 생각 안 드십니까. 학교, 집, 국가, 역사…….
사이.
마리아 그렇게 말이 많더니 오늘은 조용하구나. 이제 좀 살겠구나.
단독자 질문이요! 저 십자가에 매달린 히피는 누구 아들이에요?
마리아 내가 어찌 알겠느냐. 지붕을 수리해 줬던 말라깽이나 낙타 젖을 배달하는 털북숭이겠지.
단독자 나도 저 남자처럼 되고 싶어요.
마리아 그의 수난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한 거란다.
단독자 나도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어요. 죽었다 살아나는 좀비도 될 수 있고.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릴 거예요. 그게 핵심이잖아요, 종말, 아포칼립스, 묵시록. 내 장래 희망은 좀비로 할래요.
마리아 어린양이 목자가 될 순 없단다.
단독자 무슨 말이에요? 양고기나 되란 말이에요?
마리아 지상의 운명에 순응하거라, 아이야.
단독자 지상은 좆까라 그러구요. 그럼 될 수 있는 게 뭐죠? 교황 정도?
마리아 왜 고행의 길을 걸으려 하느냐, 아이야.
단독자 뻔하잖아요. 유명해지고 싶어요. 모두가 내 말에 굴복하게 하고 싶어요. 두 손을 모으게 하고 다리를 꿇게 해서 쥐가 나게 하고 싶어요. 머릿속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는 정신지체아들로 만들고 싶어요. (애답게 침을 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어야 했는데…….
마리아 그의 아버지는 만백성 위에 우뚝 솟으신 분이란다.
단독자 솟긴 뭐가 솟았다는 거예요.
마리아 누구보다 높이 솟은…… 그런 물건을 가진 남자였지. 얼굴도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 그 거룩함은 기억나는구나.
단독자 그래서 난 안 된다구요? 생물학적 부친이 개미좆이라서?
마리아 난 모든 걸 굽어보고 있단다. 모든 크기와 굵기를.
단독자 젠장…… 개미좆에서 태어난 탓에 예언자가 못 될 줄이야.
마리아 그걸 원죄라 부른단다.
단독자 뭐요, 좌절당한 꿈?
마리아 부모를 갖는 것 말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는 죄는 그뿐이지.
단독자 그럼 안 가지면 돼요, 그딴 건. 버리면 돼.
마리아 부모를 버릴 순 없단다.
단독자 난 뭐든지 버릴 수 있는 인간이에요. 부모든 인간성이든.
마리아 왜 그런 죄를 저지르겠다는 거냐.
단독자 죄의식이야말로 내 유일한 신앙이니까.
마리아 살인은 큰 죄란다, 부모를 살해하는 건 더 큰 죄고.
단독자 죄에 크고 작은 건 없어요, 죄가 무슨 좆도 아니고.
마리아 뭘 원하느냐, 아이야.
사이.
단독자 마리아님. 머지않아 인간들은 절 악마라고 부를 거예요. 그전에 싸이코패스라고 부를 거예요.
마리아 싸이코패스?
단독자 있어요, 그런 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 명하고 홍수로 대량 학살하는 그런. 하지만 난 보통 싸이코패스와는 다를 거예요. 난 그렇게 어설프지 않아요. 날 악마라고, 싸이코패스라고 부르겠지만 그건 적절한 명칭이 없어서일 뿐이에요. 난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해요.
마리아 뭐라 불리길 바라느냐, 아이야.
단독자 난…… 단독자예요.
사이.
마리아 뭘 뜻하는지 모르겠구나, 아이야.
단독자 그럴 수밖에요. 속 빈 대리석 인형이 뭘 알겠어.
마리아 머리는 비었어도…… 얼굴은 반반하잖느냐.
단독자, 코웃음치곤 성모상을 살짝 밀어 떨어트린다. 깨진다.
놀라 달려 들어오는 아빠, 엄마.
단독자 이제 버릴 때가 됐어.
엄마 무슨 일이니?
울기 시작하는 단독자.
단독자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 미안, 아빠가 늦게 왔지?
단독자 아뇨, 아빠가 보고 싶다구요.
아빠 아빠 여기 있잖아, 아들.
단독자 (정색) 내 말 잘 들어, 이 누군지도 모를 머저리야.
아빠 ……뭐?
단독자 (다시 흑흑) 아빠가 보고 싶어.
엄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애야?
단독자 아빠랑 또 목욕탕에 가고 싶어요.
아빠 내가 널 목욕탕에 데려간 적이 있던가?
단독자 당신은 목욕탕엘 가지 않잖아요. 남들 앞에서 달랑거릴 물건이 아니니까.
아빠 ……누구랑 갔다는 거냐.
단독자 아빠랑 목욕탕도 갔었지요. (굵은 목소리) 역시 내 아들이구나. 날 닮아서 물건이 아주 거룩해.
아빠 ……뭐?
엄마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단독자 (아빠를 가리키며) 엄마, 왜 아빠는 이 머저리가 집에 없을 때만 오는 거예요?
돌아버리는 아빠.
아빠 이 씨발년!
엄마의 목을 조르는 아빠.
서서히 탱고를 추기 시작하는 단독자. 어설프다.
아빠 이 좆같은 년…… 그럴 줄 알았어, 니년이 내 뒤통수를 칠 걸!
단독자 (춤추며) 떡부터 쳤겠지, 딴 새끼랑.
아빠 (단독자를 가리키며) 저런 막돼먹은 새끼가 내 자식일 리 없지. 누구 새끼야!
단독자 (춤추며) 난 파괴의 사생아이자 멸망의 씨앗이지.
아빠 어떤 새끼야! 난 저런 새낀 원하지 않았어!
엄마 (목 졸려) 그, 그건 나도야…… 케겍.
단독자 그럴 줄 알았어. 누가 멸망을 바라겠어.
아빠 어떤 새끼랑 붙어먹은 거냐구! 앙?
엄마 (간신히 입을 열어) 니가 알아서 뭐 하게! 쪽도 못 쓸 거면서!
춤이 멎는 단독자.
단독자 ……뭐? 진짜였다구……?
완전히 돌아버리는 아빠.
아빠 (눈이 뒤집히고 혀가 꼬여) 이 후레씨발개좆창녀 같은 씨부랄잡썅년……!
단독자 그럼 내 친부는 누구죠, 엄마?
단독자, 거품을 꼴깍이고 있는 엄마를 흔들며 묻는다.
단독자 누구예요, 네? 분명 만백성 위에 우뚝 솟은 남자죠? 그렇죠?
엄마, 숨이 끊긴다.
아빠, 절망한다.
단독자 (설렌다) 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죠. 누굴까? 내 아빠는. 어떤 괴물일까? 연쇄살인범? 아니면 범죄조직 두목? 고문기술자? 아니면 혹시…… (하늘을 보며) 아빠……?
성스러운 빛으로 아득해지는 무대.
아빠, 수갑을 차는 손 모양을 하며 물러선다.
원장 (아득한 음성) 아들아…….
단독자 아빠……?
원장 그래, 아들아……. 내 아들아……
단독자 (울먹거리며) 아빠…….
원장 아들아…… 엎드리거라.
단독자 응?
원장 엎드려야지.
엎드려뻗치는 단독자.
집행관 생부를 찾았나요.
단독자 (눈물 훔치곤) 생물학적 부모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깜빵 간 열한 살짜리가 어딜 가겠습니까. 고아원이지.
목검 차고 등장하는 원장.
단독자 원장님은 원생들을 아들딸로 불렀죠. 셋 이상의 이름은 기억할 수 없는 반쪽짜리 두뇌였으니까.
원장, 왼쪽 허리춤에서 목검을 찾는다.
하지만 목검은 오른쪽.
각 잡힌 자세로 목검을 뽑는 원장.
단독자 반쪽짜리 두뇌를 가지긴 했지만…… 그는 참된 폭력의 화신이었죠. 아주 선명한 미의식을 지닌.
원장, 단독자 엉덩이를 목검으로 내려치고 내려친다.
단독자 (맞으며) 그의 미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난 그를 아버지로 임명할까 생각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죠. 아이씨, 뼈 맞았어.
원장 (체벌을 잠깐 멈추며) 왜 그럴 수 없었습니까?
단독자 그의 폭력성의 원천은…… 또 하나의 개미좆이었으니까.
눈 뒤집힌 원장, 다시 매질.
집행관 어린 시절의 학대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건가요?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만.
단독자 학대가 아닌 수행이었습니다. 그는 때와 장소를 잘못 선택해 태어난 무사였으니까.
집행관 무사?
