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슴

작은 사슴

박기순

 

 

두 자루의 검은 상대를 베어낼 듯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떨어진 꽃이 강물 위로 흘러 세상의 기쁨을 안다. [落花流水認天台]’ 당나라 시인 고변의 시구에 나온 것처럼, 둘의 검무는 강물을 따라 흐르는 꽃잎과 같았다.
“예 대협의 제자 중 첫째가 제일이라더니 이제 보니 넷째가 예 대협을 잇겠군.”

 

1

이슬 구르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 고요한 새벽, 검술 수련을 끝낸 모두연은 평소처럼 뒷산에 올랐다.
다른 날보다 그의 발걸음은 빨랐다. 혼자 끙끙거리며 만든 가마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꺼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산 너머 마을에 있는 가마를 곁눈질로 보고 만든 것이라 제대로 구워져 나왔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모두연이 도예를 취미로 택한 것은 검법 수련에 중요한 부동심을 키우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사문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사형제들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아로 자란 때문인지 혼자서 하는 이 일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기도 했다.
산중턱에 위치한 가마터에 도착한 모두연은 가마 벽에 손을 대어도 보고, 가마의 균열을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다행이 온도는 적당했고 균열 또한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모두연은 눈을 감고 천천히 가마 문을 열었다. 뜨거운 열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나무받침 위에 있는 온전한 형태의 자기 두 점이 보였다. 모두연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초벌구이가 성공한 것이다.
두툼한 장갑을 끼고 어린 아이 안듯 조심스레 자기를 꺼내 살펴보았다. 문양도 제법 잘 나온 것이, 남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 선물이 되기에 충분할 듯했다.
닷새 후면 사부님의 환갑이었다. 원래는 작년 생신을 위해 준비한 일이었는데, 한두 달이면 완성될 줄 알았던 가마가 일 년을 잡아먹는 바람에 환갑 선물이 되고 말았다. 이제 유약을 발라 말리고 한 번 더 구우면 첫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뒤로부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오래 있었던 것일까? 사형 중 한 명이 아침밥을 먹으라며 온 모양이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작업에 몰두하던 모두연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가오는 발자국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과묵한 첫째 사형의 무거운 발자국소리도, 생각 깊은 둘째 사형의 느긋한 발자국소리도, 음침한 셋째 사형의 은밀한 발자국 소리도 아니었다. 그들을 제외하면 이 시간에 이곳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인이 경쾌한 걸음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뿌연 안개를 헤치고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윤기 있는 머리는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어깨 위를 흐르고 있었고 몸에 걸친 백의보다 더 하얀 피부는 갓난아이의 그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갸름한 턱선과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아침 햇살이 빗어낸 조각처럼 보였다. 갑자기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처음 검을 쥐었을 때의 짜릿함보다, 아름다운 도자기를 바라볼 때의 감동보다 더한 무언가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숨이 막혔다. 안개 속에 뿌려지는 몇 줄기 햇살 사이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모든 사고 기능과 신체 기능이 마비된 듯했다.
“뭐하고 있어요?”
그녀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서야 모두연은 정신을 차렸다. 모두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그의 낯짝은 감정을 숨기는 데 매우 익숙했다.
“보다시피…….”
모두연은 붓으로 자기에 유약을 바르는 척하다 아직 붓에 아무 것도 발라져 있지 않음을 알고 얼른 유약을 묻혔다. 그녀가 옆에 쪼그려 앉았다.
“뭘 만드는 거죠?”
“도자기.”
“어떤 데 쓸 것이기에 그렇게 멋진 문양이 들어가는 거예요?”
“중요한 사람에게 줄 거야.”
“아! 아쉽네요. 나도 하나 가지고 싶은데. 이미 임자가 있는 물건이었군요.”
모두연은 음, 하고 신음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제 것도 하나 만들어 주실래요?”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 좋은 첫째 사형은 흔쾌히 응낙했을 것이고, 속 깊은 둘째 사형은 알 수 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을 것이다. 신경질적인 셋째 사형은 퉁퉁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연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유약 바르는 것을 바라보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마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옆에 쪼그려 앉은 그녀의 손에는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진흙덩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저는 이걸로 할게요.”
