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그해 여름 난 항주(抗州)에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복잡해 반쯤 휴양 차 간 것이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 일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용돈벌이 삼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보수도 적당하고 일도 어렵지 않아 항주에 눌러앉게 되었다.

 항주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경치도 아름답고 여자들은 교태가 철철 넘쳐흐른다. 광대한 미작지대인 북부 절강과 강소로부터 쌀을 운반하는 배가 끊임없이 운하로 밀려들고 육시(肉市)라 불린 돼지고기 시장에선 매일 아침 갓 잡은 신선한 고기를 팔았다. 바다에서 매일 수십 척의 생선배가 신선한 어패류를 가져오고 서호(西湖)에서도 계절마다 다양한 물고기가 잡혔다. 동쪽 교외 신문(新門) 앞에는 야채 시장이 있고 시의 동쪽 후조교(後潮橋)에는 선어 시장, 하안에는 게시장, 남쪽 성벽 밖에는 중원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한약 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중심가에는 커다란 주루며 다방, 귀금속집, 공예품점, 그리고 고급연회장이며 도박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중원 어디보다도 복잡한 대도시지만 시내 전체에 바둑판처럼 운하가 깔려 있어 도시 반대편까지 움직이는 일도 간편하다.

 항주는 똥 빼곤 버릴 것이 없는 완벽한 도시였지만 그중 압권은 무림인이었다. 항주는 호구만이 무림인이 될 수 있다고 법으로 정해놓은 도시 같았다. 가장 위험하다는 뒷골목조차 그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헤헤 웃을 줄만 아는 무골호인들이 득실거렸다. 장사치에게서 빌린 돈을 받아내다가도 고향에 두고 온 노모 생각에 질질 짜면서 원금만 돌려받는 녀석들이었다. 이놈들은 사람이 죽을까봐 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내가 있던 하북(河北)에선 누군가 자신을 모욕했다 싶으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복수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한 마디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칼부터 휘두르고 본다. 상대의 간을 꺼내 씹었을 때야 진짜 협객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이곳 항주에는 뺨을 맞고도 실실거리는 녀석들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다. 

 도시가 크면 뜯어먹을 곳도 많은 법이다. 항주는 장사치에 도박꾼, 창녀, 도둑놈에 강도들이 득실거리는, 그야말로 무림인에게 황금어장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관리해야 할 무림인이 물렁해 빠졌다. 돈 냄새를 맡은 불한당들이 사방에서 꼬일 수밖에 없다.

 그중에 구륭이 있었다.

 지다성 구륭.

 지다성 구륭은 녹림사십팔채(綠林四十八寨) 중 비호채(飛虎寨)의 채주로 무식한 외모만큼이나 흉측하게 생긴 여덟 개의 뾰족한 갈고리를 무기로 썼다. 그 갈고리로 상대를 푸줏간 고기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것이 놈의 유일한 취미라고 했다. 돈 떨어지는 소리도, 여자의 교성도 아니고, 하다못해 비단 찢는 소리도 아닌, 갈고리로 가죽을 벅벅 긁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떠드는 위험한 인간이었다. 

 지다성이란 별호를 머리가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되는 것이 지다(智多)가 아니라 지다(多), 즉 손가락이 많다는 뜻이었다. 갈고리로 하도 그어대니까 생긴 이름인 것이다. 녹림사십팔채의 총채주인 천살성(天煞星) 장경이 구륭에게 살해당한 시체를 보고, "이 새끼 밭고랑 내나…… 촘촘하게도 긁어놨네. 넌 손가락이 한 스무 개 되냐?" 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했다.

 말이 좋아 녹림도요 녹림호걸이지, 사실은 산적, 크게 해먹는 산적에 불과한 것이 그들이다. 산속 깊숙한 데 틀어박혀서, 지나가는 사람들 돈이나 갈취하는 인종들이 정신 멀쩡하게 박혔을 리 없다. 구륭은 그런 녹림도 내부에서도 미친놈이라고 불릴 정도의 심각한 악당에 인면수심, 사회부적응자였다. 게다가 머리도 나빴다. 중원 전체에 지명 수배된 녹림도란 놈이 대명천지에 항주 도심까지 내려와 도박장을 들락거릴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녹림의 채주라는 자신의 사회적 책임과 도리를 망각한 태도였는데, 구륭은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여겼는지 도박장에서 온갖 추태를 다 부렸다. 

 구륭의 도박 전략은 간단명료했다. 돈을 따면 가져가고, 잃으면 도로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내가 언제 돈 걸었어? 엉? 잠깐 내려놨던 거 아냐! 안 내놔? 어?"

라는 식이다. 말도 안 되는 오랑캐식 논리지만 효과는 있었다.

