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분재> 문지기



글/ 이재일

 

 

1.

내 아버지는 문지기였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문지기가 된 것으로 아는데, 그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딱히 들은 적이 없어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평범한 문지기였고, 세상의 모든 평범한 문지기들이 그렇듯 살다 보니 어쩌다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나도 얼마 전 문지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일하던 시절도 그랬지만 지금도 문지기는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니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날 세가의 총관인 유 노대(劉老大)는 숙소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를 불러다 놓고 말했다.

“네 아비는 좋은 문지기였지. 그렇다고 네게 그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원한다면 다른 자리를 알아봐 주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문지기가 좋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문지기가 되었고, 아버지의 일터였던 열두 자 높이의 정문은 그대로 내 일터가 되었다.

정식으로 문지기 일을 시작한 첫날, 얼마 전 세가에 들어온 수문 무사 손 형(孫兄)이 물었다.

“어이, 짝귀. 창고 하나만 맡아도 떨어지는 게 훨씬 많을 텐데 왜 하필 문지기지? 선대인께서 유언이라도 남기셨나?

“그런 유언 없었소.

“그런데 왜? 설마하니 어릴 적 꿈이 문지기였을 리는 없을 테고.

나는 씁쓸하게 웃을 뿐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손 형의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맞든 틀리든, 내 어릴 적 꿈이 문지기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문지기에게 매료당하기도 했고, 문지기를 혐오하기도 했다. 반드시 문지기가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으며, 절대로 문지기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만일 누군가 있어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한다면, 나는 여섯 살의 눈 내린 아침과 아홉 살의 피비린내 자욱한 밤과 열한 살의 그 따가운 가을볕 속에서 만난 한 문지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 줄 작정이다. 내 아버지, 그리고 나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문지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2.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양이 무척 많아서 정문 앞 돌사자가 꼭 눈사람처럼 보였다.

하늘은 아직 침침했지만 사방을 덮은 눈빛 덕분에 어둡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이른 시각, 나는 키보다 곱절은 긴 눈 밀대를 들고 정문 앞에 나와 있었다. 돌이켜 보면 한 자 가까이 쌓인 눈을 여섯 살짜리가 치운다는 게 참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뭘 알까.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노동의 버거움도 모른 채, 그저 나는 몽글몽글 떨어지는 커다란 눈송이들과 그렇게 새하얘진 세상에 마냥 신기해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느냐?

목소리가 울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앞에는 그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의 첫 모습은 세월이 꽤 지난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하얀 눈을 배경으로 한 검은 옷. 여섯 살 눈높이로 올려다보는 까마득하게 큰 키.

당시의 그 사람은 반나절은 갈아댄 먹물처럼 새카매 보였고 후원 가산(假山)의 보탑(寶塔)처럼 커다래 보였다. 부스스한 머리칼과 텁수룩한 수염은 그 사람을 더욱 새카맣게, 더욱 커다랗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나타난 새카만 거인을 보면서도 전혀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훗날 여러 번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무엇 때문이다 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누구세요?

내가 말똥말똥 올려다보며 묻자 그 사람은 한쪽 볼따구니를 실룩거리더니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남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물음에 답하길 바란다면 공정하지 못한 일이겠지. 내 물음에 먼저 대답하면 내가 누군지 가르쳐 주마.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또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뭘 물으셨는데요?

“이런, 아예 듣지도 못한 거냐?

그 사람은 더욱 세차게 머리를 긁더니 내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대며 말했다.

“지금 꼬맹이 네가 눈을 치우려고 나온 게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마 바로 위에 떠 있는 투박한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눈을 네가 치우겠다고? 그걸로?

그 사람은 내 얼굴과 내가 어깨에 기대 잡고 있는 눈 밀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허! 아무리 현판을 내렸기로서니 천하의 운검가(雲劍家)에서 요런 꼬맹이에게까지 문지기 일을 시킬 리는 없고, 별일 다 보겠군.

