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자객열전(新刺客列傳)



 

태사공(太史公 : 사마천)이 말했다.

 

"조말(曹沫 : 춘추시대 중국의 자객)로부터 형가(荊軻 : 전국시대 중국의 자객)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자객은 자기의 의열을 성취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하며, 그 의지를 바꾸지도 않았다. 그들의 명성이 후세에 전하는 것은 실로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기 자객열전 중)

 

좌백은 말한다.

 

"이제 새로 자객열전을 쓰는 것은 자객의 칼을 미화하려 함이 아니라 의열이 아닌 사욕을 위해 칼을 사용한, 그러므로 기념할 이유가 없는 자객들의 이야기를 하려 함이다."

 

1. 고수의 칼

 

장안에 석씨 성 가진 큰 부자가 있었는데, 집안에 손이 귀해 일가친척이 드물었고, 처첩을 여럿 두었음에도 늦게까지 자손을 보지 못하다가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아들을 보았다. 하여 외아들을 애지중지 키우는 것은 물론 늙은 자신이 죽은 뒤에 아들 혼자 살아갈 일도 걱정하여 대책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무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사람은 많아도 믿을 사람은 없고, 수하는 많아도 돈을 위해 모인 것일 뿐, 바로 그 돈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것이 세상 인정. 믿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이므로 언제 어떤 일이 생겨도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게 석 장자의 생각이었다.

아이가 자라자 석 장자는 재물을 풀어 사방의 무술가를 초빙했다. 명망 있는 자라고 그냥 믿지 않고 솜씨를 시험해 보고 뛰어난 자는 아이의 사부로 삼고, 헛된 명성뿐이었던 자라도 후한 예물로 돌려보내니 한 번 석 장자의 초빙을 받고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자가 없었다. 곧 천하의 뛰어난 무술가들이 아이의 사부가 되거나 석 장자와 인사 한 번이라도 나누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도 각 방면의 명인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아이의 사부가 되었다.

이쯤 되면 재능 없는 아이라도 제법 손발을 쓰게 되기 마련인데 신묘하게도 아이는 무술에 탁월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의 명인들이 가진 재주를 남김없이 습득하고 오히려 그를 추월할 지경이라 나중엔 사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장권(長拳)과 단타(短打)를 일찌감치 통달하고 무예 십팔반에 부족한 것이 없었다. 주먹을 휘두르면 바위를 깨부수고, 창을 찌르면 나는 제비를 꿰뚫을 수 있었으며, 한 자루 검을 잡고 돌면 검광이 띠처럼 늘어져 무지개를 만들고, 한 번 몸을 보호하고자 하면 검막이 밀밀(密密)하게 생겨 그 형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검선(劍仙)의 화신이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았다.

그게 단지 주변 사람들이 석 장자의 체면을 생각하여 아첨으로 한 말이 아님은 솜씨를 시험하기 위한 몇 십 번의 비무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강한 자가 있다고 하면 멀리까지 찾아가 손을 겨루기 수십 차례, 단 한 번도 그를 이긴 자가 없으며 나중에는 강북제일인(江北第一人)의 칭호를 얻기까지 했으니 석 장자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세월이 흘러 석 장자가 죽고 아이가 가산을 물려받았다. 아이는 석 장자의 소망대로 스스로를 지키며 잘 살았던가. 아니었다. 석 장자는 아이에게 무술은 가르쳤지만 재물 지키는 법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는 몸에 밴 사치와 방탕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었다 한들 석 장자의 재물에 표시도 나지 않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거기에 주변 사람들의 손이 가면 아무리 많은 재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보이지도 않게 재물에 축이 나고, 보이게 사라지는 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것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손을 놓고 보고만 있는 사이에 그 많던 재물은 사라지고 어느새 빚더미가 그를 누르게 된 것은 석씨 아이가 나이 서른이 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왕의 궁전을 연상케 하던 고대광실 장원은 남의 것이 된 지 오래, 수십을 헤아리던 처첩은 다 어디로 가고, 수백의 수하들도 이제는 그를 모른 척했다. 비가 새는 오막에서 조강지처와 아이들을 데리고 누워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 일상이 된 어느 날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교분을 들먹이며 간신히 돌려보내던 시절이라 석씨는 손님이라면 질색을 했지만 이번 손님은 달랐다. 예물이라며 가져온 상자에 담긴 금은보화가 먼저 그의 눈을 어둡게 했고, 황금 일만 냥이라는 소리가 귀를 멀게 했다.