 누가 감히 지다성 구륭에게 덤비겠나. 자살하고 싶으면 서호에 몸을 던지는 게 낫다. 구륭에게 걸리면 몸이 빨래판으로 변한다. 구륭이 특유의 눈웃음을 치면서 솥뚜껑 같은 손을 어깨에 올릴 때, 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도박꾼이 있다면 내가 한 번 만나보고 싶다.

 항주가 아무리 물렁한 도시라고 해도 진짜배기 무림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작자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도박장은 그 생리상 조용하게 운영될 필요가 있다. 도박 좋아하는 사람치고 번잡한 것 좋아하는 사람 없다. 내가 도박꾼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하는 말인데, 도박꾼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하게 골패와 마주하길 원하지, 근처에 지랄하는 인종이 있는 걸 원치 않는다. 구륭 같은 미친놈과 싸운답시고 가게 기물을 부수고 벽에 피를 뿌려대면 쪽박 찰 일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고 포도아문에 연락해서 해결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 세상에 구륭보다 돈을 밝히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관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항주의 관원은 돈 냄새 잘 맡기로 악명 높았다. 평소에도 도박장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용돈을 요구하는 놈들인데,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해 봐라. 당장 생명의 은인처럼 으스대면서 아예 들어앉으려고 할 거다. 

 결국 항주 중심부의 도박장 주인 다섯이 모임을 가졌다. 표면적으로는 도박장을 경영하는 장사치들이지만 실제론 항주의 밤거리를 지배하는 다섯 따거(大兄)들의 회합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오대현인(五代賢人)이라고 불렀다. 그들 중 우두머리는 금룡(金龍)이란 골동품 가게의 주인인 석방평이었다.

 그는 이제 막 환갑이 지난 노인으로 이웃집 아저씨처럼 포근한 인상의 소유자였지만 그건 겉보기에 불과할 뿐 실상은 살도귀(殺刀鬼)란 별호를 가진 구제불능의 살인자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특유의 잔인성도 살집 속으로 사라졌지만 가끔씩 쏘아보는 눈빛 사이로 과거 무림의 영웅호걸들을 토막 냈던 흉포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항주 무림의 신화적 존재였다. 항주 토박이로는 처음으로 흑도 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석방평의 대단함은 무공의 고강함이 아니라 항주 사람답지 않은 과단성과 잔인함에 있었다. 

 석방평은 어떤 도박장도 경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도박장의 주인이기도 했다. 항주에서 도박 영업을 하는 자는 누구든 석방평에게 상납금을 바쳐야 했다. 상납이 하루라도 늦거나 한 푼이라도 적으면 그자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석방평은 항주 흑도문파 중 가장 세력이 크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흑사방(黑死幇)의 방주였다. 염라대왕 돈을 떼먹어도 흑사방 돈은 못 떼먹는다고 말할 때의 바로 그 흑사방이다. 흑사방은 항주에서 유일한 진짜 무림방파로 그 밑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들이 잔뜩 있었다.  

 석방평은 참을성이 없는 인물이었고, 구륭이라고 특별히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쯤 되는 거물이면 다른 사람 생각을 안 하는 법이다. 그들은 회의를 했고 석방평은 결론을 내렸다.

“그 놈 적당히 손봐 줘."

 석방평의 입에서 ‘적당히'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적당한 시점에 인근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되게 해달라는 의미다. 도박장에서 날뛰면 이렇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일종의 본보기 같은 거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니라서 회의 결과를 전해들은 흑사방의 실무자들은 구륭을 죽여 버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찌되었건 구륭은 녹림사십팔채의 고급 간부였다. 마흔 여덟 명의 채주 중 상위 십오 위 내에 드는 절정고수이자 중요 인물인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죽여 버려도 되는 놈이 아니다.

 녹림 총채주에게 그간의 사태를 통보하고 허락을 구하는 것이 순서였다. 어느 쪽 책임이 더 큰지 따져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만일에 죽인다면 보상금은 얼마로 정할 것인지, 죽이는 시점은 언제가 되는 것이 좋을지 양측 모두에 만족할 만한 날짜를 고르는 일로 한바탕 소동을 벌인 후 (제3자에게 빚이 있을 수도 있고 병든 노모가 집에 있을 수도 있기에) 최종적으로 시체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정중하고 체계화된 순서에 따라 논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죽여도 좋다는 결론이 내려지면 그때 '적당히' 일을 벌일 수 있다. 

