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구름 아래 늑대 새끼 우짖는다

밤 구름 아래 늑대 새끼 우짖는다

하지은

풀벌레들이 귀를 어지럽히는 자정, 아들의 무덤가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군다.
"이것이 마지막 눈물일 게다. 용서하려무나, 휴야."
다시 올 것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칼을 뽑는 매순간이 마지막일 것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들을 묻은 지 열하루가 지났다. 혼자 머물기에 이 산장은 너무도 춥고 삭막하다. 모아두었던 겨울 식량과 장작을 정리하고 떠날 채비를 하는데, 숲 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걸음을 내딛었을 때 나는 이미 아들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 실없이 웃어버렸다. 이미 가버린 아들 녀석이 나를 찾으며 울었을 거라 생각하다니, 슬픔도 자비도 느낄 줄 모른다는 사혈공(死血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산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금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혼동하지 않았다. 숲으로 걸어 들어가니 탁 트인 곳에 앉아 울고 있는 늑대 새끼가 보인다. 어미도 다른 형제들도 어딜 가버렸는지 홀로 남겨져 있었다.
"네 있을 곳은 거기가 아니다. 금세 맹수들에게 잡아먹힐 게다."
늑대새끼는 조용히 울기만 했다. 맹수로 태어났으면서도 스스로가 맹수인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금수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숲은 녀석에게 강호나 다름없었다.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놔두고서 산장으로 돌아와 불을 지폈다. 예서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떠날 참이었다.
어디로? 아무 곳으로든.
어쩌면 십 수 년 전 묻어뒀던 은원을 청산할 때인지도 모른다. 하늘 가득 불편한 구름들이 모여 있던 가을 날, 운과 나는 화묵도에서 만났었다. 흰 목덜미가 아름다웠던 여인을 버리고 떠난 나를 운은 용서하지 않았다. 스물두 합. 우리가 주고받은 검은 간결했지만 서로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감정이 흐트러졌던 운은 나선으로 휘어지는 내 검을 견디지 못하고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목숨을 거두어라."
차분히 그러나 증오하는 눈으로 운이 말했다. 나는 고갯짓으로 거절했다.
"이 일을 대단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사혈이 흐르는 너에게도 눈물 흘릴 날이 온다면 반드시 나를 기억해라."
운은 물론 아들의 죽음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이토록 몸서리치는 비애에 젖은 순간 나는 그를 기억한다. 그러니 그를 찾아가는 것이 도리일 터였다.
고기가 익어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저편에서 늑대 새끼가 걸어 나왔다. 냄새를 맡고 따라온 모양이다. 이제 보니 비척거리는 모습이 제법 안되었다. 녀석은 나처럼 혼자였고 지쳐 있었다. 아직 익지 않은 사슴 고기를 떼어 던져주니 허겁지겁 잘도 먹는다.
제 어미는 죽은 걸까, 연약한 새끼를 버리고 떠난 걸까. 어느 쪽이든 참 모질기도 하다. 어찌 이 어린 것을 혼자 두고 가버렸을까.
너는 참 모질기도 하다, 휴야. 나를 두고 어찌 그렇게 혼자서 가버렸느냐. 아무리 다정한 아비가 아니었던들 이토록 매정할 수 있느냐. 나는 네가 야속하구나. 그리고 그립구나.
 
휴는 원했던 아이가 아니었고 원하던 여인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사냥꾼의 입장에서 숲이 풍요롭듯 강호가 내게 그러했다. 재물을 원할 때는 갈취했고 여인을 원할 때는 돈으로 샀다. 휴는 그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숱한 여인 중 하나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젖먹이 아이를 내게 떠안기듯 맡겼다.
아이를 처음 품에 안던 순간이 기억난다. 너무 작고 연약해서 그대로 모가지를 비틀어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내게는 단지 짐이고 방해물이었으며 운이 없는 경우 훗날 내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사혈공에게는 용납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순간의 변덕 혹은 호기심이 아기의 목숨을 내버려두게 했다. 언젠가 필요해질지 모르는 후계자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피를 이어받았다면 틀림없이 하늘 아래 적수 없는 무인이 될 터. 내 아들을 그렇게 키우고픈 욕망이 생겨났다.
내 아들. 스스로가 떠올린 그 단어에 놀랐다.
나는 아들을 가졌고 아비가 된 것이다. 원치 않았던 일이지만 그것을 인정한 순간부터 내게는 소중한 책무가 생겨났다. 아비로서 아들을 기른다. 대개의 경우 그 책무는 피곤함과 짜증스러움을 안겨다줄 뿐이었지만 아주 가끔, 방긋방긋 웃는 아이에게서 소소한 기쁨과 훗날에 대한 기대감을 느꼈다.
이 아이가 나처럼 될 수 있을까?
눈매는 확실히 나를 닮았지만 체질은 그렇지 않아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이는 잘 먹지 않고 자주 아팠다. 아이란 게 다 그런 건지 아니면 제 어미가 없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업고 강호를 돌아다니며 아이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자 했다. 의원들을 협박하여 병을 치유해보고 여인들을 달래어 어머니의 역할을 해보게 했다. 어느 쪽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휴는 여전히 연약한 채로 일곱 살이 되었다.
"아버지. 그럼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가요?"
"물론. 일대일로는 적수가 없지."
"일대다수로는요?"
"사명종(四命終)을 한꺼번에 대적하는 경우라면 생각 좀 해봐야 할 게다. 하지만 그들 넷은 서로 사이가 대단히 좋지 않아서 그럴 일은 없다고 볼 수 있지."
내 예상은 보기 좋게 틀렸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강호를 드나들었던 나는 사명종 중 둘째인 백주문의 아우를 건드렸다. 명의로 이름 높았던 그가 말을 듣지 않자 눈을 멀게 했던가 했을 게다. 백주문이 어떤 귀신같은 솜씨로 사명종을 모았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산장에 아들과 함께 머물고 있던 나를 쳤다. 일 년 전 여름, 숨소리마저 뜨겁던 날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는가. 사혈공에게 아들이 있다던 소문이."
백발의 수좌 장사영이 가벼이 혀를 찼다. 그들은 이미 산장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들은 내 다리를 꽉 붙든 채 떨어지지 않았다. 매달려 있는 아들의 무게가 곧 우리 두 사람 목숨의 무게였다. 그것이 이토록 무거웠던가.
"휴라고 합니다. 휴야, 인사드리거라."
휴는 다리 너머로 고개만 내밀어 꾸벅 인사했다. 장사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해 보이는 아이로고.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식도 있는 사람이 어찌 그리 함부로 사람을 해치는가."
"제 행동에 변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을 들으러 오신 것도 아닐 테고."
"그래. 이제가 있으니 용서는 불가하겠지. 아쉽구나, 아쉬워. 사혈이 맥박 치는 날이 멀지 않아 보이거늘."
네 사람이 혈투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나는 아들을 달래었다.
"들어가 있거라, 휴야."
"하지만 아버지. 저 사람들과 싸우나요?"
"그래야 한단다."
"아버지, 죽어요?"
겁에 질린 아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아비를 기다린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게다."
"기다릴게요. 아버지, 집에서 기다릴 거예요."
"그래, 그래."
아들이 집안으로 사라지자 백주문이 이죽거렸다.
"쓸데없는 짓이다. 네가 죽으면 아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일곱 살짜리 아이일 뿐일세. 내가 죽으면 아이는 거두어주게."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눈이 먼 채로 평생을 살아가게 해주지. 내 아우처럼."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리석게도 그는 스스로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를 만들었다. 기력을 끌어 모아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태양이 나를 마주보고 네 사람의 그림자가 나를 따른다. 하늘 아래 사혈공의 적수는 없음이로다.
 
