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동화책

 

[ 편집위원 노트 ]

 

 

그때 그 동화책

 

 

김미월(소설가, 본지 편집위원)

 

 

 

 

 

    대학 시절에 혼자 어느 충청도 깊은 골짜기 마을에 간 적이 있습니다. 홍진에 찌든 눈을 씻어낼 수 있을 만큼 청정하고 순박한 풍경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니 한 시간 만에 마을을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풍경은 없었습니다. 산 푸르고 물 맑은 것, 그뿐이었지요. 저는 그만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근처 밭에서 일을 하시던 아주머니께 물었습니다.
    “읍내 나가는 차는 몇 시까지 있나요?”
    “네 시 버스가 막차예요.”
    맙소사. 일 분 전이었습니다. 정류장으로 달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 앞에 서 있는 버스가 보였지요.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빨리, 더 빨리!
    버스는 떠났습니다. 저는 남겨졌습니다. 콜택시를 부를 수도 없고 히치하이킹도 불가능했습니다. 할 수 없이 저는 조금 전에 정신없이 뛰어왔던 길을 되짚어 천천히 걸었습니다. 길가 양옆으로 상수리나무가 늘어서 있었습니다. 잎이 반들반들하고 깨끗했습니다. 나무 아래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뼘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냇가 옆에 들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습니다. 달콤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습니다. 모두 아까 뛰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갑자기 시력이 좋아진 것일까요. 상수리나무 이파리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청설모 한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훌쩍 날아올랐습니다. 시냇물이 조약돌 사이로 춤추듯 돌돌돌 흘렀습니다. 바람이 들꽃의 이마를 살랑이며 지나갔습니다. 시력이 좋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은 느리게 걷는 자, 천천히 움직이는 자에게만 제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지요. 저는 더 천천히 걸었습니다. 연인을 만나러 갈 때처럼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초여름 오후였습니다.
    그날 저는 막차 시간을 일러준 아주머니 댁에서 묵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이 뜨내기 여행자에게 속살이 포슬포슬한 고구마를 쪄주고 갓 딴 곰취와 두릅을 올린 밥상을 차려 주었습니다. 아저씨는 외양간의 송아지와 앞마당의 토끼와 뒷마당의 거위를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그 집 꼬마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바닷가 그물침대에 늙은 어부가 한가로이 누워 있었어요. 바다에서는 다른 어부들이 고기를 잡느라 바빴지요. 지나가던 청년이 늙은 어부에게 물었답니다.
    “할아버지는 왜 고기를 잡지 않으시나요?”
    “아침에 많이 잡았어. 우리 식구들이 배불리 먹을 만큼 말이야.”
    “하지만 저녁때까지 계속 잡으면 더 많은 고기를 잡으실 텐데요.”
    “고기를 그렇게 많이 잡아 뭐 하게?”
    “식구들이 먹고 남은 것들을 시장에 내다팔지요.”
    “내다판 다음엔?”
    “돈을 많이 벌어 더 큰 배를 사지요.”
    “배를 산 다음엔?”
    “더 크고 빠른 배를 타고 멀리 나가서 고기를 더 많이 잡지요.”
    “그러고 나선?”
    “그것들을 또 내다팔고, 그 돈으로 더 큰 배를 사고, 돈을 주고 아랫사람을 고용하지요. 고기잡이는 힘든 일이니까 아랫사람들에게 시키는 거예요.”
    “그럼 난 뭘 하고?”
    “그저 편안히 쉬시면 되지요.”
    노인은 잔잔하게 웃으며 대답했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편안히 쉬고 있지 않은가.”

 

    그때 그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덮던 순간으로부터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다시 일상. 저는 늘 무엇엔가 쫓겨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욕심내지도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누리자고, 바로 이곳에 손에 잡히는 행복이 있다고. 그때 저를 사로잡았던 그 고요한 깨달음은 어디로 갔을까요. 시간에 쫓기고 목표에 쫓기고 알 수 없는 미래와 그 밖의 숱한 정체 모를 괴물에 쫓기며, 지금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6월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잠깐, 문장웹진에 들러 쉬어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번 6월호에 실린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오랜만에 신작을 보내주신 시인 김은주, 문동만, 조용미, 함민복, 송승언, 김선재, 이상 여섯 분의 시들은 저마다 깊고 단단하고 아득하니 과연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소설가 임수현, 도제희, 최민우, 정희선, 이은희, 이상 다섯 분은 제목만 봐도 당장 읽고 싶어지는 신작 소설들을 보내주셨지요. 중편 연재를 맡아주신 장강명 소설가의 ‘목성에선 피가 더 붉어진다’는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니 다음 3회는 또 어떻게 기다린답니까.
    그뿐 아닙니다. 에세이 테라스에는 김중일 시인이 시적 사유와 산문적 감수성으로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를 긴장과 이완이 교차하는 인상적인 하루로 바꾸어놓은 ‘오늘과의 작별’이 있고, 유종인 시인이 광저우의 오래된 절에서 발견한 낯선 문자들을 통해 예술과 세상과 인간을 조명하는 미술유람기 ‘서체를 바라보다’가 있습니다. 물론 기획 특집 코너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미국의 현대 시인’ 코너에 실린 최돈미 시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집중 분석, 그리고 ‘문학 신간 리뷰’ 코너에서 박소란의 시집에 주목한 김태선 평론가의 글 ‘안녕 안녕’도 눈여겨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음 달에도 역시 알차고 흥미롭고 웅숭깊은 작품들로 찾아뵙겠습니다.

 

 

작가소개 / 김미월(소설가)

1977년 강릉 출생,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및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와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장편소설 『여덟 번째 방』 출간,
신동엽창작상 및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등 수상.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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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르캥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