당시의 나는 ‘운검가’가 등지고 선 장원의 이름이란 걸 알지 못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그 장원 안에서 ‘운검가’란 세 글자를 입에 담는 일은 혹독한 제재가 뒤따르는 금기였고, 그것은 이때로부터 오 년 뒤인 내가 열한 살이 되던 해까지 계속되었다.

“근데 아저씬 누구세요?

나중에도 여러 번 든 생각이지만 그 사람의 가장 큰 미덕은 공정함이었다. 그 사람은 공정한 사람답게 내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난 양업(梁嶪)이라고 한다. , 양 형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지만 곤란하면 양 아저씨라고 불러도 된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때 그 사람은 삼십 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결혼했으면 나보다 큰 자식을 두었을 어른에게 양 형이란 호칭은 가당치 않겠지만, 나는 왠지 그쪽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양 형이라고 부를게요.

어째서 형 소리를 아저씨 소리보다 좋아하는지는 지금까지도 궁금한 일이다. 어쨌든 내 말을 들은 그 사람, 아니 양 형은 키만큼이나 커다란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새로 생긴 동생을 위해 이 늙은 형이 힘 좀 써야겠군.

양 형은 길고 튼튼해 보이는 손을 쭉 뻗어 내가 쥔 눈 밀대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그토록 높아 보이던 끄트머리가 그에겐 겨우 가슴 높이였다. 나는 그제야 조금 무서워졌다. 양 형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빗자루나 마대, 눈 밀대 같은 도구들을 무척이나 귀히 여겼다. 한 번은 싸릿대 인형을 만들기 위해 빗자루 살을 한 움큼 뽑은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그 뽑은 살들을 모아 잡고 내 등이 해지도록 때렸다. 그러니 이 눈 밀대를 잃어버리는 날엔…….

“늙은 형을 믿지 못하는 거냐?

내가 눈 밀대를 더욱 세게 움켜쥐자 양 형은 한쪽 볼따구니를 실룩거리더니 눈 밀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당시에는 몰랐던, 난처하거나 무안할 때면 양 형이 보이는 버릇이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아빠 물건을 주면 나중에 아빠한테 혼나요.

“아빠 물건?

잠시 갸웃거리던 양 형이 갑자기 탄성을 터뜨렸다.

“아하! 네가 노칠(魯七)의 아들이구나!

“우리 아빠를 알아요?

“알다마다. 노칠도 문지기, 나도 문지기. 같은 일을 하는데 내가 그를 모를 리가 있나.

“어? 그럼 양 형도 아빠처럼 문지기예요?

양 형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 여겼는지 곧 덧붙였다.

“어느 쪽을 지키느냐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있던 눈 밀대가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가 어, 할 새도 없이 눈 밀대를 채 간 양 형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통을 잡아 돌려세운 뒤 등을 툭툭 밀었다.

“처마 밑에서 눈이나 피하고 있으렴. 너 같은 꼬맹이에겐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 며칠은 나 같은 꼬맹이가 아니더라도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눈 치우는 일에 문지기 아들이 나선 것도 그 일을 해야 할 문지기가 감기에 된통 걸려 앓아누운 탓이니까.

얼마 동안 나는 정문의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양 형이 눈을 치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양 형은 아버지보다 능력 있는 문지기 같았다. 최소한 눈 치우는 일에서만큼은 분명히 그래 보였다. 눈 밀대가 드르륵 미끄러질 때마다 숨어 있던 바닥의 (塼石)이 모습을 드러내고, 눈 밀대를 탕 터는 곳에는 어김없이 작은 눈 동산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빠르기는 어찌나 빠른지. 이쪽을 미나 싶다가도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어느새 저쪽에서 눈가루를 날리고 있었다.

“어, 땀난다.

여섯 살 눈에 평원처럼 넓게만 보이던 정문 앞 공터를 잠깐 사이에 다 치운 양 형이 눈 밀대를 어깨에 걸치고 터덜터덜 다가왔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훤히 드러난 가슴팍은 내 입김보다 훨씬 더 많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 정문 앞 눈사람이 돌사자로 되돌아오는 요술까지 구경하게 되자, 나는 그에게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나, 이다음에 꼭 양 형 같은 문지기가 될래요!