석씨가 말했다.

“뭘 하면 준다고 하셨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무술밖에 없는 그였다. 그리고 무술로는 큰돈을 벌 수 없는 것이다. 도적질을 하자니 담은 넘을 수 있어도 상자를 딸 수가 없고, 무엇보다 체면이 용납지 않았다. 호원 무사 같은 것은 더욱 그랬다. 그런데 황금 일만 냥을 준다고? 도대체 뭘 하면?

“한 사람을 죽여주시면 됩니다.”

손님은 미목이 수려한 중년인이었는데 그 수려한 얼굴에 한 점 어두운 기색 없이 그런 말을 했다. 석씨는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소?”

“평소 원한 있는 자가 있으나 그 자의 무술이 뛰어나 감히 어찌해볼 바가 없었던 차에 공자의 무술이 당할 자 없이 뛰어남을 전해 듣고 찾아왔습니다. 날랜 검을 휘둘러 그 자의 목을 베어다 주시면 천한 재물으로나마 보상할까 하오니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천한 재물이라니. 바로 그 재물 때문에 그가 고수가 되었고, 바로 그 재물이 없어 지금 궁상스러운 생활을 감수하고 있지 않으냐. 석씨는 며칠 말미를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날 밤 예물상자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무술이란 놈을 배웠지만 어디에 쓸 것인가. 세상에는 무술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았고 필요한 것을 하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맞아죽는 것보다 굶어죽는 게 빠를 것이며, 그런 일에라도 쓰지 않으면 솜씨가 아깝기도 했다. 그는 며칠 후 다시 만난 중년인에게 어디의 누구든 죽여주겠노라고 승낙하고 말았다.

누굴 죽이려면 상대를 먼저 아는 게 순서. 지나가는 사람으로 가장하여 목표의 얼굴을 확인하고, 내친 김에 그날 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담을 넘었다. 마침 목표가 달빛 아래에서 홀로 연무를 하고 있는데 제법 솜씨가 뛰어났으나 그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날랜 칼 한 번에 수급을 떨어뜨리는 것이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기만큼 쉬울 것 같았다. 한 번 더 내친 김에 단매에 때려죽여 버리고 일을 끝낼까 하다가 너무 성급한 듯하여 그냥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오한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쓰고 누웠지만 오한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식을 취해보고 약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몸 움직이는 데에 불편한 것은 아니라 며칠 후 검을 품에 안고 다시 담을 넘었다. 이번에는 밝은 창 너머로 목표가 아내와 아이를 안고 웃는 것을 보았다. 창 밑에 웅크리고 앉아 죄 없는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도록 자리가 파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밤이슬이 내렸다. 다시 오한이 시작되었다.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것도 상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살인이 무서워서라는 것을. 그는 여태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자와 아이가 각기 방으로 돌아가고 목표가 자리에 누웠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석씨는 뛰어 들어가지 못했다.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그는 끝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중년인이 다시 그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석씨는 퀭한 눈과 수척한 몰골로 맞이했다. 며칠간 고민한 결과였다.

“말미를 좀 더 주시오.”

중년인은 의미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상대가 어렵던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오.”

중년인은 일어나 뒷짐을 지고 서성거렸다. 석씨는 고개를 숙인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중년인이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시간은 이미 충분히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 조금만 더……. 내 오늘밤이라도 반드시…….”

석씨의 입이 중년인의 행동에 의해 막혔다. 어느새 꺼내들었는지, 또 어느새 찔렀는지 비수 한 자루가 그의 가슴에 박혀들었던 것이다. 석씨의 퀭한 눈이 이번에는 놀란 눈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왜……?”

중년인이 잠자코 그를 보다가 석씨의 얼굴에 푸른 기가 돌기 시작하자 비로소 말했다.