 야심만만한 바보들은 무림에 무슨 순서며 도리냐, 힘 있으면 일단 죽이고 보는 거지, 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놈이 스물 넘게 사는 경우를 나는 보지 못했다. 무림방파에 몸담은 인간이라고 해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진 못한다. 오히려 무림인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무력으로 결론을 내리는 세계에 있기 때문에 더욱 지켜야 할 규율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싸움이 좋다고 해도 1년 내내 미친개처럼 싸우고 다닐 순 없는 일 아닌가. 적당히 대화로 해결될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 편이 낫다. 

 석방평도 잔인하다는 점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이었지만 일의 순서는 철저하게 지켰다. 미친개 하나를 잡자고 피바다를 만들 순 없는 일 아닌가. 그는 녹림총채주에게 사람을 보내 사정을 설명했다. 앞뒤로 길고 복잡한 수식어가 붙어 있었지만 그 요지만 말하자면- 구륭을 손봐 줄 생각인데 불만 있냐는 거였다.

 열흘 후 답신이 도착했고 오대현인은 날 불렀다.

 오대현인은 언제나 흑교 옆의 대풍주루(大豊酒樓)에서 모였다. 그들은 주루의 최상층인 7층을 통째로 사용했고 여자 한 명 부르지 않고 조용히 밀담을 나눈 후 흩어졌다. 5층과 6층은 거물들의 경호원들이 사용했다. 날 주루까지 안내한 자는 귀면검객(鬼面劍客)이란 별호의 칼잡이였는데, 녀석은 오대현인의 회합에 외부인이 참석한 건 20년 만에 내가 처음이라고 말해주었다.

 난 물었다. "20년 전엔 누가 왔었는데요?"  

 귀면검객은 귀신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모릅니다. 석 대인에게 말대답을 했다가 머리에 망치를 맞았거든요. 통성명을 할 시간은커녕 얼굴도 못 알아보겠더군요."

 녀석은 석방평이 말을 거는 일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덧붙였지만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주루의 7층에는 다섯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주름진 얼굴에 탐욕으로 가득 찬 눈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석방평의 눈이 가장 크게 빛났다. 노인 넷은 침묵을 지켰고 그들 중 가장 뚱뚱한 고생이란 노인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 애들 말로는 일을 제법 한다던데. 철혈문(鐵血門) 출신이라고?"

 "예."

 나는 미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철혈문에서도 알아주는 인재라고 들었는데……. 어쩌다 항주까지 왔나?" 

 "개인적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개인적 사정이 뭔지 알고 싶다는 거지."

 나는 다리를 꼬았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해도 불편하다.

 "돈 문제가 있었습니다."

 "돈 문제?"

 "도박을 좀 했거든요."

 "도박! 하긴 자네 우리 도박장에 들락거린다는 이야긴 들었지. 거참…… 도박이란 게 적당히 하면 참 건전한 놀이인데…… 꼭 지나치게 하다가 패가망신을 한단 말이야. 그래서? 빚을 졌나?"

 "예. 문파 공금을 조금 꺼내 썼습니다."

 "문파 돈을? 그건 큰 실수구만. 그래서 파문당했나?"  

 "꼭 그런 건 아니고…… 여자문제가 있었습니다."

 "여자문제?"

 "도박장에서 여잘 만났거든요. 돈도 잃고 기분도 별로라서 여잘 따라갔는데……."

 "따라갔는데?"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여자였습니다." 

 노인들의 표정이 변했다. 이런 지저분한 놈이 있을 수 있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노인네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들 역시 성적(性的)인 문제에 있어 보수적인 모양이었다. 나는 석방평이 망치를 든 부하를 부르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절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요. 자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지 뭡니까. 워낙 늦은 밤인데다 그년이 워낙 화장을 덕지덕지 처바르고 있어서……. 그년이 그년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했을 겁니다."

 "그래서? 들켰나?"

 "침대에서 사부님과 눈이 마주쳤죠. 정당방위였습니다." 

 "항주까지 온 이유를 알겠군. 허나 정당방위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심 괜한 소릴 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왕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다. 여기서 그만둔다고 이들이 날 비단결처럼 착한 마음의 소유자로 믿어주지도 않을 터였다.

 "얌전히 칼을 맞아줄 순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사부를 죽였나?"

 노인들의 표정이 변했다. 이런 천인공노할 놈이 있을 수 있나, 하는 표정들이다. 노인네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들 역시 위아래 문제에 집착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석방평이 망치나 뭐 다른 잔인한 흉기를 든 부하를 부르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죽인 건 아니고 뼈가 두어 대 부러졌죠.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서 벌어진 일입니다. 딱 한 대, 한 대밖에 안 때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재수 없이 급소에 맞는 바람에……."

 "끝내주는군."

 침묵을 지키던 노인 한 명이 중얼거렸다. 고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더는 없나? 철혈문에 불을 지르거나 사형들을 독살하거나 뭐 그런 건 없어?"