갑자기 터져 나온 내 말에 양 형의 한쪽 볼따구니가 그날 본 것 중 가장 크게 실룩거렸다. 뒷머리도 거죽이 벗겨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벅벅 문질러졌고.

“그게 말이다…….

양 형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끽 소리와 함께 정문이 열리고 낡은 수건을 목에 친친 두른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 집의 진짜 문지기인 아버지였다. 정문 앞에 있던 나와 양 형을 본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심하게 기침을 하는데, 그 이유가 목에 피풍건(避風巾)까지 두르게 만든 감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기침을 겨우겨우 수습한 아버지가 나를 향해 크게 말했다.

“아복(阿福)! 이리 와라!

말로는 부족했던지 아버지는 내 손목을 붙잡아 세게 낚아챘다.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지만 나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분명 화가 나 있었고, 여섯 살 적 내게 있어서 화난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아버지는 품에 당겨 넣은 내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길은 오직 양 형의 얼굴 위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 달엔 일찍 오셨습니다.

곱지 않은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는 아버지의 말에 양 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매달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네. 자네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을 뿐이지.

아버지는 시선을 돌려 새로 내린 눈으로 희끗희끗 번져가는 공터를 둘러보았다. 나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저 눈 밀대, 빨리 받아 놨어야 하는 건데.

“자식 놈이 수고를 끼친 모양입니다. 쇤네가 대신 사과드리지요.

내 손목을 움켜잡은 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았는지, 양 형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큰 눈이 내려 어릴 적 기분을 내 보았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괜히 죄 없는 아이를 혼내지는 말게나.

“쇤네 같은 천것들 사정까지 다 신경 써 주시고,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빈정거림에 양 형은 조금은 슬퍼 보이는 웃음을 짓더니 어깨에 걸치고 있던 눈 밀대를 내게 내밀었다.

“이건 돌려주마.

엉겁결에 마주 손을 내밀었지만 잡은 것은 없었다. 아버지가 한발 앞서 눈 밀대를 가로챈 것이다. 양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들어가도 되는가?

아버지는 나를 끌고 한 걸음 비켜섰고, 양 형은 아버지가 내준 길을 걸어 반쯤 열린 정문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지날 때 잠깐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았지만, 아마도 나는 썩 좋은 표정을 보여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양 형이 장원 안으로 사라지자 아버지는 나를 품에서 떼 놓고는 무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는 겁에 질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이번에는 무엇으로 얻어맞을까 상상하는 것은 여섯 살 아이에겐 너무 잔인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는 절대로 숙소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뿐 아니라 이 장원에서 일하는 모든 일꾼의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기 전까지 숙소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그것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지켜야만 하는 공통의 규칙인 줄 알았다.

“한데 숙소도 아니고 장원 밖으로 나가다니, 그것도 눈 밀대까지 꺼내 가지고. 대체 무슨 짓을 할 작정이었느냐?

“……눈을 치우려고요.

“뭐?

“아침에 깨 보니까 눈이 많이 오잖아요. 그런데 아빠는 감기에 걸려 아프고, 그래서 대신 눈을 치워 놓으려고 나왔어요. 아빠 힘들지 말라고요.

말하며 나는 울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맞을까 봐 무서워해야 하는 현실이 억울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무서워서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후우, 하는 긴 숨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바위처럼 딴딴해진 어깨에서 힘을 빼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 두마.

맞지 않게 되었으니 기뻐야 할 텐데 어쩐 영문인지 눈물만 더 나왔다. 나는 대답도 못 하고 오리처럼 꺽꺽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나는 눈물 맺힌 눈에 의문을 담아 아버지를 올려다보았고, 아버지는 그런 내게 한 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

“아까 그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알은체를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모습이 이 집 어른들의 눈에 띄는 날에는, 우리는 더 이상 이 집에서 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여섯 살의 어느 겨울날 아침, 나는 문지기가 되겠다는 꿈을 처음으로 마음에 새겼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이 세상은 내게 그 꿈을 꾸게 해 준 사람을 멀리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3.

