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약속이 불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조   현



1. 


 둔탁한 납빛, 허공을 천천히 헤엄치는 청동의 물고기들. 수초처럼 일렁이는 쓸쓸한 밤의 안개와 모호하게 부유하는 잿빛 물결. 그리고 위급한 비명과 작은 사이렌 소리.


 서연은 아직도 혼수상태였다. 모 방송사의 삶의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의식불명이 된 지도 벌써 일주일. 데뷔초의 청순함과 인기가 많이 사그라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서연은 크게 히트를 친 데뷔작의 여주인공이었으며 그해 이런저런 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을 휩쓸기도 했다.


 따라서 늦겨울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연일 취재진이 병원 입구에서 장사진을 치고, 들락거리는 의사들에게마다 서연의 경과에 대해 묻곤 하였다. 특히나 거액의 한일합작영화에 주연으로 기용될 수 있다거나, 그 차기작은 지금까지의 청순한 이미지를 벗어던진 아주 에로틱한 멜로물이 될 것이라는 미확인 소문도 있어 취재는 더 극성이었다.


 서연의 사고가 발생한 곳은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들을 돌보는 한 사회복지시설이었다. 사고는 비좁은 식당 한 구석에 쌓아둔 철제 식탁들이 급하게 자리를 옮기던 조명장비의 전선과 얽히면서 쓰러져 아이들의 식사를 돕고 있던 서연을 덮치면서 벌어졌다.


 맨 처음 부딪친 팔목의 골절은 두어 달 정도의 깁스로 치료할 수 있는 정도였으나 넘어지면서 철제 다리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당시 사고 상황을 담은 테이프는 이미 뉴스를 통해서도 방영되었는데, 녹화된 상황을 보면 맨 처음 철제 식탁들이 위태롭게 쓰러지면서 위험에 처한 것은 무함마드라는 아랍계 아이였다. 그런데 그 한 호흡 순간, 서연이 아이를 밀치면서 대신 깔린 것이었다.


 오늘도 서연의 병실에는 목숨을 구한 무함마드의 어머니가 와서 아랍식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한 서연의 병실에는 취재가 통제되고 있었지만, 생명의 은인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걸 말릴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위로를 받는 장면이 서연 자신이나 회사를 위해서도 플러스가 된다는 소속사의 방침에 따라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면회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서연의 소속사 사장은 방송용으로 무함마드 어머니의 간호 장면을 몇 컷 찍으라고 지시하면서 매니저에게 물었다. “어때? 바깥 상황은?” “CF쪽은 지금 난리 났습니다. 서연 양이 깨어나면 광고 찍겠다고 벌써부터 서고 있습니다.” “뭐, 하긴 미모의 여배우가 어린 아이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몸을 던졌으니 요새 같은 때에 휴먼드라마도 이런 휴먼드라마가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요번 체험 프로 건도 차기작 계약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인지도 좀 띄워볼까 하는 차원에서 추진한 거였는데 말이지…….” 사장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려다가 병원의 금연표지에 필터만 아쉽게 매만지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미담이 해외에까지 토픽으로 보도되면서 일본 쪽에서도 계약에 매우 긍정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걔네들 미담에 쫌 약하잖아. 그건 그렇고 저 아줌마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아까 언론사 연예부 기자들도 궁금해 해서 제가 물어봤는데요, 자기네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옛날 민담이랑, 또 무슨 레바논 시인의 시(詩)랍니다. 요번에 목숨 구한 애 아빠가 그쪽 출신이라잖아요.” “뭐든 좋은 얘기겠지. 근데, 얘는 도대체 왜 사고를 쳐서 사람 혼을 쏙 빼놓는 거야? 뭐, 어쨌거나 전화위복이라고 이제 서연이만 일어서면 완전 대박 치는 거야, 우리 팔자 쫙 피는 거라구.”

 

 환자의 안정을 위하여 촬영기사 한 명만 대표로 들어와 조용히 촬영하는 동안에도 이 레바논 여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끊임없이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2. 


 옛날 옛적, 그러니까 레바논의 이백 큐빗짜리 백향목이 오래 산 노인들의 지팡이처럼 작았을 무렵, 지중해 바닷가의 작은 읍내에 리디아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죠. 리디아는 흑요석처럼 까만 눈을 가지고 있는 신실한 처녀였는데, 어느 날 읍내에 질그릇을 팔러 나왔다가 시장통 입구의 대추야자 아래에서 한 젊은 음유시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시리아산 홍옥석보다도 더 붉은 입술로 기이한 환상이 잿더미처럼 타들어가는 이계의 마법과 불사조처럼 그 잿속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선홍빛 꽃을 노래하고 있었죠.