 "거기에도 오해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날 약간 취해 있어서……."

 "그만. 그만하지."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말투로 고생이 중얼거렸다.

 "철혈문 오백년 역사에 자네가 똥칠을 했구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림인이 하는 일이라는 게 결국은 똥칠인 거다. 사람을 죽이고 남의 돈을 빼앗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농사를 짓지도 장사를 하지도, 하다못해 구걸도 하지 못한다. 그저 무공을 연마하고 심심풀이로 도박을 하는 게 전부다. 고급 주루 7층에 들어앉아 비싼 안주를 먹는다고 그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철혈문에도, 이들 흑사방에도 지켜야 할 영광 따윈 없다.

 물론 내가 조금 과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노인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날 천하의 패륜아에 막장인생으로 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슬쩍 문 쪽을 곁눈질했다. 망치를 든 놈이 깨금발을 한 채 문을 열고 있을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노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아무리 나쁜 놈이 필요한 일이라고 해도 저건 좀……." "저놈 먼저 죽여야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그만 보낼까?" 

 그때 침묵을 지키던 석방평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마음에 드는군." 

 석방평의 한 마디에 장내의 분위기는 단번에 내가 적임자라는 쪽으로 변했다. "하긴 배짱이 있어야 남자지." "그래. 주먹에 눈이 달렸? 휘두르다 보면 맞을 수도 있지. 주먹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 "영웅호색이란 말도 있잖아? 칼끝을 걷는 우리 무림인에게 2세를 낳는 문제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그런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석방평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보수는 후하게 지불하지."

 나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돈이 떨어지던 차였다. 그래서 일거리를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오대현인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이들이 맡기는 일이라면 빌린 돈 받아내는 종류의 소소한 일은 아닐 터였다.

 "지다성 구륭이라고 아나?"

 "두어 번 본 일은 있습니다. 돈 딴 사람을 때리고 있더군요." 

 "그자가 항주의 물을 흐리고 있어. 그냥 두면 안 되겠어." 

 석방평은 더 말하지 않고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원래 우두머리는 과묵해야 하는 법이다. 남은 설명은 아랫것들이 해도 되는데 왜 목 아프게 떠들겠는가.

 고생이 침을 튀기며 말을 받았다.

 "항주가 어떤 곳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중원을 통틀어 가장 품위 있고 아름다운 도시야. 세상의 시인묵객, 기인이사, 고승대덕들이 살아생전 항주의 땅을 한 번만 밟아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곳이란 말일세. 구륭 같은 악당에 살인자가 들락거려도 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란 뜻이지."

 다른 노인이 말을 받았다.

 "미꾸라지 같은 놈이야. 물을 흐리고 있다고." 

 "우린 구륭이 항주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자라는 결론을 내렸네." 

 이들이 내 품위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시인묵객은 못 되더라도 기인이사처럼 보이기 위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사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부질없는 노력을 포기하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구륭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녹림채가 나설 텐데요."

 "비열한 산적 놈들!"

 고생이 투덜거렸다.

 "그놈들이 두려운 건 아니야. 하지만 분쟁이 생기면 귀찮으니까…… 일단 녹림채에 연락을 했지. 구륭을 손봐주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인들은 치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 반문했다.

 "그래서요?"

 고생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지."


*


 녹림 총채주 장경에겐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장경의 나이 쉰에 낳은 무남독녀다. 평생 금이야 옥이야 정성껏 기르다 다음 달에 시집을 보낼 모양이다.

 "그것도 지방현령에게 보냈지. 이게 말이 되나? 산적두목이 관리와 사돈지간이라니? 지들끼리 다 해먹겠단 수작이잖아. 나라의 기강이 이렇게 해이해져도 되는 건가?"

고생은 공분을 토해냈다. 도박장 주인이 나라의 기강을 따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대명제국의 미래가 더욱 걱정스럽게 느껴졌다. 고생은 한참을 투덜거린 끝에야 결론으로 넘어갔다.

 "딸의 혼사가 있는 중요한 때라 피를 볼 수 없다는군."

 "그럼 혼사가 끝난 다음에……?"

 "아니. 구륭을 따끔하게 혼낼 테니 한 번만 양보해 달라더군."

 무림에선 체면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내 체면뿐 아니라 상대의 체면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난다. 구륭을 처리하기 전에 녹림채에 미리 연락한 것도 체면을 지켜주기 위함이고, 녹림총채주가 딸의 혼사 문제까지 들먹이며 한 번 양보해 달라고 말한 것도 흑사방의 체면을 위해서다. 양쪽 다 적당히 체면을 지켰으니 이쯤에서 끝내는 게 일반적이다. 또 다시 구륭이 사고를 쳤을 땐 사전경고 없이 처리해도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으로 진행된 일임에도 노인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럼 대충 끝난 것 아닙니까? 왜들 그러십니까?"