어제 가마에 불을 올리며 심심풀이로 만들었던 사슴 인형이었다. 문양 같은 것도 없고 모양만 대충 만들어 놓은 진흙덩어리. 그나마 마음에 들지 않아 버렸던 것이었다.
“그건 실패작이야.”
“그래도 이게 맘에 들어요.”
모두연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잠시 뾰로통해 있던 그녀가 손가락을 조몰락거리더니 다시 손을 내밀었다.
“어때요?”
손이 아름답고 섬세하다고 해서 그 손이 아름답고 섬세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잠깐 동안 사슴을 너구리로 변신시켰으니 말이다. 모두연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봐.”
손이 살짝 스치며 둘의 얼굴이 붉어졌다. 모두연은 진흙을 뭉쳐 다시 모양을 냈다. 곧 제대로 된 모양의 사슴 한 마리가 만들어졌다.
“어머, 정말 예뻐요. 그런데…….”
그녀가 약간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한 마리는 너무 외로워 보여요.”
모두연은 진흙 한 덩이를 떼어내 한 마리를 더 만들었다. 두 마리 사슴을 받아든 그녀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큰 것이 수컷이 되고, 작은 것이 암컷이 되면 한 쌍의 사슴 부부가 되겠네요.”
생각 없이 만든 것이었는데 두 번째 것이 처음 것보다 조금 작은 모양이었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야. 오늘하고 내일은 잘 말려야 해. 그 다음에 이 자기들과 함께 구우면……. 음, 닷새 후면 완성될 거야.”
“그래요? 그날은 저희 아버님 생일인데…….”
모두연의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며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전 예홍지라고 해요.”
하마터면 모두연은 손에 들고 있던 자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예홍지라면 사부님의 딸이었다. 몇 년 전 무공을 익히기 위해 멀리 떠났던 그녀는, 내일 정오쯤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어요. 막내 사형!”
예홍지가 모두연을 그렇게 부르고는 킥, 하고 웃었다.
“다른 사형들과는 인사를 나누었는데 한 사람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큰 사형한테 물었더니 여기에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음…….”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제 이름은 알려드렸는데……?”
“모두연.”
“좋은 이름이네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갑자기 예홍지가 또 다시 킥킥거리고 웃었다.
“모두연이라는 이름이요.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실없는 그녀의 말에 모두연도 피식 웃었다.
“어머, 웃었네요? 큰 사형 말로는 표정이라곤 없는 놈, 아니 분이라고 하던데?”
말을 마친 후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기분까지 좋아지는 맑은 웃음이었다. 갑자기 예홍지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곤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서섰다.
“큰일났어요.”
“뭐가?”
모두연도 얼결에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이제 어쩌냐며 안절부절 못하던 그녀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밥이 다 식었겠어요. 금방 돌아올 테니 제 것이랑 막내 사형 것도 준비해 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리곤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매는 툭 하면 웃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왜 이렇게 정신없이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이 좋았고 어색하기는 해도 자신의 웃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내려가요. 더 있다가는 솥바닥을 긁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배고픈 건 못 참아요.”
그녀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몇 걸음 그녀에게 끌려가던 모두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오늘 유약을 다 발라야 하는데…….”
“밥 먹고 해도 되잖아요. 저는 집에 돌아온 첫 번째 식사를 모든 사형들과 함께 하고 싶다구요.”
예홍지는 더욱 세게 잡아끌었고 모두연은 한 걸음 한 걸음 딸려갈 수밖에 없었다. 산을 내려가는 내내 예홍지는 모두연을 재촉했다. 폴짝폴짝 앞서 뛰어가는 모습이 한 마리 작은 사슴 같았다. 산을 다 내려왔을 때 모두연은 그 사슴이 가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화진산장의 주인 예천호는 강호에서 손꼽히는 고수였다. 강주 일대에서는 물론 중원에서도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무림인은 거의 없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인격이었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이들을 꺾어야 하고 그러다보면 음으로 양으로 많은 원한을 뿌릴 수밖에 없는데, 예천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환갑연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수는 그의 지난 인생이 어땠는지를 여실히 알려주었다. 산장은 열흘 전부터 천하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방이 부족해 정원에 만든 임시 거처에 손님을 들이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동나고 말았다.
환갑 당일, 모두연과 그의 사형들은 이른 아침부터 꾸역꾸역 밀려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첫째 사형 진립은 정문에서 큰 인사로 손님들을 맞이했는데 얼마나 허리를 굽혔다 폈는지 담이 들었다고 했다. 하객들이 가져온 선물을 접수하는 둘째 사형 하위강은 선물더미에 묻혀 그 모습을 찾기 힘들었고, 하인들을 부려 손님 접대를 하는 셋째 사형 막여는 목이 쉰지 오래였다.