 응당 자비로우신 알라─그 거룩하신 이름에 백만 개의 별들보다 더 빛나는 영광이 있기를!─의 은총으로 리디아는 한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죠! 사실 세상의 어떤 소녀라도 지중해의 미풍보다 감미롭고, 짓다해1)의 물결보다도 정열적인 음성을 듣는다면 시리아 사막보다도 더 뜨거운 사랑의 열기에 사로잡힐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어여쁜 리디아는 또한 자애로운 부모로부터 마땅히 정숙한 무슬림 처녀가 갖추어야 할 절제의 미덕을 훈육 받은 터였으므로 여느 이교도의 여식들처럼 맨 얼굴을 내밀고 부끄럽게 그의 사랑을 갈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리디아는 샬와콰미즈2)를 단정히 매무시하고, 오히려 두파타3)를 뺨으로 더욱 밀착시킨 채 더욱 조심스럽게 그 남자의 목울대와 두터운 어깨와 그리고 경건한 이마마4) 사이로 몇 가닥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보았답니다.


 그 남자의 늠름한 모습은 다마스쿠스의 높은 성벽보다도 더 굳건했고, 그의 눈은 지중해의 푸른 물결보다도 더 짙은 청록빛 주뭇루드5)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여 리디아는 흩날리는 두파타 사이로 그 마즈눈6)의 노랫말과 음률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세세하게 자신의 기억 속에 각인시켰습니다. 


 그 다음으로 리디아가 선택한 것은 성지순례였습니다. 리디아가 태어난 다마스쿠스 근동에서는 여느 무슬림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지순례를 마친 사람에게는 남성의 경우 핫지, 여성인 경우에는 핫자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는데요, 이 핫지 혹은 핫자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사람에게는 귀향 후 은혜로우신 알라─그 거룩하신 이름에 백만 권의 책보다도 더 위대한 지혜가 깃들기를!─의 이름으로 한 가지의 소원을 얘기할 자격을 주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지요.


 처녀로서는 두 세대 만에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이라고, 마을 여인들의 축복과 그리고 약간의 시샘을 받으며 리디아는 메카로 향하는 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었는데요, 암만에서의 몸살이라든가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밤이라든가 하는 모든 고통도 신실한 신앙과 굳건한 신념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리디아에게 첫 번째 시험이 닥쳐온 것은 메카도 이제 열흘 거리에 위치한 메디나 시내에 도착해서였습니다. 그날 밤 창문으로 달을 쳐다보며 리디아는 그 음유시인이 노래했던 아네모네7)의 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홀연 진8)이 나타났던 거지요.


 하지만 지중해의 오래된 항로(航路)만큼이나 신앙심이 굳건했던 리디아에게, 진이란 정령 따위는 알라의 말씀으로 충분히 경계할 수 있었던 터, 크게 놀라진 않았습니다. 진이 말했습니다. “거룩한 알라의 신도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며 또 어디를 가고 있느뇨?” 충만한 용기를 지닌 리디아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미천한 종 리디아라고 하며, 핫자의 칭호를 얻고자 메카로 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자 진은 물었습니다. “그대가 핫자의 칭호를 얻고자 함은 금과 은의 이익을 위함인가, 주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명예를 위함인가, 혹은 세상을 경륜하는 지혜를 얻기 위함인가?”


 리디아는 잠시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핫자의 칭호를 얻기 위함은 이익이나 명예, 혹은 지혜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하고도 은혜로우신 알라께서 운명 지워주신 사랑을 얻기 위함입니다.” 진은 말했습니다. “그렇구나. 그대가 고백한 그 말의 진실성은 그대의 행동으로 증명될 터이니!” 그리고 홀연 진은 나타날 때처럼 연기로 사라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隊商)들과 함께 출발하려는데 메디아 길거리에 한 어미가 젖먹이와 함께 쓰러져 있었습니다. 상인의 우두머리가 외쳤습니다. “저 여인네는 히잡9)도 두르지 않고 부끄러이 맨얼굴을 드러내니 이교도의 여식이 틀림없다. 저 여식을 보살피다간 이들 아드하10)에 쓰일 가축을 팔 수 없을 터, 그러니 우리는 번제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출발하자! 제사에 쓰일 낙타와 양을 공급하는 것 또한 알라의 영예를 위한 일일 터!”


 대상 무리에 섞여 길을 나선 순례자들도 외쳤습니다. “나는 이번 여행을 위하여 이미 많은 길을 걸어왔다. 지금 지체하면 핫지의 영예를 얻을 수 없겠다. 성지순례는 지엄하신 알라께서 명령하신 신성한 의무이므로 응당 길을 나서야겠다. 이 또한 위대하신 알라의 사도 무함마드께서 지시하신 당부일진저!”


 마지막으로 남은 소수의 순례자들 역시 꼼짝도 못하고 쓰러져 있는 그 어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명 이곳 메디나에도 무슈리크11)따위의 이교도나 하라피시12)를 구제하는 관청이 있을 터, 그대는 그곳으로 가 보라!” 그리고 은화 몇 닢을 던져주며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솨다까13)의 계명을 지켰노라! 이제 율법도 지켰으니 지엄하신 알라께 더 큰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성지로 향하도록 하자!”