 "구륭이 어제 대운방(大運房)을 거덜냈어."

 대운방은 항주에서도 가장 큰 도박장이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덜이요?"

 "골패노름이었지. 어디서 가져왔는지 구륭 그놈이 은자로 천 냥도 넘는 돈을 가져왔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돈을 수레에 실어왔으니까. 항주를 떠나기 전에 크게 한 판 땡기고 싶다더군. 그놈이 우리 도박장 돈을 축낸 게 얼만가. 본전 회수할 기회로 여기고 당연히 수락했지. 자네도 봤다니 알겠지만 구륭 그놈이 노름에 능숙한 놈이 아니잖아. 그래서 우리 애들 중에 제일 잘하는 놈들로 붙였지."

 "그런데 졌군요."

 "처음엔 조금씩 땄는데 마지막 한 판으로 은자 이천 냥을 잃었네. 밤이 늦었으니 한 판만 더 하고 가겠다고 해서…… 남은 돈 다 걸고 한 판 벌였다가 대형사고가 난 거지."   

 한 판에 이천 냥이라니……. 도박판에서 뼈가 굵은 나조차도 본 일이 없는 일이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대명 건국 이래 최고의 승부였겠군요."

 "최고의 승부는 무슨! 당연히 사기당한 거 아닌가. 구륭 그 호구가 무슨 재주로 우리 애들을 재껴?"

 "증거가 있는 겁니까?"

 고생은 헛기침을 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 보아 증거는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구륭을 건드릴 수 없다. 사기를 쳤다는 증거 없이 구륭을 건드리면 녹림채와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 

 "곧 찾아낼 거야. 놈에게 내부 정보를 판 놈이 있어. 그놈만 찾으면 돼."

 그때까지 구륭이 기다려줄 리 없다. 무슨 꼴을 당하려고 항주에 남아 있겠나? 그 돈이면 어딜 가도 지상낙원이다. 천하의 시인묵객, 기인이사, 고승대덕, 고관대작들도 항주보단 은자 이천 냥을 택할 거다.

 "배신자를 찾아달란 겁니까?"

 "자네에게? 아니지. 자네 전문은 머리 쓰는 게 아니라 힘쓰는 거 아닌가."

 난 은근히 마음이 상해 중얼거렸다. 

 "저 머리 좋습니다."

 "철혈문을 서까래 한 장 안 남기고 말아먹은 게 자네 머리 아니었나?" 

 그때 석방평이 번쩍 눈을 떴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쏠렸다. 그는 날 쳐다보며 거물 특유의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구륭을 죽이고 돈을 회수해주게."

 난 입을 딱 벌렸다. "흑사방도 못 건드리는 놈을 제가 어떻게 죽입니까?" "녹림채의 추적은 어떡하라고요?" "설마 농담이시겠죠?" 등등의 질문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결국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무슨 질문을 하든 등 뒤에서 망치가 날아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


 나는 고생과 함께 주루 뒷문으로 나왔다. 고생은 계단을 내려오며 "이왕 버린 몸이잖아. 한 번만 노력해주게. 이번 일만 해결해주면 평생 먹고 살 돈을 만들어주지." 등의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내 반응이 시원치 않자 "혹시 구륭과 싸워 질까봐 걱정되나? 철혈문 이거 실망인데." 같은 말로 날 부추기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할 것이 많아 머리가 복잡했다. 뒷문 앞엔 주방에서 버린 음식물쓰레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거지 몇 명이 쓰레기를 헤집고 있다가 우리가 나오는 걸 보고 급히 달아났다. 고생은 못마땅한 듯 수염을 잡아당겼다.

 "저놈들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는 나무통 가득 쓰레기를 가지고 나오는 주방 직원에게 소리쳤다. 

 "거기다 비상을 좀 타서 버려. 한두 놈 죽으면 다신 안 오겠지."

 쓰레기더미에선 썩은 물이 흘러나와 작게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지독한 악취. 고생은 가죽신발에 물이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쓰레기 좀 빨리 치워. 다 썩잖아."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고생은 어두운 골목을 앞장서 걸어갔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계획을 설명했다.

 "놈을 죽이고 돈을 가져오게. 가급적 사람 많은 데서 죽여야 해. 그래야 녹림채 놈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을 못 할 테니까. 배를 준비해 두지. 배를 타고 어디 작은 섬 같은데 들어가서 2-3년 있으면 녹림채 놈들도 다 잊어버릴 거야."