모두연은 마을에서 데려온 숙수 네 명과 하인 십여 명을 데리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로 간단한 소면을 한 그릇씩 내는 것만으로 진을 쏙 뺐는데, 점심에 쓸 고기와 야채를 준비하는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예홍지가 주방을 오락가락하며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음, 이건 좀 짠 거 같아요. 음, 이건 좀 달고……. 하지만 맛있으니 그대로 내도 될 것 같네요. 음, 이 채소는 너무 시들었어요. 다시 만들어야겠어요.”
그녀는 지난 닷새 동안 지남철처럼 모두연 옆에 붙어 다녔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모두연을 데리고 다녔다. 환갑연에 쓰일 물건을 사야한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물건을 사는데 필요한 시간은 한 시진이면 족했다. 나머지 시간 동안 그녀는 기분 내키는 대로 모두연을 끌고 다녔다. 주위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기도 했고, 저잣거리에서 노름을 하기도 했고, 이것저것 군것질을 하기도 했으며 몇 편의 창극을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행동이 부담스러웠고 그녀와 함께하며 생겨난 낯선 감정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부담감은 사라졌다. 대신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이제는 그녀가 조금만 안 보여도 불안해지곤 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그녀는 이렇게 주방에서 한가롭게 음식 맛이나 볼 신분이 아니었다. 결국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사매는 사부님 옆에서 손님들께 인사를 해야지.”
“쳇, 그 늙다리들은 정말 재미없어요. 그냥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만 하면 될걸, 세월이 어쩌고저쩌고, 정세가 어쩌고저쩌고……. 뭘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하루 종일 인사만 하더라구요.”
그때였다. 커다란 북 소리가 울렸다. 하객들에 대한 답례 행사가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모두연은 서둘러 손을 씻고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은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사형들은 벌써 한쪽 구석에서 장삼을 벗고 남색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모두연도 옷을 갈아입었다. 예천호가 대청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하객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보잘 것 없는 예 모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시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가진 밑천을 모두 털어 접대해 드리는 것이 주인된 예의겠지만, 험한 강호생활만 하다 보니 모아둔 재산도 없고, 어떤 식으로 접대를 해드려야 예의에 맞는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가진 거라곤 네 명의 변변찮은 제자들뿐인데, 여러분들 눈에 들지나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천호가 준비한 접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네 제자의 장기를 선보이는 것이었다. 북이 둥, 하고 다시 한 번 크게 울렸다. 그 소리에 맞춰 첫째 진립이 대청 가운데로 나섰다.
“제 첫 제자 진립은 힘쓰는 것밖에 장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서른에 터득한 철검오식을 녀석에게 전수했지요.”
진립이 대중에게 인사를 하고 대청에 마련된 아름드리 통나무 다섯 개를 상대로 철검오식을 펼쳐보였다. 그가 시범을 마쳤을 때, 통나무들은 제각각의 모양으로 변해버렸다. 두 쪽으로 깔끔하게 쪼개진 것, 힘으로 부러뜨린 것처럼 거칠게 잘려나간 것, 여러 조각으로 나눠진 것, 망치로 내리친 것처럼 으깨진 것 등등, 어느 하나 쉽지 않은 묘기였다.
“두 번째 제자와 세 번째 제자는 잘 피하고 잘 던지니, 잘 피하는 놈에게는 오행보라는 보법과 산화조라는 금나수법을 가르쳤고, 잘 던지는 놈에게는 유엽비도술을 가르쳤습니다.”
둘째 하위강과 셋째 막여가 동시에 대청에 올라 비도를 던지고 받는 묘기를 선보였다. 막여가 비도를 던지고 하위강이 받아내는 쪽이었는데, 던지는 쪽도 받는 쪽도 쉴 새 없이 몸을 날리니 사람들은 그저 희끗거리는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막여가 한꺼번에 아홉 개의 비도를 날리는 신기를 선보였다. 하위강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비도를 순식간에 낚아챘는데, 손가락 사이가 여덟 개뿐이라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마지막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비도가 얼굴에 꽂힌 하위강의 몸이 한 바퀴 돌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데, 하위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홉 번째 비도는 그의 이빨 사이에 있었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둘의 묘기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막내 녀석은 힘도 없고 빠르지도 않아 딱히 가르칠 게 없더이다. 그래서 이 늙은이랑 놀이나 해보자고 검무를 한 수 가르쳤지요.”
