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일날


 

     

1937년 가을, 소비에트 중앙인민위원회는 고려인(소련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124대의 화물열차(마소 운반용)에 실려 카자흐스탄(9만5256명)과 우즈베키스탄(7만6525명)으로 쫓겨 간 고려인은 모두 17만1781명이었다. 그중 고려인 인텔리와 군 장교 등 2800여 명은 비밀리에 체포되어 학살당했다. 강제 이주를 반대할 우려가 있다는 단 하나만의 이유로.

이때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황무지에 버려지다시피 한 고려인들은 추위와 기아, 풍토병 등으로 줄줄이 쓰러져 숨졌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숨진 고려인의 수는 무려 2만여 명이 넘었다.

 

등장인물

이반

돼지

연이

갑이

연이모

고씨

고씨부인

김씨할배

로스께교장

로스께위원장

로스께1

로스께2

이반어미

지식인들

 

 

암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차바퀴음.

식민지 조선에서 소련의 연해주로

또 다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떠도는 고려인들의 유랑의 궤적처럼

기차 소리는, 정처 없다.

무대 밝아오면, 느리고도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는 고려인들의 이주 행렬.

각자 짐보따리나 살림도구들을 이거나 들었으며,

수레 위에는 병든 노인들이나 가재도구들이 쌓여있다.

기차바퀴음이 점점 잦아든다.

 

암전.

 

1장 소련 연해주 1932년 여름.

 

나무 아래 돼지를 묶어놓고 꽃을 꺾으며 노래하는 이반.

 

엄마 생일날에 꽃을 드리자.

무슨 꽃을 드리면 기뻐하실까.

장미화를 드릴까 목단화를 드릴까.

꽃 중에도 오래 피는 백일홍을 드리자.

 

엄마 생일날에 노래 부르자.

무슨 노래 부르면 기뻐하실까.

엄마 엄마 나의 엄마 나의 노래 들으시라.

엄마 엄마 나의 엄마 나의 절을 받으시라.

아이들, 혼자 돼지와 노는 이반에게 다가와 둘러싼다.

 

로스께아이1  바보 이반 바보 이반.

로스께아이1  어른도 아니래.

로스께아이2  애기도 아니래.

로스께아이2  반편이 이반 반편이 이반.

로스께아이1  (악의적으로) 같이 놀까?

이반  (반색하며) 응!

로스께아이2  술래잡기다.

 

로스께아이1, 이반의 눈을 수건으로 가린다. 아이들, 손뼉을 치며 이반을 유인한다. 이반, 두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아이들을 찾는다.

 

로스께아이2  여기다, 이반.

로스께아이1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로스께아이들끼리 서로 마주보며 키득거린다.)

이반  뭔데?

로스께아이1  넌, 도대체 누구야?

이반  이반.

로스께아이2  어느 민족이냐구?

이반  (조금 생각하다가) 조선 사람.

로스께아이들  조선 사람?

로스께아이1  이상도 하지 엄마도 없고.

로스께아이2  이상도 하지 아버지도 없고.

로스께아이1  돼지랑 사는데?

이반  이반인…… 조선 사람이야.

로스께아이1  그럼 돼지는?

이반  (당연하다는 듯) 이반이 조선 사람이니까 돼지도 조선 돼지지.

로스께아이2  그럼 어디 조선말 좀 해봐.

 

이반, 말을 못하고 울상이 된다.

 

로스께아이1  왜 못해? 조선말 몰라? 얘는 카자흐말, 나는 우즈벡말, 우린 다 자기말을 아는데 왜 넌 몰라? 안 그러니?

로스께아이2  돼지말은 알아?

이반  응, 꿀꿀꿀꿀 이건 밥 달라는 거다. 꾸-울 꾸-울 하면 아프다는 거다. 꾸꾸꿀 하면 똥 쌌다는 거다. 이반인 돼지말 다 안다.

로스께아이1  옳지, 넌 조선 사람이 아닌 거야.

로스께아이2  러시아 사람도 아니고.

로스께아이1,2  (서로 마주보며) 말하자면,

로스께아이1  돼지 새끼란 말이지.

로스께아이2   돼지랑 먹구.

로스께아이1  돼지랑 자구.

로스께아이들  돼지 돼지 돼지 꿀꿀꿀꿀 한인들은 돼지래요 꿀꿀꿀꿀!

로스께아이들 놀리며 달아나면, 이반이는 눈가리개를 한 채 운다. 무대 왼쪽에서 죽은 자의 영령 같은 모습의 이반의 어미 독백.

이반어미  울지 마라, 얘야. 네가 조선말을 모르는 것은 네 잘못이 아니란다. 네가 크면 알게 될 거다. 우리 민족이 누군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것을 알게 되면 더는 울지 않게 될 거다. 울 수 없게 될 거다. 울지 마라, 얘야. 울지 마라……

 

이반이 수건으로 가리워진 채 앞을 더듬다가 연이의 허리를 꽉 잡는다.

 

이반  연이다! (허리를 안고 얼굴을 부빈다.)

연이  아이구, 우리 이반이 뭐 하니? (연이가 이반의 수건을 벗겨준다.) 이런 또 로스께녀석들이 놀렸구나. 나쁜 놈들 누나가 혼내줄 테다.

이반  연이야 한인들이 반편이니?

연이  누가 그런 못된 소릴 해? (로스께아이들이 사라진 쪽을 향해) 요런 로스께놈들!

이반  근데 왜 조선 사람은 조선말이 없어?

연이  없긴 왜 없어.

이반  뻐꾸기는 뻐꾹뻐꾹 말하지? 개구리는 개굴개굴 말하지? 별들은 반짝반짝 말하지? 근데 왜 조선 사람은 조선말 안 해?

연이그건…… 그건 로스께땅에서 사니까 그런 거야.

이반  왜 조선엘랑 안 살구?

연이  일본 놈들이 우리 조선땅에서 사니까.

이반  그럼 일본 놈들은 조선땅에 사니까 조선말 하니?

연이  이렇게 똑똑한데 우리 이반이를 누가 바보래. 김씨할배한테 가서 조선말 가르쳐 주세요, 해보렴. 말이야 배우면 되지.

이반  그래! 근데 돼지도 배울 수 있을까?

연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돼지한테 돼지말 뺏으면 돼지가 슬프지 않겠어?

이반  응. 그래도 난 돼지말 다 안다. 연이말도 다 안다.

연이  내 말을?

이반  (연이에게 꽃을 꽂아주며) 연이말은 꽃 같다. 이뻐. 냄새가 좋아. (연이를 보며) 어? 얼굴이 빨개졌다, 화났어?

 

이반이 연이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곳에는 교복을 입은 갑이가 책가방과 짐을 들고 다가온다.

갑자기 안절부절하는 연이.

어색하게 마주 선 갑이와 연이.

이반, 둘을 번갈아 보다가 소리치듯,

 

이반  연이야, 넌 내 각시다! 연이는 내 각시다!

갑이  (웃으며) 연이가 이반이한테 시집갔는 줄 몰랐는걸.

연이  (이반의 등을 떠밀며) 어서 가봐, 돼지 기다리잖니.

갑이  (이반에게) 이반이 녀석 많이 컸구나.

이반  연이는 내 각시다! 갑이는 가라!

연이  이 녀석이. 한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몽달귀신이 잡아간다.

이반  으악! (무서운 듯 달아난다)

 

어색한 사이

 

연이  작년 겨울방학 땐…… 왜 안 오셨어요? 마을 어른들이…… 걱정하셨어요.

갑이  편지 기다렸어.

연이  네? 받지 못했어요? 전 답장이 없길래……

갑이  (기뻐하며) 그랬구나! 난 연이가 날 잊은 줄 알았지 뭐야. 요즘 학교에 일이 좀 복잡해서 전달이 안 됐나보군.

연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갑이  한인학생 하나가 로스께학생들한테 집단으로 구타를 당해서 패싸움이 벌어졌어. 한동안 학교가 시끄러웠지.

연이  오빠는요? 괜찮아요?

갑이  (한숨) 정국이 불안하니까. 다들 별일은 없으신 거지? 부모님은 안녕하시고?

연이  그럼요. 올해 농사도 우리 고려인 꼴호즈(집단농장)가 최고일걸요.

갑이  연이 아버님이 한인촌 장학회에서 모아주신 장학금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몰라.

연이  다들 오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걸요. 우리 고려인들을 위해 큰일을 할 거라고.

갑이  그래야 할 텐데. (연이를 바라본다)

연이  (수줍어하며) 어서 가세요. 마을 어른들이 기다리세요.

갑이  잠깐.

 

갑이, 연이의 손목을 잡는다. 마주 보는 두 사람.

 

오, 행복한 이 순간!

행복한 이 순간!

촛불이거든 꺼지질 말고

꽃이거든 지지 말아요.

 

둘의 사랑 깊고 깊어

바다보다 더 깊다면

둘의 사랑 곱고 고와

진주보다 더 곱다면

산이 높다 못 넘으며

물이 깊다 못 건널까

오는 봄을 뉘 막으며

솟는 해를 뉘 막으랴

 

갑자기 나타나는 로스께아이들 놀려대며,

 

로스께아이들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누구누구는 손 잡았대요. 누구누구는 정분났대요.

갑이  이 녀석들!

연이  (당황해서 손을 뿌리치며) 어서 가요. 어서요.

 

둘은 도망치듯 퇴장한다.