단독자 원장, 아니, 사부님은 할복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었죠.
체벌을 멈추는 원장.
무릎 꿇고 앉는 단독자.
어설프게 깎아 만든 작은 목검을 건네는 원장.
원장 (근엄하게) 다시 해보거라.
단독자 네, 원장, 아니, 사부님.
단독자, 목검으로 자기 배를 가른다.
원장 아직도 손에 공포가 남아 있구나.
단독자 아무리 저라도 제 십이지장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원장 공포를 극복하거라.
단독자 공포가 아니라 십이지장이라니까요.
원장, 목검을 높이 쳐든다.
입을 다무는 단독자.
원장 결사항전의 자세를 잊으면 안 된다.
단독자 넵!
원장 언제 어디서든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단 걸 알아야 한다.
단독자 넵!
원장 그리고 무장은 패배에 책임을 져야 하지.
단독자 이기면 되잖아요.
원장 ……뭐?
단독자 이기면 된다구요.
혼란에 맛이 가는 원장.
원장 이겨……? 뭘 이겨……? 이긴다구? 전쟁에서? 그럼 전쟁을 왜 하는데? 그럼 자살특공대엔 왜 지원할 거지, 난?
단독자 그에게 전쟁은 패배 그 자체였죠. 승리라고는 개념 자체도 없는. 전쟁은 지는 것, 져서 죽는 것, 고로 전쟁은 곧 죽음. 죽음 이꼬르 공포.
덜덜 떨며 헛소리하는 원장.
원장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내 목숨을 바쳐 적의 목숨을 끊는다…… 너 죽고 나 죽자…… 섬멸이다…… 일 빼기 일은 영…… 수천만 빼기 수천만도 영…… 들린다…… 적군이 몰려오는 소리가……!
목검을 치켜들고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원장.
정적.
집행관 ……독특한 유년 시절이긴 했군요.
단독자 따분했죠, 사실. 벌레들이나 죽이며 시간을 때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작은 목검으로 바닥을 쿡쿡 찌르는 단독자.
단독자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으니! 이 빛도 못 보는 버러지들! 여긴 전쟁터야! 모두 섬멸해 주지.
집행관 언제나 혼자였나요.
단독자 나처럼 우월한 존재들은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이죠.
집행관 고독으로 본인을 포장하려는 겁니까.
단독자 난 단독자입니다. 고독이야말로 나의 숙명이었죠. (다시 격하게 찔러대며) 이 버러지들! 죽어! 전쟁은 죽음이야! 공포야!
집행관 이쯤이면 마지막으로 할 말은 다 한 거 아닙니까. 대체 언제까지,
단독자 그리고 그때였습니다.
집행관 그때?
단독자 그 아이가 내 세계에 침입한 건.
배심원단에서 한 발 나서는 소녀.
단독자 ……피와 눈물로 점철된 내 세계에.
소녀, 단독자 옆에 선다.
단독자, 보지 않고 계속 찌른다.
소녀 너 재밌는 아이구나?
단독자 뭐? 넌 뭐야.
소녀 넌 참 재밌는 아이 같아.
단독자 재미? 재수 없게 기웃거리다가 사창가에 팔려가는 재미는 어때? 발기 불능자들한테 토막 나는 재미는 덤으로 얹어서 말이야.
하하하 웃는 소녀.
소녀 손에 든 건 뭐니?
단독자 타고난 살인자의 또 하나의 손이랄까. 난 손이 세 개야.
소녀 누굴 죽일 셈이니? 그 세 번째 손으로?
단독자 너부터 죽여야겠지. 내 원대한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으니.
소녀 그리고?
단독자 그리고?
소녀 그리고 누굴 죽일 거니?
단독자 생각 중이야. 사부님이나 내 아빠가 되겠지. 우선 아빠를 찾아야겠지만. 아니면 옆 반 사팔뜨기도 괜찮겠지. 그 눈이 보고 있을 걸 상상하면 온 우주가 뒤틀리거든.
소녀 아빠가 있니? 그런데 왜 여기 있어?
단독자 생물학적 부친을 말하는 거야. 내게 육신은 오직 고통이거든.
소녀 복수를 하겠다는 거구나.
단독자 (바닥을 팍 찌르며) 복수든 소일거리든 뭐든.
소녀 날 살려 주면 안 되겠니?
단독자 무리한 부탁이야. 살인자의 손에 걸린 인간은, 곤충채집군의 채집망에 걸린 나비나 다름없어.
소녀 하지만 나도 복수하고 싶어, 우리 아빠한테.
단독자 아빠가 있어?
소녀 응. 끔찍한 인간이야.
단독자 무슨 짓을 했지? 강간? 폭행? 고문?
소녀 모두. 하지만 복수는 그래서가 아니야. 그가 선생님이기 때문이야.
단독자 선생님?
소녀 응, 도덕을 가르치며 먹고 살아.
단독자 (손을 들어 말을 막으며) 됐어, 더는 말하지 마. 내가 죽인다.
소녀 그냥 아빠였다면 살려 뒀을 텐데, 도덕 선생이기도 하는 바람에,
단독자 그만 말해, 도덕이란 단어는. 기도문 같은 거거든, 참고 들어줄 수가 없어.
소녀 기도문? 너 뱀파이어니?
단독자 뱀파이어, 좀비, 인권운동가, 프랑켄슈타인……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괴물의 총합이 나야.
소녀 그럼 널 뭘로 불러야 하지?
단독자, 잔뜩 폼을 잡고.
단독자 난, 단독자야.
소녀 단독자? 그건 무슨 괴물이니?
단독자 (대답 못 한다) 그…… 그건…… 너 따위 계집한테 말할 게 아니야.
소녀 하하하, 너의 아빠는 분명 대단한 사람일 거야. 그래서 죽이려는 거지?
단독자 내게 친부살해의 욕망 같은 건 없어. 난 보통 인간이 아니거든.
소녀 그럼 어떤 욕망이 있는데?
사이.
단독자 아직…… 잘 모르겠어.
소녀 (벌레들을 발끝으로 차며) 음…… 이런 거 아닐까? 넌 인류살해자야.
단독자 인류살해자?
소녀 모든 인류를 짓밟으면 니네 아빠도 죽고 말 거잖아.
단독자 ……그렇지.
소녀 어쩌면 네 아빠는 그러기 위한 존재일지도 몰라. (말을 받으라는 듯이) 그리고 니네 아빠가 인류살해자를 낳기 위한 존재라면……
단독자 나는…… 인류살해자로 태어나기 위한 존재?
소녀 (끄덕)
단독자 인류…… 살해자?
단독자 옆에 쪼그려 앉는 소녀, 손을 내민다.
단독자, 어리둥절하며 목검을 건넨다.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노는 소녀.
집행관 왜 그렇게 친부를 찾아 죽이고 싶었죠? 그게 친부살해의 욕망이 아니고 뭡니까.
단독자 (소녀를 보며) 난…… 단독자입니다.
집행관 아니, 사형수죠. (전기의자를 보며) 이 의자에서 오줌을 지리며 죽어갈.
단독자 난 단독자입니다, 역사와 무관한.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역사는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주 탄생 이전의 시공간이 무의미한 것처럼.
집행관 본인을 우주로 지칭하는 겁니까.
단독자 이 우주를 채우고 있는 게 뭔 줄 아십니까.
집행관 별인가요, 아니, 그 빛인가요? 평생을 쫓았다는?
단독자 우주를 채우고 있는 건…… 암흑물질이죠. 언젠간 우주를 끝장내 버릴.
이때 나서는 원장, 진검을 차고 있다.
원장 물리학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사형대에서 종칠 인생치고는.
단독자 내 지성이 인류 진화의 정점에 섰다는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장 지성? (버럭) 뭘 하고 있는 거냐! 계집이랑 노닥거리다니!
화들짝 놀라는 단독자.
소녀, 뒤로 물러서며,
소녀 아직도 같은 생각이야?
단독자 같은 생각?
소녀 아직도 날 제일 먼저 죽이고 싶니?
단독자 …….
소녀 니 계획을 지켜줄게. 죽을 때까지 간직할게.
단독자 ……. 정말?
소녀 그래,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오케이?
단독자 ……오케이.
소녀 어때? 아직도 날 죽이고 싶니?
완전히 물러나는 소녀.
소녀를 바라보는 단독자.
그 시선이 애틋해진다.
단독자 ……죽인다? 널? 아니, 넌…… 제일 나중에 죽일 거야. 반드시 내 손으로…….
집행관 눈빛이 이상해졌군요.
단독자 맞습니다. 난 사랑에 빠졌죠.