예천호가 검을 뽑아들고 대청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모두연도 검을 들고 대청으로 나와 예천호와 세 걸음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이 검무는 이 늙은이가 말년에 심심풀이로 만든 것으로 흐느적거리는 게 전부일 뿐이라 낙화유수라는 이름을 붙였다오. 혹시 보신 뒤에 흉이나 보지 말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람들은 예천호가 창안한 이 검무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예천호가 검으로 모두연을 겨누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모두연도 고개를 끄떡이곤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수많은 시선에 바짝 긴장이 됐다. 천천히 검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긴 심호흡을 했다. 지난 이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검무를 수련했다. 그것만이 고아로 길에 버려져 거지처럼 자라온 자신을 거두어주고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려준 예천호에게 보답하는 길이었다.
예천호의 뒤쪽으로 고개를 살포시 숙이고 수줍게 미소를 짓는 예홍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안정되던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언제나 밝은 얼굴에 사소한 일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였지만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미소의 의미를 생각하는데 예천호가 말했다.
“시작하자.”
예천호가 가볍게 검을 허공에 빙글빙글 돌렸다. 모두연도 정신을 가다듬고 검을 돌리기 시작했다. 둘의 검이 쌀쌀한 가을 공기를 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때론 바닥의 흙먼지를 끌고, 때론 낙엽을 끌고, 때론 급하게, 때론 여유 있게……. 사람도 돌고 검도 돌았다. 검이 돌며 작은 원을 그렸고, 모두연과 예천호가 몸을 엇갈리며 중간 원을 그렸고, 둘의 걸음은 대청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수십 쌍의 눈이 그 세 개의 원을 따라 움직였다.
두 자루의 검은 상대를 베어낼 듯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떨어진 꽃이 강물 위로 흘러 세상의 기쁨을 안다. [落花流水認天台]’ 당나라 시인 고변의 시구에 나온 것처럼, 둘의 검무는 강물을 따라 흐르는 꽃잎과 같았다.
“예 대협의 제자 중 첫째가 제일이라더니 이제 보니 넷째가 예 대협을 잇겠군.”
누군가 말했다. 그 말에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허허, 당분간 강호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하더니, 알고 보니 저런 제자를 키우느라 조용했던 것이었구려.”
사람들은 그 말에도 고개를 끄떡였다. 진립과 하위강, 막여가 독특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예천호의 이름을 물려받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검무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검무가 무르익자 처음에는 긴장했던 모두연의 검도 점차 예천호의 움직임에 맞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검무에 몰입되면서 주위의 모든 것이 느껴졌다. 검 끝에 실리는 바람의 무게, 머리칼을 스치는 낙엽, 언제부터인가 울리기 시작한 북소리와 사람들의 탄성 소리, 그리고 예홍지의 눈빛까지. 이 순간만큼 모두연은 세상 누구보다 자신이 행복할 걸라고 생각했다.
검무의 마지막 변화를 펼칠 때였다. 발목에 전해진 따끔한 통증에 모두연의 몸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검무의 흐름이 끊어지며 원래는 예천호의 겨드랑이 사이로 흘러갔어야 할 검이 그의 허리를 살짝 베고 말았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고, 깜짝 놀란 모두연도 검무를 멈추고 예천호를 바라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허리의 피를 닦아내며 예천호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껄껄, 그만 해도 훌륭하다. 내가 십 년 고심한 걸 너는 불과 이 년 만에 깨우쳤구나.”
이어 예천호는 사람들에게 포권을 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하객들은 둘의 검무에 혼이 나간 상태라 모두연의 마지막 실수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예천호와 모두연을 칭찬했다.
예천호와 모두연이 사람들에게 답례 인사를 하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예천호가 비틀거리더니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그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손과 다리는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사부님!”
예홍지와 모두연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거, 검에 독이…….”
예천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예홍지가 단상에서 뛰어내려오며 모두연에게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넋이 반쯤 나간 모두연이 멍하니 검을 바라보았다.
“나, 나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예천호가 몇 차례 각혈을 하더니 정신을 잃었다.
“사부님!”
모두연이 예천호를 부축하려 했지만 예홍지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밀쳐냈다.
“저리 가요!”
하객으로 온 의원 하나가 예천호의 맥을 짚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절명했소. 이런 극독은 남만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인데……. 실제 보기는 처음이구려.”
모두연의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예홍지가 아버지를 외치며 울부짖는 소리만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2