로스께아이들 놀려대며 우루루 흩어진다.

 

이반이 돼지와 함께 뛰듯이 나와 김씨할배를 부른다.

김씨할배,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이반  할배야 할배야 어딨어 할배!

김씨할배  늙은이 귀청떨어지겠다, 이놈아.

이반  할배, 나 조선말 가르쳐주라.

김씨할배  조선말?

이반  조선말 모르면 반편이래?

김씨할배  누가 그러던?

이반  빨리 가르쳐주라, 엉?

김씨할배  (사이) 여기는 남의 땅이라, 땅 주인들이 조선말을 싫어하는구나.

이반  우리 땅에 가면 되지.

김씨할배  지금은 우리 땅도 남의 나라 것이란다.

이반  에이, 그럼 땅도 없고 말도 없는데 왜 조선 사람이래?

김씨할배  아니지…… 땅이 없고 말을 못해도 우린 조선 사람인 게야.

이반  왜?

김씨할배  이반이는 엄마 아들이지?

이반  그럼.

김씨할배  같이 못 살아도 얼굴을 못 봐도 엄마는 엄마지?

이반  엄마는 엄마다. 내 엄마다.

김씨할배  그래 조선은 엄마 같은 거란다. 우린 조선이 낳은 자식들인 게지. 그건 어딜 가도 절대 변치 않는단다.

이반  그럼 반편이 아니지, 이반이는?

김씨할배  이 할배가 약속하마. (손가락 걸며) 이반이는 반편이가 아니다.

이반  돼지한테도 해줘.

김씨할배  (돼지를 쓸어주며) 돼지는 반편이가 아니다. (사이) 고향땅을 다시 밟을 수나 있을지.

이반  고향이 뭔데?

김씨할배  자기가 태어난 곳이지.

이반  할배는 어디서 태어났나?

김씨할배  내 고향은 함흥땅이란다. 여기 러시아 말고 조선땅이지.

이반  함흥? 할배야, 그럼 죽는 곳은 뭐라구 해?

김씨할배  글쎄다…… 할애비도 그건 모르겠구나.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우리 땅에서 나서 태를 묻고 죽어서도 우리 땅에 몸을 묻는 게 예삿일이었다만…… 이역만리 타국에 왔으니……

 

보고 싶네 보고 싶네

조국 산천이 보고 싶네

한강수도 대동강도

맘속에 한없이 보고 싶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보고 싶네 보고 싶네

조국 산천이 보고 싶네

백두산도 한라산도

맘속에 한없이 보고 싶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암전.

 

2장 5년 후 연해주 1937년 가을.

 

무대 중앙에 혼인 초례청이 차져 있다.

그 뒤로 무대 중앙 후면 높은 곳에 계단식의 처형대가 있다.

이때 혼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한인 지식인 체포와 사형 장면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초례상에 마주선 신랑신부. 갑이와 연이다.

마을 아낙들과 사내들이 모여 한껏 들뜬 분위기다.

 

고씨부인  아이고, 새색시 뽀얀 것 좀 봐. 꼭 박꽃 같네.

연이모  (눈물을 찍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기침을 한다. 병색이 느껴지는 모습)

김씨할배  곱기만 한가. 당차고 똑부러지지 착하지 바지런하지. 일등 신붓감이야.

고씨부인  신랑은 어떻구요. 모스크바대학 나와 조선사범학교 선생 됐지. 천생배필이 따로 없네. 안 그래요 여보?

 

고씨는 부인의 말을 듣지 못한 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고씨부인  여봇! 이이는 아까부터 누굴 그렇게 찾아요?

고씨  찾긴 뭘 찾아. (딴청) 어 참 날씨 좋네. 보리쌀 서 말만 있어도 데릴사윈 안 하는 겐데.

고씨부인  (옆구리 찌르며) 누가 들어요! 이이는 경사스런 날에.

고씨  내가 틀린 말 했남. 허긴 갑이네 부모가 만주서 독립운동하다 비명횡사를 했으니 데릴사위라도 해야지.

고씨부인  그런 소리 말아요. 갑이는 인제 우리 성택이 학교 선생님 아니우. 아들놈 앞길 막을 일 있수.

고씨  우리 성택이가 커봐라, 갑이보다야 백배 낫지.

고씨부인  하여튼 속알딱지는.

 

이반이가 돼지와 함께 들어온다.

 

이반  연이야 연이야, 이반이 왔다. 어? 잔치하니?

고씨부인  (킁킁 냄새를 맡다가) 이게 돼지냄새냐, 사람냄새냐.

고씨  이 등신, 여긴 왜 또 왔어.

김씨할배  (고씨에게) 이쁜 날이야 이쁜 말만 해.

고씨부인  얼른 가서 씻지 못해. (김씨할배에게) 아이구, 얘 좀 어떻게 해봐요.

이반  연이 꽃 줄려구. 연이는 꽃 같다. 이뻐.

사회자  신부 배례

 

신부, 다소곳이 절한다.

 

이반  어, 연이가 꼬까옷 입었네…..(갑이를 보며) 어, 갑이도 꼬까옷 입었네…… 어 어 어?

고씨  그래 이놈아, 연이는 오늘 갑이한테 시집간다.

이반  연이 시집 못 간다. 연이야, 넌 내 각시다. 연이야, 넌 내 각시다!

고씨부인  이놈이 또 또. 저리 가지 못해. (부지깽이를 들며) 궁둥이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래?

이반  가지 마라 시집가지 마라.

 

그때 이반이의 돼지가 초례청에 뛰어들고 이반이는 돼지를 잡으러 우왕좌왕하며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연이모  아이구 이 녀석아, 예가 어디라고 돼지를 데리구 와.

고씨부인  아따, 고 놈의 돼지 투실투실한 게 날 한번 잡아야겄네.

고씨  (주위를 자꾸 은밀히 살피며 뭔가를 기다리는 듯하며 건성으로) 돼지 잡기엔 잔칫날이 딱 좋지.

 

깜짝 놀란 이반이 돼지를 껴안고 황급히 달아난다.

이때 무대 구석에 등장하는 로스께경찰.

고씨가 살금살금 로스께경찰에게 다가가 은밀히 하객들 중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들의 얘기를 우연히 엿듣는 이반.

로스께경찰은 지식인 한 명을 조용히 두 팔을 잡아끌어 연행한다.

 

사회자  신랑 배례.

 

영문도 모르고 얼마쯤 따라나서던 지식인이 도망치다가 붙잡힌다.

지식인, 이내 얼굴이 두건으로 들씌워지고 두 팔이 묶인 채

처형대 위에 끌려 나가 선다.

 

신랑이 배례하고 마을 주민들 기쁨에 들떠 있는 동안,

처형대 위에선, 여러 발의 총소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지식인.

 

사회자   신랑 신부 합배

 

이때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강제이주 통지서를 들고 황급히 혼례청으로 다가와 김씨할배에게 다가가 보여준다. 김씨할배는 그것을 읽고 놀라나 황급히 감춘다.

 

다시 연행당하는 지식인2. 또 다시 총소리.

처형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지식인.

 

암전.

 

무대 밝아오면 며칠의 시간이 경과. 로스께교장실이다.

갑이가 불안하게 들어온다.

 

갑이  부르셨습니까?

로스께교장  이선생, 잘 왔소.

갑이  무슨 일로 절……

로스께교장  이선생 요즘 재미가 어떻소?

갑이  좋습니다.

로스께교장  좋다…… 좋다…… 참말이오?

갑이  제가 무슨 실수라도……?

로스께교장  조선 사범학교 교장은 대대로 조선인이었죠?

갑이  네.

로스께교장  내가 교장이 된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오?

갑이  당에서 하는 일이니, 저야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로스께교장  불온한 교사들과 학생들이 잡혀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오?

갑이  학교를 위해서 당에서 내린 판단이겠지요.

로스께교장  앞으로 당에서는 조선 사범학교를 없애고 일반 사범학교로 만들 예정이요.

갑이  그렇다면! 조선말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로스께교장  그렇지, 바로 그거요. 수업도 러시아말로 하게 될 것이오. 그래서 말인데 당에서는 이선생처럼 러시아말이 능통한 교사가 필요하오.

갑이  ……그럼 다른 교사들은?

로스께교장  러시아말이 안 되면 수업을 할 수 있겠소? 우린 이선생같이 성분도 좋고 실력도 출중한 인재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소.

갑이  ……

로스께교장  왜? 재미없소?

갑이  …… 아,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로스께교장  그런데 말이오…… 학생이고 선생이고 할 것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들이 있어서 말이야…… 소비에트 인민의 신성한 의무가 바로 그런 자들을 색출하는 거 아니겠소.

갑이  물, 물론 그렇겠지요.

로스께교장  명단을 좀 뽑아 오시오.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갑이  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을 다해 왔습니다. 누가 반동분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정보원들에게 정보를 받는 것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로스께교장  얼마 전에 결혼을 했지?

갑이  네.

로스께교장  장인이 권선생이라고 한인촌에서 명망이 높던데. 유감스럽게도 결혼식날 체포되었다고?

갑이  장인어른 소식을 아십니까? 어디 계십니까? 무사하신가요?

로스께교장  이선생이나 장인 같은 유능한 인민들이 반동분자들로 인해 화를 입어서야 되겠소. 난 이선생을 믿고 있소. 내 뜻은 곧 당의 뜻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로스께교장과 갑이 쪽이 어두워지면,

무대 한쪽 연이 집 평상에서는 근심어린 마을 사람들. 이반이 뛰어 들어오며,

 

이반  로스께다. 로스께가 왔다.

