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꽃

 
 

 

  

– 명경지수(明鏡止水)를 아느냐?

– 뭐예요, 사부님?

–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을 이름이다. 또한 내가 선인에게 전수받은 심법의 이름이기도 하다.

– 심법이 뭔데요, 사부님?

– 마음을 쓰는 법이다. 사람들은 병기와 몸 쓰는 법을 배우는 것만이 무공인 줄 안다. 하나 병기와 몸을 쓰는 것은 사람이며,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니, 마음이 가면 몸과 병기는 그 뒤를 따르는 법이다.

– 어려워요, 사부님.

– 모든 제자들 중에 오직 네게 이 심법을 전수하겠다.

– 왜요, 사부님?

– 너만이, 내 모든 제자들 중에 오직 너만이 다른 자를 위해 대신 눈물 흘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부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 이 심법을 익히기 위해 너는 영원히 침묵해야 한다.

유달리 말하기를 좋아하던 제자가 눈을 깜빡거렸다. 사부는 그 눈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마지막 말을 뱉었다.

– 오늘부터 네 이름은 묵란(黙蘭)이다.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은 네가 여섯 살 때다. 그때 너는 사흘째 다락에 웅크리고 있었다. 너를 거기 집어넣은 것은 네 어머니였으리라. 깊은 밤, 어머니는 너를 흔들어 깨우고, 칭얼대는 너를 덥석 안아다가 다락에 밀어 넣은 뒤 말했으리라.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무슨 기척이 들리더라도 뛰쳐나와서는 안돼. 누가 널 꺼내줄 때까지 버텨야 한다.”

 

너는 잠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사흘이 흘렀다. 그때는 그렇게 시간이 흐른 줄을 몰랐다. 나중에서야 무사들이 모두 도륙당하고, 하인들의 목이 잘리고, 아버지의 첩들과 그 시녀들까지 모두 죽는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흘 동안 너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기다렸다.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를. 문이 열렸다. 누군가 너를 불렀다.

 

“이리 오십시오. 십삼공자.”


아버지를 섬기던 노인이었다. 평소에는 어머니와 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을 정도로 위세 당당했던 그가, 피와 먼지투성이 몰골로 손을 내밀었다.


“함께 달아납시다, 십삼공자.”

 

아버지의 총신들은 열세 번째 아들인 너를 그렇게 불렀다. 세가를 물려받을 가능성조차 없는, 무수한 첩들 중 한 명이 낳은 아들인 너는 죄인처럼 그렇게 숫자로 불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풍적회 도당들의 경계가 느슨해진 지금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달아나야 합니다. 십삼공자가 살아남은 유일한 혈족이십니다. 이리 오십시오. 속하가 공자와 와신상담 의 세월을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풍적회에 이 원한을 풀 때까지.”

 

노인의 얼굴은 괴물처럼 보였다. 네가 움츠리기만 하자 노인은 다락 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너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비명을 지른 것은 노인이었다. 천천히 쓰러지는 노인의 몸 너머로 너는 그 여자를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채찍을 든 여자. 채찍 끝은 노인의 등짝 한 가운데에 마치 칼처럼 꽂혀 있다. 눈이 마주쳤다. 너는 그때 여섯 살이었다. 그 여자 같은 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유리알 같은 눈, 심연 같은 눈,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일로, 다음 순간 여자의 눈에는 지독한 적개심과 살기가 드러났다. 너는 그 여자가 곧 너를 죽이려고 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섯 살이었던 너는 그만 오줌을 지렸다. 
 

“쯧쯧, 세가의 마지막 식솔인 모양이로구나.”

 

여자의 뒤편에서 누군가 평온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자는 노인의 시체에서 채찍을 뽑아내더니 한 발 옆으로 물러섰다. 여러 호위들에게 둘러싸인 귀티 나는 남자가 다락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곳에 아들을 숨기다니, 어느 여인인지는 모르지만 자식 사랑이 깊었던 모양이다.”

 

그 옆의 누군가가 대답했다.

 

 “심계가 깊은 여인일지도 모르지요.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싹입니다, 회주.”

 

너는 귀티 나는 그 남자가 너희집안을 몰살시킨 풍적회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싹이라. 그러나 너무도 어리지 않느냐.”