 그렇게 상인들과 순례자의 무리는 떠나갔지만, 꼼짝도 못하고 쓰러져 있는 여인과 우는 아기 때문에 리디아는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착한 처녀는 메디나 시내에 며칠간 눌러 앉아 이 이교도 여성의 병세를 간호하며 그녀의 젖먹이를 달랬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 히즈라역14)으로 벌써 12월 초이레가 되었습니다. 성지순례로 인정되는 기간이 12월의 초여드레부터 단 닷새뿐이니 리디아의 성지순례는 이미 물거품처럼 사그라진 것이라도 봐도 좋겠지요.


 리디아는 메디나에서의 첫날밤처럼 달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녀는 몇 달간 그토록 염원해 왔던 성지순례의 기회를─더더구나 핫자의 칭호를 얻어서 은혜롭고도 측량하기 어려운 지혜를 가지신 알라의 자비를 구할 기회를─ 이렇게 덧없이 흘려보낸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 음유시인의 노랫말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시리아에 피어오르는 아네모네 꽃보다도 더 붉은 입술로 무슬림에게나 이교도에게나 편견 없이 알라의 자비를 행하는 선한 덕성을 찬양했으니까요. 아마도 그 노래 때문에 차마 쓰러진 어미의 곁에서 목 놓아 우는 젖먹이를 두고 길을 떠나지 못했던 거라고 리디아는 생각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또다시 홀연한 연기와 함께 진이 나타난 것은! 진은 말했습니다. “거룩하신 알라의 신도여, 그대는 왜 그리 구슬피 울고 있느뇨?” 아름다운 처녀는 대답했습니다. “이교도 모녀의 목숨을 구제하여 알라의 자비를 증거한 것은 다행이었습니다만, 이미 열흘의 시간을 보내어 핫자의 소망을 이루지 못함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진은 말했습니다. “지엄하신 알라의 충실한 신도여, 그대가 이곳에 머문 기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노라. 이 열흘의 시간은 그대가 미망(迷妄)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알라의 선물을 간구한 시간이었느니! 그리하여 이미 그대는 분별 있는 선택으로 그대의 용기를 증명함과 동시에 은혜롭고도 자비로우신 알라의 이름을 빛냈노라. 자, 이제 내가 너를 메카의 성벽으로 데려다 주겠노라.”


 그리고 진은 리디아를 자신의 옷깃으로 감싸더니 밤하늘의 아라비아 사막을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리디아는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오른쪽으로 멀리 펼쳐진 검은 바다를 보았습니다. “거룩하신 알라의 종복인 진이여, 저 안개와도 같은 잿빛 물결은 무엇입니까?” 진이 대답했습니다. “저 바다는 존엄하신 알라의 충복인 모세가 그의 백성을 이끌고 파라오의 궁전을 나오면서 깊은 물결을 갈랐던 홍해이니라. 대저 알 할리끄15)의 능력은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의 종복을 시험하시는 법! 그대도 언젠가는 밤의 홍해처럼 모호하게 일렁이는 잿빛의 암흑을 가르고 피안(彼岸)을 건너야 할 터인즉!”


 리디아는 알라의 권능을 찬양하면서 사막을 건너는데 한 무리의 대상(隊商)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리디아는 물었습니다. “저 무리는 저와 함께 메디아에 묵었던 그 상인들과 순례자가 아닙니까?” 진은 대답하였습니다. “그렇도다. 저 무리는 사막의 마신(魔神)이 일으킨 돌풍에 휩쓸렸느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알 라흐만16)의 은혜를 증명하는 이가 있었다면 저렇게 팔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저 목숨만이라도 건져 거룩한 성도에 도달하는 것도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은총일진저!”


 이렇게 알라의 거룩하신 권능으로 정확한 시간 안에 성지에 도착한 리디아는 예의 성지순례 의식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허름한 흰색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하람 사원의 카으바 신전으로 가서 “주여! 제가 당신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왔나이다!” 하고 탈비야를 외치며 행진하였습니다. 이것을 이흐람이라고 하죠.


 다음으로 카으바 신전 중앙의 흑석에서 출발해 신전을 일곱 바퀴 돌고 나서 다시 흑석에 입을 맞추는 따와프 의식과, 하람 사원 내에 있는 사파 동산과 마르와 동산 사이를 일곱 차례 뛰어서 왕복하는 싸이 의식도 마쳤습니다. 이 의식은 아브라함의 처 하갈이 아들인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를 헤매다가 기갈이 든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고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리디아는 자비의 산(山)인 잘 라흐만에 머물면서 순조롭게 우크프 의식도 행하였습니다. 다음날 악마의 기둥에 던질 일곱 개의 조약돌도 모으고 무즈달리파 사막에서의 야영도 마쳤던 것이지요.