정신없는 하루가 지났다. 예천호가 죽은 날 저녁, 장례를 준비하며 사람들은 모두연의 처리에 대해 의논했다. 당연히 참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진립이 반대했다.
“넷째는 그런 일을 할 위인도 되지 못하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떤 바보가 내가 범인이오, 하고 일을 벌이겠습니까? 이번 일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사부님과 넷째가 검무를 연습하는 걸 자주 보곤 했는데, 마지막 변화에서 실수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아, 뭐가 되었든 예 대협이 녀석의 검에 죽은 건 사실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 녀석 처소에서 예 대협을 죽인 독이 발견되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단호한 처벌이 없다면 화진산장은 다시는 예전의 기세를 찾지 못할 걸세.”
이 말을 한 사람은 하위강의 아버지 하철이었다. 그는 화진산장과 기주 지방에서 쌍벽을 이루는 장위문의 문주이기도 했다. 선풍도골의 외모에 유창한 언변, 그리고 평소 공명한 일처리로 소문이 자자한 그가 그렇게 나오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의 의견을 쫒을 수밖에 없었다.
“예 소저 의견은 어떤가?”
“사매는 방에서 통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걸 생각한다는 자체가 그녀에게는 고통일 겁니다.”
하철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기운을 차리기 전까지는 당분간 자네가 화진산장을 이끌어야 하네. 자네 무공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문파를 이끈다는 것은 무공과는 별개의 문제야.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어려워 말고 내게 부탁하게. 예 대협에게 받은 은혜가 적지 않으니 화진산장의 일이 내 일이라 생각하고 도와줌세.”
“감사합니다.”
회의가 다시 이어졌고 결국 모두연은 예천호의 칠일장이 끝나는 날 참수하기로 결정됐다.
그날 밤 진립이 모두연을 찾았다. 포박된 채 헛간에 감금된 모두연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진립은 모두연의 포박을 풀어주고 품에서 주먹밥 하나를 꺼냈다. 모두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수 당하느니 굶어 죽겠다는 거냐?”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모두연이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일이다. 나는 네가 그런 일을 했다고 믿지 않는다.”
모두연이 대뜸 물었다.
“그녀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해. 이럴 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그녀는 괜찮으니 어서 기운이나 차려라. 게다가 너는 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처지이지 않느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네가 죽으면 사부님이 남긴 절학이 이대로 사라진다는 걸 말하는 거다.”
그 말에 모두연은 주먹밥을 받아들었다. 그 뒤로도 진립은 매끼마다 주먹밥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날 밤이었다. 모두연은 잠결에 헛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 말은 말이야, 어떻게 상중인데 혼담이 오갈 수 있냐는 거지.”
“자넨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예 장주님이 돌아가셨으니 우리 화진산장은 끝이나 마찬가지야. 그 때문에 하철 문주님이 우리 화진산장을 살리는 방법으로 둘째 도련님과 예 소저의 정략결혼을 제의한 거야. 게다가 사십구제가 끝난 후 정혼을 하고, 삼년상을 물리면 혼인을 하기로 했으니, 그다지 천리에 어긋난 것도 아니지.”
“그래도 그렇지! 넷째 도련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쉿! 이 사람아 조용히 하게. 안에 있는 사람 깨겠네. 그리고 생각해 보게. 넷째 도련님이……. 아니지. 이제 그렇게 부를 수도 없지. 아버지를 죽인 자를 좋아하는 거야 말로 천리를 어기는 거란 말이야. 예 소저도 얼마나 상심했겠는가?”
이야기를 듣고 난 모두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박이 빨라지고 손끝이 떨렸다. 예홍지가 둘째 사형과 혼인을 하다니!
문지기들의 말이 옳았다. 예홍지는 고아인데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였다. 그에 비해 하위강은 외모는 물론 배경 또한 번듯했다. 지난 며칠간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문득 모두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이대로 죽으면 사부님에게 또 한 번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연은 문지기에게 지필묵을 부탁해 낙화유수에 대한 모든 것을 적기 시작했다. 진립에게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날에는 채 반의 반도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속도가 붙어 마지막 날에는 신들린 듯 붓을 놀렸다. 사부님이 알려줬던 이야기들과 자신이 직접 수련을 하며 느꼈던 것에 대한 해석까지 곁들였다. 그렇게 정리하다 보니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몇몇 부분들이 저절로 깨우쳐졌다. 
진립이 가져다주는 밥도 거르며 사흘 동안 꼬박 적은 끝에 사십 여 장의 검보가 완성되었다. 그날은 예천호의 칠일장이 끝나는 날이었다. 예홍지가 찾아온 것도 그날이었다.
“떠나주세요.”
이른 새벽, 하얀 소복을 입은 예홍지가 찾아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차곡차곡 접힌 옷 몇 벌과 황금 몇 덩이, 그리고  대나무 잎에 싸인 주먹밥이 들어 있었다.
“부탁이에요. 이곳을 떠나 주세요. 당신마저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차마 얼굴을 들 용기가 없어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모두연은 그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자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큰 사형한테 전해 줘.”
검보를 건넨 뒤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요.”
모두연은 망설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후회했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지난 사흘간 애써 쌓은 용기가 와르르 허물어졌다.
“저를 좋아했나요?”
대답을 하면 울고 있는 걸 들킬까봐 모두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착각처럼 그녀의 얼굴에 밝은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오지 마세요. 당신이 돌아온다면 우리 모두 불행해질 거예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 주세요.”
 