 

“하지만 저희가 일부러 경계를 풀고 저 늙은이를 감시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저 늙은이가 만약 저 아이를 데리고 도주하는데 성공했더라면, 분명 먼 훗날 심복의 우환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잖은가. 저 아이는 이제 내 손에 들어왔네.”

 

“회주님!”

 

“천하는 칼로만 다스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만약 우리 풍적회가 옥석 구별 없이 마지막 씨 하나 남기지 않고 몰살시킨다면, 이후 우리 회와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이 물을 등지고 선 심정으로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 아닌가? 이제부터는 우리 풍적회의 그릇이 크다는 것을 입증해 보여야할 것이야.”

“하지만…….”

“긴말 말게. 나, 풍적회주가 그리 결정했네.”


불만과 회의로 가득 찬 존명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풍적회주는 다락 앞에 서있던 여자를 불렀다.

 

“수고했다, 묵란. 이번 일에는 네 공이 크다.”


여자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너는 묵란이라는 그 여자의 이름을 입 속으로 외워보았다. 회주의 사람 하나가 너를 다락방에서 끌어내 회주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어차피 그냥 세워두었어도, 너는 서있을 힘이 없었다. 회주가 네 이름을 물었다. 너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너는 여섯 살이었고, 네 모든 용기와 이름마저도 다락방의 어둠 속에 버려두고 온 것 같았다. 다행히 회주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네게 새 이름을 주마. 새 성도 주마. 수천. 너는 이제 내 아들이다.”

그렇게 해서 너는 단수천이 되었다. 수천, 하늘을 지키는 자. 풍적회주의 양자. 너는 그때 여섯 살이었고, 며칠 후 머나먼 북해에 있는 풍적회의 작은 지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네가 풍적회의 말단 일꾼이나 다름없는 고된 생활을 하는 동안, 강호에는 풍적회주의 자비심에 대한 소문이 훌륭하게 퍼졌다. 명목뿐인 양부인 풍적회주와, 묵란이라는 이름의 그 여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십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 십여 년 동안, 너는 밤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의 꿈을 꾸었다. 그 십여 년 동안, 너는 나이를 먹어 남자가 되었지만, 꿈속의 그 여자는 조금도 늙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여전히 그녀가 두려웠다.
두려움이 나이테처럼 한 해 한 해 두터워져가던 어느 날. 북해에 한 통의 서찰이 날아들었다. 회주가 너를 대도로 부르는 편지였다.

 

 

 

 

“그러니까…….”

 

풍적회주는 뜰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지기들이 너를 못 알아보고 통과시켜주지 않더란 말이지?”

 

너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회주는 뜰 여기저기에 나뒹굴며 끙끙 신음하는 수하들을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네 신분을 증명하는 대신 문지기들을 때려눕혔고?”


“증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너는 퉁명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네 품속에는, 회주가 십여 년 만에 대도의 풍적회 본타로 너를 호출했음을 입증하는 서찰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걸 꺼내기가 싫었던 것이다.

 

“내친 김에 안에 들어오자마자 막아서는 족족 다 집어던졌고?”

 

그쯤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풍적회의 무사들이 으르렁거렸다.

 

“저 자는 감히 회를 능멸했습니다, 회주님!”

 

“큰 벌을 내리셔야 옳습니다.”

회주는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매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네게서 다락방에 숨어 떨고 있던 꼬마의 모습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네가 정녕 수천이 맞느냐?”

 

“예.”

 

“많이 자랐구나. 정말로 다 컸어. 네 이름을 대고 예의를 좀 갖췄으면 이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어째서 그리했느냐?”

 

너는 대답했다. 총타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처음으로 고개숙여 인사 올릴 분이 아버님이길 바랐던 까닭입니다. 용서하십시오.”

 

회주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보아라. 이 녀석이 바로 내 아들, 단수천이다. 기개도 재주도 자못 장하지 않으냐? 다 우리 회의 복이로구나.”