로스께  이주 통지서는 받았겠지?

고씨부인  위원장나리, 우리보고 어디로 가란 말인가요?

고씨  우리가 뭘 잘못했소? 무슨 까닭이 있을 것 아니오?

로스께  중앙당의 지침이다. 모든 한인들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한다.

이반  로스께는 얼굴이 하얗다. 눈은 파랗다. 로스께는 도깨비다.

로스께  앞으로 3일 뒤 09시까지 4호 마을 작업장 앞으로 집결한다. 이삿짐은 간단하게 꾸리고 먹을 양식도 지참할 것. 장거리가 될 테니.

김씨할배  다 지어 논 농사는요? 벼가 누렇게 팼는데 저걸 두고 어딜 가란 말이오?

고씨부인  집은요? 저 돼지, 닭, 가축들은 다 어떻게 하고요?

로스께  집과 재산, 가축들은 당에서 정당한 값을 쳐서 새 정착지에 가면 환불해 줄 것이다.

 

고씨, 로스께를 끌고 한쪽으로 가서 은밀히 따진다.

 

고씨  제가 당에 얼마나 열성적이고 협조적이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만 잘 끝나면, 꼴호즈 위원장 시켜준다는 약속을 하셨지 않소?

로스께  고려인들은 단 한 명이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고씨  뭐요? 이러는 법이 어딨습니까? 실컷 이용만 하고 이제 와서 나를 내쫓겠다? 내가 가만 있을 줄 알아요, 당장 지방 당 위원회에 고발하겠소.

로스께  흥! 좋을 대로.

고씨부인  (고씨를 말리며) 이럴 때일수록 나 죽었소, 엎드려 있어야죠. 입 한번 뻥긋 잘못 놀렸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구 이래요, 이러길.

김씨할배  저 위원장나리, 권선생이 며칠 전에 끌려가서 여태 소식이 없습니다. 무슨 이윤지나 알아야지……

로스께  인민내무위원회에서 하는 일은 우리도 알 수가 없다. 설령 안다 해도 정보누설죄에 해당한다는 것쯤은 잘 알겠지? 그럼 이만.

고씨  (멀어지는 로스께를 향해) 위원장나리. 위원장나리! (허탈하게 혼잣말) 이건 약속이 틀리잖아, 약속이……

고씨부인  (고씨에게) 설마 우릴 내쫓진 않겠죠?

김씨할배  농번기니까 생산량을 높이려고 겁주는 거지. 지레 걱정하지들 말어. 아무 말 않고 소같이 일만 하는데 누가 뭐래.

고씨  중앙에서 한인들을 의심하고 있어요.

김씨할배  뭣 땜에? 우리가 반란이라도 할까봐?

고씨  인민의 원수를 찾아내 응징한다고……

고씨부인  5호 마을에 두 사람, 6호 마을에선 세 사람이 간밤에 붙잡혀가서 종무소식이래요.

김씨할배  (발끈) 농사나 짓고 사는데 무슨 인민의 원수란 말이야?

이반  일본첩자래. 한인들은 모두 일본첩자래. 로스께가 그랬다.

고씨부인  으이구 이 등신, 조용히 못 있어.

김씨할배  내 나라 뺏은 왜놈들이 뭐가 좋다고 우리가 밀정짓을 해. 밀정짓하는 거 즈그들이 봤데?

고씨  (뜨끔해서) 당에서 없는 말을 지어냈겠어요?

김씨할배  쯧쯧쯧, 자네는 누구 편인가? 로스께한테 붙어먹더니 아주 허연 물이 들었구먼.

고씨  뭐요? 내가 언제 로스께한테 붙어먹었다는 겁니까? 다 우리 고려인들 편히 살자고 당에 협조한 거 아닙니까?

고씨부인  여보, 그만 둬요. 우리끼리 싸우면 뭘 해요. 무슨 수를 내야지.

김씨할배  무슨 수가 있나. 우리 같은 소수민족이 말할 데가 있나 갈 데가 있나.

고씨부인  아이고, 당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지.

이반  이반이는 다 아는데. 이반이는 다 봤는데.

고씨부인  저리 가지 못해. 심란해 죽겠는데 정신 사납게 얼쩡거려.

 

이때 연이모 넋이 나간 듯 힘없이 마당에 들어선다.

 

고씨부인  어찌 됐어, 만나봤어?

연이모  (침울한 얼굴로 허탈하게) 만나게 해주질 않어. 조사 중이라는 말만 하고……

고씨부인  어이구 나쁜 놈들. 자식 혼사 치르는 경사스런 날에 붙잡아가서 몇 날 며칠…… 뭘 조사한다는 거야 대체……

김씨할배  (위로하며) 별일이야 있겠나. 권선생이야 우리 한인촌에서도 명망이 높은 양반이고 당에도 좀 충성스러웠는가.

고씨  (뭔가 켕기는 듯 멀쑥하게) 뭐, 죄가 없으면 금방 풀려나겠죠.

고씨부인  로스께 놈들이 죄가 있고 없고를 가리나. 털어봐야 먼지가 나지 않으면 풀어주어야 할 텐데 종무소식이니.

연이모  여보! (흐느낀다.)

김씨할배  괜찮어. 소식 올 거니까 염려 말어.

이반  로스께는 얼굴이 하얗다. 눈은 파랗다. 로스께는 도깨비다. 이반인 다 들었다. 다 봤다. 그치 돼지야 너도 알지. (돼지에게 속삭이며 키득거리며 웃는다) 너랑 나랑만 알지.

 

암전.

 

3장 강제이주 직전의 혼란

 

돼지막을 도끼로 내려치는 연이모, 말리는 연이.

 

연이  이러지 마세요. 어머니, 그냥 내다 팔면 되잖아요.

연이모  다 소용없다. 너도나도 팔려는 사람들뿐이지 어디 살 사람이 있더냐. 돼지 기르느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했는데.

연이  어쩔 수 없잖아요, 당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고.

연이모  피땀 흘려 겨우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었는데…… 이 한인촌 집들 하나 하나 우리가 함께 벽을 바르고 지붕을 이었어. 근데 이제 와서 이 논밭, 집, 가축들을 다 놓아두고 남의 땅에 가서 살라니?

연이  이주 날짜가 당장 낼 모레예요. 서둘러 짐부터 챙겨야 해요.

 

갑이가 들어온다.

 

연이  만나셨어요? 뭐라고 해요? 아버지는요?

갑이  기다리라는 말뿐이오.

연이모  아이고, 아무래도 탈이 난 게 틀림없어. 죄다 붙잡아다 죽인 게야.

갑이  아니 살아계실 겁니다. 아버님이 한인촌에 학교 세우고 당에 충성한 공로가 있잖습니까. 당에서도 한인들 이목이 있는데 그렇게 쉽게 어른을 해치기야 하겠습니까.

연이모  그러면 오죽이나 좋겠느냐. 나설 때 안 나설 때 안 가리고 불쑥 불쑥 앞장서는 게 로스께 눈에는 아니꼽게 보였을 텐데……

연이  아버지는 돌아오실 거예요. 어머니 우선 짐부터 싸야 한다니까요.

연이모  난 아무데도 안 갈란다. 느이 아버지 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여. 우리가 개돼지도 아니고 설마하니 하루아침에 이 땅에서 내쫓기야 하겠니.

갑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당에 비협조적이면 아버님이 곤란해지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연이모  이게 웬 날벼락이냐……

연이  저는 텃밭에 있는 채소랑 감자를 절일 테니 어머닌 씨앗부터 챙기세요.

연이모  사람 사는데 씨종자 없을까봐.

연이  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조선사람은 저승엘 갈 때도 씨앗은 가져 간 다고. 볍씨 옥수수 조 보리 배추 무 고추씨 모두 챙겨야 해요. 다 버리고 가더라도 종자가 없으면 농사를 어떻게 짓겠어요?

연이모  우린 돈이 있잖니. 돈만 있으면……

연이  어머니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돈을 먹을 순 없어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양식이 떨어지면 돈을 먹을 건가요? 냄비나 주전자나 할 것 없이 양식으로 꼭꼭 채워야 해요.

연이모  아이고 아이고 여보, 늑대 피하다가 호랑이굴로 들어왔소. 왜놈들이 나라 뺏고 땅도 뺏고 말도 뺏는다고 로스께땅에 왔더니 로스께놈들이 다를 게 뭐 있소.

 

갑이가 한 쪽에서 족보책을 챙긴다.

 

연이  그건 어디다 쓰겠다고요.

갑이  이건 우리 이씨 가문 족보요. 우리 아버지가 항일투쟁하시면서도 조선에서부터 가져 오신 거요.

연이  열 권이나 되는 족보책을 어떻게 가져 가실려구요?

갑이  근본도 없는 인간이 될 순 없어.

연이  그래도 살아야죠, 우선은 살아야 근본도 있는 거죠. 지금 우리한텐 소금 한 움큼, 간장 한 종지가 더 중요해요.

갑이  여기는 남의 땅이오. 우리 자식들이 누구의 핏줄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소.

연이  하지만……..