 리디아에게 두 번째 시험이 닥친 것은 다음날 미나 평원의 악마의 기둥 앞에서였습니다. 성지순례의 마지막 의식으로 악마의 기둥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모여든 순례자들 사이에 리디아 역시 줄을 서서 조약돌들을 만지작거릴 때 사막의 마신이 나타난 것이지요.


 리디아는 늙은 베두인족 노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사막의 마신을 처음 볼 때부터 수상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노인은 리디아가 만지작거리던 조약돌을 보고 순간 움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명하고 영리한 리디아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이 노인이 지난번에 만난 진과는 달리 알라를 경외하지 않는 요령(妖靈)임을 알아챘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이교도이거나 혹은 알라를 경외하는 정령이라면 악마의 기둥에 던질 조약돌을 보고 흠칫 놀랄 리는 없을 테니까요.


 때문에 리디아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이다!”라고 연신 샤하다17)  외우며 경계를 했습니다. 그러자 마신은 리디아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슨 연유로 그대의 신의 자비를 갈구하여 이토록 먼 길을 걸어왔는가? 그 음유시인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그 청년의 늠름한 몸인가? 나에게 경배하면 인간의 성대가 지어내는 모든 음과, 그 육신에서 짜낼 수 있는 모든 쾌락과, 인간의 지혜가 형상화할 수 있는 온갖 기이한 사물들을 주겠노라!”


 그리고 마신은 불길하게 생긴 거울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홀연 어젯밤 야영했던 무즈달리파 사막으로 바뀌더니 거울 속에 리디아의 심령 깊은 곳이 비추어지면서 리디아가 꿈에서조차 떠올리기 꺼려했던 모든 내밀한 욕망이 음습하고도 달뜬 안개처럼 펼쳐졌습니다.


 한순간은 술탄의 황후가 되어 온갖 산해진미의 미각을 맛보는 쾌락이 찾아오는가 하면, 생전 처음 보는 악기가 자아내는 기묘한 음률이 귀를 파고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간혹 접하던 야싸민18)이나 아주 드물게 맡아본 적이 있는 용연향19)이나 갈리야20)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오묘한 향내 속에서 생각만으로도 부끄러운 체위로 자아내는 온갖 육체의 황홀경이 농익은 복숭아처럼 펼쳐져, 알라를 경외하는 이 순진무구한 처녀의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듯 거울의 풍경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공간적으로는 마슈리끄21)에서 무즈달리파 사막을 거쳐 마그리브22)까지의 온 세상을,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마신들이 창궐했던 고대의 바빌론의 궁전에서 시작해 그리스의 이교도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신전을 거쳐 리디아가 생전 들어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던 미래의 도시로 변화하면서 이 처녀의 내밀한 관능을 속속들이 심령의 깊은 우물에서 끄집어내었습니다.


 마신은 말했습니다. “너는 피할 수 없다! 네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모든 것은 곧 인간의 심연에서 걷어 올리는 네 자신의 욕망일지니!” 마신의 말처럼 리디아는 애써 도망치려고 했으나 피하려고 연 문에서는 이전 문보다도 더 큰 관능과 물욕이 펼쳐졌습니다.


 리디아는 그 기묘한 정욕에 동화되어가는 마음을 바로 잡으려 손 안에 든 조약돌을 힘껏 마신의 거울이 자아내는 황홀경을 향해 던졌습니다. 리디아가 그렇게 조약돌을 던져나가자 불길한 거울에 금이 가며 모호한 안개와 달뜬 열기가 가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나머지 돌을 던지자 환상이 하나씩 깨어지고 드디어 마신이 자신의 흉악한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분하구나! 우크프의 돌23)로 나의 마법을 깨뜨리다니!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돌의 힘, 그대 자신의 진정한 선택은 아닐지니! 그대가 그대 자신의 내밀한 욕망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리는 날, 나는 그대의 진실한 선택을 다시금 시험하고자 하려니!” 그렇게 외치고 마신은 물러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리디아는 두 번째 시험을 이기고 번제를 올리는 이들 아드하의 제의도 무사히 마치고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메카 순례를 마치고 그녀는 자애로우신 알라─그분의 이름에 백만 송이의 꽃보다 더 향그러운 방향이 머물기를─의 은총 아래 모든 칭호에 앞세우는 핫자의 영예를 얻게 된 것이죠.


 자, 이제 핫자 리디아가 된 이 처녀가 귀향 후 다마스쿠스의 제일원로인 현자 이맘 앞에서 무슨 소원을 청원했는지 짐작하시겠죠! 네, 그렇습니다. 이 집념어린 처녀의 순결한 청혼을 받은 남자의 이름은 알 와라한24)이었습니다!


 그리고 핫자인 여성의 청혼을 받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이었으므로, 알 와라한의 가문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한 쌍의 부부는 달콤한 신혼을 보내며 알라의 은혜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낮이면 남편 알 와라한은 아부 누와스25)보다 더 맑은 목소리로 알라의 은혜와 사랑의 간절함을 노래하고, 밤이면 아내 핫자 리디아는 사랑스러운 남편이 부르는 노래를 잘 말린 대추야자 잎에 옮겨 적곤 했습니다.