 

그날 저녁, 회주는 주연을 베풀었다. 명목상으로는 양자의 귀향을 환영하는 연회였지만, 너는 여전히 말석이었다. 아무도 네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신경쓰지 않는다. 네 마음을 사로잡는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대체 왜 회주가 너를 불러들였는지 궁금했다. 한창 강호제패에 여념이 없던 시절, 적당한 명분의 도구로 사용하고 잊어버렸던 양자의 존재가 갑자기 필요해질 이유가 있을까? 설마 불치의 병에라도 걸리는 바람에 후계자가 필요해서?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었다. 너와 같은 이유로 거둬들인 양자와 양녀가 회주에게 한 바구니쯤은 너끈히 있다는 이야기는 북해에도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더욱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궁금한 것은 또 있었다. 그 여자는 어디에 있을까? 묵란이라는 이름의 그 여자는. 낮에 풍적회의 본타를 들었다 놓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 여자가 있었다면 회주가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꼿꼿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너는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사해는 동포요, 풍적회는 천하제일의 방파로다.”
 

연회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머뭇머뭇, 풍적회 식의 인사를 걸어왔다. 돌아보니 너만큼이나 주목받지 못하는 젊은 녀석 하나가 불쌍하고도 비굴한 웃음을 지으면서 잔을 들어올려 건배를 청하고 있었다. 너는 무성의하게 허공에 잔을 들어 보이고 단번에 비웠다. 그리고 다시 그 여자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소이까?”

 

이 비루먹은 진드기 같은 녀석은 계속해서 말을 붙여왔다. 너는 못들은 척했다. 이런 녀석과 친하게 지내면 비굴함이 옮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연회장 입구로 막 회주가 뭇 사람들의 예를 받으며 들어서는 찰나였던지라, 너의 무시는 그리 무례한 것이 되지 않았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어나 회주를 향해 예를 올렸다.

 

“사해는 동포요, 풍적회는 천하제일의 방파로다.”


입을 맞춘 듯한 구호가 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너도 대충 우물우물 그 소리를 따랐다. 회주가 자리로 가서 앉으며 모두에게 손짓했다.

 

“술 마시는 자리에서 무슨 번거로운 예의들을 차리는가. 어서들 앉아서 마시고 취하게. 나보

다 빨리 취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내가 벌주를 내리겠네.”

 

사람들은 일제히 웃으면서 회주의 호탕함을 찬하고 분분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야, 너는 회주 옆에 앉은 그 여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놀랐다. 십여 년 동안, 조금도 늙지 않은 것은 꿈속의 그 여자만이 아니었다. 어두운 다락에서 덜덜 떨고 있던 꼬마 녀석이 이렇게나 자란 동안, 그 여자는 여전히 그때와 똑같았다. 무표정함까지도. 너는 그 여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여자에게 반하셨소?”

 

잠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진드기가 은근히 물었다. 무시하려고 했으나, 무시할 수 없는 말이 이어 들렸다.

 

“관심 갖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녀, 묵란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있는 듯한 말투였다. 너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왜?”

 

“위험하니까.”

 

“회주의 여자라서?”

 

“아니.”
 

네가 보인 관심이 반가워서인지,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그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회주의 사람이긴 하지. 뭐. 어쩌면 잠자리도 같이 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회주의 애첩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무미무취하지. 숫제 여자라고 할 수도 없다오. 이름은 묵란이라고 하오.”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네가 잘 모르던 대목까지 이어졌다. 너는 경청했다. 이따금 그의 건배에 호응해주면서.
묵란은 회주의 최측근인 사군자 중의 한명이라고 했다. 사군자란 각자 매, 란, 국, 죽의 이름을 딴 네 명을 일컫는데 회주가 매우 총애하는 이들이었다. 그중 철죽과 소매라고 불리던 두 사람은 얼마 전 금분세수하고 강호를 떠났고, 남은 것은 취국과 묵란 둘뿐으로, 각각 좌우호법을 맡고 있다고 했다. 그들 넷 중에 묵란은 가장 명성이 낮지만, 사군자를 잘 아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그 여자라고 했다.

 

“가장 고수이기 때문이오?”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소. 듣자하니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더군. 저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데, 원래부터 벙어리는 아니었다는거요.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신의 말을 없애버렸다고 하더군.”

 

너는 코웃음을 쳤다. 상대의 심리를 읽는 정도는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면서.

 

“아니, 그냥 미루어 짐작하는 정도가 아니오. 정말로 모두 본다는 거지. 심지어 생전처음 본 사람이라도 그의 지나온 인생까지, 혹은 그 자신도 모르는 소망까지도 말이지. 그러니, 어찌 생각하면 묵란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고수라고도 할 수 있지. 마음에 빈  틈이 있는 자는 묵란 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으니까.”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군.”