오랜 시간 미동 없던 산이 격노하며 깨어난다. 미물과 다름없는 사람 다섯이 그의 살을 깊이 파헤치고 뒤엎는다. 수천수만 년 사람의 시간보다 오래 잠들어 있던 바위들이 불쾌한 비명과 함께 낙석으로 전락했다. 숲의 은밀한 곳까지 짐승의 흔적 대신 사람의 피와 땀이 뿌려진다. 열흘하고도 칠일이 더 이어진, 하늘이 무너지는 싸움이었다.
나는 처음 이틀 동안 둘째와 셋째를 죽였다. 그러나 은신에 능한 넷째와 정면으로 상대하기 버거운 장사영은 십칠 일째 되는 날까지 손을 쓰지 못했다.
숲의 열기는 무더웠고 나는 몹시도 지쳐 있었다. 남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곳 산중에서 칠 년을 보낸 내게 유리한 것은 지형뿐이었다. 마지막 날 나는 간신히 장사영을 좁은 협곡 속으로 몰아넣고 위쪽 절벽을 무너뜨렸다. 두 다리가 으스러진 채 장사영의 허리 아래쪽은 바위에 파묻혔다. 내 실력이 우위였기 때문이라기보다 나이 차이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일흔이 넘은 장사영은 긴 싸움에 나보다 먼저 지친 상태였다. 해서 그의 목숨을 끊기 직전 내려다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손에 망설임을 둘 것 없네.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나의 강대함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부끄럽지 않고 후회하지도 않네."
"그리 말씀하시니 거두겠습니다.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나 벗이 되기를."
나는 진심 어린 경의를 담아 그의 목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아들이 새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버지!"
목소리가 겁에 질려 있었기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뿔싸. 넷째 윤무형이 아들을 잡고 있었다.
"일형을 놔줘."
아들의 목을 칼로 겨눈 그의 손은 떨렸고 얼굴은 치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대일 승부에 정면 혈투였다. 그런 와중에 아이를 인질로 삼았으니 나뿐 아니라 그 자신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일 터였다.
"아우, 놔주어라."
장사영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윤무형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다 죽을 셈이오? 우리 사명종이 이렇게, 단 한 사람에게……."
허무와 치욕, 후회와 분노가 뒤섞인 머리가 그의 목에서 떨어진다. 피를 뒤집어쓴 아들은 잠시 후에야 비명을 질렀다. 손을 써서 아들을 잠재우고 홀로 남은 장사영에게 다가갔다. 세 아우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비통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자네의 강인함에 실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군. 그러나 손이 너무 잔인해. 그 중 어느 것도 자네 아들에게 이어지지는 않을 테니 세상을 위해 그것을 다행이라 해야겠지. 죽어 후회할 말을 하는 이 늙은이를 용서하게나. 그러나 자네 아들은 앞으로 채 일 년을 더 살지 못할 걸세."
아들을 붙잡은 윤무형을 봤을 때도 생기지 않던 분노가 그제사 치밀었다. 적이지만 존경했고 죽여야 하지만 존중했던 상대에게 잔혹한 마음이 일었다. 나는 손으로 직접 그의 머리를 내리쳐 목숨을 끊었다. 고고했던 백발이 피에 젖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어찌 휴가 죽는단 말이냐. 누가 감히 내 아들을 데려갈 수 있다는 말이더냐. 강호의 누구도 그럴 수 없다. 사람이 아니라면 귀신, 그도 아니라면 하늘일지언정 내게서 휴를 떼어낼 수는 없다."
괴롭고도 기쁜 마음으로, 나는 휴가 내 유일한 약점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늑대 새끼가 와서 끙끙대며 내 손을 핥는다. 먹이를 던져준 사람이라고 그새 마음을 놓은 모양이다. 어리석고 연약하다. 손을 다 쓸 것도 없이 손가락만 튕겨줘도 금세 끊어질 목숨이다. 휴를 처음 안았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나는 그때처럼 녀석을 받아들일 수 있고 죽일 수도 있었다. 이제 하나뿐이던 약점은 사라졌고 다시 그런 것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얻을 때의 기쁨 배 이상으로 잃을 때의 상실감이 크기에. 휴가 실제 떠났을 때 내 일부는 아들과 함께 죽었다. 무엇으로도 다시 살릴 수 없다.
"너를 휴라고 부르마.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은 그것뿐이니."
늑대 새끼는 나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휴는 영리했다. 허약한 탓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던 아들은 대신 글자를 깨치자마자 많은 책을 읽었다. 좁은 산장의 절반이 책으로 뒤덮여 있는 것도 그 탓이다. 나는 좀생이처럼 구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혈공의 아들이 선비가 된다면 그처럼 우스운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들은 틈만 나면 새 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예? 그것을 사다주세요, 아버지. 서둔평의 글은 정말 재미있단 말이에요."
"책은 그만두고 아버지와 기공수련이나 하자꾸나."
"전 그런 것은 하기 싫어요. 싸우는 것도 싫고 칼을 휘두르는 것도 싫어요. 책이 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 입 다물어라. 사혈공의 아들은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전 죽은 피가 흐른다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따뜻하기만 하신걸요."
강호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하늘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그를 찾아가 최대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한데 아들의 그 말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알았다. 다음 번 장에 나가는 날에 사다주마."
"고마워요, 아버지. 고마워요."
네게서 그 말을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내가 뭔들 하지 못하겠니.
 