 

연이모 갑자기 갑이에게 달려들어 매달리며,

 

연이모  여보게, 다시 한 번 애 아버지한테 가보게. 그새 무슨 소식이라도 있을지 모르지 않나…… 뭐든 달라는 대로,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각서를 쓰라면 각서를 쓰고 아무튼 자네는 선생이니 힘을 좀 써보게.

갑이  어머님……

연이모  자네는 윗선에 줄이 좀 닿을 게 아닌가. 우리 그 양반 좀 살려주게. 응? 제발.

연이  어머니 이이도 힘닿는 데까지 애쓰고 있어요.

연이모  (통곡하며) 여보, 여보.

갑이  (침통하게 침묵하다) 다녀오겠소.

연이  오자마자 어딜 또 가시려구요?

갑이  (나가다 말고 연이를 보다가) 어머니를 돌봐드려요.

연이  (걱정스레) 여보, 몸조심 하세요. (어머니에게) 안방에서 좀 누워계셔요. 이러다 쓰러지세요.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간다)

 

이반이가 돼지를 몰고 연이네 집으로 들어온다.

 

이반  연이야, 동네가 다들 울고불고 난리다?

연이  넌, 짐은 다 쌌어?

이반  짐? 무슨 짐?

연이  우린 이사 가야 해.

이반  왜?

연이  몰라.

반  어디로?

연이  몰라.

이반  모르면서 짐을 싸?

연이  싸라면 싸야지. 우린 당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루 해야 해.

이반  에이, 그러는 게 어딨어. (돼지를 향해) 이 녀석도 시키는 대루 안 하는데. 글쎄 오늘은 개울물에 가지 말랬는데도 텀벙 들어갔다가 이 녀석이 살려달라고 꽥꽥 소릴 지르는 거야. 으이그 그러길래 뭐랬어. 왜 말을 안 들어, 글쎄.

연이  아무튼 무거운 거 말고 먹을 거하고 입을 거하고 많이 챙겨야 해. 김씨할배가 도와주실 거야.

이반  연이도 같이 가는 거니?

연이  그럼.

이반  갑이도 같이 가는 거니?

연이  그럼. 왜 싫어?

이반  (가슴 가리키며) 여기가 아퍼.

연이  아퍼? 체했니?

이반  몰라. 여기, 여기 있는 건 아무도 빼앗지 못해…… 연이도 여기 있다.

연이  (쓸쓸히 웃으며) 그래, 거기 있으니 아무도 이반이 것을 못 뺏을 거야. 어서 가. 가서 꼭 양식부터 챙겨야 한다.

이반  알았어. 연이가 가면 나도 갈 테다. (나가다 말고) 연이는 내 각시다! (도망치듯 나간다.)

 

잠시 암전.

무대 밝아오면, 울부짖으며 고씨 부인이 달려 들어온다.

 

고씨부인  이선생, 이선생 어딨어요?

연이  아버지 일 때문에 알아보러 나갔어요.

고씨부인  아이고, 우리 아들이 잡혀갔어. 우리 금쪽같은 새끼가 사범학교 수업받다가 끌려들어갔어.

연이모  아니 집이네도? 성택이가 무슨 죄를 졌길래.

고씨부인  뭔가 잘못된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이선생이 그 학교 선생이니 말 좀 잘해주세요. 어떻게 좀 해봐요. 아이고 성택아, 성택아.

연이  학교 일도 뒤숭숭한 것 같더니 그예 일이 났나봐요.

고씨부인  우리같이 당에 충성하고 깨끗한 인민이 어딨다고 잡아가.

연이모  우리 바깥양반 소식 알아보러 갔으니 가면 뭔 소식을 듣지 않겠어? 그러니 기다려봐.

 

고씨 등장한다.

 

고씨  이놈의 여편네야, 여기 오면 뭔 수가 생긴다고 여길 와.

고씨부인  어떻게 뭐래요, 성택이 무사하대요?

고씨  누군가 고발한 게 틀림없어.

연이  누가요?

고씨  이선생은 학교에서도 안 짤렸대지?

연이모  그럼 뭘 하우, 다들 쫓겨날 마당에.

고씨부인  이선생 오면 꼭 좀 얘길 해줘요. 우리 성택이 좀 빼달라고.

연이모  우리 양반도 저 꼴이니 무슨 힘이 있어.

고씨  (고씨부인에게) 이놈의 여편네야, 그러게 경대는 뭐 말라비틀어진 경대를 가져 간다구.

고씨부인  (울면서) 시집올 때 친정 엄마가 해주신 거라구요. 아이고, 성택아.

고씨  에이, 미련한 여편네. 그러니 자식놈이 이 모양이 되도록 뭘 한 거여. 입단속시키라고 그렇게 얘길 했는데. 내 그놈의 경댈 똥통에 처넣어야.

고씨부인  (나가는 고씨를 따라 나가며) 안 돼요. 내 피붙이 같은 거라구요. 아이고, 성택아 성택아.

 

 

4장 강제이주의 행렬

 

긴 호루라기 소리와 군화발소리,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린다.

그 속에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서로를 찾는 소리, 아이들 울음소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아낙네들의 소리.

그 소리를 제압하듯 울려 퍼지는 러시아 군가.

피난민과도 같은 사람들의 긴 행렬.

이주민들 중에 짐을 짊어진 갑이와 짐을 든 연이, 연이모친은 수레 위에 실렸다.

연이는 수레위에 모친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낡은 을 여며준다.

연이모친은 병색이 완연하다.

 

연이모  (울면서) 느이 아버지를 두고 나는 못 간다…… 생사도 모르는데…… 이러다 영영 생이별일 게 틀림없어. (숨 넘어가듯 기침소리)

연이  몸도 불편하신 분이 왜 자꾸 약한 소리만 하세요. 우선은 어머니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나중에라도 아버지를 만나실 거 아녜요.

갑이  어머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붙잡혀간 한인들은 취조가 끝나는 대로 다음 기차로 보낸다지 않습니까.

연이모  (울면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느이 아버질 찾누. 아이고 여보……

고씨부인  여보, 성택이가 정말 내일 나온다고 했어요?

고씨  그렇다고 몇 번을 얘기해, 낼 성택이랑 같이 들어갔던 학생들 죄다 풀려난대잖어.

고씨부인  이선생 정말 이이 말이 맞우?

갑이  네? ……그, 그럼요, 어린 학생들이야 뭐 간단한 조사만 마치면 된답니다.

고씨부인  그럼 얼마나 좋을까. 몸이 축났을 텐데 끼니나 제대로 얻어먹었는지.

김씨할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간다는 건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니 도깨비 놀음도 아니고.

고씨부인  이게 웬 날벼락이오. 올 농사가 풍작이라 성택이 졸업하고 당신 꼴호즈 위원장 되면 팔자 한번 펴지나 했는데.

고씨  누, 누가 위원장 된다고 그래!

고씨부인  아 당신이 그랬잖우, 위원회에서 얘기가 다 끝났다고……

고씨  닥치지 못해! 여편네가 쓸데없는 소릴……

김씨할배  (먼 하늘을 보며) 하늘이 저리 높고 맑은 걸 보니 꼭 우리 고향 추석 날씨 같구먼……

 

로스께1이 나타난다.

 

로스께1  우리 소비에트의 위대한 지도자 다바리시 스탈린 동지와 당 중앙위원회의 특별한 배려로 한인들은 더 좋은 땅, 희망의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로스께1 뒤로 기차가 보인다.

 

갑이  저 저건, 죄수 수송용 열차.

연이  세상에 저런 데다 사람을 태운단 말에요?

고씨  우리가 개돼지, 도둑놈이란 말야? 망할 녀석들.

고씨부인  앞으로 날씨는 더 추워질 텐데 대체 어떻게 지내라고.

김씨할배  보아하니 멀리 보낼 게야, 아주 멀리.

고씨부인  여러 날이 걸리면 이 안에서 밥도 지을 수 없고…… 배식도 안 되는데 무얼 먹고 지내라는 거죠?

김씨할배  그러니까 비상식량을 준비하라고 그랬겠지.

연이  물은요, 물도 안 준단 말인가요?

김씨할배  이게 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이지.

고씨  좋은 땅 주겠다고 떠들어대지만 누가 그 소릴 믿어. 소련놈들 말을.

갑이  (주위를 경계하며) 조용히…… 조용히…… 누가 듣겠소.

로스께2  자, 꾸물대지 말고 각 세대별로 열차에 승차한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서로를 찾는 소리, 아이들 울음소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아낙네들의 소리.

 

이때 이반이가 괴나리봇짐을 메고 돼지를 몰고 나타난다.

 

김씨할배  이반아, 가축은 안 된다지 않았어.

이반  싫어.

고씨  사람 타기도 좁아터진 열차에 돼지 새끼를 태워!

고씨부인  우리가 지금 소풍가는 줄 알어?

고씨  (돼지를 빼앗으려 하며) 이리 내.

이반  안 된다. 안 된다. 돼지도 같이 갈 거다.

김씨할배  돼지는 또 사서 새끼치면 열 마리 스무 마리도 갖게 될 테니. 할애비 말 들어라.

이반  열 마리 스무 마리 돼지가 이 돼지는 아니잖어. 안 된다 못 준다.

연이  이반아, 누나 손 잡고 같이 가자.

이반  (망설인다) 연이야, 돼지도 같이 가자 응?

연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그만 가자.

이반  돼지 없으면 이반인 반편이다.

고씨  이놈이 돼지귀신이 씌었나.