 

“나도 처음에는 그랬소.”
 

이쯤에서 너는 그의 이야기를 그만 듣기로 했다. 하지만 예의상 그의 이름 정도는 물어주어야 할 듯 했다. 그는 비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단호천이라오.”
 

풍적회주의 성은 단이며, 그가 단신으로 강호를 주유할 때 별호는 풍적천객이었다. 너의 이름, 그리고 그의 이름의 천은 바로 천객의 천이다. 네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은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로, 최근에 불려온 양자요.”

 

그도 또한 풍적회에 말살당한 가문의 혈손이라는 뜻이다. 너는 물었다.

 

“어디에 살았소?”
 

“운남.”

 

“따뜻한 곳이었겠군.”

 

“벌레가 많았지. 당신은 북해라고 들었소.”

 

“다른 양자들에게도 관심이 많군. 왜, 새삼 형제애라도 느끼나?”

 

네가 비아냥거리자, 그는 부르르 떨더니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왜 회주……, 아버님이 최근 양자들을 하나하나 총타로 불러들이고 있는지 당신은 모르는 거요?”

 

“모르오.”
 

“정말로? 소문도 듣지 못했소?”

 

“북해는 추운 곳이라, 소문이 날아오다가 얼어서 죽었나보지.”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얼마 전 회주에 대한 암살 음모가 있었소. 아주 위험했었다고 하지.”
 

“그래서?”

 

“또 다른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소. 가장 의심받는 것은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 어딘가에 살아있는 그 가문의 총신들이나, 아니면 불만을 품은 자들이 가장 이용하기 좋은 게 ‘혈겁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자손’ 아니겠소?”

 

“그럼 우리들은 조사당하기 위해 불려온 거요?”

 

“그런 셈이지. 지난달부터 양자 양녀들이 하나둘씩 이리로 오고 있소. 본타에서 일을 받고 복무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사를 당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원래의 지부로 돌려보내지기도 하지. 아니, 사실은 돌려보내지지 않았다는 말도 있소.”
 

그는 겁에 질려 이를 딱딱 부딪쳤다. 이곳은 북해처럼 춥지도 않은데.

 

“나는 두렵소. 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내일 운남으로 돌아가라고 하더군. 정말 갈 수 있는 건지 모르겠소.”

 

너는 그의 비루하고 옹색한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그에게서 들을 말은 이미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저 여자도 무섭소. 저 여자는 벙어리에 무표정하다고 하지만 언제나 뭔가 흉계가 있는 표정을 하고 있소. 어쩌면 회주를 죽이려는 건 저 여자일지도 몰라. 그런데 왜 무고한 우리가 의심당해야 하는 거지?”

 

겁쟁이. 네가 단호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비겁자와 함께 있으면 그 두려움이 옮을까봐. 너는 네 두려움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우니까.
그때, 연회석이 조용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너와 단호천을 돌아보았다. 회주가 너희를 지목한 것이다.

 

 

 

 

너희 둘은 회주 앞까지 무릎을 바닥에 대고 걸어갔다. 회주는 먼저 호천에게 한 잔의 술을 내렸다. 술잔을 받는 호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가 운남에서 독공을 연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어떠냐. 네 성취는?”

 

“화, 황송합니다. 아직 미미한 재주라…….”

 

“내일 운남으로 돌아간다지? 어디에 있든 너희들은 우리 풍적회의 기둥임을 잊지 말고 항상 행동에 조심하거라.”

 

“부, 분부대로…….”

 

우물거리는 호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주는 네게로 시선을 돌리고, 너의 잔에 술을 채웠다.

 

“네가 북해 지부에서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곰을 때려잡았느니, 늑대를 찢어죽였느니 하는 이야기가 모두 허황된 줄 알았는데, 오늘 우리 본타를 쓸어버린 솜씨를 보니 오히려 소문이 작게 난 모양이로구나.”

 

“과찬이십니다.”
 

너는 공손히 술잔을 비웠다.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본 회주가 너희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근래에 우리 회는 강성해졌으나 안팎으로 흉흉한 소문도 적지 않다. 나는 내 아들들이 우리 회의 든든한 기둥이 되길 바란다.”
 