집행관 사랑이라…….
배심원들, 일제히 하품.
단독자 그 애가 멀어져 가는 동안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죠. 우리는 옆 반 사팔뜨기의 피를 뽑아 만든 잉크 펜으로 연애편지를 쓸 것이고, 서로의 생일에 사육장 동물의 시체를 선물하겠죠.
집행관 이번엔 여자를 탓하겠다는 겁니까? 여자를 잘못 만나 인생이 틀어졌다고?
단독자 천만에요. 그 애는 내가 누군지 깨닫게 해줬습니다. 그게 사랑의 본질이죠.
집행관 당신의 본질은…… 괴물입니다.
단독자 내겐 같은 단어로 들립니다. 사랑과 괴물은.
집행관 …….
한 발 더 나서는 원장.
원장 여자야말로 심신을 더럽히는 해충이거늘!
단독자 그건 걱정 마십쇼, 제게 더럽힐 구석이란 남아 있지 않으니까.
원장 따라오거라.
단독자 어디로 말입니까, 사부님.
원장 (진검을 뽑으며) 이 검신의 아름다움이 보이느냐? 온전히 기능적인 이 아름다움이? 어떤 기능의 미학이라 생각하느냐.
단독자 자르기 위한 기능이겠지요. 사람의 목을.
원장 그렇지. 목이든 좆이든.
단독자 네?
원장 따라오거라.
단독자 흠…….
단독자, 자기 가랑이 사이를 본다.
집행관 그렇게 당하게 됐군요…… 거세는.
사이.
집행관 아이러니하군요, 여자가 생긴 순간 써보지도 못하게 됐다니.
단독자 우리에게 연결을 위한 신체기관 따윈 필요치 않았습니다. 우린…… 존재 자체로 연결돼 있었으니까.
합장하고 눈을 감는 단독자.
옆에서 엄하게 지켜보는 원장.
단독자 사부님은 인자하셨죠. 꽝꽝 언 호수에 구멍을 내주셨고 그 안에서 수행하게 해주셨습니다. 허리 아래론 모두 마비되어 버렸죠. 눈이 핑핑 돌더군요.
원장 얽힌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린 고대의 대왕 이야기를 아느냐.
단독자 대왕이면 분명 물건도 대물이겠죠?
원장 (분을 참곤) 그 이야기의 교훈은……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다.
단독자 사부님은 왕 마니아였죠. 역사의 모든 왕을 지키는 호위무사. 왕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처럼 죽어도 상관없는, 아니, 그거야말로 영광인. 어쩌면 그가 미친 건, 더 이상 할복의 명령을 내릴 왕이 없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원장 고민하지 말거라, 배우려고도 하지 말거라. 육체에 방해가 되는 건 모두 버리거라. 이성이든 지성이든 모두 헛것이니라.
단독자 다리 사이의 육체도 단련이 가능했다면 사부님은 천하무적이셨겠죠? 코흘리개들이나 상대하는 대신.
원장, 살인자의 눈빛.
단독자 그때였습니다……. 사부님이 발도술을 선보였을 때…… 그 빛은 또 내게로 왔죠.
원장, 기합과 함께 허공에 발도술.
가랑이 사이를 움켜쥐며 소리 없이 절규하는 단독자.
그러다 경건하게 내리쬐는 빛에 아득해진다.
집행관 평생 따라다녔다는 그 빛 말이군요.
단독자 ……맞습니다.
집행관 고통에 시신경이 날뛴 건 아닐까요. 아무리 냉수에 마비됐다 해도 생좆을, 흠, 생살을 잘라내는 건 큰 고통이었을 테니까요.
단독자 (잠시 생각해 보곤) 아니, 그건 계시의 빛이었습니다, 분명.
무릎 꿇으며 무너지는 단독자.
단독자 끙끙 앓았습니다. 고열이 미치기 직전까지 몰고 갔죠.
집행관 그래서 미치게 된 겁니까?
단독자 그 애의 간호가 없었다면 분명 미쳤겠죠.
집행관 그 애? 아, 그 여자애 말이군요.
오물오물 씹으며 등장하는 소녀, 단독자의 땀을 닦아 준다.
그러곤 씹던 걸 단독자에게 입으로 먹여 준다.
단독자 내 땀을 닦아 주고 식사를 시켜 주었죠. 상처를 꿰매 준 건 물론이고.
집행관 상처를 꿰매 줬다구요? 병원에 가지 않고 말입니까?
단독자 (바지춤을 잡으며) 보여드릴까요?
집행관 ……됐습니다.
단독자 그 애는 재봉반이었죠. 인형 등을 재봉해서 원장 주머니를 채우는.
집행관 그렇군요.
단독자 수도원에 처박혀 바느질만 하다 눈이 먼 수녀들 이야기를 아십니까? 여자 원생들 절반이 시력을 잃었죠.
집행관 여전히 어린 시절의 학대로 관점을 옮기려 하는군요.
단독자 얼마나 꼼꼼하게 꿰맸는지 보여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집행관 됐다고 했습니다.
단독자 (바지춤을 끄르며) 그 애의 솜씨는 숨기기 아까운 것입니다.
집행관 당장 형을 집행해 드릴까요?
단독자 (씨익) 거세의 공포란 참으로 인간적이죠, 안 그렇습니까?
집행관 …….
단독자 이제 아시겠죠? 난 점점 인간을 초월하고 있었다는 걸.
집행관 뭐, 나름 초월했다고 할 순 있겠죠. 이제 곧 저세상으로 갈 테니.
단독자 …….
사이.
집행관 드디어 마지막 말이 끝난 모양이군요. 그럼 집행하겠습니다.
단독자 잠시…… 추억에 젖어 있었습니다.
사이.
아빠 ……그 여자 아이는 분명 죽을 운명이었죠?
단독자 …….
엄마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이제 우리 모두는 파악하고 있으니까.
사이.
수녀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 모든 인간이 당신에게 속은 걸 생각하면…….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는 환호성과 박수.
단독자, 눈을 감고 음미한다.
원장 모두가 당신에게 속아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환호하고…….
단독자 응당하단 생각은 안 드십니까?
집행관 응당?
단독자 그들, 내 이름을 연호한 모든 이들은 자유의지로 날 선택한 겁니다.
사이.
집행관 하지만 이렇게 당신은 처형대에 올랐죠. 그것도 오늘.
단독자 …….
집행관 우리가 사형집행을 오늘로 맞추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아십니까. 당신에게 가장 큰 좌절을 안겨 주고 싶었죠. 아직까진…… 힘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단독자 힘이라…… 그게 바로 그 코털머저리의 패착이었죠.
집행관 코털머저리? 누굴 말하는 거죠?
사이.
단독자 조용히 좀 해주십쇼. (소녀를 보며) 내 마지막 추억입니다. 너무 그리워 다시 꺼내 볼 엄두도 안 나는…….
단독자 옆에 무릎 꿇는 소녀.
무릎 꿇은 채 애틋하게 마주 보는 둘.
소녀 우린 똑같아.
단독자 무엇도 우릴 갈라 놓을 수 없을 거야.
소녀 우린 하나니까.
단독자 그래. 넌 나야.
소녀 넌 나고.
단독자 네가 웃으면 나도 웃을 거야.
소녀 네가 울면 나도 울 거야.
단독자 니 목숨은 내 꺼야.
소녀 니 영혼은 내 꺼고.
손을 잡는 둘.
단독자 우린 분명 남매였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에 빠질 리 없으니까.
집행관 그럼 당신 생부도 도덕 선생이란 말입니까?
단독자 그래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 인간은.
집행관 무슨 말인지?
단독자 우리가 남매가 되기 위해 그 애의 생물학적 부친은 죽어야 했으니까.
집행관 지금…… 살인을 자백하는 겁니까.
단독자 독살, 교살, 척살, 총살. 온갖 종류의 살인이 떠올랐죠.
집행관 당신은 확실히…… 문제적 인간이었군요.
단독자 우린 온갖 계획을 짰고, 그 시간은 비할 데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단독자와 소녀, 마주 보고,
단독자 음식에 독을 타는 건 어때?
소녀 먹고 피를 토하게 말이지?
단독자 피도 토하고 플러스로 내장도 토하고.
소녀 음…… 화끈하긴 한데 너무 지저분할 거 같아. 결국 내가 치워야 하잖아.
단독자 그럼…… 깨끗한 방법이 뭘까? 목을 조를까?
소녀 눈알이 빠지도록?
단독자 눈알도 빠지고 플러스로 두뇌도 삐져나오고!
소녀 하지만 그 인간은 나보다 힘이 세.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실패했었어.