 어림 반푼어치 없는 소리. 녹림도는 절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지옥 끝까지라도 날 추적할 게 틀림없다. 녹림의 정보력이라면 섬이 아니라 서역으로 나간다 해도 안 된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녹림도보다 더 큰 걱정거리는 이놈들, 흑사방이다. 과연 날 놔주려 할까? 그보단 날 죽여 입을 봉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야 구륭을 죽이는 데 개입한 증거가 사라지는 거니까.

 골목 어귀에 귀면검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친구가 자넬 도울 걸세. 구륭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고 다시 우리에게 데려와줄 거야.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이 친구에게 말해. 칼이든 도끼든 뭐든 원하는 대로 가져다 줄 테니."

 도움은 얼어 죽을. 그저 감시꾼 아닌가. 내가 구륭과 싸우지 않고 도망칠까봐 걱정이 되어서 감시꾼을 하나 깔아둔 거다. 고생은 본인도 믿지 않는 공치사를 한참이나 늘어놓다가 내 어깨를 토닥이다가 집에서 아내가 기다린다고 사라져버렸다. 귀면검객은 날 보고 귀신처럼 웃었다.

 "거 보슈. 안 죽고 나왔잖수."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  

 귀면검객의 이름은 허삼락이었다. 그는 내게 원하는 걸 물었고 난 잠시 고민하다가 새 칼을 요구했다.

 "육도(肉刀)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고기 자를 때 쓰는 그 네모난 칼 말인가? 철혈문은 권법과 장법만 가르치는 줄 알았는데?"

 "맨손으로 어떻게 갈고리를 당해?"

 내 퉁명스러운 대꾸에 허삼락은 당황한 듯 보였다. 무림에 나오자마자 처음 안 게 바로 그거였다. 권각법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대로 된 칼잡이에겐 상대가 안 된다. 철혈문이 하북에 웅크린 채 고관대작 자녀들에게 권법을 가르쳐주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옛날 잘 나갈 때는 권각법 말고 바람처럼 움직이는 경신술이 있어, 무기를 든 자와도 맞서 싸울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완전히 실전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은 형편이었다. 

 허삼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도……. 철혈문 무공이라면 칼인들 무섭겠어?"

 허삼락의 말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철혈문을 두려워했다. 200년 전 철혈문의 개파조사가 보여줬던 무위 때문이다. 그는 맨손으로 소림방장의 선장을 부러뜨리고 발길질 한 번으로 화산장문의 검을 부러뜨렸다고 했다. 내가 여태까지 목숨 부지하고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이다.   철혈문의 제자라고 하면 어떤 놈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구륭을 죽이려면 진짜 실력이 필요했다. 실력이 없다면 숨겨둔 한 수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다. 

 "구할 수 있어 없어?

 "뭐, 구해주지."  

 "그리고……. 두꺼운 철판 한 장. 두께는 반 치 정도면 되겠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송곳처럼 가늘고 뾰족한 검이 한 자루 더 필요해."


*


 
구륭은 아직 객잔에 있었다. 바리바리 짐을 싸서 도망치려는 중이었다. 벌써 마차도 한 대 빌려 객잔 앞에 세워놓은 상태였다. 객잔 주인의 말로는 도박장에서 2천 냥이나 땄음에도 객잔 식기까지 훔쳤다고 했다.

 "한두 개면 말을 안 해. 한 이십 개는 챙겼어. 완전히 놈 아냐?" 

 그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말을 이었다.

 "구륭 만나러 온 거야? 그 새끼 어제 돈 좀 땄다던데 개평 받으려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았다. 그 새끼 죽이러 왔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나. 잠시 후 객잔이 박살날 걸 알면 심장마비로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잠깐 할 말이 있어서."

 "잠깐. 자기, 구륭이랑 친하지?"

 "친하긴 뭘. 그냥 오다가다 얼굴 몇 번 본 정도지."

 "그래도 도박장에서 자주 봤잖아. 자기가 그릇 좀 돌려달라고 하면 안 돼? 내가 숙박비는 조금 덜 받아도 돼. 근데 기물까지 훔쳐가는 건 너무하잖아." 

 나는 왠지 슬픈 기분이 들어 주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알았어. 내가 그릇은 책임지고 돌려줄게."

 그때 허삼락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온다. 나와."

 허삼락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구륭이 거들먹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허삼락은 말을 마치자마자 객잔 입구로 움직였다. 입구엔 흑사방에서 보낸 칼잡이가 십여 명 밥을 먹고 있었다. 손님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긴 하지만 겨드랑이가 볼록한 것으로 보아 칼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구륭과 싸우지 않으면 날 죽이려고 모인 놈들이다.

 '빌어먹을…….'