아홉 살이면 제법 많은 것들에 대해 알 나이다. 나는 아버지와 나를 품은 커다란 장원이 운검가라는 이름의 강호세가(江湖世家)임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주인인 채 씨(蔡氏)들이 한 가지 검법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여섯 살 때와 비슷했다. 여전히 정문 위 현판이 걸리는 곳은 빈자리였고, 여전히 ‘운검가’라는 세 자는 입에 담아서 안 되는 금기였으며, 여전히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기 전까지 숙소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날선 규칙, 금기도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 속에선 어떤 식으로든 무뎌지는 법. 반항과 거역에 이제 막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개구쟁이들은 많은 은밀한 이야기들을 공유하려 하였고, 이를 눈치 챈 몇몇 어른들도 딱히 문제 삼으려 들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사내아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운검가의 주인들이 가졌다는 한 가지 검법에 대해 커다란 호기심을 느꼈다. 흐르는 구름처럼 신비하다는 그 검법은 십 년 전에만 해도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열 가지 무공 중 하나로 꼽혔다고 한다. 흙바닥이 허옇게 보일 만큼 가물고 무더운 어느 여름날, 내게 그 얘기를 들려 준 것은 유 총관네 막내아들인 유덕(劉德)이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유덕은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을 사람 좋은 부친으로부터 자주 듣는다고 했다.

“난 봤지, 그 검법.

“진짜?

“응, 밤중에 귀뚜라미를 잡으러 정원에 나갔다가 둘째 도련님이 수련하는 걸 몰래 봤어. ! 쉭쉭! 그러고 붕 떠서 차차착! 씨발, 진짜로 죽여주는 검법이더라고.

효과음에 욕설까지 섞어 낸 유덕의 이야기는 내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고요한 정원. 춤추는 그림자. 구름처럼 흐르는 검광. 그리고 그 끝에서 점점이 부서지는 달빛. 그것은 이제 막 사내가 돼 가는 아홉 살짜리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를 뒤로하고 숙소를 살금살금 빠져나온 것은.

아버지와 내가 살던 방 하나짜리 조그만 사옥(舍屋)은 문지기라는 아버지의 직책으로 인해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정원까지는 얕은 담을 둘이나 지나야 하지만, 쪽문은 항시 열려 있고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겠지 싶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날 정원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둘째 도련님은 볼 수 있었다. 유덕처럼 몰래 본 것이 아니었다. 몰래 본 쪽은 둘째 도련님이었다.

“아복.

석등 뒤에서 울려온 낮은 목소리가 안 그래도 켕긴 게 많은 나를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비명이라도 지를까 봐 걱정했던지 목소리의 주인은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더욱 놀라워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달빛에 드러난 둘째 도련님은 얼굴과 의복, 신발까지 온통 새빨갰다. 저렇게 많은 양은 본 적이 없지만 그 빨간색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피, 피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그 입은 곧바로 다시 틀어막혔다. 이번에는 내 손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어느새 다가온 둘째 도련님의 손. 뒤따라 밀려온 짙은 피비린내.

“너 혼자냐?

속이 뒤집힐 것 같은 피비린내 속에서도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긴장이 풀렸는지 둘째 도련님은 크게 휘청거렸다. 엉겁결에 둘째 도련님의 허리를 받친 나는 길게 갈라진 의복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시뻘건 속살에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아빠를 불러올게요.

“안 돼!

둘째 도련님은 황급히 소리쳤다가 그 울림에 놀랐는지 얼른 목소리를 깔았다.

“아무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

“하지만…….

“걷기가 힘들구나. 처소에 갈 때까지 네가 도와줘야겠다.

아무리 사내가 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아홉 살이면 여섯 살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꼬맹이였다. 덜 자란 그 어깨로 건장한 이십 대 청년을 부축해 움직인다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낑낑거리며 댓 발짝쯤 떼어 놓을 무렵, 나는 둘째 도련님을 받치던 오른쪽 어깨가 갑자기 허전해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목격하게 된 둘째 도련님의 검법은 내 조잡한 안목으로도 ‘씨발, 진짜로 죽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어 보였다. 하긴 지금이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둘째 도련님은 아홉 살짜리의 부축이라도 받아야 할 만큼 망가진 몸이었으니.