그때, 무슨 이유에선지 너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썩은 기둥은 어찌하시렵니까?”

 

회주는 물론이고, 연회석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주목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너를 보지 않았다. 바로 네 옆자리의 호천이다. 그는 아직도 입에 술을 머금은 채로, 부들부들 떨며 묵란을 보고 있었다. 회주가 네 표정을 곰곰 뜯어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썩은 기둥은 잘라내고 불태워야겠지.”
 

그 순간, 호천이 술을 뿜어냈다. 토하는 것이 아니었다. 입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맑은 호박색이었던 술이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올 때는 시커먼 독액으로 변해버렸다. 회주와 호천의 거리는 너무나 가까웠다. 회주의 좌우에 앉아있던 묵란과 취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가 좀 더 빨랐다.
너는 회주를 감싸 안고 그 독주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놀란 외침, 스르릉 칼 뽑히는 소리, 비명. 소란은 한순간에 끝났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속에, 독주를 뒤집어쓴 너의 나직한 신음이 울렸다. 단호천의 독공은 과연 수준이 높았던 모양인지, 좌우호법이 회주를 부축해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도 너는 온몸 꼼짝하지 못했다. 쓰러진 네 옆으로 호천의 목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눈과 너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잘라내고 불태워지기 전에 먼저 불타버릴 만큼 무서워. 너는 그의 두려움을 이해했다. 그가 죽는 순간에서야, 너 또한 그와 비슷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그리고 너는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너는 독주를 뒤집어쓴 얼굴 반쪽에 지울 수 없는 흉악한 상처를 얻었다. 그리고 영웅이 되었다. 회주가 친히 너의 병석을 찾아와 상세를 물었을 때, 너는 이제 네가 풍적회 안에서 부동의 위치를 갖게 됨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무엇을 갖고 싶으냐?”

 

아무리 그래도, 회주가 너그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을 때 너는 당황했다. 딱히 원할 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너의 눈은 저도 모르게 회주의 뒤에 말없이 서있는 묵란에게로 향했다. 얼른 시선을 도로 거둬들였지만 회주는 눈치가 빨랐다. 잠자코 웃더니 묵란을 향해 잠시 나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묵란은 그 말에 따랐다. 너는 얼굴을 붉혔다.

 

“우호법이 마음에 드느냐?”

 

네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것을 회주는 긍정으로 알아들었다.
 

“곤란한 청이로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호법이다보니 내가 물건처럼 네게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중매라면 서줄 수도 있다만 그러기엔 난제가 한둘이 아니로구나.”

 

너는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다.

 

“우선은 너와 우호법의 나이 차이가 적지 않구나. 겉보기에는 큰 차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호법께서는 주안술이라도 익히신 겁니까?”
 

너는 애써 그녀에 대한 관심을, 그녀의 독특한 무공에 대한 관심이라 주장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하지만 회주는 그리 쉽게 속는 사람이 아니었다.

 

“글쎄다. 내가 우호법의 사부되는 분께 들은 말로는, 저 아이는 젊은 사람을 만나면 젊어지고, 늙은 사람을 만나면 늙어진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영원히 나이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지. 굳이 말하자면 그런 것도 주안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

 

못 믿을 이야기라고 써있는 너의 표정을 보고, 회주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요괴나 신선 이야기라도 들은 얼굴이로구나. 하지만 단지 세월의 변화가 또렷이 나타나지

않을 뿐, 우호법도 나이는 먹는다. 내가 처음 거둬들였을 때보다는 칠팔년쯤 나이를 먹은 것 같구나.”

 

여전히 불신과 혼란으로 가득 찬 너의 얼굴을 보고, 회주는 말했다.

 

“묵란에게는 자신이 없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너는 고개를 저었다.

 

“‘나’가 없다. 세상이 온통 ‘너’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너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 회주는 다시 한 번 웃고는 네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런 여자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게 좋다. 나 또한 한 번도 묵란을 여자로 본 적이 없다. 만약 그래도 우호법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 없거든,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해라.”

 

회주는 그날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믿지 못할 이야기를 해주었다.

 

“네가 그녀의 얼굴을 볼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네 마음을 대신한 것이다.”