 리디아는 남편이 들려주는 기쁜 이야기에는 손뼉을 치고, 거룩한 이야기에는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때로는 슬픈 이야기에 고요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듯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는 현명한 아내의 도움으로 알 와라한은 자신이 짓는 노래에 더욱 더 자긍심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남자는 생각했습니다. 사랑에 미쳐 모래언덕을 헤맨 시인 카이스26)의 슬픈 운명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하구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드디어 리디아에게, 유예된 최후의 시련이 찾아온 것은요! 그것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젊은 시절 다녀온 적이 있던 먼 북녘의 이틸강(江)27)에 내린 눈처럼 이들 부부의 머리칼에도 흰 빛이 내린 때였습니다. 어렵사리 북시리아를 다녀오면서, 이들 부부는 다소 슬픔에 젖어―이번 나들이가 생의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되어―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사막을 건널 때, 리디아는 사막의 신기루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알 와라한, 저기 저 사막 위로 신기루가 보이나요?” 리디아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어여쁜 리디아, 내 눈에도 신기루가 보인다오.” 그러자 리디아는 말했습니다. “저는 저 신기루보다 더 선명하고 더 황홀한 무엇을 본 적이 있었답니다. 그것을 어찌 묘사하면 좋을까요? 그건 뭐랄까 이교도 성당의 천정화보다도 훨씬 더 선명한 색채로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었어요!”


 노(老) 시인은 대답하였습니다. “아직도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리디아! 대저 신기루라는 것은 이 사막의 한 가운데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오. 밀빵을 굽는 우리들의 부엌에서나 낙타를 사고파는 시장에서나, 혹은 초조하게 비를 기다리는 목초지에서나 심지어는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거룩한 사원에서도 신기루는 인간을 미혹하기 마련이오. 그렇소, 사람들은 자비롭고도 자애로우신 알라께서 지으신 모든 진리에 대한 의혹을 가질 때 아찔한 신기루를 보게 된다오. 불길한 미망에 빠져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바른 길을 걷지 못한다면 우리 삶의 사막에서 스스로 길을 잃고 말아 어쩌면 영영 헤어날 수 없는 갈증으로 목이 타버리는 그 심연을 말이오.”


 그러자 리디아는 다소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알 와라한! 당신이 진정한 신기루를 보지 못해서 그래요! 사실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제가 열일곱 살 되던 해, 성지순례를 위해 메카에 도착한 때 악마의 기둥 앞에서 한 마신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마신은 제게 인간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것들을 보여주었답니다. 알 와라한! 우리는 젊은 시절부터 알라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온갖 이국의 풍물을 찾아다녔고, 또 밤이면 불붙은 놋쇠 등잔 아래에서 뜨거운 사랑을 탐했지요. 알 와라한! 저는 아직도 당신을 깊이 사랑하지만, 이렇게 세월이 흘러 육신의 기력이 쇠해지니 처녀 시절 미나의 평원에서 보았던 그 마법의 환상이 떠오른답니다! 그 기이한 환상을 다시 한 번 봤으면!”


 바로 그 순간 사막의 돌풍이 리디아에게 쏟아져 그녀를 낙타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리디아의 귀로 마신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냐! 이제야 나의 마력을 알아보겠느냐? 나의 권능과 내가 섬기는 이블리스28)의 권세에 경배하라! 그리하면 너에게 백 마리의 낙타에도 다 실을 수 없는 금은과 향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미모와 젊음, 그리고 그 신기루의 세계에 드날리는 명성과 영예를 주겠노라!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니 들어가라! 나조차 잠이 들면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이계의 차원으로!” 그 순간, 낙타의 발굽에 머리를 차인 리디아는 아득히 혼절하고 말았습니다.



3.


 서연은 검은 물 한 가운데에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것도 숨을 쉴 수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탁한 잿빛으로 일렁이는 밤바다는 서연에게 참을 수 없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수초 모양의 아지랑이가 서서히 공간을 일그러뜨리더니 이윽고 강한 산(酸) 냄새가 풍겨왔다. 그것은 수산화나트륨에 비릿한 돼지피를 섞은 냄새였다. 그 음습하고도 시큼한 자극은 서연이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오랫동안 봉인한 유년의 냄새.