단독자 걱정 마. 우린 언제나 함께니까.
둘, 서로 잡은 손으로 가상인물의 목을 조른다.
단독자 (멈추며) 아참, 안 돼. 목이 졸리면 오줌을 지린대. 오줌 묻어.
소녀 사람은 죽을 때 다 오줌을 지려. 똥도 싸고.
단독자 인간은 참 추잡해. 태어날 땐 피칠갑을 하더니 죽을 땐 똥칠갑이라니.
소녀 걱정 마, 넌 그렇게 죽지 않을 거야. 넌 인간을 뛰어넘을 거니까.
단독자, 감동.
단독자 맞아, 난 태어난 적도 없이 죽을 거야. (수줍게) 너랑…… 함께.
소녀 우린 언제까지 하나니까.
둘, 미소.
단독자 (벅차서) 그럼 총? 빵야빵야!
소녀 총을 어디서 구하게.
단독자 욕망하는 모든 걸 파는 가게가 있대. 아무도 안 가는 골목 안쪽에서 봤어.
소녀 바보. 거긴 성인용품점이야. 채찍이나 드릴은 팔아도 총은 못 팔 걸?
단독자 드릴? 대체 뭘 욕망하는 거야, 이 세상은. 도처에 욕구불만이야.
소녀 그럼 결국 칼이네.
단독자 오케이, 칼!
소녀 칼을 어디서 구하지?
단독자 ……좋은 생각이 있어. 미학이 우릴 인도할 거야.
소녀 미학?
단독자 완벽히 기능적인 미학이.
소녀 ?
단독자 사부님이 숨겨 놓은 진검이 있어.
소녀 목검만 있는 게 아니고?
단독자 내 물건을 가위 따위로 잘랐겠어? 사부님은 진검으로 여기 모든 원생들의 목을 칠 거야. 그는 그것만 기다리고 있어. 여긴 그가 만든 전쟁터거든.
소녀 어디 숨겼는지 알아?
단독자 (끄덕)
단독자와 소녀, 몸을 웅크리고 슬금슬금 움직인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멈칫하기도 하며 발소리를 죽인 채.
그때, 진검을 차고 등장하는 원장.
원장 뭣들 하는 거냐!
화들짝 놀라는 단독자와 소녀.
원장 너 이 자식, 그렇게 가르쳤건만 계집과 함께라니…….
단독자 사부님, 열등감을 버리세요. 성숙한 관계라면 좆은 좆도 아니에요.
소녀 우린 정신으로 하나 된 사이에요.
원장 정신……? 정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정신 말고는 모두 잡생각이야! 이번엔 목을 쳐주지!
진검을 뽑아 소녀에게 달려드는 원장.
단독자, 원장과 몸싸움. 엎치락뒤치락.
그러다 진검을 놓치는 원장.
소녀, 진검을 집어 든다.
원장 그건 계집 손을 탈 것이 아니야!
소녀 잡아 보시지, 이 반쪽짜리 두뇌!
원장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모두 참수시켜 주지.
단독자 (자기 가랑이를 쥐며) 이제 내 꺼랑 사부님 꺼랑 크기가 비슷해졌죠?
원장 (미쳐버린다) 섬멸이다…… 전면전이다…… 적군 한 명당 아군 한 명! 너 죽고 나 죽자…… 목숨을 버려 적의 목숨을 취한다!
단독자 모두 섬멸되면 아무도 남지 않겠군요!
원장 ……그게 국가야!
원장, 단독자를 후려친다.
나가떨어지는 단독자.
원장, 단독자를 짓밟으려 하면, 원장에게 진검을 휘두르는 소녀.
배를 움켜쥐고 물러서는 원장.
원장 ……이 쥐새끼들!
단독자 이건 계획에 없었어요, 왜 끼어들어 가지고.
쓰러지는 원장.
원장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하늘같은 스승의 배를 갈라?
단독자 할복했다고 생각하세요. 언제나 동경하셨잖아요. 아니, 여긴 전쟁터잖아요. 적군에게 아름답게 죽는 거예요.
원장 빌어먹을……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단독자 호랑이……? 난 단독자야, 이 얼간이야.
단독자, 원장의 목을 발로 짓밟으려 하다가 멈칫.
차마 죽이지 못한다.
그의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단독자의 손을 잡아 주는 소녀, 자기 발로 원장 목을 짓누른다.
바둥거리다 숨을 거두는 원장.
집행관 그래서 그 진검으로 여자 아이의 부친을 죽였습니까.
단독자 이미 부친이고 나발이고는 아무 의미도 없었죠. 우린 인명을 하나 살해했고, 그걸로 의식은 치러 줬습니다.
집행관 의식?
단독자 이 세상엔 우리 둘뿐이라는 의식.
진검을 쥔 단독자, 소녀 손을 잡고 달린다.
단독자 우린 사랑의 도피를 했습니다.
원장 (벌떡 일어서서)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그런 것도 하는군요!
단독자 우리에게서 피가 마를 일은 없었을 겁니다.
둘, 깔깔거리며 무대 위를 돈다.
비도 오고, 눈도 내리고, 천둥도 치고, 벚꽃도 흩날리고.
집행관 잠은 어디서 잤으며, 뭘 먹고 살았죠?
단독자 먹잇감은 지천에 널려 있었습니다.
집행관 먹잇감?
단독자 위선자들 말입니다.
집행관 …….
단독자 소아성애자들의 얼굴은 단번에 알 수 있죠. 다림질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머리를 빗어 넘긴 사람들, 반짝이는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소아성애자들이자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집행관 ……매춘을 시켰단 말입니까, 첫사랑에게?
단독자 우린 뭐든지 함께했습니다.
집행관 당신도였습니까.
제자리에 멈추는 둘.
단독자 하지만 화대를 받으며 산 건 아닙니다.
집행관 그럼?
단독자 죗값을 치른 것뿐이었죠, 그들 위선자는.
단독자와 소녀, 서로 등을 지고 무대 양쪽을 향해 동시에, 혹은 번갈아.
함께 아저씨! 갈 곳이 없어요. 푹신한 침대에서 한 시간이라도 잤으면 좋겠어요. 한 시간도 좋고 긴 밤도 좋고…… 아주 푹신한 침대에서…… 무슨 짓을 해도 푹신한 그런 침대에서.
집행관 분명…… 살해했겠군요, 성매매자를. 그리고 그들의 금품을 갈취하며,
단독자 아뇨. 그들은 혐오스러운 존재들이지만 세계를 지탱하는 기반이었죠. 세계는 아직 무너져선 안 됐습니다.
집행관 죽이지 않았다면?
단독자 개미좆들은 이 기다란 진검 앞에서 오줌을 지리기 마련이죠.
집행관 ……협박했나요.
단독자 발가벗은 인간이야말로 강요받기 위한 존재니까요. 신생아나 시체처럼.
집행관 …….
단독자 그들은 욕망을 위해선 뭐든지 내놓을 수 있는 인간들이었죠. 윤리든 양심이든 인격이든 어떤 것이든 지불할 수 있는 인간들. 그들 모두가 우리 남매의 아버지였습니다.
하늘에서 돈이 흩날리며 쏟아진다.
둘, 돈다발로 장난친다.
진검에 돈을 꿰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고,
눈싸움을 하듯 뭉쳐서 던지며 놀고.
집행관 그때쯤이었겠군요, 소년원에 들어간 건.
단독자 (돈뭉치를 던지려다 멈칫) …… 구매자 중 한 명이 경찰이었죠.
한 발 나서는 경찰. 텅 빈 눈이다.
둘, 시무룩해진다.
집행관 잠복수사 중이었나 보군요.
단독자 아뇨, 그냥 경찰 일로 먹고 사는 소아성애자였죠.
단독자, 경찰을 향해 검을 휘두르지만,
능숙하게 검을 뺏고 단독자를 쳐내는 경찰.
바닥에 주저앉는 단독자.
단독자 그리고 결국…….
소녀 (단독자를 보며) 우린 잠시 떨어져 있게 되었지.
단독자 (애틋하게 본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소녀 (단독자의 뺨에 손을 댄다)
사이.
집행관 발각됐군요, 고아원 원장 살인이.
단독자 ……소아성애자인 경찰은 수배 전단의 우리 얼굴을 잊지 않고 있었죠.
집행관 여자애는 소년원으로 가게 됐겠군요.
단독자 (소년 톤으로) 아니에요, 내가 죽였어요.
집행관 뭐라구요?
단독자 (경찰에게 절박하게) 얘는 아무 잘못 없어요. 감옥에 보내려면 날 보내세요.