 
산장을 나온 모두연은 사부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뒷산에 마련된 묘로 향했다. 아직 물기도 마르지 않은 묘에 큰 절을 한 뒤 그곳을 떠나려 할 때였다. 산 아래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모두연은 묘 뒤편의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얼마 뒤 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셋째 사형 막여였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묘 앞에 앉아 나직하게 흐느꼈다.
“사부님,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모두연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한참을 흐느끼던 막여가 갑자기 품에서 비도를 꺼내더니 자신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사형!”
깜짝 놀란 모두연이 나무 뒤에서 뛰어나와 막여를 안았다. 비도는 이미 자루만 남기고 막여의 가슴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당황한 모두연이 비도를 뽑아내려 하자 막여가 눈을 부릅뜨고 그의 손을 잡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막여가 힘겹게 입을 뗐다.
“미안하다. 미안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죽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사형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10년을 사부님 밑에 있으면서도 배운 거라곤 고작 비도술 한 가지뿐이었는데, 왜 너에게 사부님의 비학이 전해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매가 너 같은 녀석을 왜 좋아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가 미웠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려고 했다. 정말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될 줄이야…….”
“제가 비학을 물려받다니요?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막여가 고개를 저었다.
“바보처럼 너만 모르고 있었지. 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너를 가르칠 때 사부님의 그 눈빛, 우리를 가르치실 때는 볼 수 없었던 눈빛이었지. 사매도 그랬다. 너를 바라보는 사매의 눈빛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모두연의 손을 잡은 막여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눈빛도 급격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날 내가 네 발목에 돌을 던졌다. 하지만 네 검에 독을 바른 건……. 그건…….”
거기까지 말한 막여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사형! 사형!”
가슴에 귀를 대 보았지만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모두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왜 셋째 사형이 돌을 던진 것인지, 그리고 누가 자신의 검에 독을 발랐다는 것인지, 또 왜 그런 짓을 한 것인지……. 막여의 시체를 안은 채 모두연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새벽까지 생각을 한 뒤에야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검을 쥔 모두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3