 어려서부터 서연은 자라면 자랄수록 더 탁월해지는 성대와 이목구비를 가졌다. 물론 거기에 비례하여 반 아이들의 질시는 더욱 심해졌다. 물론 단순한 질시뿐이었다면 천성이 여렸던 서연도 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부잣집 여자애들의 시기가 따돌림과 은밀한 폭행으로 전이된 것은 서연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찌검과 가난에 못 이겨 집을 나간 후부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건이 있었다. 점심시간 서연이 희석되지 않은 수산화나트륨이 담긴 물병을 들이킨 것은. 다행히 선생님의 빠른 발견으로 위세척을 하여 건강에는 지장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서연은 누구나 쉽게 사로잡히는 돈의 힘을 깨달았다. ‘사람에게는 돈이 절실해. 돈만 있었다면 어머니도 집을 나가지 않았을 테고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역시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가난뱅이 주제에 생긴 것만 여우같이 생겼다고 따돌림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서연은 생각했다. 그리고 또 서연은 생각했다. 나에게는 내세울 것이 있어, 나의 목소리와 또 나의 눈동자!


 그러므로 사춘기 시절 연예기획사의 문을 먼저 두드린 것도 서연이었고, 이 세계의 온갖 비열한 추태도 응당 그런 것이려니 하고 감내한 것도 그녀 자신이었다. 사실, 이번에 외국인 노동자 자녀를 대상으로 한 체험 현장 프로그램도 스케줄상 곤란한 기획이었지만, 점차 무디어져가는 집념을 다잡으려고 서연 스스로가 강하게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촬영 당일, 서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강추위는 가셨다고는 하나 아직도 차가운 날씨에, 촬영장인 보육시설에서 손을 호호 불고 있는데, 한 아이가 화분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요새 같은 한 겨울에 이런 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꽃잎이 붉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서러운 빛깔. 서연은 아늑한 기분이 들어 물었다. “꼬마야, 넌 이름이 뭐니?” “무함마드!” 서연을 잠시 응시하던 소년은 부끄러웠는지 그렇게만 말하고 달아나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원장이 한 마디 거들었다. “쟤는 레바논계 아이인데 지금 엄마하고만 있어요. 작년에 아빠가 다쳐서 본국으로 이송되고 난 뒤에 더 부끄러움을 타던 아이인데 오늘은 어쩐 일로 화분을 가져다주었을까요.”


 아마 그래서였을까. 철제 식탁들이 쏟아지면서 아이를 덮치려 할 때 서연이 그 아이의 눈빛과 마주친 것은. 일초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순간에 서연은 그 아이의 눈에 담긴 깊은 슬픔과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외로움을 보아 버렸다. 그렇다. 그 눈빛은 오래전부터 서연이 애써 잊고자 했던 수산화나트륨의 냄새였고, 그녀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연민에 대한 냄새였다. 그렇다. 그 아이의 힘 빠진 어깨는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엄마가 없어서 한없이 들썩였던 그녀의 어깨였고, 아이의 눈망울은 병원에 처량하게 누워 있던 그녀 자신의 눈동자였던 것이다.


 오랜 세월 출세에 대한 의지로 달려왔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명 감춰진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나 외모가 자아내는 성취감이나 영예를 넘어서는, 서러운 그 무엇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 옛날 서연이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단 하나뿐인 친구가 가져다 준 이름 모를 꽃의 처연한 붉은 빛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서연은 볼 수 있었다. 한없이 발목을 감아대는 미끄러운 수초처럼 어두컴컴한 물이 아무리 그녀의 눈꺼풀을 아릿하게 자극할지라도, 아까부터 심장의 저편으로 희미하게 출렁이며 미세한 온기를 뿜어내는 빛의 입자들을!


 서연은, 자기가 헤엄쳐 나온 편을 잠깐 돌아보고 아이를 밀칠 때와 똑같은 압력으로 신열과도 같은 꽃잎의 온기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리고 생각했다─이 부유하는 석회빛 안개를 가르면 나는 존재의 피안에 다다를 수 있을 터.



4.


 리디아가 깨어나서 처음 본 것은 피보다 붉은 빛깔의 아네모네였습니다. “드디어 깨어났구려! 정확히 열흘 만이오.” 그리고 알 와라한은 기쁨에 젖어 알라에게 칭송을 외쳤습니다.


 “어찌 된 일이지요?” 현기증을 가라앉히며 리디아가 물었습니다. “생각나지 않소? 우리가 시리아에서 돌아올 때 다마스쿠스 사막에서 돌풍이 불어 당신이 떨어졌던 것이? 그래서 내가 재생을 뜻하는 화초를 당신 곁에 두고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께 그대의 회복을 간절히 기원했다오!”


 “아! 사막에서의 돌풍이 기억나요, 그리고 그대가 젊은 시절, 제일 먼저 얼어붙은 땅에서 눈을 헤집고 솟구쳐 오르는 이 꽃 아네모네를 노래한 것도요! 알 와라한! 저는 기절하는 동안 꿈속에서 옛날 메디나에서 제가 간호하던 그 여인네를 보았답니다. 그 여인네는 제게 한없이 그리운 음로 그대가 젊은 시절 대추나무 아래에서 불렀던 노래를 제게 들려주었지요! 그때 그대는 잿속에서 피어올라 눈을 태우는 불의 꽃을 노래했지요. 그리하여 그대는 잿더미를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위대하신 알라께서는 잿더미 속에서도 선홍빛의 사랑을 부활시킨다고요! 그때, 아네모네의 불타오르는 핏빛을 알라의 놀라운 은총에 기대어 노래하는 그대의 목소리가 어쩌면 그리도 늠름하고도 확신에 차 있던지!”