소녀 아니, 아니에요, 내가 죽였어요! 감옥엔 날 보내주세요.
집행관 하지만 감옥이 아니라 소년원이었겠죠.
단독자 감옥이든 소년원이든 지옥이든 상관없어요. 날 보내주세요.
소녀 아니에요, 나예요.
단독자 아, 혹시 함께 가도 돼요?
소녀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우리 둘이 죽였어요.
단독자 우린 떨어질 수 없어요. 함께 보내주세요,
소녀 그래요, 소년원이든 지옥이든. 어디든 함께.
단독자 돈을 줄게요.
돈다발을 내미는 단독자.
단독자 하지만 경찰 아저씨는…… 아니, (성인 톤으로) 그 경찰 새끼는…….
단독자 손을 뿌리치는 경찰.
집행관 청렴한 경찰이었군요. 소아성애자긴 하지만.
단독자 아뇨, 그는…….
그러곤 서서히 손을 뻗어 소녀를 움켜쥐는 경찰.
단독자 그는…… 진정한 자본주의자였죠.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래하는 궁극적 자본주의자.
뿌리치려 하지만 속수무책인 소녀.
단독자 ……고아원 원장 살해사건. 사인은 과다출혈 및 기도폐쇄. 범행 도구는 도검. 소년은 검거에 성공,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행방불명.
경찰에게 끌려가는 소녀.
소녀, 안간힘으로 버틴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가세하고,
소녀의 작은 몸은 유린당하듯 끌려간다.
단독자 조금만 기다려. 곧 찾으러 갈게, 힘을 키워서.
소녀 알아, 기다리고 있을게.
단독자 무슨 짓을 당해도 울지 마.
소녀 너만 울지 않으면.
단독자 살아만 있어.
소녀 오케이.
단독자 반항도 말고 도망치려고도 하지 마. 이 경찰, 미치광이의 눈을 하고 있어.
소녀 죽은 듯이 살아남을게. 금방 올 거지?
단독자 날 가둘 수 있는 곳은 없어. 열흘만 기다려.
소녀 오늘부터 열흘이다?
단독자 오케이.
소녀 벌써 하루야.
단독자 오케이.
끌려가는 소녀.
홀로 남는 단독자.
조명, 영상 등의 효과로 철창.
단독자 하루…… 이틀…… (시무룩이 앉으며) 나흘…… 그리고 반년…….
집행관 번번이 실패했죠? 탈옥은.
단독자 ……너무 성급했었죠.
집행관 어땠습니까, 소년원 생활은.
단독자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바지가 벗겨지기 전까진.
집행관 ?
단독자 단독자로서의 성기를 보곤 모두가 놀려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폭력은 시작됐죠.
집행관 울었습니까?
단독자 네?
집행관 당신이 울었다면 좋겠군요.
단독자 ……그저 눈물샘이 얻어맞아 자극받은 것뿐입니다.
재빨리 눈을 훔치는 단독자.
단독자 또 한 번의 탈출에 실패하고 며칠 뒤였습니다. 소식을 듣게 된 건.
집행관 어떤 소식이었죠?
단독자 그 애를 데려간 경찰이 죽었다는 소식.
집행관 정말 그 여자애의 짓이 아니었습니까.
단독자 (끄덕) 자살이었으니까.
집행관 …….
단독자 모든 공권력이 그렇듯, 완벽한 권력은 결국 광기로 이어지죠. 그 애에게 더 이상 할 짓이 없어진 경찰은 자살했습니다. 물론 그 애를 죽이고…….
집행관 …….
단독자 그 애 몸을 토막 내서 전국에 걸쳐 버리곤,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죠.
사이.
단독자 그 애의 죽음은 묵살되었습니다. 공권력은 신성한 법이니까.
집행관 이젠 공권력에 화살을 돌리는군요.
단독자 전국에 뿌려진 그 애의 시신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죠. 전 국민이 그 애의 시신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집행관 …….
단독자 우릴 조각낸 채 내버려두려고…… 날 혼자 남겨 두려고…… 모종의 공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은.
사이.
집행관 울었습니까.
단독자 네, 조금 과격하게…….
난동을 부리는 단독자.
단독자 난동을 부렸고, 탈옥을 시도했습니다! 난동과 탈옥! 내 청소년기는 그렇게 끝나 갔죠!
배심원들, 단독자를 붙들어 제압하곤 교복에서 죄수복으로 갈아입힌다.
집행관 결국 소년원에서 성인이 된 당신은 일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단독자 (지쳐선) 난동과 탈옥은 멈추지 않았죠. 내 성기를 향한 폭력도.
집행관 아이러니하군요. 범죄자들이야말로 당신이 동경하던 존재들일 텐데, 그들에게 거부당했다니.
단독자 독방에 갇힌 단독자…….
집행관 뭐라구요?
단독자 어찌 보면 단독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이었죠. 독방, 단독자 그리고…… 고독.
등장하는 소녀. 철제 침상에 앉는다.
소녀 따분하지? 혼자 있으니까.
단독자 응.
소녀 그럼 이런 재미는 어때? 발기 불능자들한테 토막 나는 재미.
단독자 (정색하며) …… 재미없어.
소녀 어차피 누구도 널 원하지 않았잖아. 이제 와서 혼자인 게 문제가 돼?
단독자 (끄덕하곤) …… 널 만난 이후로.
소녀 그리고 이제 내가 죽어서 우울하고?
단독자 (끄덕) 더 이상 못 보니까.
소녀 바보, 그건 인간들 얘기잖아. 아직도 인간에 미련이 남았어?
단독자 (고개 절레절레)
소녀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삶과 죽음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어.
단독자 그럼…….
소녀 그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린 하나야. 오케이?
단독자 ……오케이.
소녀 (말 받으라는 듯이) 우린 하나니까…….
단독자 널 죽이면…… 날 죽이는 거야.
소녀 (끄덕)
집행관 이번엔 복수군요. 당신의 범죄가 복수 탓이었다고 말하고 있군요.
단독자, 팔굽혀펴기, 셰도 복싱 등을 한다.
소녀, 박수치며 응원한다.
소등되고 점등되고 날이 어두워져 소등돼도 계속.
그러다 점등되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인간.
죄수복을 입고 있지만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있다.
단독자는 여전히 육체 단련.
인간 뭘 하는 거지?
단독자 말 시키지 말아요. 정신 사나우니까.
집행관 누구죠?
단독자 깜방 동료입니다.
집행관 동료? 독방이라 하지 않았나요.
대답 않고 셰도 복싱.
인간 그게 무슨 쓸데없는 짓이야.
단독자 육체를 단련해야 해요. 잡생각을 몰아내야 해. 적을 섬멸해야 해요.
인간 전 국민을 다 죽이려고?
단독자 그게 국가예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난 해내겠어요.
인간 불가능할걸. 머리를 써야 해.
단독자 내가 누군지 몰라요?
인간 니가 누군데?
단독자, 멈춘다.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배심원들을 둘러본다.
단독자 난 반지성주의와 비합리주의가 키운 괴물이에요. 난 머리를 쓸 줄 몰라요.
인간 고도의 반지성주의와 비합리주의야말로 인류 지성의 정점이지.
단독자 ……무슨 말이에요?
인간 증오란 감정만이 오래가기 마련이지. 내가 했던 명언이야.
숨을 몰아쉬며 책 하나를 집어 드는 단독자.
잠시 읽다가 던지고 다시 셰도 복싱.
인간 소중히 다뤄, 역사적인 책이야. 이 안에서 일 년이나 쓴 책이지.
단독자 시시한 책이에요. 무슨 어린애 칭얼거림을 책이랍시고.
인간 내 철학의 정수가 담긴 책이야.
단독자 철학이라 했나요? 당장 죽고 싶어요?
인간 복수심을 버려야 해. 그리고, 대체 뭘 위한 복수란 거야?
단독자 …….
인간 그런 칼날을 품고 살아갈 순 없어. 너부터 베일 거야.
단독자 난 인간이 아니에요. 살고 죽는 건 내게 무의미해요.
인간 넌 인간이야. 이제 그만 성장해.
단독자 성장? 말했을 텐데요, 누가 날 키웠는지.
인간 이제 소년은 죽여. 남자가 일어설 시간이야.
셰도 복싱을 멈추는 단독자.
단독자 ……뭘 어쩌란 말이에요.
인간 이 세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단독자 세계의 가치? 그딴 게 어딨어요.
인간 너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단독자 그 가치가 뭔데요.
인간 사랑이지.
단독자 사랑……?