늑대 새끼인 휴도 영리했다. 녀석은 먹이를 얻고 가끔 친근감을 표시할 때가 아니면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가까이 오지 않고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나를 관찰하듯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나와의 관계에 대해 고려해보는 듯한 눈치다.
이 사람은 나에게 먹이를 준다. 그러면 내가 그를 개처럼 따라야 할까?
늑대 새끼는 맹수로서의 본능과 살기 위한 본능 속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후자를 위해서라면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게다. 나는 녀석이 홀로 결정하도록 먹이를 주는 것 외에 특별히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래서 녀석의 고민도 길어지는 듯했다.
이미 지체된 시간이 사흘이었다. 기운을 차릴 때까지만 먹이를 주자고 결정한 것이 잘못이었다. 숲은 짐승들의 강호고 녀석은 새끼일지언정 맹수다. 그를 개처럼 기르는 게 옳은 일일까? 분명한 것은 내가 떠나고 나면 홀로 오래 버티지 못하리란 점이었다. 가끔 손가락을 잘근잘근 무는 녀석의 이는 아직 충분히 날카롭지 못했다. 녀석이 결정하도록 기다리는 것만이 내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일 터. 그러나 부디 나를 떠나 맹수로서 죽기를 바랐다.
먹이를 던져준 지 아흐레. 늑대 새끼의 고민은 끝났다. 산장 앞마당에서 선잠이 들었던 내가 눈을 떴을 때 휴는 내 품에 누워 자고 있었다. 갸르릉 갸르릉. 짐승도 꿈을 꾸는지 입을 달싹거리고 앞발을 휘젓는다.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래. 살아야겠지. 우선은 살고 보자꾸나."
휴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산장에서 떠나는 것을 기약 없이 미루기로 했다. 아들의 무덤을 떠나지 않을 변명거리가 생겨 잘 되었다고 내심 생각했다.
 
늑대 새끼는 사람의 아이와 달리 빠르게 자라났다. 장난치며 물고 할퀴고 했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맹수의 본능을 드러낸다. 녀석과 놀아주다 보면 팔이 성할 날이 없었다. 한 번은 호되게 물려서 피를 흘리기도 했다.
"사혈공에게서 이렇게 많은 피를 본 놈은 네가 처음일 게다."
휴는 다소 풀이 죽은 채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었다. 보송보송하던 털이 짧고 날카로워지고 눈에도 허기가 져 있다. 녀석을 보낼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짐작하고 있었기에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빨리 그날이 왔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다음에 주는 먹이가 마지막일 게다. 앞으로는 스스로 잡도록 해라."
이미 휴는 작은 토끼나 다람쥐 등을 쫓아 숲을 헤매는 일이 잦았다. 한 번은 반쯤 찢긴 쥐의 시체를 물어와 내 앞에 자랑스럽게 내려놓기도 했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휴가 처음으로 준 선물이었기에 함께 나누어 먹었다. 생각보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우우-우.
휴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며칠 전부터 숲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다. 꼬리로 땅을 탁탁 치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가고픈 모양이었다.
"가거라."
휴는 다시 나를 본다.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멀리서 다시 한 번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엔 돌아보지도 않았다.
"의리를 지키는 게냐?"
휴는 대답 대신 혀를 내밀고 헥헥거렸다. 기특하긴 하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문득 강호에서 만난 수많은 인간 군상보다도 이 늑대 한 마리가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것을 보내려 하고 있다.
"네 뜻은 알겠다만 우리는 갈 길이 다르다. 나는 지려는 해이고 너는 떠오르려는 달이지. 밤이 오거들랑 네 동료들과 함께여야할 것이다. 그것이 늑대 새끼인 것을."
휴는 귀만 쫑긋거렸다.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이해하려는 듯한 그런 행동을 보이곤 했다.
우우-우.
 