 

몸이 다 나은 뒤 회주는 네게 본타에서 중요한 자리를 내주었고, 이제는 누구도 네 고개가 뻣뻣하다고 흘겨보는 눈이 없었다. 일그러진 너의 반쪽 얼굴은 회주를 지킨 자랑스러운 훈장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너는 점점 더 많은 공을 세웠다. 많은 양자와 양녀들이 본타로 불려왔다가 원래 머물던 지부로 돌려보내졌지만, 너만은 그대로 남았다.
마침내 좌호법인 취국이 회를 떠났을 때, 회주는 너를 풍적회의 좌호법으로 임명했다. 그것은 사마세가의 마지막 혈손으로서 풍적회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풍적회의 우호법은 묵란. 너는 마침내 그 여자와 대등한 위치에 선 것이다.

호법으로 임명받은 날, 너는 술병을 들고 묵란의 처소로 찾아갔다. 본타에 뿌리를 내린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그녀의 처소에는 처음으로 와보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문전박대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너는 하인을 불렀다. 하인은 없었다. 그녀가 나왔다. 너는 술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야기나 좀 할까 해서 왔소.”

 

그녀는 말없이 마당 한 귀퉁이의 바위에 앉았다. 방으로 청해 들이지 않는 것에 너는 어쩐지 안심했다. 때는 겨울이라 바람이 매서웠지만 너는 추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호법과 따로 친분을 쌓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당신과 내가 함께 회주님을 보필해야 하는 처지이니…….”

 

너는 혼자 중언부언 떠들어댔고, 술도 거의 혼자 마셨다. 그녀는 죽어버린 겨울 꽃처럼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술기운이 치밀어 올랐을 때 너는 벌떡 일어났다.

“감히 한 수 청해보겠소.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신다 생각하고 부디 사양하지 마시기를.”
 

묵란이 너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숨 막히는 눈길이었다. 너는 한 가지 조건을 더 내세웠다.

 

“무기를 쓰지 않은 적수공권의 대결로 합시다. 우호법의 무기는 신편이고, 나는 본래 권법을 익힌 사람이니 적수공권이라면 물론 내 쪽이 더 유리하겠지요. 그러나 선배님이시니 이쯤은 양보해주실 수 있겠지요?”

 

묵란은 허리에 감고 있던 채찍을 풀어 바위 위에 올려두고 천천히 일어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결을 위해 뜰 가운데 마주보고 섰을 때 점점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네게 유리했다.
북해의 눈보라는 매섭고 차다. 네 주먹은 그 속에서 단련된 것이다. 너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너는 그녀를 이겨, 오래된 그녀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너는 네가 가진 온갖 절기를 모두 꺼냈다. 묵란은 눈보라에 휩쓸린 연약한 난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리면서 피해야만 했다. 너는 그녀를 점점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승리의 쾌재를 부르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다. 그것은 네가 가진 권격 중에 가장 패도적인 것으로, 이것으로 어떤 야수든 고수든 쓰러뜨리지 못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패도적이었기에 네 몸을 돌보지 않았고, 온몸에 세 군데의 허점을 드러내는 수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작 한순간의 빈틈이다. 결코 눈치 챌 수 없을 거라고 너는 믿었다.
그녀를 마침내 담벼락을 등진 구석까지 몰아넣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그보다 먼저 묵란의 손날이 네 옆구리에 닿았다. 그녀는 가격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손만 댔다. 하지만 너의 패배는 자명했다. 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너는 후려치려면 후려칠 수도 있었을 주먹을 내렸다.
묵란의 수도가 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네 두려움의 원인은 그것이다. 너는 이 여자가 정말로 두려운 것이다. 너무나 갖고 싶어서. 그녀는 네 어머니만큼이나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그녀는 영원히 늙지 않을 여자다.
너는 그녀를 안았고, 너희들은 눈 위에서 한 몸이 되었다. 뜨거운 몸이 식자, 네 마음은 눈보다 차갑게 얼어붙었다. 너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요물이다. 늙은 요물이다. 왜 이런 짓을 했지?
너는 다정한 말 한 마디도 없이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녀 또한 그런 것을 기대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네가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차가운 눈 위에 누워 먼 하늘을 막막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는 더욱 비겁한 사내가 되어 허둥지둥 처소로 돌아갔다. 신기하게도, 그날부터 너는 더 이상 그녀의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너는 오랫동안 미루고 숨겨왔던 일을 그날부터 다시 시작했다.
풍적회를 무너뜨리는, 반란의 준비를.