연이  사람만 탈 수 있대잖어. 자꾸 그러면 로스께경찰한테 혼난다.

이반  (고씨가 낚아채려하면 악을 쓰며) 안 된다. 안 된다. 연이는 갑이랑도 가고 엄마랑도 가는데, 왜 나는 돼지랑 가면 안 되냐?

고씨부인  돼지가 니 에미냐?

로스께2  왜 이리 소란인가?

김씨할배  별일 아닙니다, 나리. 얘가 돼지를 데리고 가겠다고 떼를 써서.

이반  (로스께1을 붙들고) 돼지도 같이 가야 한다.

로스께1  가축은 절대 승차할 수 없다.

김씨할배  나리, 이 녀석이 앞뒤 모르는 반편이랍니다.

이반  할배, 나 반편이 아니라고 약속했잖아.

김씨할배  (엄하게) 가만 있어!

이반  돼지한테도 반편이 아니라고 약속했잖아.

김씨할배  (무시하며) 어리석은 반편이도 다 스탈린 동지의 인민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한번만 은혜를 베푸시면……

로스께1  당의 명령에는 예외란 없다.

이반  할배는 거짓말쟁이다. 나 간다. 이반인 돼지랑 간다. (열차에 돼지와 함께 올라타려 한다.)

로스께2  (총을 빼어들어 돼지에 겨눈다.) 내려!

이반  (돼지를 감싸며) 안 돼! 우리 돼지 죽이면 나도 죽는다.

로스께2  이런 반동 새끼!

갑이  이러지들 마시오. 우리가 잘 설득해보겠소.

로스께2  (갑이를 겨냥하며) 니 머리통부터 구멍이 나고 싶나?

 

흥미롭게 이 장면을 바라보던 로스께1. 이반에게 다가가 다리를 굽혀 빤히 바라본다. 이반, 돼지목을 끌어안으며 겁먹은 얼굴이다.

 

로스께1  재밌군, 한인들은 원래 돼지와 같은 종족이지. 먹고 싸고…. 잡아 먹으면 아주 맛이 좋지. 후후후, 그래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로스께2에게) 어이, 태워.

갑이  뭐! (갑이가 나서려 하면 김씨할배가 가로막는다.)

김씨할배  감사합니다, 나리. 비천한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니.

 

로스께1, 2는 껄껄 웃으며 멀어진다.

 

갑이  (분을 참지 못하며 이반을 향해) 이놈이! 네놈 때문에…… 우리가 이런 치욕을……

연이  (이반을 감싸 안으며) 그만 하세요. 이반이가 무슨 잘못이 있어요. 로스께놈들이 잘못이죠.

이반  (울음을 터트리며) 돼지는 나랑 간다. 나랑 산다.

연이모  (울음을 터트리며) 아이고 여보……여보……어디 계시우……살아는 있수…… 여보.

고씨부인  (덩달아 서러워) 성택아…… 성택아……

 

암전.

 

5장 강제 이주 열차 안

 

비좁은 이주민들의 칸,

그 다음 칸에는 따스한 난로불이 피워져 있는 러시아경찰들의 칸이다.

러시아경찰 칸에서는 바알갛게 타오르는 난로가에서 시가를 피워물거나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 경찰들.

이주민 칸에서는 면도날 같은 칼바람소리가 들리고 모두 이불이며 담요로 몸을 두르고 떨고 있다.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들. 여인네들은 담요자락으로 누군가 가려주어 양동이에 소변을 본다. 이반이 돼지가 바닥에 똥을 싼다.

 

고씨  아, 이 냄새. 이 돼지새끼가 사람도 못 싸는 똥을 여기다 싸. (고씨가 이반이의 돼지를 발길질로 내지른다.)

이반  (돼지를 감싸며) 돼지는 똥 못 참아. 아프다, 아프다. 그러지 마라.

고씨부인  사람이래야 말로 타이르지.

김씨할배  고만들 해.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함부로 해서야 쓰나.

고씨  이놈의 돼지똥 냄새 땜에 사람이 살 수가 있어야지. 이거야 원 상전모시고 가는 꼴이니.

이반  돼지 때리면 이반이가 가만 안 있을 거다.

고씨  흥, 가만 안 있으면? 아 이런 등신새끼, 오냐 오냐 봐줬더만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어른한테 대들어. (때리려고 하면)

갑이  (책을 덮으며) 그만둡시다. 어차피 한배를 탔으니, 이럴 때일수록 서로 도와야 하지 않습니까.

고씨  이선생 여기가 조선 사범학교 교실인 줄 알아. 사상교육일랑 저 로스께 놈들한테나 하시지. 여기가 프롤레타리아의 천국이란 말야? 똥돼지하고 먹고 자는 여기가? 흥.

갑이  이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다시 잘 살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믿읍시다.

김씨할배  이선생 말이 맞어.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러시아 소수민족 중에서도 농사로는 제일 일등 민족 아닌가. 땅이 있으면 어디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게야.

고씨  에이, 젠장할 거.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연이모가 심하게 기침을 한다. 연이가 자신의 옷을 벗어 어미에게 덮어준다. 갑이가 자신의 옷을 덮어준다.

 

연이  난 괜찮아요. (갑이에게 다시 옷을 덮어준다.)

갑이  (연이의 발을 부벼주며) 발이 얼어서 빨갛게 부어올랐어.

연이  (벽에 기대 덜덜 떨고 있는 연이모의 이마를 만지며) 어쩌나, 열이 심해요.

갑이  어머님, 조금만 견디세요. 다음 역에서 정차할 때 제가 약을 구해 보겠습니다.

고씨  약을 어디서 구해? 먹을 것도 떨어져가는데.

고씨부인  큰일이에요…… 벌써 보름도 넘게 달리고 있잖어. 이렇게 고생스러운데 성택이는 어찌 지내는지. 열차를 타기나 한 건지 원.

이반  춥다. (돼지를 꼭 끌어안으며) 너도 춥다.

고씨  옘병하네.

 

다음 칸의 로스께 경찰들

 

로스께1  당은 우리에게 중대한 사업을 맡겼다. 당의 이름으로 인민의 적을 모조리 색출하는 것이다. 오늘의 적, 그리고 내일의 적까지 샅샅이.

로스께2   연해주의 한인 십팔만 명을 깡그리 쓸어 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말많은 한인 지도자놈들부터 죄다 뿌리를 뽑아놨으니 우리의 과업은 성공한 거나 매한가지입니다.

로스께1  한인들은 잡초 같은 놈들이다. 뽑아도 뽑아도 악착스럽게 다시 살아나거든.

로스께2  제깐놈들이 어디 황무지에서도 살아나겠습니까?

로스께1  중요한 것은, 저들이 당에서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끝까지 이해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로스께2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은 모두 꽃에 불과합니다. 열매는 이제부터 아니겠습니까.

로스께1  우리의 적이 있다. 밖에도 안에도 있다. 이를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로스께2  위대한 인민내무위(전KGB) 만세!

로스께1  스탈린 동지 만세! 춤을 출까? 폴카!

 

기차역 표지판이 지나친다. 라스똘리예역, 우스리스크역, 스파스크역, 이만역, 비킨역……

 

다들 지쳐있는 모습, 이반이는 자기의 양식을 돼지에게 나누어 먹인다. 고씨가 달려들어 돼지에게 주려는 양식을 빼앗으며,

 

고씨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돼지를 먹여!

이반  내 꺼야! 돼지 배고프다. 이반이도 배고프다.

고씨  배때지가 불렀어! 너, 지금부터 돼지한테 감자 한 톨 주기만 해.

이반  (달려들며) 내 놔! 내꺼야!

고씨  이 반편이 등신새끼 입 닥치지 못해! (이반을 친다)

이반  (강그러지며 악착같이 물어뜯는다.) 이 나쁜 놈. 도둑놈.

연이  돌려주세요. 그건 이반이에게 남은 마지막 양식이에요.

갑이  그만두시오. 고통스러운 건 다 마찬가지 아니오. 그렇다고 남의 것을 빼앗는다면 도둑질이나 뭐가 다르겠소.

고씨  선생은 글만 읽어도 배가 부르신가. 남 가르칠 힘이 남아있구먼. 사람이 배를 곯아도 짐승을 멕이라고 책에 써 있습디까?

고씨부인  (힘없이) 여보, 그만둬요. 걔가 뭘 알겠수.

고씨  이 여편네야, 그러기에 내가 뭐랬어. 저따위 경대나 챙긴다고 기를 쓰더니 서방을 굶겨 죽일 작정이야.

김씨할배  왜들 이래! 꼴사납게 먹을 걸 가지고 이웃끼리 드잡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게 사람 노릇인가. 쯧쯧, 부끄러운 알아야지. (이반에게) 이반아, 니 먹을 걸 돼지한테 주면 안 된다. 아무한테도 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여기는 연해주가 아니야. 명심해라.

이반  돼지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김씨할배  사람 목숨이 짐승보다 더 중한 게야.

이반  이반이한테 돼지가 돼지가 더 중해.

고씨부인  효자 났구먼. 효자 났어. 이제 양식도 다 떨어졌으니 어쩌면 좋누.

연이  다음에 기차가 정차하면 이 신발이라도 벗어서 팔아야겠어요. 양식을 구해야 해요.

갑이  우리를 기차 안에서 죽게 할 생각인가? 이 짐승 같은 로스께놈들!

고씨  흥, 언젠 책만 읽으시더니, 이젠 독립운동이라도 할 모양이군.