그날은 달이 몹시도 들뜬 밤이었다. 풀벌레들이 귀를 어지럽히는 자정, 아들의 무덤가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군다.
"이것이 마지막 눈물일 게다. 용서하려무나, 휴야."
다시 올 것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칼을 뽑는 매순간이 마지막일 것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들이 죽은 지 이 년 만에 다시 찾는 강호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내 이름도 풋내기들의 허언 속에 많이 바랬을 터, 실력도 그렇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아들이 나를 찾아 너무 많이 울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늑대 새끼인 휴가 나를 기다리며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녀석을 떠나보낼 자신이 없어 내 쪽에서 먼저 떠나기로 했다. 의리를 지켰던 녀석은 배신감을 느낄 게다. 그러나 또다시 같은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아들의 무덤에서 한 줌 풀을 뽑아 땅을 박찬다. 억겁의 나무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밤을 스쳐 달을 밟는다. 오래간만에 하늘을 나는 사혈공의 심장은 뜨겁게 살아 있다. 누구라도 와서 이것을 가져가보아라! 손에 쥔 풀 한 줌을 하늘에 뿌린다. 내가 남긴 날카로운 흔적들이 지상으로 나풀나풀 떨어진다. 휴를 위한 작별인사다. 마지막 풀잎이 땅에 닿을 즈음 나는 산장으로부터 천삼백 리 떨어져 있는 주해(輳骸)의 땅을 밟고 있었다.
 
백골이 모여든다는 그 땅의 주인은 가은(可垠)당의 당주 소운영이다. 십삼 년 산중수련으로 유검(楺劍)의 모든 것을 전수 받은 나는 강호에 처음 발을 디딘 대부분의 무사들이 그러하듯 그릇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 내게 처음 의뢰를 해온 것이 그녀였다.
그녀는 수많은 절정고수들을 비열하게 살해한 암살자인 자비(紫匕)를 처리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름과 달리 자비로움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인물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그것이 호승심 때문이었는지 소운영의 아름다운 흰 목덜미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일곱 개의 거대한 산봉우리 아래 험난한 지형이 어우러진 칠서협곡에서 마침내 나는 숨어 있던 자비를 찾아냈다. 구십 일이 넘는 추격 끝이었다. 더 이상 도망칠 기운이 없는지 그는 지쳐서 나를 바라보았다. 수십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광인데도 묘하게 그의 눈은 살기 없이 고요했다.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나는 손을 털었네. 더 이상 추적하지 말게."
"그대가 거둔 목숨들을 어이 하고 이제사 발을 빼려 하시는가. 무고한 많은 목숨을 대신하여 나와 겨루세."
"자네에게 맹세하겠네. 정확히 십칠 년 뒤 자네를 찾아가 아무 대가 없이 내 목숨을 내놓겠네. 그러니 오늘만큼은 고이 보내주시게나."
"그런 유예를 자네 손으로 살해한 이들에게는 왜 주지 않았나?"
"이제 와 내 죄를 부인하지는 않겠네. 그러나 사정이 있네."
그의 눈에는 진심 어린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다잡았음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대결하여 질 것을 걱정하는가? 그러나 비록 투기가 없다 한들 앞에 있는 상대에게서 솔직하게 내 우세를 점칠 수 없었다. 한데 어째서?
계곡 저편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때 자비가 흠칫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이해했다.
"어인 아이인가?"
"……내 아들일세."
"혼인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네만."
"사생아로 태어났지. 바로 나처럼. 그러니 나와 같이 되지 않도록 키울 걸세."
"십칠 년이라. 과연, 그래서였나."
"이제 나를 양해해 주겠는가?"
"어림없는 소리. 자네도 아이 있는 어비를 죽이기 전 양해를 구하지 않았겠지."
자비는 탄식했다.
"내 업은 곧 내 아이의 업. 청산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는 거로군."
그의 검에서 자색 검광이 터져 나왔다.
 
그때 나는 자비를 보내줬어야 했을까? 흰 목덜미의 여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내 욕심을 뒤로 미루고서?
그러나 회의를 느꼈을 때 이미 자비는 내 검에 쓰러진 뒤였다.
"휘어 바로잡을 검이라. 과연. 유검의 전승자로군."
한 움큼 피를 토하면서도 자비는 웃었다. 그러나 곧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죄는 나로써 종결하고 아이만큼은 부디 거두어주게."
"가은당에 맡기도록 하지. 당주 소운영은 덕이 있는 여인일세. 자네 바람처럼 올바른 아이로 자라나겠지."
"그렇군. 고맙네."
눈을 감기 전 아들을 품에 안겨주기 위해 계곡에서 아이를 찾아왔지만 자비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흰 강보에 안겨 있던 아이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회의가 명확한 후회가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성공적인 첫 의뢰에서 내가 배운 것은 악한일지라도 생명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호의 거친 바람 속에 그 깨달음도 오래 가지 않았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며 살아왔음에도 나는 어느새 그렇게도 증오하던 악인이 되어 있었다. 젊을 적의 나처럼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날뛰는 젊은이들이 제일 먼저 겨냥하는 게 바로 나였다. 죽은피가 흐르는 악당이라 해서 붙여진 사혈공이라는 이름, 그것이 경멸스럽기보다 내심 자랑스러웠던 것은 마음 한구석이 진실로 변질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휴를 얻기 전까지 나는 어찌할 바 없는 세상의 악(惡)이었다.
 