“이번 일에서 자객은 바로 나요. 그리고 목표는 당신이고. 창피한 말이지만 도저히 실력으로는 당신을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먼저 고민할 거리를 만들어준 것인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 나도 놀랐소.”

석씨의 얼굴이 푸르게 변한 것은 비수에 독이 발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붉어지기 시작한 것은 울화가 치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답지 않게 사나운 기세로 일어나 중년인에게 달려들다가 끝내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 시체를 향해 중년인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람도 못 죽이는 게 무슨 고수냐.”

 

옛적에 고수는 칼을 빼면 반드시 베었고, 손을 쓰지 않으면 모르되 한 번 쓰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거두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손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되는 것이었으니 무술을 배우며 마음을 같이 닦는 것이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혹 모양으로 배우는 자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2. 살인의 대가

 

개봉에 사는 제갈씨는 이재와 식화에 능해 어려서부터 장사를 하여 큰 재산을 모았고, 마흔에는 이미 거부가 되었다. 창고에는 진귀한 옥과 금은보화가 쌓였고, 식탁에는 매 끼니 산해진미가 올라왔다. 정원과 후원은 물론 집안 곳곳의 빈터에까지도 기화이초가 피어있고, 거기 아름다운 시녀들과 처첩들이 돌아다녔으니 아방궁이 부럽지 않았다.

그러던 하루 제갈씨는 개봉의 대협 곽가(郭家)와 사소한 시비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가 약간의 잘못을 하긴 했지만 개봉 일대의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다시피 한 그에게 일개 강호의 촌부, 무뢰배들의 우두머리 따위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항의하였고, 그 자신은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몇 마디 사과의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끝났는데, 이 일이 제갈씨의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국법으로 처단하려니 별달리 책잡힐 일을 한 것이 없고, 개봉을 다스리는 지부대인도, 하남성을 다스리는 안찰사도, 2년에 한 번 바뀌는 총독도 곽가에게 호의적이라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제갈씨의 재물이 먹혀들지 않았다. 차라리 재물로 호의를 얻어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됨으로써 체면을 세워보려 하였으나 소위 몸 밖의 물건을 돌멩이처럼 여기는 곽가의 태도에 만금의 재물도, 금은보화도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다. 강호의 자객을 사려고 했지만 곽가는 물론 그를 따르며 지키는 무리들의 무용에도 필적할 자가 드물었으니 그조차도 가능하지 않았다.

사소한 불쾌감이 상대의 뻣뻣한 태도에 앙심으로 화하였고, 그 앙심을 해소할 길이 없다는 것이 스스로의 무력감을 자극하여 원한으로 변하였다. 이제 제갈씨는 곽가에 대한 원한으로 앙앙불락하여 진미도 맛나지 않았고, 호사도 즐겁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이때 그의 집에 드나들던 무녀 채씨가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하였다.

“근래 대야(大爺 : 어르신)의 배후에 어두운 그림자가 감돌고 있으니 무슨 일입니까?”

“내 배후에 뭐가 있다고? 그게 무언가?”

“원념(怨念)입니다.”

제갈씨가 속으로 뜨끔하였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태연히 물었다.

“원념이라니. 누가 날 원망하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채씨는 제갈씨의 시치미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원념이 뭉치면 나쁜 기운이 되고, 나쁜 기운이 형체를 갖추게 되면 요괴가 되어 사람을 해치는 법입니다. 막힌 곳은 뚫어야 한다는 것이 의원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마음에 맺힌 것이 있으면 반드시 풀어서 앙금이 남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제갈씨가 태도를 바꾸어 물었다.

“제사를 지내야 할까?”

“제사로는 되지 않습니다.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바른 일입니다.”

“그 원인이라는 게 마음대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애초에 원념이 쌓일 리도 없었네.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답답하지.”

이왕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제갈씨는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채씨에게 털어놓았다. 채씨가 다 들은 뒤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곽가에 대해서는 저도 들은 게 있습니다. 과연 말씀대로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인물이지요. 하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제갈씨가 반색하며 매달렸다.

“방도가 있으면 말해주게. 무얼 망설이는가.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겠네.”

채씨가 주저주저 말했다.