단독자, 중앙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단독자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자지러지게 비웃고 싶기도 하고, 당신을 두들겨 패고 싶기도 하고. 한 주먹거리도 안 되겠죠. 채식주의자들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기 마련이니까.
인간 모두를 사랑하도록 해봐.
단독자 모두를 죽일 건데요.
인간 사랑해 봐, 모든 인간을. 그럼 내 말뜻을 알 거야. 날 믿어 봐.
단독자 당신을…… 믿으라구요?
인간 목적이 있어서 날 부른 거 아니야.
단독자 …….
집행관 인간의 외로움은 별 공상을 다 하게 한다죠.
단독자 ……그래서 어쩌란 거죠?
인간 함께 얘기나 나누자고. 고독자들끼리.
단독자 ……단독자예요.
단독자, 책을 본다.
단독자, 읽기 시작하더니 빠져드는지 앉아 읽는다.
단독자 조잡한 책이었죠. 그래도…… 시간을 때우기엔 충분하더군요.
집행관 무슨 책이었죠? 간디의 자서전이라도 됐나요?
단독자 조용히 좀 하세요. 이제 소등 시간이에요. 좀 더 읽어야 해요.
어두워지는 조명. 하품하는 단독자.
소녀, 단독자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단독자 내가…… 모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소녀 (고개를 젓는다)
단독자 복수심을 버릴 수 있을까?
소녀 (고개를 젓는다)
단독자 그럼……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소녀 (잠시 생각 후 끄덕인다)
잠시 생각 후 고개를 끄덕이는 단독자.
소등.
소녀, 일어서서 손을 흔든다.
단독자도 손을 흔든다. 매일 해왔던 듯이.
사라지는 소녀.
소녀가 앉았던 자리에 머리를 대고 눕는 단독자.
단독자 (소녀가 앉았던 자리를 어루만지며) 그리고 어느 날 난 꿈을 꾸었죠.
집행관 무슨 꿈을 꾸었죠?
단독자 내가 쫓던 빛의 근원에 관한 꿈…… 세계가 빛으로 가득 차는 꿈.
집행관 뭐였죠, 그 근원은?
단독자 그건…… 사랑이었죠.
집행관 사랑이라.
일어나 앉는 단독자.
마구 설렌다.
단독자 네, 사랑. 나는 모두를 사랑하기로 했죠. 우선 나의 동료들부터.
집행관 동료들이라. 마침내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건가요.
단독자 내가 어렸던 거죠, 어리석었던 거예요.
집행관 그래서 사랑했습니까? 당신에게 린치를 가하던 이들을?
단독자 그 폭력 또한 외로움이었단 걸 알게 된 거죠.
일어서는 단독자.
집행관 무슨 짓을 했죠? 성을 제공했습니까?
단독자 아닙니다.
집행관 금지물품이라도 구해 줬습니까?
단독자 아닙니다.
집행관 그럼?
단독자 제가 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들을…… 긍정해 주었죠.
집행관 긍정?
단독자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긍정. 그들은 잘못되지 않았다는 긍정.
집행관 …….
단독자 진실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하니까.
사이.
눈을 감는 단독자, 표정이 온화해진다.
단독자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결국 저의 사랑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집행관 믿기 어렵군요.
단독자 그들 모두 단독자였던 겁니다. 난 그들과 대화를 했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줬고, 그들에게 미래를 제시했습니다.
집행관 ……당신의 그 업적 중 하나였죠. 악명 높은 형무소에서의…… 교화 활동은.
단독자 출소날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들 모두는 눈물로 저를 보내주었죠. 나 또한 그들과의 이별에 가슴이 미어졌구요.
단독자,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든다.
어둠 속 인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집행관 공교롭게도 출소날이었죠? 경찰 자살의 진상이 밝혀진 건.
두세 번의 카메라 플래시.
단독자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죠. 내가 누군지 궁금한 사람들 앞에.
집행관 그래서 어떤 인간인지 드러냈습니까? 위악으로 점철된 인생을?
단독자 그건…… 어리석었던 제 과거였습니다. 어렸고 어리석었던…….
원형단 위에 조심스럽게 서는 단독자.
단독자 네? 하고 싶은 말이 있냐구요……? 글쎄요…… 전 어렸지만 분명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더한 고통도 감수할 수 있었다는 말밖엔…….
박수소리.
단독자 (단에서 내려서며) 그럼 전 이만……. 아,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쭈뼛쭈뼛 다시 오르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 모두가 스스로를 사랑하셨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그 자체로 사랑하셨으면 합니다. 우린 모두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한 명 한 명 눈부시게 빛나는…… 여러분의 고통, 슬픔, 분노…… 그 어느 것도 잘못된 건 없습니다. 모든 아픔을 받아들이십쇼. 그 아픔이야말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우리 삶을 아름답게 수놓는 별빛입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십쇼, 여러분.
멋쩍게 단에서 내려서는 단독자.
자리를 뜨려는 단독자를 붙잡는 작은 박수소리.
박수소리, 점점 커지더니 환호와 뒤섞인다.
연속된 카메라 플래시.
어리둥절한 단독자.
집행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단독자 저도 잘 몰랐습니다. 그저…… 그들 모두가 절 사랑하기 시작했단 것밖엔.
단독자, 어둠 속의 인간을 돌아본다.
조용히 박수치는 어둠 속의 인간.
단독자 그날 전 그들의 환호성을 뒤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꿈은 또 제게 찾아왔습니다.
집행관 빛으로 가득했다는 그 꿈 말이군요.
단독자 빛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날 향한 그들의 사랑처럼…… 내 온몸을 감싸 안는 밝은 빛이…….
사이.
집행관 그렇게 당신은…….
단독자 그렇습니다.
배심원들, 단독자를 죄수복에서 정장으로 갈아입힌다.
집행관 이례적인 경력이 화제가 됐었죠. 전과자 출신의 후보. 그것도 최연소의.
단독자 전 그들의 부름에 진심으로 다가선 것뿐입니다.
집행관 그 꿈이었군요. (사이) 출마의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단독자 모두의 고독…… 그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나처럼 어두웠던 과거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습니다.
집행관 그 악명 높던 형무소 출소자들의 후일담도 큰 화제가 됐었죠.
단독자 그들은 나의 동료들, 아니, 나의 친구들이었으니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죠.
집행관 불우한 가정사에 대한 동정론도 퍼져 갔구요.
단독자 죄송할 따름입니다, 두 분에겐…….
집행관 고아원에서의 학대 이야기로 모든 부모들이 눈물을 흘렸고.
단독자 그런 폭력은 다신 없어야 하니까요.
집행관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여심을 흔들었죠.
단독자 모두가 제 손을 꼭 잡아 주더군요. 마치 그녀가 돌아온 거 같았습니다…….
집행관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의 성기가…….
단독자 (끄덕하곤) 내게 호의적이지 않던 언론사에서 단독기사로 내보냈지만…… 국민들은 내 아픔을 이해해 줬죠.
집행관 이해 정도가 아니었죠.
단독자 (멋쩍게) 맞습니다. 그들은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집행관 인정이라…… 숭배라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요.
단독자 숭배라뇨, 당치않습니다.
집행관 화제가 됐던 증언이 기억나는군요. 순결한 그의 두 손이 나의 다리에 닿자…….
단독자 전 응원을 해준 것뿐입니다. 그에겐 이미 두 다리로 일어설 힘이 있었습니다.
집행관 불우한 가정사와 어린 시절의 학대, 그리고 첫사랑의 죽음과 전과자란 파격, 거기에 종교적 우상성이 더해져 당신은…….
단독자 네, 부름을 받게 됐죠. 시대와 국민들의 부름을. 아니, 사랑을.
단독자, 여기저기를 향해 인사한다.
여기저기를 향해 손을 흔든다. 플래시 펑, 펑.
과장된 마임으로 연설하고 두 손을 맞잡아 흔든다.
단독자 국민 여러분! 여러분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집행관 어떤 꿈이었죠?
단독자 스스로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도 그 사랑을 방해하지 못할 겁니다!
집행관 어떤 꿈이었나요. 당신이 꿨던…… 꿈은.
두 손을 맞잡아 흔들던 단독자의 동작, 서서히 탱고로 변한다.
엄마가 죽었을 때 추던 그 춤.
같은 춤이지만 이젠 능숙하고 댄디하게.
집행관 어떤 꿈이었지?
단독자 (춤추며 혼잣말로) 스스로 사랑하라고. 니들이 어떤 괴물인지 상관없이.
집행관 어떤 꿈이야!
단독자, 춤을 멈추고 바로 선다.