그 후로 십여 년 만의 방문이다. 가은당사에 내려앉은 적막은 준엄했다. 조만간 불쾌한 침입자가 그것을 깰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다 죽일 것인가 그들의 손에 죽을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나쁠 것이 없어 보이니 내게는 유리한 선택이다. 그러나 다른 고민은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운을 먼저 만날 것인가, 소운영을 먼저 만날 것인가?
운에게는 분명한 볼 일이 있었다. 그러나 소운영에게는 분명치 않다.
젊은 시절 나는 그녀를 농락했었다. 얌전한 규수로 하여금 곧 결혼할 것이라 믿고 기다리게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호위로서 그녀를 사모했던 운이 나를 죽이겠다고 쫓아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를 찾아가봐야 사죄밖에는 할 일이 없을 터.
결정을 내리고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격렬한 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당사 뒤쪽의 연무장이었다. 들킨 것인가 싶어 긴장한 채 싸울 준비를 했지만 내게 향하는 살기는 없었다. 누군가 수련중인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조용히 몸을 날려 연무장으로 접근했다. 중년의 남성이 갓 소년티를 벗은 청년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로구나. 네게는 의지가 없다. 싸워서 상대를 이기겠다는 의지 말이다."
"별로 싸우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을 어쩝니까."
"사내 녀석이 어찌 그리도 나약한 소릴 하느냐. 강호는 네가 싸우고 싶지 않아도 싸우게끔 만들 것이다. 너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상대에게도 그런 태도를 보일 테냐?"
"저를 누가 무슨 이유로 죽이려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전 누구하고도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은원이 생기지 않도록 강자에게 굽히고 약자에게 너그러이 살아가면 됩니다."
"한심하구나, 정말로 한심해. 당이 어떤 지경인지도 모르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중년의 남자는 운이었다. 기개로 보아하니 그동안 꾸준히 수련을 쌓아온 모양이었다. 청년은 그의 제자일 터였다. 운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강호는 그처럼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싸워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때는 늦다. 그런 날을 위해 수련해야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거늘.
"네 좋을 대로 하거라. 밤이 깊었으니 이만 처소로 돌아가거라."
청년이 사라지자 운이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와 누군가를 기다리듯 섰다. 뜻을 알아차린 나는 그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알고 있었던 듯 운은 놀라지 않았다.
"십오 년 만이군."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 용케 기억하고 있군."
"네 놈은 잊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네 놈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가슴에 선명하다."
"유검은 날카롭지. 누구에게나 흔적을 남긴다."
운의 손이 꿈틀거렸지만 아직 공격할 태세를 갖추지는 않았다.
"네가 예 무슨 볼 일이 남아 있어 왔느냐."
"너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왔다."
"기회?"
"나를 죽일 기회."
아마포에 싸인 검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히 뽑아낸다. 내내 그리워하고 있던 감촉이다. 월광에 찬란히 반란하는 검, 휘어 바로잡을 검. 수많은 생명이 유검으로 끊어졌었다. 삼 년 만에 나는 그때의 감각을 되뇌었다.
"선수를 양보하겠다. 와라."
운의 눈이 일렁였다. 밤마저도 가르는 날카로운 살기가 온몸을 찢을 듯하다.
죽어야만 한다면 죽을 각오로 검을 뻗는 자에게서.
눈앞에서 번뜩이는 빛을 보며 나는 휴의 이름을 불렀다.
 
"진심으로 탄복한다. 그새 많이 강해졌구나."
운은 웃었다.
"오로지 네놈 가슴에 같은 상처를 새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검을 휘둘러왔다. 수많은 낮과 수많은 밤. 아씨를 사모하는 날보다 네놈을 증오하는 날이 더 많았지. 그러는 동안 나는 너와 같은 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죽은피가 흐르는 사람 같지 않은 놈."
나는 피 웅덩이를 피해 운의 곁에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숨은 점차 가빠지고 있었다. 피거품과 함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부족했구나. 후회한다, 더 악귀가 되지 못한 것을. 그보다 더욱 후회한다, 차라리 아씨 곁에서 따스한 벗이 되어주지 못한 것을."
"운영은 어찌 지내고 있나."
"그 이름 감히 입에 올리지 마라."
"원한다면 그녀를 찾아가 사죄하겠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운은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인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먼 강을 건너가셨다. 깊고 어두운, 돌아올 수 없는 고독한."
잠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
"오 년이 지난 일이다. 내게는 어제 일처럼 선명하지만."
"요절했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지모진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사건이 있기 육 개월 전부터 아씨를 찾아와 자신과 혼인할 것을 강제했던 사내다. 그는 아씨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이 땅과 가은당이란 이름이 필요했을 뿐. 그러나 아씨가 이를 거절하자 불같이 화를 내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자객이 찾아왔고, 그리고……."
운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나는 그의 어깨를 짚고 기를 넣어주었다. 식어가던 그의 몸이 잠시나마 따뜻해졌다. 그는 고마운 눈빛을 보내고 말을 이었다.
"지모진의 짓이라고 확신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어르신들이 그를 찾아 사람을 풀었지만 모두 돌아오지 않았지. 내가 직접 움직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그가 천문(天問)당의 사람임을 알아냈다. 복수를 위해 몇 번이고 조직을 꾸렸지만 번번이 손을 써보지 못하고 격파 당했다. 부끄럽게도 나만 늘 살아남았지. 복수를 위해 자결할 수도 없었고."
"천문당이라. 서녘의 주인들인가."
"현 강호의 지배자들이기도 하다."
"그렇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편히 가거라. 네 복수는 내가 이어받겠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뜨였다.
"어째서 네가?"
"사죄할 수 없다면 그것이라도 대신해야겠지."
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제야 힘겨운 업을 해결한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이 꿈틀거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고맙다는 말을 했으리라.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운의 눈을 감겨주고 일어섰을 때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과 마주쳤다. 아까 운과 대련했던 청년이다.
"운 아저씨?"
제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눈이 싸늘하게 누워 있는 운과 피 웅덩이를 훑고 내게 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내가 그리 했다."
"어째서?"
"오랜 은원의 청산이다."
"이놈!"
그가 허리춤을 더듬거렸지만 칼도 차고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쯧 소리를 낸 뒤 말했다.
"지금은 이르다. 훗날 찾아오거라. 혹 아까 말했던 대로 싸우고 싶지 않아 강자에게 굽히는 것이 네 뜻이라면 존중하겠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내가 운 아저씨의 원한을 갚겠다!"
"그것도 좋겠지. 되도록이면 반드시 그렇게 해라."
몸을 돌려 신형을 띄우려는 순간 청년이 외쳤다.
"내 이름은 자운이다! 잊지 마라! 반드시 너를 찾아갈 것이다!"
"자운이라고?"
새삼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지. 자비의 아들을 소운영에게 맡긴 것도 십오 년 전의 일이었던가.
"네가 자비의 아들이냐?"
"내 아버님의 존함을 네가 어찌 알고 있는 것이냐?"
"재미있군. 네가 복수해야 할 이유는 이로써 두 가지다. 운의 죽음과 네 아비의 죽음."
"뭣…… 뭐라고?"
"강호에 일대일로 더 이상 적수가 없을 때 사혈공을 찾아와라. 그 전에 나를 찾아서는 네 아비처럼 개죽음이 될 뿐이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녀석을 뒤로 하고 날아올랐다. 세 번 허공을 박찼을 때 이미 뇌리에서 녀석의 이름은 잊혀지고 없었다. 사혈공에게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위험하기에 더욱 몸을 던지고 싶은 책무. 내게도 아직 젊을 적의 치기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무엇으로든 잠시나마 휴를 잊을 수만 있다면.
 