“설산에서 수련하고 내려온 무격(巫覡 : 남자 무당)이 하나 있습니다. 신선술에 능해서 가히 어떠한 일도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다는 사람인데, 그 능력 중에 주법(呪法)으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제가 직접 본 일도 있으니 확실한 일입니다. 그런 일을 어찌 거짓으로 아뢰겠습니까?”

“그럼 데려오게. 가슴에 맺힌 이 원한을 풀어준다면 그는 물론 자네에게도 후히 사례함세.”

“하지만 그 대가가 작은 것이 아니라서…….”

“그 일을 위해서는 족히 만금도 쓸 수 있다네. 긴 말 말고 얼른 가서 데려오게.”

제갈씨는 말도 다 듣기 전에 채씨를 밀어 보내었다.

채씨가 그 설산의 무격이라는 괴이한 복색의 사내를 데려온 것은 사흘 후였다.

무격은 검은 도포를 입고, 검은 도관을 머리에 썼으며, 발에는 검은 초혜를 신었다. 얼굴도 거무스름한데다가 눈동자가 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눈조차 검게 보였다. 그 몸에서 풍기는 음산한 사기에 제갈씨는 몸을 떨었으나 한편으로는 채씨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 같아 마음 든든히 여겼다.

“죽이고자 하는 자가 누구요?”

무격은 대뜸 그렇게 말을 꺼내었다. 제갈씨가 잠시 당황하였으나 곧 침착하게 곽가의 이름과 사는 곳을 말하였다. 이어서 원한 진 이유까지 이야기하려 하였으나 무격은 더 듣지 않고 말을 잘랐다.

“오늘 밤 삼경에 적당한 곳에 제단을 마련하고 기다리시오. 제단은 탁자에 촛불 둘, 향로와 향만 있으면 되오. 나머지는 내가 준비하겠소.”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던 무격이 문득 물었다.

“일의 대가에 대해서는 들으셨겠지요?”

제갈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를 달라하든 달라는 대로 주면 그만 아닌가.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보화를 가득 담은 상자를 준비해 내밀리라. 그때 저 검은 눈, 오만한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자.

삼경이 되어 후원 깊숙한 곳에 제단이 준비되었다. 제갈씨와 채씨가 단 둘이 그곳에서 기다리는데 무격은 귀신과도 같이 홀연히 나타나더니 품에서 부적 몇 장을 꺼내어 제단 사방을 봉하고, 미리 준비해 온 축문과도 같은 것을 꺼내어 읽었다. 달조차 없는 야반삼경에 무격의 음산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퍼져갔다. 사람의 말인지 짐승의 신음인지, 그도 아니면 귀신의 웅얼거림인지 모를 저주의 목소리가 후원을 감돌아 하늘로 한줄기 끈처럼 올라가는 것을 제갈씨는 눈으로 보는 듯해서 몸을 떨었다.

그러기를 한식 경, 무격이 촛불에 축문을 대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축문을 허공으로 날리자 홀연 일진광풍이 불어와서 촛불이 꺼지는데 축문에 붙은 불은 오히려 더욱 활활 타올라 사방에 빛을 발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제갈씨 눈에는 그 불이 마치 악귀, 혹은 악룡의 모습처럼 보여 주저앉고 말았다.

무격이 서쪽 하늘을 보며 잠시 섰다가 말했다.

“됐소.”

제갈씨가 떨며 물었다.

“곽가가 죽었단 말이오?”

“확인해 보시오.”

“아니 뭐 못 믿겠다는 것은 아니고…….”

제갈씨가 떨떠름하게 말하다가 발치에 내려놓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대가요.”

무격이 물었다.

“이게 뭐요?”

“수고해 주신 대가요. 열어 보시오. 적잖게 넣었소. 원래는 일이 제대로 되었나 확인한 다음에 드려야겠지만…….”

무격은 제갈씨의 말을 무시하고 채씨를 향해 물었다.

“제대로 이야기를 않은 것인가?”

채씨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말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의아해 하는 제갈씨에게 무격이 말했다.

“내가 요구하는 대가는 재물이 아니오.”

“그럼 뭘……?”