예천호의 사십구제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 날 오후, 긴 행렬 하나가 화진산장을 향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나팔수들이, 그 뒤에는 패물을 실은 나귀들이, 그리고 이십에 달하는 무사들이 커다란 남여와 백마 한 마리를 호위하고 있었다.
남여 위에는 장위문의 문주 하철이 흐뭇한 미소를 흘리며 앉아 있었고, 백마에는 화려한 백의를 걸친 하위강이 앉아 있었다. 제법 쌀쌀한 초겨울 날이었지만, 행렬은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깃발을 앞세우고 요란한 음악을 연주하며 한껏 신을 내고 있었다. 장위문의 아들과 화진산장의 딸이 정혼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흥이 깨진 것은 화진산장을 십여 리 앞 둔 다리에서였다. 한 사내가 다리 앞에서 검을 뽑아들고 행렬을 멈춰 세웠다. 헝클어진 머리에 때로 얼룩진 얼굴, 걸치고 있는 옷은 걸레조각 같았다. 하위강과 하철은 그가 모두연임을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하철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네 녀석이 도주하는 바람에 이번 정혼이 찜찜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제야 예 대협 묘에 제를 올릴 때 부끄럽지 않게 되었군.”
모두연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왜였을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말해 봐라.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는지.”
“껄껄, 사부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제 사형까지 죽인 녀석이 뭘 따지느냐? 네 놈을 오늘 죽이지 않는다면 강호인들이 우리를 비웃을 거다. 네겐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자결해 죄를 씻겠느냐,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해 주랴?”
하위강이 말에서 내리며 하철을 만류했다.
“아버님,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니 피를 보기 싫군요. 넷째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네 죄를 인정하고 순순히 우리를 따르거라. 그러면 내 강호 동도들에게 선처를 구해보마.”
모두연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를 사부를 죽인 패륜아로 만든 것도 참을 수 있었고, 막여를 죽인 범인으로 만든 것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홍지를 불행하게 만들고, 더욱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모두연이 짤막하게 말했다.
“웃기는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연이 달려들었다. 어, 하는 사이 그는 하철의 면전에 이르러 남여를 맨 사내의 가슴을 발로 밟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당황한 하철이 채 검도 뽑지 못하고 검집으로 모두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 순간, 모두연이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의 검이 큰 원 하나를 그렸다. 하철의 목울대에서 피가 뿜어졌다. 목이 반이나 잘린 하철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남여에서 고꾸라졌다.
누구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라 장내가 조용해졌다. 실력대로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하철이 아니었지만, 그의 감각은 평온한 생활 속에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져 있었다. 게다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죽었음에도 하위강은 담담한 신색이었다. 그가 좌우의 무사들에게 명했다.
“죽여라!”
십 수명의 무사들이 칼과 창을 꼬나들고 모두연에게 달려들었다. 모두연의 몸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한 바퀴 돌때마다 한 번의 비명이 터졌고, 한 명의 무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예천호가 만든 검무를 변화시킨 검법이었다. 어떤 공격도 모두연의 몸놀림을 잡지 못했고, 어떤 수비도 모두연의 검이 그리는 원을 막아내지 못했다. 맞을 듯 안 맞을 듯, 모두연의 몸은 아슬아슬하게 창칼 사이를 미끄러졌고, 그의 검은 끊임없이 원을 그려냈다.
그렇게 싸우기를 반 각. 대부분의 무사들이 모두연의 칼에 쓰러졌다. 남아 있던 장위문 무사 서넛은 줄행랑쳤고, 모두연은 질펀한 피바다 위에 서서 하위강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때로 얼룩졌던 그의 옷은 이제 피로 얼룩져 있었다. 몸 곳곳에는 십여 개의 크고 작은 상처가 나있었다.
모두연은 너무나 많은 피를 쏟아내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검을 휘두르고 어떻게 공격을 피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쓰러질 수 없었다.
“그날 너를 죽였어야 하는 건데. 예천호도 막지 못했던 길을 너 따위가 막을 줄이야…….”
하위강의 천천히 검을 뽑아들며 한숨을 쉬었다.
“왜였지?”
하위강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때문이지.”
“나 때문이었다고?”
하위강이 고개를 끄떡였다.
“너만 화진산장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행복했을 거야. 원래 사매와 나는 몇 년 전에 이미 정혼이 되어 있었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 그런데 네 녀석이 들어온 뒤 예천호, 그 늙은이가 마음을 바꾸더군. 작년이었을 거야. 내 자질이 어떻다느니, 인간성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파혼을 하더군. 나는 이런 촌구석에서 평생을 썩을 생각이 없어. 넓은 중원에 나가 이름을 떨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진산장과 예천호의 이름이 필요했어. 그런데 애초 생각했던 방법이 틀어졌으니 어쩌겠어? 다른 방법이라도 써야지. 마침 셋째 녀석이 사매한테 눈독을 들이고 있더군. 그 때문에 수월하게 일을 풀어낼 수 있었지.”
“고작 그런 헛된 꿈 때문이었나?”
“고작? 그래, 너에게는 고작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꿈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야.”
“설령 그렇다 해도 큰 사형이 있는데 어떻게 화진산장이 네 것이 되겠느냐?”
“큰 사형? 그 우직하기만 한 인간?”
하위강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당분간은 그렇겠지. 하지만 그는 화진산장을 꾸려가면서 계속 큰 실수들을 하게 될 거야. 그때마다 내가 나서 수습할 거고. 그런 일이 계속되다보면 자연스럽게 화진산장의 모든 것이 내게 넘어오겠지. 그러니 그런 걱정은 안 해줘도 돼.”
“넌……. 정말…….”
“그래 맞아. 죽어 마땅한 놈이지. 하지만 네 녀석만 죽어주면 패륜아를 처단한 영웅이 되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위강이 달려들었다. 모두연의 검이 다시 원을 그리기 시작했고, 하위강은 그 원을 쫓으며 날카롭게 빈틈을 노렸다.
수십 합을 겨루었을 때 모두연은 점점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하위강의 손에 죽는 게 아니라 출혈로 죽을 판이었다. 빠른 승부가 필요했다.
모두연이 원을 그리려는 듯 움직이려다 반대로 몸을 돌리며 곧장 하위강에게 달려들었다. 직접 부딪히는 걸 피하기만 하던 모두연이 정면으로 달려들자 깜짝 놀란 하위강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짤막하게 끊어 내리쳤다.
위급한 상황에서 적을 물러서게 하는 구명절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위강의 예상과 달리 모두연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왼팔을 들어 올리며 계속 짓쳐들어왔다.
하위강의 검이 모두연의 왼팔을 내리쳤고, 모두연은 왼팔이 잘려나가는 아찔한 고통 속에 검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진립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장내에 도착했을 때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십여 구의 시체 외에 특이한 물건들도 발견되었다. 하나는 하위강의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팔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위강의 가슴을 관통한 검의 손잡이에 꽂혀 있는 종이쪽이었다.
종이는 거상들이 사용하는 대금청구서였다. 거기에는 남만을 오가는 한 상인이 하위강에게 황금 백 냥을 청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진립은 그 숨은 뜻을 한참이나 생각했다. 이 대금청구서를 만든 상인을 직접 만나 물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남만이라면 짚이는 바가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었구나.”
주먹이 꽉 쥐어진 주인 모를 팔을 주워들으며 진립이 탄식했다.