"아버지. 나 곧 죽나요?"
이 년쯤 전의 어느 날이었다. 아들은 사혈공을 상대로 날카로운 기습을 성공시킨 셈이었다.
"죽다니, 왜 그런 소릴 하는 거냐?"
"오늘 장을 보러 나갔을 때 어떤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제가 곧 죽을 것이라고요."
"미치광이였던 모양이구나."
"그래요? 살 방도를 찾고 싶으면 지사자(知死者)을 찾아오라고 하던데."
"지사자라고?"
맙소사, 내가 왜 여지껏 그를 떠올리지 못했단 말인가.
미심쩍어하는 아들에게 대충 얼버무린 후 밤을 틈타 그를 찾아 나섰다. 장에 왔었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독특한 기의 흐름을 포착했다.
지사자는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수명을 읽어낼 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읽어내는 죽음은 살 방도가 있는 죽음이었다. 나그네처럼 강호의 온갖 곳을 떠돌아다니며 그는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능력을 행사했다. 대가를 주려 하면 허허 웃고 떠날 뿐이었다.
그런 그를 여기서 만나다니, 천운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가 머무는 초라한 객잔에 내려섰다. 늦은 시간까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을 부수고 들어가고픈 걸 간신히 자제하고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또 누가 내 손을 필요로 하는가?"
"장에서 제 아들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하니 그가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아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름에 비해 내 얼굴은 그다지 알려진 편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나를 안다면 그것은 득이 될까 실이 될까.
"사혈공에게 아들이 있었던가."
정체가 드러난 이상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로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휴라고 합니다."
"과연. 아이의 특이한 기혈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제 아들의 기혈이 특이하다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끓어오르기 직전이야. 차가운 제 아비 대신에 그런 업을 진 모양이지."
내 탓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 어찌 해야 합니까? 방도가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방도야 있다네."
"그럼 손을 써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지사자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재차 다그치려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설영이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봤는가?"
"아니요, 못 들어봤습니다. 그를 찾아가야 합니까?"
"찾아갈 수 없네. 이미 죽었지."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괜히 꺼내는 것은 아닐 터였다. 문득 불안이 엄습했다.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네. 자네 손으로 해친 그 수많은 이들을 일일이 어찌 기억하겠는가."
"제가 죽였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내 아우였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다른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제 자식을 살려주십시오."
"거절하겠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속에서 울컥 살의가 치솟았으나 간신히 내리눌렀다.
"제 죄는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들만큼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 대답은 한결같을 걸세."
내 인내심은 고작 거기까지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지사자의 바로 앞까지 걸어가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살기를 내질렀다.
"당장 내 아들을 고쳐내라. 그러지 않으면 네 혈족을 찾아내어 다 죽이겠다."
"죽은 아우가 내 유일한 혈족이었다네."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여지도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황을 바꿀 수 없을 거란 게 분명한 태도였다. 차라리 그가 나를 놀리거나 비웃었다면 고문의 여지라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릎을 꿇어야 할까? 그래, 사혈공이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무릎 꿇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무고한 아이의 생명을 가지고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저를 죽이시고 제 아이는 살려주십시오. 복수를 하실 것이라면 아이가 아니라 저에게 하십시오."
그는 무릎 꿇은 나를 보고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그를 죽이기 위해 나는 손을 올렸었다. 그러나 태연히 목을 내미는 그를 보고 어째서인지 허탈해져 그만두었다. 결국 손을 거두고 산장으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자고 있던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아이는 잠시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휴야."
휴는 칭얼거림 한 번 없이 다시 잠들었다.
업이란 이토록 무거운 것이다.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처음 강호를 내딛었던 그날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장 먼저 유곽에서 외다리 여인을 꺼내와 혼인할 것이다. 그러면 휴만은 그대로겠지.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음 날 똑같은 아침이 찾아왔다. 휴를 안고 잠들었던 나는 아이의 몸이 뜨거운 것을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휴야, 왜 이러느냐? 휴야!"
그날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떻게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휴의 기혈은 엉망이었다. 바로 곁에서 그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장사영도 그렇게 말해주었는데.
아들의 몸은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가워졌다. 어느 쪽이든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고열로 인해 일찌감치 귀가 멀었고 눈도 멀어갔다. 겁에 질린 아들은 정신이 들 때마다 소리 질러 나를 찾았고 그럴 때면 달려가 손을 잡아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 기절과 구토만 반복하던 아들은 열흘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말하는 '온몸이 찢어진다'거나 '뼈가 바스러진다'는 표현은 내 가슴을 찢고 바스러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날마다 산을 헤매며 고통을 줄여줄 약초를 찾아다녔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무엇을 먹여도 아프다고 비명만 지를 뿐이고 어쩌다 깨어났을 때 내가 없으면 피를 토하도록 내 이름만 불렀다.
억겁 같은 보름이 지나, 아들도 나도 지쳐 있을 때였다.
"이제 그만하세요, 아버지."
오래간만에 비명 대신 듣게 된 아들의 말이었다. 나는 대꾸할 기운이 없어 숨을 고르며 아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만 하면 됐어요. 저도 아버지도 더는 못 견딜 거예요. 이제 그만 보내주세요. 아버지는 그런 일을 쉽게 하실 수 있잖아요……."
일곱 살짜리가 하는 말이다. 잠깐의 고통을 못 이겨 하고 있는 소리일 뿐이다. 틀림없이 아들은 죽음이란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폭풍 전에는 항상 고요함이 먼저 찾아온다고 하셨죠? 저는 이제 그걸 알겠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에요. 이후로는 고통, 오직 고통뿐이에요. 그것을 느끼기 전에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저는 무서워요. 너무나도 무서워요. 제발요, 아버지."
열이 높아 하는 헛소리일 뿐이다. 아들이 내게 그런 말을 할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아들을 달래어보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들은 아파서 비명을 지를 때가 아니면 입을 열 때마다 한결같이 말했다.
죽여주세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고 얼마나 많은 탄식을 뱉어냈던가. 아들 대신 죽을 수 있고 아들 대신 아플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손은 고통을 줄 수 있을지언정 고통을 내게로 가져올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
열두 시간 동안 이어진 비명 끝에 아들은 목소리마저 잃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그곳에 가서도 나를 잊으면 안 된다. 절대로 아버지의 얼굴을 잊으면 안 된다."
아들이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안 잊을게요.
"다시 만나자. 꼭 다시 만나자. 그곳에서도 서로를 기억하여 반드시 다시 만나자."
꼭 다시 만날 거예요.
아들은 미소 지었다. 내 손이 그를 보내버리고 난 후에도 아들은 여전히 그렇게 웃었다.
 