어느 틈엔가 나타난 두 명의 괴한은 뒤뚱거리며 검을 휘젓는 둘째 도련님을 병기 부딪는 소리 한 번 없이 가볍게 제압하더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이 꼬마는?

“차림을 보니 이 집 일꾼의 자식 놈인 것 같구려.

“그런데 왜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거지? 우리가 무섭지 않은 건가?

“그러게 말이오.

두 명의 괴한 중 주로 질문을 던지던 쪽이 내게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양쪽 뺨에 자벌레만큼이나 큼직한 칼자국이 난 사내였다.

“꼬마야, 무서우면 비명을 질러도 된다.

비명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목구멍이 말라붙었는지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굳어 버렸군.

뒷전에서 둘째 도련님을 붙잡고 있던 땅딸한 괴한이 말하자, 칼자국은 혀를 차며 오른손을 슬쩍 움직였다. 왼쪽 볼에 선뜻한 기운이 감돌더니 후드득 소리가 어깨 위로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 만져 보니…… 귀가 사라져 있었다!

“꺅! 꺄아악!

“목청이 좋구나.

칼자국이 만족한 듯 몸을 돌렸다. 내가 목구멍이 찢어져라 악을 쓰는 동안 도련님을 둘러멘 칼자국과 땅딸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담장을 넘어가 버렸다.

한밤중에 울린 내 비명은 커다란 장원을 순식간에 잠에서 깨웠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보다 한발 앞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내원 깊숙한 곳에서 자고 있었을 주인어른이었다. 이부자리에서 곧바로 빠져나왔는지 연자주색 얇은 침의 차림인 주인어른은 왼쪽 얼굴로 피를 흘리며 악을 써대는 나를 보더니 목덜미와 뒤통수의 몇 곳을 아프게 눌러 주었다.

“아복! , 이게 대체……!

뒤늦게 당도한 아버지가 놀라 외치자 주인어른이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혈을 했으니 별일은 없을 걸세.

이 무렵 내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평소라면 눈길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채씨 집안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복, 무슨 일이냐?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고 여겼는지 주인어른이 비로소 내게 물었다. 그러나 한쪽 귀가 잘린 아홉 살 아이가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진정이 되었겠는가. 그런 날 대신하여 주인어른을 상대해 준 사람이 있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조금도 고맙지 않았지만.

“오호파(五虎派)의 두 호랑이가 운검가의 가주 어른을 뵙고자 하오.

정문 너머에서 들려온 음산한 목소리에 주인어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위의 채 씨들이 수군거렸다.

“오호파가 어떤 자들이지?

“근래에 이 부근까지 세력을 넓힌 흑도 놈들입니다.

“허! 이젠 그런 조무래기들까지…….

주인어른은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킨 뒤 내 머리통을 붙잡고 쩔쩔매고 있는 아버지에게 명했다.

“노칠, 문을 열게.

정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정문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는 아까 본 두 괴한이 서 있고, 그들의 앞에는 피투성이인 둘째 도련님이 무릎 꿇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환한 달빛은 정문 앞 모든 풍경을 가감 없이 옮겨다 주고 있었다.

“으음!

주인어른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곁에 있던 큰도련님이 성큼 나서며 호통을 터뜨렸다.

“자면호(刺面虎) 이립(李砬)! 왜호(矮虎) 정춘방(丁春坊)!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뒷골목에서 노략질이나 일삼던 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목청이 크고 성미가 급하여 나 같은 아랫것들 사이에선 ‘벼락통’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큰도련님은 여느 때와 달리 내지른 호통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칼자국이 둘째 도련님의 목덜미를 한쪽 발로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여기가 운검무적(雲劍無敵) 채씨세가의 정문 앞이라는 것쯤은 견문 짧은 이 호랑이들도 알고 있지요.