무격이 대답했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의 목숨이오.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 희생해야 할 무엇이 있는 법이오. 미워하는 누군가가 죽어주기를 바란다면 사랑하는 누군가의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하오. 이것이 설산 초혼문의 법계고, 나의 원칙이오. 당신이 몰랐다 하나 일은 이미 이루어졌고, 당신이 마땅히 지불하여야 할 대가 역시 지불되었소.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원한 것, 나를 원망 마시오.”

말과 함께 무격은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곽가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왔을 때 제갈씨는 가장 사랑하는 손자의 주검 앞에 망연히 주저앉아 있었다.

 

3. 목숨장수

 

장삼(張三)은 사천 사람이다. 나무를 해 먹고 사는데 그가 사는 방식이 원래는 이러하였다.

봄부터 겨울까지 사천 깊은 산 속에서 나무를 한다. 어른이 그 팔로 다 못 안을 우람한 나무를 몇 십, 몇 백 개나 찍어서 쌓아뒀다가 새 봄이 오면 불어난 강물에 밀어 넣는다. 칡덩굴을 몇 겹이나 꼬아 만든 튼튼한 밧줄로 나무들을 엮어 긴 뗏목을 만든다. 거기 흙을 깔고 판자로 벽과 지붕을 만들어 집을 지은 다음에 늙은 부모와 처자식, 집에서 기르던 닭이니 개 따위 가축까지 다 싣고는 강물을 따라 내려간다.

이렇게 해서 사천의 깊은 산 속에서부터 저 머나먼 장강 하류 양주니 항주까지 가는데 반년은 족히 걸린다. 그 기간 동안은 자는 것, 먹는 것, 아이 낳아 기르는 것까지 모두 뗏목 위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성도나 중경에 도착하면 뗏목에서 집, 가축까지 모두 팔아버리고 그걸로 소금과 곡식, 입을 것을 사서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올 때는 반년이었으나 돌아가는 길은 몇 배로 걸려 삼 년이 족히 걸리곤 했다. 그리고는 다시 사 년 주기의 이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원래는 그랬다. 장삼 또한 이 일을 열 번, 스무 번 반복하면서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평화롭던 생을 마감할 수 있을 줄로 알았었다. 하지만 그해 일어난 일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지난 겨울부터 이미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단단한 나무껍질을 빗겨 맞고 튀긴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바람에 근 한 달을 쉬어야 했다. 그 사이에 마누라와 어린 자식들이 나무를 한다고 나가긴 했지만 삭정이나 주워오는 것에 불과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된 다음부터 다시 열심히 나무를 벴지만 뗏목은 평소 띄우는 숫자보다 십여 개나 부족했다.

출발도 순탄치 않았다. 길고 험난한 장강의 뱃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도록 고사까지 지내고 바야흐로 출발하려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긴 겨울동안 콜록거리더니 여기 사천 나무꾼답지 않게 산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사천의 나무꾼은 산에서 죽는 것보다 강물 위에서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 뗏목 위에서 죽어 그 뼛가루를 강에 뿌리게 되면 다행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풍랑에 좌초하여 산채로 물고기 밥이 되곤 했다.

드물게도 산에서 돌아가셨으니 산에 묻어야 했다. 그 바람에 사흘이 지체되었다. 봄의 강물은 급속도로 불기 때문에 때를 놓치면 매우 위험했다. 거친 물살이 산곡을 돌아 나갈 때는 더욱 거칠어지므로 되도록 빨리 큰물로 나가야 했다. 하긴 장강 천리 어느 곳은 거칠지 않고 위험하지 않으랴마는.

반년이 지나갔다. 일일이 다 말하지도 못할 고난과 위험이 장삼의 가족에게 닥쳤다가 세월과 함께 지나갔다. 풍랑에 뗏목 일부를 잃은 일도 있었고, 가축들이 원인 모르게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그나마 가족들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산 삼협의 그 지옥과도 같이 거친 물살을 헤쳐온 것만도 천행이라고 여겼다.