4

섬서성 깊숙한 곳에 소진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서역으로 가는 물자들이 잠시 쉬어가는 마을로, 크기는 작지만 언제나 여행객과 상인들이 북적거리는 곳이다.
소진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둔덕 위에 사십대 초반의 남자와 이십대 후반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이 사내에게 물었다.
“저기에 그가 있나요?”
사내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무림과 관련된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찾았던 게 실수였지. 그가 좋아했다는 일로 찾았더니 금방 찾게 되더구나.”
“설마 그가 검을 버릴 줄은 몰랐어요.”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던 거지. 고생도 많이 했고……. 이제 그만 가 보거라.”
“같이 안 가시게요?”
“나처럼 눈치 없는 놈이 그런 자리에 가면 재미만 없어지지 않겠느냐.”
사내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큰 사형은 정말 바보에요.”
사내가 피식 웃었다.
“바보처럼 살아야 편한 세상도 있는 법이란다.”
여인이 천천히 소진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걷다가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은 채 그녀를 육 년 동안이나 지켜준 사내였다. 그런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지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고마워요.”
사내가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어서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가 소진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녀의 외모나 옷차림이 너무나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집 저집에 들러 상인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봤고, 네 번째 집에서 한 상인이 손가락을 펴 길 건너에서 그릇과 항아리를 파는 가게를 가리켰다.
가게는 작고 지저분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점원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떤 물건을 찾으시나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어요. 모두연이라는 사람이 여기 있지 않나요?”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나이는 서른쯤에 왼쪽 팔이 없을 텐데…….”
여인의 아래 위를 살펴보던 점원이 의뭉스럽다는 듯 물었다.
“외팔이라면 한 명 있기는 하죠. 그런데 왜 그런 녀석을 소저 같은 귀한 분이……?”
“한번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점원이 고개를 끄떡이곤 가게 뒤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장일, 누가 너를 찾아 온 것 같아!”
얼마 후 한 사내가 가게 뒤편에서 걸어 나왔다. 장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여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온 몸에 흙이 잔뜩 묻은 채로 걸어 나온 그의 왼 소매는 아무 것도 없는 듯 헐렁했고, 오른 뺨과 이마에도 큰 흉터가 있었다.
사내는 여인을 보자마자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졌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글썽이던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요.”
그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군데군데 금이 생긴 사슴 도자기 인형 한 쌍이었다.
“하나씩 나눠 갖기로 했는데, 내가 두 개를 다 가지고 있었지 뭐에요.”
그녀가 한 쌍의 인형 중 하나를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 예홍지의 눈에 맺혔던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는 웃었다.
“멀리 가라고 했더니 이렇게 멀리 가면 어떡해요. 육 년이나 찾았잖아요.”
사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가운 태양에 눈이 부셨다.
이놈의 해가 왜 이리 쨍쨍한 거야. 눈물이 날 것 같잖아.

작가소개

박기순

1973년 생. 한양대학교 경영학부 졸업. 게임 개발자, 무협작가. 『만인동』,  『자객왕』 등을 출판.

작품후기

이 글은 원래 2권짜리 장편이었습니다. 천성적인 게으름탓에 1권 중반까지 뭉그적거리다 덮어두었었는데, 좌백 선배님 덕에 단편으로 수정해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게 되었습니다. 8년 만에 꺼내니 곰팡내가 풀풀 풍기네요.
다시 무협을 쓰면서 ‘역시 무협만큼 재미있는 장르는 없을 거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무협작가 분들이 얼른 얼른 대작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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