땅딸보가 칼자국의 말을 받았다.

“채 씨 나리들께선 그 문 바깥에서 절대로 무적의 운검을 펼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고요.

이 말이 아주 무거운 짐이라도 되는 듯 주인어른을 비롯한 모든 채 씨들이 짓눌린 표정을 지었다. 즐기는 듯한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칼자국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이 집안 둘째 도령께선 참으로 풍류가 높더이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 월장하여 기방 출입을 한 것까지야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소. 하지만 아무리 아랫도리 사정이 급하기로서니 새치기를 해서야 쓰나. 더구나 그걸 따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그 ‘무적의 운검’을 휘두른 것은 더더욱 곤란한 일 아니겠소?

“그녀는, 그녀는 기녀가 아니다! 그녀는 내…… 으윽!

둘째 도련님의 항변은 칼자국이 인상을 찡그림과 함께 끊겼다. 목덜미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는지, 둘째 도련님의 얼굴과 맞닿은 전석 바닥에 검붉은 얼룩이 번져 나왔다.

“뭐, 어제까지는 둘째 도령의 숨겨둔 정인이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기녀가 별거요? 빚을 갚지 못해 기루에 팔려 가면 그게 곧 기녀 아니겠소. 게다가 우리는 아직 그 빚을 다 받지 못했단 말씀이야. 해서 우리 다섯이 오늘밤 그 계집의 머리를 올려 주는 것으로 잔금을 청산하려 했던 것인데, 갑자기 난입해서 그 ‘무적의 운검’으로……. 쯧쯧, 결국 오호파의 다섯 호랑이 중 셋이 오늘부로 염라전 신세를 지게 생겼으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겠소?

주인어른이 정문 너머 칼잡이와 땅딸보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칼자국이 야비하게 웃으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호랑이 한 마리당 은자 천 냥씩, 총 삼천 냥. ! 물론 둘째 도령이 ‘규칙’을 어긴 일을 불문에 붙이는 대가는 따로 계산해야겠지요.

“이놈들!

! 큰도련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당장이라도 정문 밖으로 뛰쳐나가 두 사내를 쳐 죽일 기세였다. 둘째 도련님도 셋을 잡았다는데 큰도련님이라면 둘쯤은 문제도 아니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기대했지만, 칼자국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하! 호랑이 몇 마리 죽는 거야 아쉽지 않지만, 이 일로 인해 큰도령과 둘째 도령 모두 근맥이 잘릴 터이니 채씨세가의 운검무적도 오늘로 대가 끊기게 생겼구려. 게다가 직계 중 둘이나 규칙을 어기게 되었으니 비봉문(飛鳳門)으로부터 받을 핍박은 오죽할까? 아쉽구나, 아쉬워!

주인어른이 큰도련님에게 말했다.

“검을 거둬라.

“아버지!

“검을 거두래도!

주인어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큰도련님은 어깨를 와들와들 떨 뿐 쉽게 검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을 뿌리치고 뛰쳐나가 성질을 풀 형편도 못 되는 눈치였다. 그때 한 사람이 주인어른의 앞으로 나섰다. 주인어른에겐 당질이 되는, 그리고 나 같은 아랫것들에겐 ‘소보살(少菩薩)’로 통하는 후당(後堂)의 작은 도련님이었다.

“가주님, 청이 있습니다.

난데없는 말에 주인어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청이라니?

“소질은 이 시간부로 세가를 떠나겠습니다.

“뭐라고?

후당 작은 도련님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주인어른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런 다음 다시 일어서서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려운 시기에 세가를 저버린 죄, 훗날 귀신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갚겠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나는 큰 의혹에 빠졌다. 후당 작은 도련님은 갑자기 왜 집을 나간다는 걸까? 어렵기만 한 이 집안의 다른 채 씨들과 달리 우리 같은 아랫것들에게도 무척 살갑게 대해 주는 좋은 분인데.