동정호, 넓은 바다와도 같은 호수에 도착해서 이제는 암초도, 칼날처럼 날카로운 양안의 절벽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사흘이면 땅위의 낙원과도 같은 항주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안도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날 밤 몰아친 풍랑에 뗏목은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동행한 다른 나무꾼의 뗏목에 간신히 올라선 장삼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확인하고 망연히 서있어야 했다. 뗏목도, 아내도, 자식들도 사라져 버렸다. 아니, 이제 겨우 걸음마하는 막내아들 놈 하나만 어찌어찌 그의 곁에 남았다. 이 아이마저 없었더라면 장삼도 저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끝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장삼이 여기 있는 것이다. 사통팔달 길에는 윤기 나는 포석이 깔려 있고, 구슬 신을 신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그 길가로 빨갛고 파란 휘장들이 가을바람을 맞아 휘날리고 있는 화려한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 기녀의 웃음소리와 기름진 음식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고 주지육림인 듯 향기로운 냄새 풍기는 호수에는 꽃처럼 아름다운 유람선들이 떠다니는데 줄지어 늘어선 버드나무 가지들이 거울 같은 물 위로 희롱하듯 휘영청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곳, 근심도 걱정도 없는 사람들이 집집마다 거리마다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이곳에, 후미진 시궁창 옆에서 아들과 함께 앉아 망연히 정신을 놓고 그저 앉아만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었다. 무얼 해야 할지 알지도 못했다. 평생 나무만 하고, 물질만 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생의 전부였다. 그런데 도끼를 잃고 벨 나무도 없어졌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가 울었다. 아까부터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조차 힘이 없어 기어들어가는 소리였다. 장삼의 가슴이 아이울음을 따라 같이 찢어졌다.

힘을 내야 한다. 자기는 죽어도 아이까지 굶겨죽일 수는 없었다. 장삼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아이를 끌고 시궁창 옆을 벗어났다. 하지만 어디 가서 어떻게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할까. 거리는 진흙 묻은 그의 맨발로 밟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깨끗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더러운 오물이라도 보듯 그를 피해 멀찌감치 비켜서 지나갔다. 이런 상황에서는 구걸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온종일 떠돌다가 항주성 서문 가에 있는 악왕묘(岳王廟 : 송나라 때의 장수 악비를 모시는 사당)에 이르렀다. 이곳 입구로부터 한 마장 정도 되는 길가에는 거지들이 줄지어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다. 장삼은 눈이 번쩍 뜨이도록 반가워서 얼른 그 틈에 끼었다. 여기라면 그도 구걸해서 먹을 것이라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굶어 죽어가는 아이도 옆에 있으니 남들보다 더 불쌍하게 봐줄 것이다.

그런 기대가 현실이 되기 전에 그는 옆구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땅바닥에 굴렀다. 아이가 찢어지도록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여러 거지들의 발길에 채여 악왕묘 밖으로 굴러갔다. 나중에 아이까지 던져주고는 거지 한 명이 침을 뱉으며 말했다.

“겁대가리 없는 것이 어딜 감히 끼어들어!”

 

밤이 깊었다. 악왕묘 가에 늘어섰던 거지들은 거기가 집이라도 되는지 안으로 들어가고, 장삼은 상처입고 굶주린 몸으로 아이를 안고 어디 갈 수도 없어 낮에 쓰러진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달빛이 시리도록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아이가 다시 울었다. 죽어가듯 기어들어가는 울음소리였다. 장삼은 아이를 안고 흔들며 내일은 꼭 먹을 것을 줄 테니 울지 마라 달래었다. 아이보다 그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한 사람이 그의 옆에 나타났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삼이 의아해서 바라보았다. 닭, 혹은 오리의 다리로 보이는 것이 기름종이에 싸인 채 그의 옆에 떨어져 있었다.

“이건……?”

“드시게나.”

기름종이를 던진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장삼은 얼른 주워서 뜯어먹다가 아들 생각을 하고 입에 든 것을 꺼내어 아이에게 먹였다. 방금까지 죽어가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 고기를 먹더니 그의 손에 든 것까지 빼앗아서 아귀처럼 먹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하나 더 던져주었다.

“많으니 천천히 드시오.”