 저절로 욕이 나온다. 앞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뒤에는 늑대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구륭에게 다가갔다. 구륭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손을 흔들었다.

 "이게 누구야. 철혈문의 파문제자 아닌가."

 "어제 좀 땄다며?"

 "헤헤. 소문 들었구나? 하긴 이 촌동네에서 그런 큰 판이 언제 있었겠어? 백 년만 지나봐. 난 항주의 전설로 남을 거다. 할머니가 손자손녀에게 무서운 얘기할 때 날 들먹거릴 거라고."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지금 떠나려고?"

 "잠깐 근처 산채에 들어가 있으려고. 곧 우리 총채주 영애가 혼례를 치루잖나. 거기 가봐야지. 혹시 알아? 축의금 두둑하게 내면 진급시켜줄지."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허삼락이 내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나는 다시 구륭을 쳐다보며 말했다.

 "갈 때 가더라도 나한테 복 좀 나눠주고 가지?"

 구륭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러지."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 주머니에 은자 몇 푼을 넣어주었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은자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내가 거지냐? 제대로 줘보지?"

 구륭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우리가 눈싸움을 시작하자 객잔의 손님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객잔주인은 사색이 된 채 우리를 쳐다보았다. 무림인끼리 싸우면, 그것도 우리 정도의 고수가 싸우면 객잔이 어떻게 될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을 말리려 했다간 자신이 먼저 죽는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을 터였다. 

 구륭은 날 노려보다가 주머니에서 은자를 더 꺼냈다.

 "이정도면 됐나?"

 "부족해."

 "이 정도는?"

 "아직."

 나는 고개를 흔들었고 바닥에 은자가 쌓였다. 구륭의 인내력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의 입에서 이상한 괴성 같은 게 흘러나왔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날 노려보다가 괴성을 질렀다.

 "그럼 이거나 처먹어!"

소 매 아래서 갈고리가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끝이 내 머리를 노렸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너무 빨랐다. 이마가 살짝 긁혀 피가 튀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발길질을 날렸다. 구륭은 다른 손을 들어 발을 막았다. 응축된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구륭의 소매가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두 번째 갈고리가 드러났다. 그는 이를 갈며 버럭 소리쳤다. 

 "그래. 이것도 먹어라!"

구륭은 양손의 갈고리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집요하게 내 머리를 노렸다. 일단 머리통을 박살낸 다음에 대화를 계속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육도를 꺼내 갈고리를 막았다. 무지막지한 격검이 이어졌다. 갈고리와 육도가 부딪쳤다 떨어지며 식탁과 의자들을 박살냈다. 사방으로 나무 조각들이 날아갔다. 

 객잔 주인은 이 시련의 순간이 끝나길 기다리며 납작하게 엎드렸다.

 '죽일노무 새끼들…… 아직 빚도 다 못 갚은 집을……'

 구륭은 두 개의 갈고리를 손가락처럼 능숙하게 다뤘다. 베고 긋고 휘두르고 찌르고 십자로 막고 밑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녹림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다웠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맞서 싸울 수 있었지만 나중엔 고작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키진 않지만 무기를 다루는 능력은 녀석이 나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림에서의 승부가 실력만으로 결정되진 않는 법이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육도가 허공을 갈라 녀석의 머리를 노렸다. 단번에 상대의 머리를 쪼갤 만큼 강력한 공격! 

 구륭은 갈고리 하나로 내 육도를 비켜내고 다른 갈고리를 내 아랫배에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갈고리 끝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구륭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지만 곧 표정이 달라졌다. 갈고리 끝의 느낌이 평소의 달랐기 때문이리라. 나는 구륭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녀석의 몸에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리고 구륭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가까이 왔어."

 구륭은 급히 다른 손으로 내 얼굴을 그어버리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칼 쓰는 법은 잘 모르지만 권각법은 자신 있다. 나는 어깨로 녀석의 가슴을 밀어냈다. 구륭은 주춤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고 갈고리가 허공을 갈랐다. 나는 다시 구륭의 팔을 잡아당기며 왼손으로 녀석의 팔꿈치를 꾹 눌렀다.

 "으악!!!!"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구륭의 팔이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나는 팔을 놓으며 구륭의 옆구리에 무릎차기를 먹였다. 구륭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녀석 가까이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주먹과 발길질을 날렸다. 결국 구륭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랫배에 감추고 있던 철판을 꺼냈다. 철판은 갈고리에 맞아 우그러져 있었다. 철혈문의 고수라는 놈이 이런 수를 쓸 줄은 녀석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철판을 바닥에 내던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권각의 고수에게 복대는 필수지."