후당 작은 도련님은 주인어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굳은 얼굴로 발길을 향한 곳은 정문. 누구도 말릴 새 없이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 끝에선 내가 그토록 보고파 하던 신비한 구름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을 거두게.

이 말을 한 사람은 주인어른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믿을 수 없게도, 양 형이었다. 삼 년 전 여섯 살 때 본 것과 마찬가지로 새카맣고 커다란 양 형이 정문 위 어딘가에서 유령처럼 뚝 떨어져 내리더니 이제 막 문지방을 넘어서려는 후당 작은 도련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검 끝으로 그려내던 신비한 구름이 양 형의 눈앞에서 뚝 끊겼다. 검 끝과 양 형의 얼굴은 그야말로 지척. 구름이 다시 피어나면 금세 양 형의 얼굴을 삼켜 버릴 것 같았다.

“비키시오.

양 형을 향한 후당 작은 도련님의 목소리는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찔러 죽일 만큼 뾰족하게 들렸다. 그러나 양 형은 비키지 않았다. 대신 후당 작은 도련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뽑더니 멀찍이 서 있는 주인어른을 향해 물었다.

“조카 분을 세가에서 내치시겠소?

“나는 그 아이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네.

주인어른의 대답이 끝난 순간 양 형이 움직였다. 양 형의 얼굴에 바짝 들이밀어진 후당 작은 도련님의 검은 어느새 원래 들어 있던 검집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칼자루를 쥔 후당 작은 도련님의 손은 삼 년 전 내게서 눈 밀대를 채 갔던 그 커다란 손에 붙잡혀 있었다. 주인어른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흑삼객(黑衫客)의 탈인조화수(奪刃造化手)는 명불허전이군.

양 형은 코앞에서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후당 작은 도련님에게 말했다.

“어둠은 왕왕 피를 뜨겁게 만들지. 자네는 그만 집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네.

후당 작은 도련님은 양 형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한 자 한 자 짓씹듯이 말했다.

“본가의 가원들이 문파 밖에서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되는 날, 운검무적의 검 끝이 가장 먼저 향할 곳은 당신의 심장일지도 모르오.

양 형은 후당 작은 도련님의 손을 놔주며 차분히 말했다.

“자네는 안 믿겠지만, 나도 그날이 오길 기다린다네.

후당 작은 도련님이 채 씨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양 형은 천천히 몸을 돌려 정문 바깥쪽을 향해 섰다. 활짝 열린 정문이 그 크고도 넓은 등에 꽉 막혀 버린 것 같았다.

“호랑이 값을 청산받기 전에 나와의 계산부터 청산해 주면 좋겠군.

양 형의 말에 칼자국은 둘째 도련님의 목에 얹어 놓은 발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흑삼객 대협 같은 분께서 저희들과 청산할 게 뭐가 있다고……?

“내 어린 동생의 귀를 자른 값.

큰 칼로 내리친 듯 단호히 떨어진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내가 채 깨닫기도 전, 양 형의 커다란 몸이 정문 문지방 위에서 사라졌다. 삼 년 전 정문 앞 공터에서 눈을 치울 때처럼 나는 그저 눈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머물던 자리에서 순식간에 꺼져 버린 것이다. 어라, 하는데 시커먼 뭔가가 내 눈앞을 가렸다. 곁에 있던 아버지의 손바닥이었다. 그러고는 두 마디 비명이 귓전을 두드렸다.

“악!

“끅!

아버지가 내 눈을 가린 손바닥을 치웠을 때, 정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양 형뿐이었다. 바닥에는 셋. 둘째 도련님은 처음 문이 열린 때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은 채 엎어져 있고, 칼자국과 땅딸보라 생각되는 몸뚱이 두 개는 내가 까치발을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높이로 납작하게 깔려 있었다.