 그리고 리디아는 계속 말하였습니다. “사실은 이번에 다마스쿠스의 사막에서 잠시 알라의 은총을 의심하여 기절한 사이 마신으로부터 참으로 기이한 유혹을 받았답니다! 마신이 보여준 꿈속의 이계에는 낙타도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쇠마차가 즐비했고, 또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루흐30)의 뱃속에 앉아 한나절 만에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여행을 다니는 기이한 세상이었지요. 저는 그곳에서 아주 아름다운 여자로 젊음을 되찾았지요! 그곳은 기이한 쾌락과 마술적인 도구들이 가득한 세계였지만,” 이렇게 말한 후에 핫자 리디아는 숨을 잠시 멈추고, 백발의 머리칼에도 불구하고 열일곱 살 되던 어느 해의 처녀시절처럼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마저 속삭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사랑만큼은 없었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으신 음률을 쫓아 어둠의 물길을 가를 수 있었답니다!”



5.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수아드가 조용하게 읊조리는 것은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 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이었다. 아직 수아드가 어렸을 적 그녀의 할머니는 자신의 손녀에게 이 오래된 민담을 일러주며, 진심을 다해 읊조리면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는 알라의 큰 은혜가 내릴 것이라고 했었다.


          나는 네가 계속 잿더미 속에 있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네가 낮을 바라보기를 또는 초월하기를 기도했다─

          우리는 너의 밤을 탐험하지 못했다

          우리는 어둠과 함께 바다를 항해하지 못했다

          불사조야,

          나는 마법이 멈추기를

          우리의 약속이 불 속에서, 잿더미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나는 광기가 우리를 이끌어주기를 기도했다


 수아드는 오늘도 서연의 머리맡에 앉아 먼저 부활과 재생을 일깨우는 아도니스29)의 시 한 편을 읽은 다음 할머니가 일러준 옛 민담을 고요히 속삭였다. 부디 자신의 아이의 목숨을 구한 이 이국의 처녀에게 자비롭고도 자애로우신 알라의 은혜가 내리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하면서 수아드는 한 고귀한 처녀가 미망의 시험을 끝내 이기고 알라의 자비를 증거하는 옛 이야기를,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심령을 다해 읊조렸다.



6.


 이렇게 하여 리디아는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알라의 세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사랑하는 노(老) 시인과 신실한 눈빛으로 재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은총으로 무사히 다마스쿠스 근교의 고향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후로도 때때로 리디아는 생각했습니다―진정한 용기란 스스로의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시험할 수 있으며, 신실한 기도란 생의 가장 처연한 순간에 모세의 결단처럼 어두운 바다를 가르는 것이라고요.


 또 리디아는 생각했습니다. 알라께서 또 한 번의 생을 선물하여 주신다 하여도 열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대추야자 밑에서처럼 선홍빛 사랑의 비밀을 노래하는 이 남자를 운명처럼 만나고 싶다고 말이죠.


 이렇게 알라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이들 부부는 자비로우신 신께서 허락하시는 오랜 동안의 천수를 마저 누렸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알 와라한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답니다!


 이제 이승에서의 소중한 인연은 다했으니, 인자하신 알라─그분의 이름에 백만 개의 횃불보다도 더 타오르는 열정을 주시기를─께서 먼 훗날 무덤을 쪼개고 하늘의 구름을 솔질한 양털처럼 만드시는 부활의 날이 오면! 그러면, 그때도 나는 알라께 간구하여 그대에게 또 한 번 아네모네의 붉은 꽃을 노래하리다!



7.


 혼수상태에 있던 서연이 끝내 숨을 거둔 것은 의식을 잃은 지 정확히 열흘 만이었다. 소속사에서는 여러 가지 아쉬움으로 애도를 하고, 서연의 팬들이나 먼 친척들 역시 그들의 입장대로 슬퍼했지만, 마지막 호흡을 멈추는 순간 서연의 표정은 발그레 웃음을 머금은 듯 너무나 평온했다.