*


 구륭은 숨이 끊어져 있었다. 나는 녀석의 눈을 감겨주고 객잔 주인에게 다가갔다. 객잔 주인은 아직도 머리를 감싸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이봐. 다 끝났어."

 "응?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다 끝났어. 참, 그릇 필요하다고 했지? 꺼내 가."

 객잔 주인은 구륭의 시체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생업을 가진 남자의 회복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곧 정상을 찾고 마차로 뛰어가 자신의 식기를 골라냈다. 나는 은자 몇 개를 골라 주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수리비에 보태 써." 

 조금 과하게 넣어준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나는 마차에 올라 말을 출발시켰다. 구경꾼들이 꼬이기 전에 멀리 달아나야 했기 때문이다. 성이 멀리 점으로 보이는 위치까지 도망친 다음에야 나는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근처의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주변엔 황량한 평야와 바다까지 연결된 물길이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침울함에 젖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은 어두웠고 하늘엔 수많은 별이 반짝거렸다. 곧 추적자들이 도착했다. 우두머리는 예의 귀면검객 허삼락이었고 흑사방의 칼잡이들이 여덟 명 뒤따르고 있었다. 허삼락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도망치는 줄 알았지 뭔가."

 "항주에서 흑사방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나. 거기다 짐도 많은데."

 "하긴 그렇지."

허삼락은 수레로 다가와 짐을 살폈다. 은자가 가득 차 있음을 확인하자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짐부터 옮겨."

 무사들은 은자가 든 상자를 자신들이 타고 온 말로 옮겼다. 그때 허삼락이 번개처럼 검을 뽑아 가장 가까이 있는 무사의 등을 후려쳤다. 피가 튀었다. 허삼락은 잔인하지만 정확한 칼솜씨로 부하들을 죽였다. 악랄한 기습에 순식간에 셋이 당했다. 남은 무사들은 분분히 무기를 꺼냈지만 너무 늦은 후였다. 차례로 둘이 더 당했고 남은 자들은 도망칠 곳을 찾아 뒷걸음쳤다. 나는 그중 한 명의 목을 잡아 비틀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남은 것은 고작 둘. 그들은 도망칠 곳이 없음을 알고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사형, 살려주세요."

 "아무 말 안 할게요. 사형. 제발……."

 허삼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두 사제의 목을 쳤다. 그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미안. 혼자 오려고 했는데 말이야……. 석방평 그 영감이 얘들을 붙이지 뭐야?"

 "잘했어. 혼자 왔으면 오히려 의심받았을 거야. 배는 언제 오기로 했나?"

 "곧."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은자를 다시 상자에 주워 담으며 대꾸했다. 내 생각대로 역시 탐욕스러운 놈이다. 녀석은 내가 돈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달려들었다. 허삼락은 은자를 넣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날 쳐다보았다.

 "약속대로 칠 대 삼이야. 알지?"

 "그래. 네가 칠."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서 항주를 빠져나오는 게 급했다. 석방평에게 돌아갔다면 아마 머리에 망치를 맞고 서호 밑바닥에 가라앉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은자를 집어 허삼락에게 다가갔다. 그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내가 박투술로 구륭을 죽인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는 나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은자를 받았다. 서로 팔을 끝까지 뻗은 거리. 내가 몸을 날리기 전에 녀석이 먼저 검을 날릴 정도의 거리다. 나는 피식 웃었다.

 "쫄지 마. 아무 일 없어."

 그도 웃었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맞아. 그런데 송곳처럼 가늘고 뾰족한 검은 왜 구해달라고 한 거야?"

 "지금 쓰려고."

소매를 뚫고 칼날이 튀어나갔다. 가늘고 날카로운 검 끝은 귀면검객의 손목을 뚫고 들어가 혈맥을 찢어냈다. 칼끝에는 주루의 주방에서 빌린 비상이 발라져있었다. 허삼락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검을 바닥에 던지고 배가 오길 기다렸다. 일 각이 지나지 않아 멀리서 돛단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상자에서 은자를 몇 개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더는 필요 없다. 남은 돈은 누군가 더 강하고 운 좋은 놈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돈 때문에 또 전쟁이 나겠지.

 바람이 불었다. 조용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겉옷을 객잔에 두고 왔음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 나는 옷깃을 끝까지 여민 후 배가 오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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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한상운 (소설가)

1977년 서울 출생

한양대 전기전자공학부 졸.

무림맹연쇄살인사건, 비정강호 등의 작품이 있다.


<작품후기>


" 낭만과 정의가 살아숨쉬는 무협의 세계가 아니라 범죄자가 득실거리는 범죄의 무림을 표현하고자 했다. 협객이 있으면 악당도 있고 낭만이 있으면 현실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악인에게도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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