"이럴 수가. 내가 늦었을 리 없을 텐데."
하루를 꼬박 무덤 앞에 주저앉아만 있었기에 고개를 돌리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시야도 흐릿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사자?"
"내가 너무 늦은 모양이군."
아니, 그는 늦지 않았다. 내가 하루를 더 견뎠더라면, 아들을 타일러 하루만 버티게 했더라면 늦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보내버렸소."
"뭐라고? 자네가…… 아아."
"나 편하자고 그리 했소. 아들의 비명을 더는 들을 수 없어서 그리했소."
"미안하네. 이제야 자네를 용서하게 된 나를 용서해주게."
"그런 것은 부질없소. 이제 모든 일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들의 무덤은 작고 구슬펐다.
"이제사 진실로 내 피는 죽었소."
 
그 후로 삼 년 하고도 육 개월. 나는 천문당의 중심에 와 있다. 과연 하늘에 대고 직접 물을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고수였다. 정면혈투로는 승산이 없었기에 암습을 택했다. 그럼에도 긴 시간을 소요하고 나서야 지모진과 독대할 수 있었다.
그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는 대화하기에 즐거운 상대가 아니었다. 단 두 번, 손을 써서 소운영과 운의 은원을 갚았다. 죽고 나서 알았지만 그는 비밀리에 키운 당주의 후계자였다. 때문에 천문당은 전력을 쏟아 나를 추적했다. 그들을 따돌리고 하나하나 처리하는 동안 또다시 삼 년이란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강호를 지배한다던 자들은 이제 서녘의 작은 문파들의 눈치를 봐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나도 온전하지는 못했다. 온몸이 크고 작은 흉터들로 가득했고 가장 큰 부상은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된 것이었다. 예전처럼 일각에 천리를 가는 일은 이제 엄두를 내지 못한다. 비단 부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도 이제 늙은 것이다.
한창 세력을 떨칠 무렵 자행했던 악행이 한둘이 아니었는지 천문당의 세력이 약해지자 금세 여러 문파가 힘을 합세하여 그들을 무너뜨렸다. 어찌 보면 내 수고를 던 셈이었다. 그러나 천문당 문주와 그를 호위하는 몇몇이 도망쳤기에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 년 넘게 추적하여 대륙의 끝자락에서 그들을 살해했다.
아들이 죽은 지 구 년, 그로써 복수가 완료되었다. 근 칠 년 만에 가장 강대했던 문파를 홀로 멸문시켰으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소한 성취감을 느꼈을 뿐 그것 외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머리는 희끗해지고 다리는 점차 무거워진다. 더 이상 목적도 죽여야 할 사람도 없었다. 이제 휴를 보러 갈 시간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더미가 산장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잠시 산장을 둘러본 뒤 아들의 무덤을 찾았다. 한데 그 작은 둔덕이 보이지 않았다. 그새 지형이 바뀌었거나 내 기억이 흐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의 무덤을 찾아 풀을 자르고 또 잘랐다. 생각 같아서는 힘을 써서 죄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들의 무덤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농부처럼 낫을 든 채 조금씩 풀을 베어내야 했다.
그날 하루를 다 쓰고 다음 날, 또 다음 날이 지나자 점차 초조해졌다. 아버지가 아들의 무덤을 찾을 수 없다니 참을 수 없이 배덕한 일로 느껴졌다. 홀린 듯 풀을 베고 또 베었다. 손에 잔뜩 생채기가 생겼다. 그러는 동안 내가 찾은 것은 오래 되지 않은 늑대 배설물뿐이었다. 늑대 새끼 휴의 것일까? 실없이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흘째에 이르러 거의 주저앉을 지경이 되었다. 근방의 풀이란 풀은 거의 다 베었는데 무덤 비슷한 것도 없다. 어쩌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홍수나 산사태가 나서 무덤이 떠내려 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숲 반대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기에 기척을 죽이고 그리로 다가갔다. 사람이라면 암살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사람 아닌 짐승이었다.
"휴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불렀다. 늑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라고 하기에 그 늑대는 너무 늙어 있었다. 빛이 바랜 회색 털에 이가 빠지고 나처럼 한쪽 다리마저 저는 놈이었다. 어쩌면 내가 찾아낸 배설물의 주인인지도 모른다.
"아니로구나. 내가 찾는 늑대는 아직 작고 젊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 년 전의 일이었다. 휴는 그때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테고, 어쩌면 눈앞에 있는 이 늑대처럼 변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설마하면서 늑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야생 늑대라면 보일 리 없는 반응이 왔다. 녀석은 순순히 내게 걸어와서는 다리에 얼굴을 슥 비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휴야, 정말로 너냐?"
늑대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잘못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한 그리움과 반가움이었다. 갑자기 왈칵 비애가 치솟았다.