장삼은 닭다리를 뜯으며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달빛을 가리고 선 그 사람은 화상(和尙)이었다. 커다란 체구에 의복은 풀어헤쳐져 있고 염주 알은 아이 주먹만한데다가 머리에 잔뜩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붉고 노란 꽃들이 만발한 머리통 가운데로 한 마리의 꽃뱀이 기어 나오고 있는 듯한 모양의 문신이 눈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화상이 적선을 해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그게 닭다리라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문신을 한 돌중이라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돌중이 적선을 한다는 게 이상해지지 않는가.

장삼은 연신 고기를 뜯어먹으며 생각을 하다가 포기했다. 이 화상은 만행(卍行)을 하는 고승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처지를 보고 갑작스럽게 동정심을 일으킨 그냥 돌중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떠랴, 먹을 게 있고, 살았다는 게 중요했다.

고기를 다 먹자 화상은 술까지 내밀었다. 그리고 장삼의 딱한 처지를 오랫동안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화상이 물었다.

“이제 어쩔 참인가?”

“모르겠습니다.”

장삼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화상이 가볍게 불호를 읊더니 문득 말했다.

“살 걱정을 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겠나?”

장삼이 반색하였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보살님.”

화상이 소맷자락으로 손을 넣더니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을 꺼내 내밀었다. 장삼이 깜짝 놀라자 화상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 힐끔 보고는 얼른 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요리할 게 있네.”

장삼은 그 말을 듣고서야 칼을 받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객잔에라도 넣어주시려는 겁니까? 전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데…….”

화상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요리하라는 걸세.”

 

날이 밝았다. 장삼은 아이의 손을 잡고 양주성 서문 거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냥 다가가서 찌르고, 도망치면 된다. 찌르고, 도망치고, 찌르고, 도망치고…….’

화상이 그에게 맡긴 일은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지방의 토호로 온갖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 하나쯤 죽여도 하늘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고통에서 해방되는 숱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했다.

살인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사람이란 의외로 약한 것이라 적당한 곳을 적당히 찔러주면 죽게 마련이라고 했다. 삶은 고해(苦海)요, 산다는 것은 악업을 쌓는 일이다. 사람은 다 서로를 뜯어먹으며 살고 있으니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도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라고 했다.

알쏭달쏭한 그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장삼은 믿기로 했다. 일 년 내내 고생해서 나무를 하고 반년이나 강물과 싸우며 떠내려 와 팔아도 쥐는 것은 잔돈 몇 푼에 불과했다. 그리고 삼 년간 거지꼴을 하고 사천 그 산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남에게 나쁜 일을 한 적이 없건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배고파 우는 아이새끼 하나뿐이다. 나쁜 일 좀 하면 어떠랴. 사람 좀 죽이면 어떤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못 할 것인가.

새벽에 마신 술이 깰 때가 됐는데도 오히려 취기가 더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때 화상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저 사람일세.”

거리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방울소리,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주렴 내린 옥마차가 사람들을 가르고 있었다. 구종별배들이 쉬이쉬이 사람을 물리는 것으로 보아 고관이나 거족의 행차일 것이다. 사람들이 솔개 만난 병아리 떼처럼 흩어졌다.

삿갓을 깊이 눌러써 문신을 가린 화상이 그의 어깨를 잡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거기가 아니고 저길세. 저기 둥근 모자를 쓴 뚱뚱이.”

마차가 오는 길가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쓸려서 비켜서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목표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정신이 없는 틈에 해야 하네. 서두르게!”

장삼은 아이의 손을 잡고 비칠비칠 걸어갔다. 아이와 함께 가는 자객이란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거라는 화상의 사전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느린 걸음으로도 그 사람과는 금세 가까워졌다. 손만 내밀면 닿을 것 같았다.

장삼은 침을 삼켰다. 온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품속으로 넣은 손에 식칼이 잡혀 있었지만 꺼낼 수가 없었다. 손 가득 땀이 쥐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화상을 보았다. 삿갓을 깊게 눌러써서 화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들어 젓는 것이 얼른 하라는 뜻일 게다.