 

 


그 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너는 한동안 회주의 가장 신임 받는 양자이자 좌호법 노릇을 충실하게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착착 음모를 진행시켜 나갔다. 오랜 인고의 대가인지, 일은 의외로 쉬웠다. 아니, 이미 천하제패를 끝낸 풍적회에 너무나 구멍이 많았던 탓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복하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 세상의 이치니.
회주의 총신 노릇을 하는 동안 너와 묵란은 단 한 번도 사적인 만남을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회주를 모시는데 있어서는 참으로 완벽하게 손발이 맞았다. 어쩌면 그건 그녀가 네 마음을 읽고, 네게 맞춰서 행동했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너는 의심했다. 그래서 너는 그녀를 더욱 조심했다. 그녀가 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음모를 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많은 것을 가진 풍적회에는 당연히 적도 많았다. 너는 그들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사실 그 일은 북해에서부터 준비된 것이다. 북해는 추운 곳이다. 가장 날씨가 추울 때는 북해의 토박이들조차도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따뜻한 화톳불을 둘러싸고 온갖 음모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회주가 너를 대도로 불러들였을 때는 모든 게 들통나는 줄 알았다. 천만다행으로, 단호천은 그 얼마나 훌륭한 번어기가 되어주었던가. 그 자신은 번어기라고 생각도 못했을 테지만.
다시 일을 추진한 지 불과 일 년 만에 너는 풍적회를 네 것으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젊은 가신들은 너의 사람이 되었고, 회주의 충견들은 모두 금분세수했거나, 혹은 네가 보낸 자객들에게 죽었다.
이 모든 일들이 알게 모르게 은밀히 진행되었지만 마지막 절차만은 거하게 치러야 했다. 한쪽 팔에 붉은 끈을 묶은 너의 사람들이 한 날을 기해 본타를 점거하고 곧바로 회주의 처소를 기습했다.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있던 회주의 총신들은 그날 모두 죽었다. 회주 또한 죽어야 했다. 그러나 묵란과 회주만이 살아서 도망을 쳤다.
너는 불같이 화를 냈다. 잡아야 했다. 회주처럼 자비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 화근이 될 만한 것이라면 반드시 죽여야 했다. 사람들은 네가 말하는 화근을 회주라고 여겼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죽이고 싶었던 것은 묵란이었다. 그녀를 죽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편하게 잠들 수가 없었으니까.

추적은 길었다. 일 년이 지난 뒤, 마침내 그 둘을 포위해 두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너는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절대 행동을 개시하지 말라는 전갈을 보내고 서둘러 무장을 갖췄다. 너는 네 손으로 직접 그녀를 죽이리라 결심했다. 수하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또 놓칠지도 모르니까. 무장을 갖추는 네 손은 떨렸고, 가슴에 두른 호심갑이 전보다 꽉 끼었다. 너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았다. 뜻밖에도 나이가 들어버린 너 자신을 거기서 발견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그 분노를 고스란히 회주와 묵란에게 풀 생각으로, 말이 피거품을 뿜으며 쓰러질 때마다 새 말로 갈아타며 한시도 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어느 산의 굴 앞이었다. 회주와 묵란은 몰이꾼들에게 쫓긴 짐승처럼 그런 곳에 숨어 있었다. 너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회주는 병에 걸려 있었다. 한때 풍류를 아는 강호의 제왕이었던 그가 비참한 노인처럼 쿨룩쿨룩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그 옆에 묵란이 있었다. 그녀는 몹시도 나이 들어 보였다. 오랜 도주 생활이 그녀의 요력을 빼앗아가 버린 것이라는 생각에, 너는 기뻤다.

 

“두 분 다 몹시 피곤해 보이시는구려. 내가 정중히 쉬게 해드리리다.”

 

너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한없이 비열하게 들린다는 사실에 억지로 기뻐했다. 늙은 회주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쉬게 해줄 자격이 네게는 없다. 아들아.”

 

회주는 얼굴을 돌려, 묵란을 바라보았다. 
 

“네가 마지막으로 남았구나.”