"네가 정말로 그 녀석이란 말이냐?"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물으면서도 나는 녀석을 하염없이 끌어안았다.
"어찌 이리도 금세 늙었단 말이냐. 이토록 참혹한 지경이 되다니."
내가 녀석을 돌봐주어야 옳았을까? 사람 손에서 안락하게 자란 늑대 새끼가 숲에서 어찌 살아갈지 생각해봐야 했을까? 나는 녀석을 거칠게 쓰다듬고 다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비록 녀석은 늙었지만 깊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래. 보내준 것이 옳았을 게다. 이제사 진실로 숲의 짐승답구나."
녀석은 귀를 쫑긋했다. 그러곤 몸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녀석을 따라갔다. 녀석이 멈춘 곳은 어느 작은 둔덕 옆이었다.
"……맙소사."
그제야 나는 완전히 방향을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산장에서 북서쪽이 아니라 북동쪽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틀린 방향의 풀만 모조리 베고 있었다.
"네 녀석이 나보다 똑똑한 것만은 틀림없구나."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아들의 무덤가에 앉았다.
"아버지가 왔다. 휴야."
아들은 언제고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늑대 휴는 그로부터 얼마를 더 살지 못했다. 늑대의 수명이란 고작 십여 년이 다였던 것이다. 녀석은 죽기 전까지 비척거렸고 늘 힘겨운 듯 헐떡였다. 그러면서 나를 볼 때면 나는 아들이 자신을 그만 보내달라고 말하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내게 부탁하지 말려무나."
휴는 체념한 듯이 엎드렸다. 먹이를 줘도 먹지 않고 물도 간신히 한두 모금 마실 뿐이었다.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낀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지만.
힘없이 누워만 있던 휴가 어느 날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을 때 녀석이 드디어 기운을 차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반시간 동안이나 운 녀석은 그대로 절명했다.
아직 따뜻한 녀석을 품에 안고 나는 끝없이 후회했다. 짐승 새끼 따위 거두는 게 아니었다. 그네들은 나보다 먼저 늙어버린다. 아비보다 먼저 간 자식처럼 배덕하기 그지없다. 다시는 그 같은 것에게 정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하늘 아래 휴라는 이름은 없다. 아들도 늑대 새끼도 나를 두고 먼저 가버렸다. 무슨 뜻이 있어 이 악한만이 계속 살아남는가. 아직 내게 남은 업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녀석을 아들 곁에 묻었다. 언젠가 나도 그 곁에 묻힐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돌아서라."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누군가 기척 없이 등 뒤까지 접근해온 것을 알지 못했다. 강호에 나온 뒤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아마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별로 놀라거나 감흥이 일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대로 돌아서니 눈앞에 강인해 보이는 무사가 서 있었다.
"나를 기억하는가?"
내가 거둔 목숨이 몇인데 일일이 기억하겠는가. 누구의 제자나 아들쯤 되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이름은 자운이다."
아아, 그래. 그 이름이라면 기억하고 있었다. 자비의 아들이고 운이 가르쳤던 아이다. 과연 어릴 적 그를 자극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다.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아이는 이제 강호에 일대일로 더 이상 적수가 없어 보였다.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너를 찾아가 복수하겠노라고."
기억한다.
"가서 검을 가져와라."
그의 말에 무의식중에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만져지는 게 없었다. 검을 산장에 놓고 나온 것이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런 애송이를 비웃었던 게 누구더라?
자운은 기다리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섰다. 나는 산장으로 가기 전 두 개의 작은 무덤을 돌아보았다. 내가 죽으면 이들 곁에 묻어달라는 말이 필요할까? 아니.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혈공이다. 하늘 아래 사혈공의 적수는 없음이로다!
 
 
산중 달 아래 긴 늑대의 울음소리, 낮을 찾아 우는가 벗을 찾아 우는가. 지난날에 반짝였던 눈물과 비애와 그리움 찾아 우는 것인가.
구슬프다. 무덤가에 진 혈화(血花)만큼이나 구슬프다.

작가소개 / 하지은(소설가)

– 1984년생

– 서울시립대학교 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 졸업

– 전작 : 『얼음나무숲』(2008), 『모래선혈』(2009),『앵무새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이다』(2009 꿈을 걷다 단편집 수록),『나를 위한 노래』(2010 꿈을 걷다 단편집 수록), 『보이드씨의 기묘한 저택』(2010)

후기

예전부터 무협만이 가지는 멋과 향취를 동경했습니다. 이렇게 기회가 닿아 감히 그것을 흉내내어 보게 되었습니다. 작업하면서 정말 즐거웠고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하고 소소하게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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