이반  (돼지에게 먹이를 주며 노래하듯) 이 돼지는 내 돼지. 엄마돼지 씨돼지 내 고향 돼지. 꽃 따 먹고 별 따 먹고 이반이 반, 돼지 반 밥도 같이 먹고, 우리는 한 가족.

연이모  연이야…… 배가 고프다……

갑이  여보, 어머님이…… 씨앗이라도……

연이  하지만 그것만은 아버님께서……

갑이  우리는 그렇다 해도 어머님은 환자요. 기력이 점점 떨어지고 계시니……

 

연이모는 멍하니 실성한 듯 앉아 있다. 병색이 더 짙어졌다.

 

연이모  연이야…… 배가 고프다…… 따끈한 밥이 먹고 싶구나……

김씨할배  20년 전 대기근 때도 유태인이나 유럽인들 같은 소수민족들은 많이 죽었지. 그래도 한인들은 소나무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해먹고, 풀뿌리를 끓여 배를 채워서 피해가 적었더랬지. 그렇더라도 열차에 실렸으니 어떤 재간도 소용없는 일이야.

연이  (망설이다 씨앗주머니를 꺼내서 어미에게 먹여준다.) 어머니 옥수수씨에요. 꼭꼭 씹어 드세요. (갑이에게도 나눠준다.)

갑이  당신도 좀 먹어요.

연이  전 괜찮아요. 남은 거라도 아껴야죠.

이반  (연이모의 배를 문지르며) 어서어서 자라라 옥수수야. 이반이도 나눠먹게. 배부르게 먹어보게.

연이  어머니! 얼굴이 창백해요.

연이모  (컥컥 거리며) 물…… 물을 다오……

연이  어쩌나, 어머니 물이 다 떨어졌어요. 누구 물 가진 사람 없어요!

갑이  하필 스파스크역에 수도시설이 고장 날 게 뭐람.

연이모  물을 좀…… 입이 탄다…… 내게 인정을 좀 베풀어다오.

갑이  (등을 쓸어주며) 어머님 힘을 내세요. 금방이면 돼요. 우선 한숨 주무세요. 주무시고 나면 물을 드릴게요.

연이모  물…… 물을…… 조금만…… 얘야, 왜 그렇게 인정머리 없니. 물을 다오.

연이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물이 어딨어요…… 정신 좀 차리세요…… 어머니! (울음을 터트린다.)

 

암전.

 

연이모  불이야, 불이 보인다. (창을 향해) 봐라, 저길 봐. 무서운 불이다!

 

힘없는 사람들, 모두 창을 내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갑이  (어머니를 끌어 앉히며) 갈증이 심하신 거야.

연이모  불! 불!

연이  어머니, 괜찮아요. 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덜컹거리는 기차바퀴의 반복음. 모두 지칠 대로 지쳐서 얼음장 같은 침묵 속에 깜빡깜빡 불안한 잠에 빠져든다.

 

연이모  불길이 보여. 저기 거대한 불꽃이 있어.

 

놀라서 깨어 일어나는 사람들. 이내 주저앉는다.

 

연이  앉으세요. 말 들으세요.

연이모  불이야!

연이  그만 해요 어머니, 제발 그만 좀 해.

고씨  (수근거리듯) 연이네가 미쳤군.

고씨부인  듣겠수. 당최 이놈의 기차는 언제나 멈출 거여. 벌써 한 달이 넘지 않았어.

고씨  옆 칸에서는 어제 저녁에 어린애 둘, 늙은이 하나가 죽어나갔다더군.

김씨할배  (쇠약해진 모습) 나더러 들으라는 소린가.

고씨부인  이이는 왜 자꾸 실없는 소릴 해. 산다 산다 해도 죽을 판에.

이반  돼지야, 돼지가 아프다! 왜 그래? 배고파? 할배, 돼지가 아프다.

김씨할배  이놈아, 너는 돼지만 중하냐. 이 핼애비도 아프다.

연이모  불을 봐! 불꽃이 타……

고씨  아, 조용히 하도록 좀 해줘. 이 안에는 한 사람만 타고 있는 게 아니잖아. 에이, 이러다 나까지 미치지.

연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픈 양반이 헛소리를 하는 걸 가지고.

고씨  내 말이 틀렸소? 저 소릴 들어봐, 멀쩡한 사람이 안 미치겠냐구.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할 거 아냐.

연이  우리 어머니가 죽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지금!

이반  돼지야, 일어나라. 왜 자꾸 눈을 감어. 죽으면 안 돼!

연이모  불! 불이야, 불이 보여!

갑이  그만 하세요 제발. (연이모를 끌어 앉히며 몸을 묶는다)

연이  무슨 짓이에요. 어머니가 짐승이야!

갑이  그만 해, 당신도 그만 하라고.

연이  뭘요? 뭘 그만 해요? 당신도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자기 코가 석잔데 병든 장모까지 얹혀서 부담스러워요?

갑이  (벽을 치며) 로스께놈들! 우리가 제풀에 서로 뜯고 할퀴고 짐승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거라구.

김씨할배  (힘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긴 틀렸어.

이반  (돼지에게 몰래 물을 주며) 아프지 마라. 이반이도 아프지 마라.

갑이  (이반이가 물을 주는 걸 발견한다. 이반이의 물을 빼앗는다.)

이반  안 된다. 우리 돼지가 아프다. 내놔라!

갑이  저따위 돼지새낀 죽어도 싸.

연이  (연이는 갑이의 물을 허겁지겁 빼앗아 연이모에게 먹인다.) 어때요? 맛있죠? 이젠 힘나죠? 어머니 걱정 마세요. 다음 역에 도착하면 실컷 마시게 해드릴게요. (눈물을 삼키며) 우리 좋은 땅에 가서 다시 농사도 짓고…… 아버지도…… 만나야죠.

고씨  흥! 선생도 별 수 없구먼. 도둑질을 하시네 그려.

갑이  (멱살을 움켜주며) 네 놈이……

 

이반이가 울면서 갑이에게 달려들어 매달린다.

 

이반  도적놈, 도적놈. 모두 다 도적놈이다.

김씨할배  굶어 죽더라도 조선 땅이 나았던 게야. 다 소용없어……다……

 

이때 로스께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등장한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비켜선다. 로스께가 연이에게 다가간다. 로스께의 빛나는 눈. 갑이는 연이를 가로막아 안는다. 로스께는 이내 이반에게로 간다.

 

로스께2  빵을 줄까?

이반  응, 빵 좋다. 배고프다. 돼지도 배고프다.

로스께2  오, 돼지? (돼지에게 다가가) 사람도 죽어가는데 돼지가 아직 살아있다니 이거 놀라운걸.

이반  (돼지를 부둥켜안으며) 나만 먹을게. 빵 주라. 돼지는 안 준다.

로스께2  오호, 눈물겹구먼. (돼지를 쓰다듬는다.) 이거 돼지라고 할 수가 없잖아? 이렇게 삐쩍 말라서야. 뭘 좀 먹여야지. (빵을 흔들며) 니 엄마라도 되나?

이반  응, 돼지는 내 엄마다.

로스께2  그래, 그럼 젖을 먹어야겠구나. (빵을 흔들며) 어디 젖을 먹어 보렴?

 

이반 망설이자 갑이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일어선다.

 

갑이  우리를 능멸하는 이유가 뭐요? 한인은 소비에트를 위해 어느 민족보다 헌신해왔소. 아무 죄 없는 우리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동안 동지는 뻬치카에 불을 피우며 양털 이불을 덮고 두 발 뻗고 잠을 자오. 이것이 전인민이 평등한 천국이라는 소비에트란 말이오?

로스께2  (갑이에게 총을 겨누며) 왜 너도 젖을 먹고 싶은가? (이반에게) 자, 배가 고프지? 어서 엄마 젖을 먹어라! 빵을 줄 테니.

 

이반이 돼지의 젖을 빨기 시작한다.

 

로스께2  (껄껄껄 웃으며) 옳지 옳지, 그래야지. (허공에 총을 쏘며) 느이들은 돼지 새끼들이다. 알겠나? 한인들은 돼지새끼들이란 말이다!

 

로스께는 빵을 떨어뜨린다. 떨어진 빵을 황급히 줍는 고씨. 달려드는 이반. 고씨부인까지 가세한다. 그 와중에 빵은 창문 밖으로 떨어져버리고 아연해진 세 사람. 이때 김씨할배의 두 눈이 번쩍 빛나며 떨어진 빵조각을 주워 먹는다. 고씨가 김씨할배를 덮친다. 쓰러진 김씨할배에게서 빵을 빼앗아 먹는다.

 

김씨할배  이런 후레자식아, 너는 에비에미도 모르냐.

고씨  여기서는 아버지도 없고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어. 모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죽는 거야.

김씨할배  (신음하며) 내게도 나눠다오…… 나눠다오……

로스께  저 꼴 좀 봐, 저 꼴을. 대민족주의자 스탈린 동지가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낄낄낄.

 

로스께 낄낄거리며 사라진다.

 

갑이  (망연하게)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연이  뭐라고요? 어머니, 무슨 말씀인지 다시 한 번 하세요. 여보, 어머니가 정신이 드시나봐요. 크게 말씀해보세요.

연이모  내 숨이 넘어가면 눈을 쓸어 감겨다오.