그래, 못 할 것이 없다. 그는 하늘을 찢어발기던 뇌성벽력과 집채 같던 파도를 생각했다. 가족과 전 재산을 앗아간 그 이유 없는 폭력을 기억했다. 그는 억울하다. 억울하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 마땅한 이 악인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 무어 잘못됐단 말인가.

그는 칼을 빼서 모자 쓴 뚱뚱이를 찔렀다. 처음에는 미끈한 감촉이 느껴지면서 칼이 헛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밀어 넣었다. 칼끝은 단단한 무엇인가에 걸리더니 다시 미끄러지면서 이번엔 저항 없이 깊이 들어갔다.

트림이라도 하듯 꺼억 하는 소리가 나왔다. 죽어가는 뚱뚱이의 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비명은 그 뒤에야 질러졌다. 피는 그보다도 나중이었다.

거리가 단번에 소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이 솔개를 만난 병아리처럼 흩어졌다. 마차를 호위하던 무사들의 시선도 장삼에게 향해졌다. 그때 화상이 성큼 걸어 나오더니 훌쩍 뛰어 마차에 올라탔다. 그의 소매에서 거대한 철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쿵, 한 번에 마차가 박살나고, 쿵, 두 번에 그 안에 앉았던 화려한 복장의 사내 머리가 바스러졌다. 세 번째 쿵 소리는 겁 없이 달려들던 무사 한 명이 화상의 발에 채여 쓰러지는 소리였다.

장삼은 화상을 돌아보았다. 화상도 마침 그를 보고 있었다. 삿갓이 약간 들어 올려지고, 그 이마로 흘러내려 눈 사이로 고개를 들이민 꽃뱀의 머리가, 그 눈빛이 장삼의 눈을 찔렀다. 화상이 돌아서려다가 고개를 젓더니 훌쩍 장삼에게 다가왔다.

“찔렀으면 얼른 달아나지 않고 뭐하나?”

 

밤이 깊었다. 모닥불을 앞에 놓고 장삼은 바로 어제 아침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화상은 그 옆에 누워 홀짝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절 이용하신 거로군요.”

화상이 잠깐 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장삼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제가 죽인 그 사람은 누굽니까?”

화상이 대답했다.

“몰라.”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말했다.

“자네가 첫 칼질에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줄은 몰랐지. 초보자가 그런 뚱뚱이를 찔러 죽이기는 쉽지 않은데 말일세.”

장삼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무어라 말을 못 하고 한참이나 엎드려 있다가 쥐어짜듯 외쳐 물었다.

“스님은, 대, 댁은 대체 누구십니까?”

화상은 태연히 대답했다.

“장사치라네. 목숨을 팔고 사는. 오늘 자네 목숨은 내게 팔렸었지만 다시 팔았지. 이문은 목숨 하나에 덤으로 하나 더였고. 이제 자네 목숨은 자네 것으로 돌아갔으니 그만 가보게.”

 

이때에 이 화상과 같은 자가 드물지 아니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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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무협은 무(술)로 협(의 정신)을 구현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무라는 건 결국 폭력이다. 그러니 무협이란 폭력을 사용해서 모종의 정의를 구현하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대단히 폭력적인 이야기가 된다. 잔인하다. 잔인하면 잔인할 수록 더 재미있기도 하다.
하지만 알고보면 세상이 그렇게 잔인하다. 피만 튀지 않았지 무수한 폭력이 이루어지며, 보이지 않는 폭력은 항거할 실체가 숨겨진다는 점에서 더욱 폭력적이다.
이 부분에서 현실과 무협의 접점이 이루어진다. 결국 무협도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현실은 무협에서 그려진 세상보다 훨씬 잔인하기도 하고, 훨씬 황당하기도 하다. 신문을 보라. 오늘 여기 내가 그려놓은 잔인한 이야기들보다 훨씬 잔인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소개>


좌백


본명은 장재훈
1965년 강원도 동해출생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
1995년 무협소설 [대도오]를 써서 작가생활을 시작.

현재까지 무협소설로는 [생사박], [혈기린외전], [천마군림], [비적유성탄], [천마군림] 등을, 그밖에 만담집으로 [부부만담], 청소년판타지철학소설로 [논리의 미궁을 탈출하라], [소크라테스를 구출하라] 등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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