단독자 ……모두가 사랑에 빠지는 꿈.
집행관 ……사랑은 괴물이고 말이지.
안주머니에서 빗을 꺼내는 단독자,
천천히 돌아서 거울을 보듯이 머리를 빗어 넘긴다.
단독자 내 공약이 뭐였는지 기억나십니까?
집행관 ……물론. 당신의 정신 나간 공약은…… 하나였으니까.
입을 떼는 어둠 속 인간.
인간 머리는 좀 더 빗어. 머리통에 찰싹 달라붙게.
단독자 촌스럽잖아요. 시대가 바뀌었으니 스타일도 바뀌어야죠.
인간 그리고 포인트가 있어야 해.
단독자 포인트?
인간 콧수염이라든지.
단독자 아뇨, 코털 같은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 코털이 아니야. 그 오해야말로 날 가슴 아프게 만들어. 잘린 성기 가지고는 부족할 거야.
단독자 질투하고 있군요. 당신이 결코 갖지 못했던…… 단독성을.
인간 …….
사이.
단독자 당선되면 뭐부터 할 생각이었는지 아십니까.
집행관 ……뭐부터 할 생각이었죠?
머리를 다 빗고 천천히 돌아서는 단독자.
꼿꼿한 자세, 확신으로 가득 찬 두 눈, 선명한 카리스마.
단독자 전 국민의 딸년을 임신시켜 임산부만 강간하는 부류들에게 수출해 버릴 생각. 엄청난 숫자일 테니 박리다매로.
집행관 …….
왕좌에 앉듯 전기의자에 앉는 단독자.
등장하는 소녀, 전기의자 뒤에서 단독자에게 속삭인다.
소녀 우린 하나야.
단독자 (끄덕이며) 그 수출이 국가경제를 일으켜 세우겠죠. 연구소 설립 자본금으로 탕진되겠지만.
집행관 연구소?
인간 고기가 먹고 싶어.
어둠 속의 인간에게로 조명 떨어지면,
머리에 권총을 대고 있는, 콧수염을 기른 총통.
인간 고기가 먹고 싶어. 코털이 아니라구!
단독자 이제 좀 사라지시죠.
인간 모두 사랑해야 해. 우리의 복수는 그때 성공하는 거야. 자신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다름 아닌 괴물이었다는 거. 가장 잔인한 복수가 아닐까.
단독자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 큰일입니다. 적군이 방공호 문을 부수고 있어요.
인간 ……모두 불태워버려. 절멸이야.
단독자 오케이.
총통, 방아쇠를 당긴다. 테이블에 머리 박고 죽는다.
소녀 우리 사랑은…… 최후의 전체주의야.
단독자 ……그래, 이제 모두가 하나야. 국가도, 역사도, 내 자아도.
소녀, 끄덕이곤 어둠 속으로.
집행관 반지성주의와 비합리주의가 키운 괴물…… 그게 당신이죠.
단독자 …….
집행관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 모든 인간이 당신에게 속은 걸 생각하면…… 모두가 당신에게 속아 당신의 이름을,
단독자 (벌떡 일어서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나와 사랑에 빠지고!! 내 잘린 자지를 숭배하고!!!
집행관 ……싸이코 새끼.
단독자 생물학적 모친이 바람을 폈다는 사실에 모든 여성 혐오자들의 지지를 얻었죠! 모든 남성들은 여성 혐오자들이니까! 첫사랑을 대신해 수감된 걸로 멍청한 계집들의 마음을 얻었고!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회색주의자들…… 그들은 더 간단했죠. 믿을 걸 간절히 꿈꿨던 그들은 내 가랑이에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고, 내 등에 날개가 달리는 꿈을 꿨죠! 그리고 모든 전과자들과 범죄자들, 잠재적 살인자들 역시 날 사랑했고…… 시체들도 투표권이 있었다면 모두 무덤에서 일어났을 겁니다. 정파든 사상이든 이념이든! 그 모든 걸 초월하는 존재가 등장한 겁니다!! 단 하나의 사랑으로!!!
사이.
집행관 ……대체 무슨 꿈이었지?
단독자 …….
집행관 당신을 이 자리에 오게 한, 그 빛의 꿈은
사이.
단독자 ……내 성기가 다시 자라나는 꿈.
단독자, 가랑이 사이를 굽어본다.
단독자 봉합 부위에서 뾰족한 대가리가 고개를 내밀더니 점점 몸통을 드러냈죠…… 강철의 몸통을 가진 성기가.
집행관 …….
단독자 그 거대한 몸통은 아주 단단하지만……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오르는 추진력을 지니고 있죠.
집행관 …….
단독자 그리고 그 귀두에는…… 내 이상을 실현시켜 줄 원료가 탑재되어 있었죠.
집행관 ……본인을 신비화시키고 있군요.
단독자 그런가요?
집행관 당신이 꿈꿨다는 그…… 환상 성기가 뭘 뜻하겠다는 건지 압니다.
단독자 너무 명백한 은유였나요.
집행관 당신은 그런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단독자 맞습니다. 내 환상좆은 꿈에서 나온 게 아니었죠.
집행관 당신이 꿈꿨다고 말하는 성기는…… 미사일.
사이.
단독자 (미소)
집행관 하지만 그 미사일은 꿈에서 나온 게 아니겠죠.
단독자 맞습니다. (죽은 총통을 보며) 아마 그의 꿈이었을 겁니다, V2라는 이름을 가진 최후의 미사일은.
집행관 …….
단독자 힘을 찬양하던 머저리의 과대망상이었죠.
집행관 망상이란 건 아는군요. 그는 전쟁에 패배해 굴욕감에 짓눌린 국민들에게 힘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었죠.
단독자 환상, 그게 핵심입니다. 이성이든 지성이든 환상 앞에선 속수무책이니까.
집행관 …….
사이.
집행관 ……언제까지 통하리라 생각했습니까? 이런…… 잠꼬대 같은 환상이?
단독자 열심히 일해야겠지요, 국민을 위해. 난 역사상 가장 바쁜 정치인으로 기록됐을 것입니다.
집행관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핵폭탄은.
단독자 날 무슨 싸이코패스로 보고 있군요. 난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집행관 ?
단독자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만들 수도 없을 테고. 만들었다고 믿게끔만 하면 됩니다. 연구소는 거대하겠지만 그 안엔 쥐새끼 한 마리 없을 겁니다. 그 뒤엔…… 위선으로부터 까발려진 공포가 알아서 처리해 주겠죠. 핵 균형, 핵 조약이라는 위선……. 공포가 그 위선부터 처리해 줄 겁니다.
단독자, 무대를 여유롭게 돌다가 전기의자를 어루만지며,
단독자 경이롭더군요, 물리학은. 추출된 우라늄235는 전 세계로 밀수출될 겁니다.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이 못 이긴 척, 못 본 척 수입하겠죠. 그리고 모두가 최후의 빨간 버튼을 노려보며 눈치를 살필 테고…… 결국 절대 악에 대한 공포가 전 세계의 빨간 버튼을 누르겠죠.
집행관 당신……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야.
단독자 그리고 그때, 내가 평생 찾아 헤맸던 빛이 전 세계를 채울 겁니다. 내 귀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우주 창조에 버금가는 빛이 인류의 얼굴을 뒤덮겠죠. 그 빛으로 전 인류는 동시에 눈물을 흘릴 겁니다. 고통의 눈물을, 아니, 사랑의 눈물을…… 그야말로 기적처럼.
단독자, 두 눈을 감고 상상한다.
전율한다.
아빠 ……그래 봤자 햇병아리 정치인에 불과해, 넌.
단독자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창대? (낄낄거리곤) 절멸이겠지!!!
엄마 우린 당신이 수감 생활 썼던 원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너와 나의 투쟁.
단독자 (어딘가를 보며) ……우린 언제나 함께니까.
수녀 조잡한 카피 제목이었죠. 조잡한 내용이었고. 하지만 국가전복죄를 적용시키기엔 충분했죠.
단독자 그럼 왜 공표하질 않는 거죠? 공표해서 내 이름을 깎아내리면 될 텐데.
수녀 …….
단독자 뭐가 두려운 거죠.
원장 ……우리, 소수의 양심 있는 지식인들에게 두려움은 없습니다.
단독자 소수면 소수답게 계시는 게 어떨까요.
집행관 양심적 행동 말고 어떤 게 우리다운 겁니까.
단독자 찌그러져 있는 거죠, 소수답게.
모두 …….
단독자 찌그러진 채, 발언권을 묵살당한 채, 궁시렁거리면 됩니다, 소수답게.