연이  왜 돌아가신단 말씀을 하세요. 이제 다 왔어요. 아버지가…… 기다리실거예요.

연이모  늬 아버진 하늘에 계실 테니 게서 만나야지.

연이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줌마, 어머니가 조선말을 하시나봐요.

고씨부인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손자녀석 못 보고 죽는 것이 한이시란다.

연이  어머니, 왜 이렇게 날 괴롭히세요.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날 못살게 그러세요.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 (울음을 터트린다.)

갑이  (벽을 치며) 기차를 세워! 사람들이 죽어간다구! 야 새끼들아, 기차를 세워!

고씨  (황급히 갑이의 얼굴을 치며) 다 죽일 작정이야? 입 닥쳐! 우린 입이 없어! 눈도 없어! 귀도 없어!

연이   어머니…… 이렇게 가시면 안 돼요. 난 어찌살라구…… 불쌍한 우리 어머니……(죽은 어미를 부둥켜안은 채 흐느낀다.)

갑이  왜 우리를 당장 총살하지 않는 거지?

고씨부인  (울면서) 제발, 아무 말 말어. 아무 말 말어……

김씨할배  (흐느끼며) 다 끝난 게야…… 다 끝났어……

이반  (울면서) 연이야, 울지 마. 연이야, 엄마는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거다 다시,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거다. 울지 마라 연이야.

 

암전.

 

6장 강제이주 열차 속의 긴 고통

 

기차역 표지판이 지나친다. 베야젤스키역. 비로비드샨역, 라히치힌스크역, 벨로고스크역……

 

로스께1  오늘은 몇 명이나 죽을까?

로스께2  날이 추워져서 한 열 명쯤 되지 않을까요.

로스께1  기차가 좀 가벼워지겠군. 클클클.

로스께2  5호차에 돼지가 아직도 살아있답니다.

로스께1  ……더럽고 미개한 종족 새끼들.

로스께2  자기들이 눈 똥 위에서 먹고 자니 돼지나 다를 바 없죠, 킥킥.

로스께1  그 바보 녀석이 아직도 돼지를 제 어미처럼 아끼나?

로스께2  얼마 전엔 돼지 젖을 빨더라니까요. 킥킥.

로스께1  오, 역겹군. 그런 놈들이 우리 소비에트 인민이라니.

로스께2  기다려보십시오. 그 놈들이 제 어미를 잡아먹겠다고 날뛰는 꼴을 곧 보게 되실 겁니다.

로스께1  음…… 자멸이로군, 움하하하.

차창 밖으로 눈발이 휘날린다. 이젠 열차 안에도 뻬치카가 설치되었다. 사람들은 뻬치카 앞에 둘러 앉아 모두 말이 없다. 이반 혼자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이반  저기 봐, 저기 봐.

고씨  (내다보다가 심드렁하게) 뭐 신기다하고 떠드냐. 제비집 첨 보냐.

고씨부인  어쩌다가 저 위험한 기차 난간에 둥지를 틀었누.

이반  제비가 둥지를 틀면 집안에 복이 온다.

갑이  (일어나서 창밖을 보며) 이 추운 곳으로 제비가 어떻게 날아와……봐라, 둥지가 비었잖아.

이반  제비도 새 집으로 갔을까?

고씨  제비도 강제이주 당했나 보네.

이반  봄이 오면 제비는 집으로 돌아온다. 봄이 오면 우리도 집으로 돌아간다.

고씨  바보새꺄, 제비는 날개라도 있지…… 우린 다시는 고향에 못 가.

갑이  (창밖을 유심히 내다보며) 이쪽으로 가면 영락없이 사막지대야.

고씨  카자흐스탄으로 데려간다는 말이 맞았네.

고씨부인  아이고, 그 황무지에서 어떻게 살라고.

김씨할배  (병색이 완연하다) 우릴 모두 죽일 작정인 게지…… 한인들을 깨끗이 청소해버리려는 게야.

고씨부인  ……우리가 이렇게 된 걸 누가 알기나 할까.

이반  춥다 춥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고씨부인  이놈아, 입 좀 다물지 못해.

고씨  불이 식었어. 뭘 좀 넣어봐.

고씨부인  뭐가 있어야 말이지, 입던 옷을 땔 수도 없고.

고씨  로스께놈들 뻬치카만 달랑 달아주면 끝이여. 땔감이라도 주어야지.

 

갑이가 갑자기 일어나 보따리를 뒤져 책을 꺼내 찢으며 뻬치카에 넣는다.

 

연이  무슨 짓이에요?

갑이  불이 꺼졌잖아.

연이  이건 우리 집안의 족보책이에요.

갑이  다 필요 없어. 이따위 족보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연이  당신이 그랬잖아요. 우리 민족은 언어와 함께 불멸한다. 이건 우리 핏줄이에요.

갑이 조선은 우리를 버렸어. 로스께놈들도 우릴 버렸어. 우린 잊혀진 거야. 우리에게 조국은 없어, 핏줄도 없어.

연이  그럼 우리는 뭐죠? 귀신인가요? 조선 사람도 아니고 로스께 사람도 아니면 우리는 뭐죠? 왜 살아야 하죠?

갑이  우리 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소련과 함께 일본군들에 맞서 항일독립투쟁을 하셨어….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시신도 찾지 못했다구.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수많은 한인들이 목숨을 바친 대가가 이거란 말인가. 조선이 우릴 위해 뭘 해줬냐구!

연이  조국이 먹여주고 입혀주어야만 조국인가요? 어머니가 우릴 두고 돌아가셨더래도 우리 어머니인 것처럼, 조국이 우릴 잊었더래도 우리 조국은 조선이에요.

갑이  이렇게 죽어가는데…… 우린 속았어.

이반  (돼지를 안고 흥얼거리며) 이 돼지는 내 돼지. 엄마돼지 씨돼지 내 고향 돼지. 꽃 따 먹고 별 따 먹고 이반이 반, 돼지 반 밥도 같이 먹고 , 우리는 한 가족.

 

고씨, 음흉하게 무어라 고씨부인에게 속삭인다. 고씨부인, 짐짓 태연한 척 끄덕인다.

 

고씨  그래…… 이반아, 배고프지?

이반  응, 배가 쑥 들어갔다. 돼지배도 쑥 들어갔다.

고씨부인  그래 이리 온.

 

고씨부인이 말린 채소를 흔들며 꾀인다. 이반이는 냉큼 달려가 고씨부인이 주는 걸 받는 순간, 고씨가 달려들어 이반이를 묶는다.

 

갑이  뭘 하는 거지?

연이  무슨 짓이에요?

고씨  여태 우리가 고기를 옆에 두고 배를 곯았어. 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고씨부인  저 놈 하나만 잡으면 우리 다 배 두드리며 지낼 수 있어요.

갑이  그건……

연이  안 될 말이에요. 아무리 허기져도 이반이 돼지를 잡아먹을 수 없어요.

이반  (비명을 지르며 묶인 몸을 격렬하게 뒤튼다) 안 된다! 내 돼지, 내 돼지를 잡아먹으면 다 죽인다. 돼지야! 돼지야!

김씨할배  (거의 다 기력이 쇠한 듯한 모습) 짐승만도 못한 놈들. 그래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이 꼴을 보지 말고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고씨  이 선생, 잘 생각하시오. 연이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이젠 할배도 얼마 남지 않았다구. 그럼 또 누구 차롈까? 여자들이겠지. 아니 당신이나 나일지도 모르지.

고씨부인  사람이 살아야 하지 않겠어. 저거야 사람 먹자고 기르는 거 아니우. 미련스럽게 데리고 있어봐야 어차피 얼마 못 가 뒈질 텐데.

갑이  하지만 그건…..내키지 않소…..그것만은……

연이  (돼지를 감싸며) 안 돼요! 이반이한텐 돼지가 전부에요. 제 엄마라고 믿고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우리한테 지금 뭐가 남아있죠? 조국을 떠나고 고향을 잃고 (울먹이며) 가족이 죽었어요. 이웃끼리 서로 훔치고 뜯고 싸우고 연해주 한인촌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로스께놈들이 왜 돼지를 태웠겠어요. 우리가 짐승이 되는 걸 보고 싶었던 거예요. 이반이의 돼지마저 잡아먹는다면 나중에 살아서 어떻게 서로의 얼굴을 보겠어요. 그래선 안 돼요. 돼지만은 죽여선 안 돼요.

고씨  저 뻬치카 위에다 돼지고기 살점을 지글지글 구워 (입맛 다신다) 먹는다고 생각해보라구. 우리가 왜 미련하게 저 놈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 그 사이에 누군가 굶어죽으면? 아니 우리 다 굶어죽으면? 그땐 무슨 소용이여.

고씨부인  (침을 삼키며) 아이구 배때지가 요동을 치네. 얼릉 잡아요. 뭔 말이 그렇게 길어.

갑이  (망설인다.) 여보……

연이  당신까지…… 제발 그러지 말아요…… 할배, 뭐라 얘기 좀 해요.

김씨할배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이반  (악을 쓰며) 다 죽인다. 내 돼지 아프기만 해, 다 죽인다!

 

고씨가 칼을 들고 돼지에게 다가가,

 

이반  너! 너다! 니가 연이아배를 고발했다. 나 다 안다. 로스께경찰한테 하는 말 다 들었다!

연이  뭐? 무슨 말이니? 누가, 누가 우리 아버질.