 그리하여 임종의 징조가 보인 순간부터 샤하다를 암송하던 레바논 여인은 서연의 고요한 표정을 보고 “인샬라!”라고 경건하게 속삭인 다음 일어섰다. 그때까지도 서연의 손에는 수아드가 아도니스의 시를 아랍어로 적어둔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대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닐저, 진정한 사자(死者)는 사랑의 확신을 잃은 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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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짓다해 : 홍해를 말한다.
2) 샬와카미즈 : 무릎이나 발목까지 느슨하게 지어진 바지로 보통 두파타와 함께 착용한다.
3) 두파타 : 무슬림 여성이 어깨에서부터 걸치는 숄로 신체의 상반신을 가린다.
4) 이마마 : 무슬림이 머리에 두르는 터빈을 뜻하는 아랍어.
5) 주뭇루드 : 순녹색 보석들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6) 마즈눈 : 정령이 붙어 신들린 사람. 탁월한 시인, 웅변가, 점성가, 설교사들을 뜻한다.
7) 아네모네 : 생명력이 강해 복수초(福壽草)라고도 하고 종종 아도니스 꽃과 혼칭(混稱)된다. 다양한 색이 있고 겨울에 수북이 쌓인 눈을 뚫고 핀다 하여 얼음새꽃, 눈새기꽃, 설련(雪蓮)이라고도 한다.
8) 진 : 이슬람의 요령(妖靈)으로 지니라고도 한다. 대개 인간을 유혹하지만 알라를 경외하는 진도 있다.
9) 히잡 : 두건 모양으로 얼굴만 내놓는 여성용 가리개.
10) 이들 아드하 : 성지순례의 마지막 날에 낙타, 소, 양 등을 도살하여 개최하는 대규모 희생제를 말한다.
11) 무슈리크 : 다신교도.
12) 하라피시 : 사회의 하층민들로서 빈민, 고아, 무의탁자 등을 뜻한다.
13) 솨다까 : 아랍어로 희사, 보시, 기부란 뜻으로 무슬림의 이흐산(선행)에 속한다.
14) 히즈라역 : 이슬람역.
15) 알 할리끄 : 알라의 아흔아홉 가지 별칭의 하나로서 창조자를 의미한다.
16) 알 라흐만 : 알라의 아흔아홉 가지 별칭의 하나로서 자비로우신 자를 뜻한다.
17) 샤하다 :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이다!”라는 두 구절의 신앙고백으로 임종을 앞둔 자에게도 낭송하였다.
18) 야싸민 : 자스민을 말한다.
19) 용연향 : 향유고래로 만드는 고급 향료로 사향과 흡사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20) 갈리야 : 사향과 용연향을 혼합하여 만드는 매우 진귀한 향료를 말한다.
21) 마슈리끄 : 해 뜨는 곳. 즉 동방.
22) 마그리브 : 해 지는 곳. 즉 서방. 현재의 모로코를 뜻하기도 한다.
23) 우크프의 돌 : 성지순례 의식 중의 하나인 우크프는 메카 외곽에 있는 동산 자발 라흐만(자비의 산)에 체류하는 것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자발 라흐만은 지상으로 내려온 아담과 이브가 합류한 곳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크프 의식은 에덴동산으로 귀환을 의미한다. 한편 우크프 의식을 하면서 나중에 악마의 기둥에 던질 조약돌을 주워야 한다.
24) 알 와라한 : 리처드 F. 버턴의 <천일야화>에 잠깐 인용되는 시인이나, 이 작품에 나오는 리디아와 알 와라한의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이다.
25) 아부 누와스 : 고대 아랍의 전설적인 시인. 역시 <천일야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26) 카이스 : 시인의 이름. 이 시인은 라이라는 여성을 무척 사랑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은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사랑에 미쳐 모래언덕을 헤맸는데, 사람들은 그를 마주눈(광인)이라고 불렀다. 그의 생애는 후대 많은 노래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27) 이틸강(江) : 중세 이슬람에서 볼가강을 이르던 명칭.
28) 이블리스 : 기독교의 사탄에 해당하는 존재. 사악한 진들의 왕이라고도 한다.
29) 아도니스 : 1930년 시리아에서 태어나 레바논에서 활약한 현대 시인으로 본명은 알리 아흐마드 사이드이다. 열일곱 살 때 아도니스 신화를 읽고 그 죽음과 부활에 매료되어 ‘아도니스’란 필명을 지었다.
30) 루흐 : 로크라고도 부르는 거대한 상상속의 새.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그리고 리처드 F. 버턴의 <천일야화> 등에 등장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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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사실은 다른 이의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모두들 한 번씩은 해 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삶이 꿈이든 다른 무엇이든 우리 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때의 사랑은 이성에 대한 사랑과 함께 다른 존재에 대한 연민을 포함하겠죠. 하여, 이 작품을 통해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며, 진정한 사자(死者)는 사랑의 확신을 잃는 사람”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리디아와 알 와라한의 모든 이야기는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입니다만, 작품 안에 묘사된 무슬림의 종교와 문화는 대체로 사실에 입각한 것임을 밝힙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꽃 아네모네는 재생과 부활을 노래하는 그리스의 아도니스 신화와 관련이 있습니다만, 이 신화는 원래 중동 지방의 더 오래된 전설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작품은 이 점에서 착안했습니다."


*작가소개*


  조현

 


소설가
 

숭실대학교 행정학과 및 국민대학교 종합예술대학원 졸업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 당선되어 등단

2008년 <현대문학> 및 <문학과 사회>에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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