집행관 반지성주의로 우리 입을 막을 순 없을 겁니다.
단독자 이제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싶군요.
집행관 다른 명칭?
단독자 민주주의랄까.
사이.
집행관 . ……당신 입에서 나올 단어가 아닙니다.
단독자 그럼 뭐라 불러야 할까요.
집행관 (대답을 못 한다)
단독자 대답을 못 하시는군요. 그 대답! 그 대답에 필요한 단어 하나만 존재했다면, 나 같은 인간이 힘을 갖진 못했겠죠.
여유로운 단독자.
집행관 ……당신 같은 인간이 역사에 한둘인 줄 압니까? 그때마다 인류의 지성과 양심은 당신들을 막아냈죠.
단독자 언젠가 이런 인간이, 아니, 이런 시대가 등장하리라 생각한 적 없으신가요? 그 무한반복의 역사에 마침내 종지부가 찍히는 그런 시대가.
사이.
집행관 그렇다 해도…… 당신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사형대에 서게 됐으니까.
단독자 …….
집행관 (시계를 보며) 곧 개표가 끝나겠군요. 이제 당신은 죽는 겁니다.
아득히 들려오는 환호성.
집행관, 배심원들에게 눈짓.
배심원들, 단독자를 전기의자에 앉히며 사형을 준비한다.
단독자 (눈을 감고 음미하며) 들리십니까…… 구원자를 부르는 저들의 소리가?
집행관 ……이제 형을 집행하겠습니다.
단독자 아직 최후의 한마디가 남았습니다.
집행관 끝입니다.
단독자 끊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집행관 나를 기만하려 드는군요. 하지만 통하지 않을 겁니다.
단독자 당신은 저 밖의 인간들처럼 어리석지 않아서?
집행관 물론입니다. (배심원들에게) 다 됐습니까?
배심원들, 끄덕.
단독자 물론 그럴 겁니다. 그런 당신의 우월한 두뇌를 닮았으니까, 나는.
집행관 (손으로 신호를 보내려다) 자, 집행을 시작…… (멈칫) 뭐?
단독자 한참 찾았습니다, 당신을. (사이) 아버지.
집행관에 쏠리는 배심원의 시선.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젓는 집행관.
단독자 아버지……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집행관 내…… 아들이라고……?
단독자 당신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집행관 …….
단독자 당신 없는 내 인생이 어떤 수난이었는지 아십니까?
이때, 시계는 정각을 가리키고,
외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환호성 방향으로 멍하게 고개를 돌리는 집행관, 배심원들.
그러곤 다시 단독자에게 고개를 돌린다.
단독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집행관 정말…… 내 아들이라고?
단독자 (집행관 가랑이 사이를 향해) 그러게 간수를 잘하셨어야죠.
집행관 그럴 리가 없어…… 난 낙태라면 마일리지까지 쌓았던 사람인데…….
단독자 확실한가요? 아니면 난 텅 빈 자궁에서 태어났을라나?
집행관 뭐?
단독자 (갸우뚱하며) 난 암흑물질에서 태어났으니 그럴지도.
박장대소하는 단독자.
굴욕으로 일그러지는 집행관의 얼굴.
단독자 재밌지 않습니까?
집행관 재미? 이런 미친 새끼…… 뭐가 재밌다는 거야!
단독자 그럼 이런 재미는 어떻습니까? 모두가 토막 나는 재미는. 전 인류가 원자 단위로 토막 나고 분해되는 재미는! 하하하하!
집행관 당장 집행해!
단독자 국민의 선택을 받은 이를 처형하실 겁니까?
집행관 처형? 너 같은 건 그냥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집행관과 배심원들, 품에서 권총을 꺼내 단독자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다.
단독자의 머리에 사방팔방으로 꽂힌 총구.
단독자 좋습니다! 나 같은 건 당장 죽여 버리는 겁니다! 머리에 총을 쏘고 목을 따버리는 겁니다! 헌법? 인도주의? 그게 다 무슨 잠꼬대입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겁니다! 위선 같은 건 토막 내서 전국에 뿌리면 그만입니다!
집행관을 뺀 모두,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이를 갈며 물러선다.
집행관만 노려보며 여전히 겨누고 있다.
단독자 내 유일한 공약을 잊으셨습니까.
집행관 …….
단독자 국민 여러분! 여러분이 무슨 짓을 하든, 사법제도 따위가 여러분을 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누구도 우리 자신을 향한 사랑을 방해할 순 없습니다! 저의 당선날, 사법제도는 폐지입니다!
더 큰 환호성.
집행관 ……그딴 법안이 통과될 리 없어.
단독자 내가 나가지 않으면 저들은 곧 이리로 들이닥치겠죠. 성난 군중의 의미를 아십니까?
집행관 …….
단독자 내가 죽는다면, 내가 죽어 저들의 꿈이 짓밟힌다면! 저들은 이곳에 들이닥쳐 당신들의 살점을 뜯어먹고 뼈를 뽑아 이를 쑤시겠죠.
서로 눈치 보는 배심원들, 슬그머니 움직여,
총을 겨누고 있는 집행관을 만류한다.
하지만 집행관이 포기하지 않자, 점차 힘으로 떼어낸다.
집행관 (몸부림치며) 넌…… 무정부주의를…… 아니, 야만의 시대를 꿈꾸는 건가?
단독자 야만……?
단독자, 큭큭거리다가 한참을 박장대소.
그러다 뚝 그친다.
단독자 (귀를 기울이곤) 박수소리가 부족한 거 같군요.
집행관 ……뭐?
단독자 (배심원들을 돌아보며) 박수소리가 좀 부족한 거 같습니다.
모든 행동이 멎는 배심원들.
이를 가는 집행관.
단독자 두려움 없는 지식인 여러분. 팔이 뽑히고 나면 박수치는 것도 그리워지겠죠?
배심원들, 눈치 보다 마지못해 박수치기 시작.
만족하는 단독자,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단독자 사형당했던 걸로 합시다. 그리고 부활한 걸로.
배심원들, 더 힘차게 박수.
집행관 정말…… 역사를 종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단독자, 동작을 멈춘다.
그에 맞춰 멈추는 배심원들의 박수.
단독자 내 사랑을 찾을 겁니다. 그 애는 날 떠나지 않았어요. 숨바꼭질인 겁니다. 이 욕구불만의 꿈나라 어딘가에서 자길 찾아 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집행관 미치광이…….
단독자 우린 방공호에 신혼방을 차릴 겁니다. 남매인 우리 사이에선 근친상간으로 인한 기형아들이 태어나겠죠. 그리고 그 기형아들은 기형아들끼리 흘레붙어 다음 세대 기형아들을 생산할 겁니다. 상상도 못할 온갖 종류의 기형아들…… 방사능으로 폐허가 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지체아들, 저능아들, 괴물들.
집행관 넌…… 미치광이야.
단독자 그리고 이제 내가 남길 마지막 한마디는, 그들에게 최초의 한마디가 되겠죠.
집행관 …….
단독자 (올려다보며) 잘 들으세요, 아버지. 인간으로서 내가 남길, 마지막 말을.
흐트러진 머리를 두 손으로 완벽히 넘기고,
문 앞에 서는 단독자.
숨을 한 번 들이쉬곤 두 팔을 벌려,
단독자 빛이 있어라.
열리는 문.
환호성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카메라 플래시.
더욱 거세지는 환호성, 배심원들의 광적인 박수,
플래시의 셔터 소리가 아득한 폭음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플래시는 끊임없이 이어져 마침내 거대한 빛으로.
빛에 파묻혀 실루엣이 된 단독자, 춤을 춘다.

 

 

< 선정평 >

 
    「태초에 우라늄이 있었다」는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연극적 상상력, 그럼에도 산만하지 않게 이야기를 비끄러매어 끌고 가는 힘이 돋보였다.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작가가 자신의 앎과 깨달음에 지나치게 도취하여 그 앎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극 중 ‘단독자’는 말 그대로 단독자다. 단독자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이 세계 속에서 그에게 맞설 자는 없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고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반성적 사유 없는 지적 유희는 공허해지기 쉽다. 이러한 불만에도, 관념을 다루는 지적인 희극으로서 이 작품이 지닌 가능성을 믿고 싶었다. 사유의 날카로움은 그 칼끝이 무엇보다 먼저 제 자신을 겨누고 있을 때 나온다. 예리한 정신은 스스로를 난도질함으로써 세계를 난도질한다.
    배삼식 (극작가)

 

석지윤 (극작가)
 

– 1981년생. 카피라이터. 제5회 대전창작희곡 공모전 수상.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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