고씨  아니, 이 등신 팔푼이 새끼가 어디서 주둥아릴 놀려!

연이  세상에…… 당신이…… 아버지를 밀고하다니…… 세상에……

고씨부인  어디서 우리 양반을 모함하는 거여!

연이  (갑이에게) 여보, 들었어요? 왜 가만 계세요. 우리 아버질 밀고했다잖아요. (사이) 당신 설마, 알고 있었어요?

갑이  알고 있었소.

고씨  권선생이 소련은 우리 조국이 아니라고 반소비에트 선동질하고 다니다가 걸려들어간 걸 누구한테 덮어씌워!

연이  (갑이에게) 왜 말하지 않았어요, 왜요!

갑이  ……

연이  (고씨에게)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개돼지만도 못한 짓을. 네 놈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반  너다! 네가 로스께한테 일러바쳤다. 일본놈 간첩이라고 했다. 내가 다 들었다.

고씨  뭐야, 이놈이 닥치지 못해!

 

칼을 빼어들어 이반에게 달려들고 연이와 갑이가 말리려 함께 뛰어들었다가, 누군가의 칼을 맞고 쓰러지는 고씨, 바닥에 떨어진 칼.

 

고씨부인  아이고, 아이고 여보 여보 정신차려요. 이 피…… 피…… 아이고 여보……! 살인마들! 내 남편을 죽였어! 누구지? 너야? 너? 네 놈이야? 돼지 때문에 산 사람을 잡아죽여! 로스께한테 다 밀고할 테다. 이 살인마들. 뒈져! 다 같이 뒈지자구!

 

한쪽에 몰려 앉은 사람들 괴로이 얼굴을 묻거나 흐느끼고 있다. 이반이는 돼지를 끌어안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연이  우리 아버지도……

고씨부인  뭐? 이년아 니 애비 일본놈 첩자질하다 끌려간 게 왜 우리 서방 잘못이냐.

갑이  다들 그만둬요. 누가 죄가 있어요? 장인어른이요? 성택이가요? 다 로스께놈들이 시킨 짓 아닙니까!

고씨부인  그래, 너 이제 알겠다. 내 아들 금쪽같은 내 아들 성택이를 고발한 것도 너지? 그래 그러고 보니 알면서도 말 안 한 이유가 그거였어. 그렇지 맞지, 네 이놈.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연이  여보, 아니죠? 그렇죠.

갑이  ……

고씨부인  (달려들어) 이놈아, 내 아들 내놔라 이놈아. 내 서방 내놔라, 아이고 무슨 원수가 졌길래!

갑이  성택이는 이미 학생위원회에 감시대상이었어요…… 난 다만…… 명단을 넘겨줬을 뿐……

김씨할배  이 죄값을 어찌…… 인과응보지…… 다 죄인이여…… 죄인.

이반  돼지야, 괜찮다 괜찮다. 내가 지켜준다.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한다.

고씨부인  네 이놈. 배은망덕한 놈. 내 아들 잡으라고 우리 마을이 널 키웠더냐. 저놈을 죽여, 저놈의 돼지새끼도 죽여! 여보시오, 저것들을 죽여야 해. 내 말 좀 들어. 아이구 여보. 아이고 원통해라.

 

이때 등장하는 로스께2, 술병을 손에 든 채,

 

로스께2  왜 이리 소란이지?

 

일순 모두 긴장한다. 고씨부인이 나서서 로스께에게 매달린다.

 

고씨부인  여보시오, 나리. 이것들이 우리 양반을 죽였소. 돼지 살리겠다고 작당을 하고 우리 양반을 찔러 죽이고 기차 밖으로 던졌소.

로스께2  (돼지를 보며) 오호! 아직도 저 놈이 멀쩡하게 살아있다니. 잡초 같은 조선놈들.

 

로스께2가 연이에게 다가가 턱을 들어올린다. 갑이가 손을 쳐내며,

 

갑이  이 여자는 내 아내요.

로스께  조선년들은 일본놈들을 좋아한다던데? 너도 나도 정신대가 되겠다고 줄을 섰다더군. 어때? 대소비에트 경찰이 치마를 벗겨줄까?

갑이  무슨 짓이요? 우리는 선량한 인민이요. 아녀자를 희롱한다면 당에 고발하겠소.

로스께  이 돼지 같은 종자들. 한인들은 우리 주인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연이의 팔을 잡아 끈다.)

연이  이거 놔요.

갑이  그 손 치우지 못해!

로스께  가만 있어. 더러운 조선몸을 이 몸이 깨끗한 일등시민으로 만들어줄테니.

이반  연이를 괴롭히지 마. 로스께놈아. 연이는 내 각시다.

로스께  엥? 니 각시? 이 년이 샛서방을 두었구만…… 그래 좋다. 이렇게 하지. 저 돼지멱을 따면 내가 순순히 물러가겠다. 어때? 니 엄마를 선택할 것인가, 각시를 선택할 것인가? 흥미롭군.

 

갑이와 연이가 이반을 바라보면,

 

이반  ……안 된다. 돼지만은 안 된다. 돼지는 내 엄마다. 절대 안 된다.

연이  이반아, 누나를 살려줘.

갑이  (칼을 들고) 내 손으로 죽이겠소.

로스께  아니 그러면 시시하지. 저 반편이 손으로 직접 멱을 따야지.

이반  안 된다…… 못 한다. 돼지는…… 못 한다 못 한다 말야!

연이  이반아…… 제발……

갑이  야, 이놈아 저깟 돼지가 뭐라고 연이보다 더 중하더냐!

이반  (멍하고 슬프게) 연이야, 왜 다들 돼지를 못살게 구니? 돼지가 무슨 잘못을 했니. 이상하다. 이상하다. 돼지는 착한데. 사람들이 더 나쁜데. 왜 돼지가 죽어야 해, 왜!

로스께  오, 유감이군. 각시 대신 엄마를 선택하다니…… 할 수 없지 기회를 충분히 주었지? (연이의 옷고름과 한복치마를 잡아 뜯는다. 속치마 채로 비명을 지르는 연이)

이반  왜! 왜!

 

이반이 돼지를 찌른다.

 

이반 엄마……

 

순간 멈칫하며 정지하는 로스께,

이내 껄껄 웃으며 다시 연이의 옷을 잡아 뜯는 순간,

이반이가 달려들자 로스께가 이반을 향해 총을 쏜다.

 

암전.

 

7장 이반의 어린 시절 회상

 

이반이 어미의 침대 맡에서 놀고 있다.

 

어미  이반아, 이리 와서 머리를 좀 빗겨다우.

 

이반이 어미를 일으켜 머리를 빗겨 내린다.

 

이반  엄마, 많이 아퍼?

어미  이반아, 서랍을 열어보아라.

 

이반 서랍에서 보따리를 꺼낸다.

 

어미  거기에 치마저고리가 있지? 버선 한 켤레도 있지? 내가 죽으면 그것을 입혀 다오.

이반  엄마 죽는 게 뭔데?

어미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거란다. 다시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거란다.

이반  뭘로?

어미  ……

이반  내가 못 알아보면 어떡해?

어미  돼지 있잖니. 엄마의 몸은 땅 속에서 오래 잠을 자도 엄마의 마음은 돼지 속에 있을 게야. 하고픈 말이 있으면 돼지한테 하고 심심하면 같이 놀거라. 대신 때가 되면 꼬박꼬박 밥을 줘야 한다. 시집 보내줘서 새끼도 낳고…… 그래야 엄마는 죽어도 엄마의 마음은 언제나 돼지 속에 살아있지. 이반아, 명심해라. 돼지는 아무한테도 뺏기면 안 된다. 엄마의 마음이니까.

이반  응, 엄마.

어미  내가 남에게 악한 일을 한 일이 없으니 마을 사람들이 널 보살펴줄 거다. 명심해라. 엄마의 마음은 돼지 속에 있을 테니 돼지를 잘 보살펴야 한다.

이반  응, 알았어. 엄마가 다시 태어나니까 오늘은 엄마 생일이다. 엄마 생일.

 

돼지 곁에서 꽃을 꺾으며 노래하는 이반.

 

엄마 생일날에 꽃을 드리자.

무슨 꽃을 드리 기뻐하실까.

장미화를 드릴까 목단화를 드릴까.

꽃 중에도 오래 피는 백일홍을 드리자.

 

엄마 생일날에 노래 부르자.

무슨 노래 부르면 기뻐하실까.

엄마 엄마 나의 엄마 나의 노래 들으시라.

엄마 엄마 나의 엄마 나의 절을 받으시라.

 

무대 한쪽에 죽은 자의 영령 같은 모습의 이반의 어미가 서 있다.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어미 우리는 여러 번 죽었지. 그리고 다시 태어났단다. 조선에서 연해주에서 이곳 카자흐까지 죽을 때마다 다시 태어났단다. 죽는 게 끝이라면 누가 살려고 하겠니. 너도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거란다. 명심해라. 우리 조국은 가슴 속에 있는 거란다. 엄마처럼 말이다. 책에 씌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 속에 살아서 거듭 태어나는 게 바로 역사란다. 그러니 울지 마라 얘야. 울지 마라……

 

                                                <막>

 

<필자소개>

 

이윤설

  

시인, 희곡작가 

 

명지대학교 철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5년 국립극장 신작희곡페스티벌 당선
2005년 거창국제연극제 세계초연희곡공모 대상
2006년 조선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글틴 시게시판 3대 운영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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