둘째 도련님을 일으켜 데려오는 양 형을 보며 나는 박수라도 보내고 싶었다. , 아버지 같은 문지기라고 하더니만 엉큼하긴! 삼 년 전 사귄 저 늙은 형은 주인어른도 어쩌지 못한 고약한 악당 둘을 순식간에 해치울 만큼 굉장한 고수였던 것이다. 그런 고수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 복수를 위해 솜씨를 드러내다니! ‘내 어린 동생의 귀를 자른 값’이라, 이 얼마나 ‘씨발, 진짜로 죽여주는’ 말인가! 그가 멋지고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막 정문으로 들어서는 그를 향해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양 형! 나는 이다음에 꼭 양 형 같은 문지기가 될 거예요!

그러나 나는 양 형을 향해 박수도, 외침도 보낼 수 없었다. 나는 귀하지 못한 집의 자식답게 눈치가 빨랐다. 그 빠른 눈치가 내게 잠자코 가만있으라는 경고를 보냈다. 주인어른을 비롯한 채 씨들의 분위기는 두 악당이 멀쩡하게 서 있을 때보다 오히려 험악해져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집안으로 들어온 양 형은 부축해 데려온 둘째 도련님을 주인어른 쪽으로 밀쳤다. 주인어른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허우적거리며 다가오는 둘째 도련님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다시 부끄러운 꼴을 보이면 용서하지 않겠다.

다행히 둘째 도련님은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못 마땅한 듯 쳐다보던 주인어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물론 양 형이 있었다. 양 형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귀가의 둘째 도령은 봉문오조(封門五條)의 제사 조를 위반했소. 인정하시오?

봉문……오조?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깜빡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모든 채 씨들, 심지어 채 씨가 아닌 아버지의 얼굴에까지 참괴하고 비통한 기색이 그늘처럼 깔려 있었다. 봉문오조가 뭐기에?

주인어른이 한참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양 형이 다시 말했다.

“봉문오조의 제사 조, 운검가의 가원은 문파 밖에서 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 귀가의 둘째 도령은 이 조항을 위반했소. 인정하시오?

주인어른의 굳게 붙은 입술은 그러고도 한참이 더 지난 뒤에야 떨어졌다.

“인정하네.

“나 양업은 봉문오조를 관장하는 봉문사(封門事)로서 제사 조를 위반한 귀가의 가원을 징계할 책임이 있소.

양 형이 하는 말을 듣는 동안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봉문오조가 뭐야? 봉문사는 또 뭐지? 이봐요, 양 형! 당신은 내게 문지기라고 했잖아요?

“제사 조의 부칙, 위반한 자는 양 손목의 근맥을 자른다. 지금부터 부칙을 시행하겠소.

양 형은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냈다. 나는 눈앞에서 정신없이 치달려 가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뭘 자르겠다고? 남달리 빠른 눈치도 이번만큼은 나를 막지 못했다.

“안 돼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꽂혔다.

“무슨 짓이에요! 양 형, 당신은 문지기랬잖아요! 문지기라면……!

“이놈!

그때 아버지가 득달같이 내달아 내 뺨을 후려갈겼다. 어찌나 호되게 맞았는지 나는 단번에 코피가 터지고 입안이 찢어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피비린내, 아까 둘째 도련님을 부축할 때 맡은 것보다 더 짙은 피비린내가 내 조그만 머릿속을 주걱처럼 휘젓고 있었다.

“어린것이 너무 놀라서 머리가 돌아 버린 모양입니다. 당장 끌고 들어가 혼찌검을 내줄 테니 저놈의 미친 짓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허락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에 의해 개처럼 끌려가면서도, 또 질식할 것 같은 피비린내에 헛구역질을 해 대면서도,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외침만큼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무슨 문지기가 저래! 문지기라면 우리를 지켜야 하잖아! 저따위 엉터리 문지기라면 난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아!

 

시작과 끝을 피비린내와 함께한 아홉 살의 어느 여름날 밤, 나는 문지기가 되겠다는 꿈을 또 한 번 마음에 새겼다. 그러나 그 꿈을 꾸게 해 준 사람은 곧바로 내 믿음을 저버렸고, 나는 치 떨리는 배신감 속에서 그 꿈을, 그리고 그 사람을 함께 묻어야 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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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약력*


   이재일

소설가

1968년 서울생

연세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칠석야> <묘왕동주> <쟁선계>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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