 

묵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보이는 것이 너는 분했다. 그녀는 한번도 네게 그런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고맙다. 나를 참으로 잘 도와주었다. 네 사부께서 내게 주신 사군자 중에 네 향기가 가장 슬프고도 오래 남았다. 이제 너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마. 묵란. 나를 쉬게 해다오.”

 

묵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숨에 회주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미처 막을 사이도 없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서 너를 향해 돌아섰다. 
너는 네 앞으로 나서려는 수하들을 모두 물리쳤다. 이 싸움은 너의 싸움이니까. 너만의 것이니까.
오래전 그 눈 내리던 밤처럼 너희들은 다시 대결을 시작했다. 이번에 그녀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었다. 너는 네가 더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싸움은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너는 전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묵란의 채찍이 네 목을 감았을 때 너는 깨달았다. 네가 두려워했던 것은 너의 죽음. 이 여자가 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네가 갈망했던 것 또한 너의 죽음. 이 여자가 그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는 어른이 되었고, 음모도 알았고, 힘도 쥐었다. 하지만 네 혼은 여전히 그 검은 다락방 안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타인을 멸망시킨 방식으로 너 자신도 언젠가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고리를 끊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뿐. 남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 오직 묵란뿐. 너의 고독과 삶을, 해체해줄 수 있는 자도 오직 그녀뿐. 강호를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너는 비굴하게도 그녀에게 죽음을 애걸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버렸다.
왜 땅바닥에 쓰러진 것이 그녀이고, 두 다리로 굳건히 서 있는 것이 너인지, 너는 알 수 없었다. 수하들은 환호를 올리고 있었지만 너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대체 왜?
아직 숨을 거두지 않은 여자의 얼굴을, 너는 내려다보았다. 바라보는 자의 마음을 대신한다는 그 얼굴에서 대답을 찾기 위해 너는 필사적으로 들여다보았다.
너는 그때, 나의 목소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다.

 

“사부님……. 이제 끝났어요. 이제…….”

 

나는 웃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그것으로 나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나의 복수도 끝이 났다.

 

 

 


꽃은 잠들어도 향기를 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묵란이 죽고 나서도 나는 묵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 마지막 표정. 모든 것이 나를 괴롭혔다. 왜? 왜?
과거 풍적회라 불렸던 천하제일의 방파는 이제 사라졌다. 이제는 내가 천하제일의 방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죽은 여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왜 날 살렸느냐.
왜 웃었느냐.
왜!
나는 내 양부였던 풍적회주의 시신을 정갈히 장사지냈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풍적회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일부 불충한 무리들이 회주를 참살했고, 내가 양자로서 그 뒤를 이어 회를 수습하고 양부의 복수를 대신했으며, 새로운 방파로 거듭나기 위해 모든 체제를 뜯어고친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나 또한 풍적회주처럼, 세상을 주먹으로만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묵란의 목은 그 불충한 무리의 상징이 되어, 새로운 방파의 중정 한 가운데 장대에 꽂혔다. 지나가는 이들은 그 목을 볼 때마다 침을 뱉고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목을 바라보면서 그저 묻기만 했다. 왜. 대체 왜?


 

그 날 밤, 애첩의 술시중조차도 달게 여겨지지 않아 뿌리치고 혼자 묵란에게로 갔다. 그녀의 목은 저 높은 장대 끝에서 달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려고 하다가, 지붕 위에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객일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경계심도 느끼지 못했다. 노인은 내가 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저 아이의 목을 회수하러 왔네.”

 

나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노인장이 묵란의 스승이오?”

 

“그런 셈이지.”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 것이오?”
 

“그렇다네. 막을 텐가?”

 

내가 큰 소리로 외치기만 하면 방파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또한 알고 있었다. 선인과도 같은 저 노인은 몇 사람이 몰려나와도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군.”

 

“한 가지만 여쭙겠소.”

 

“그러게.”
 

“그녀는 죽기 직전에 웃었소. 죽기 직전에 사부님, 이제 끝났어요, 라고 말했소. 그게 대체 무슨 의미요? 그녀는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요?”

 

노인은 혀를 찼다.
 

“명경지수의 심법이 마지막 순간에 깨졌구나. 끝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을.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십이 성에 도달할 수 있었으련만.”

 

“그건 무슨 의미요?”

 

“그래도 그 아이가 십일 성까지는 도달한 것 같으이. 자네를 살렸다는 것을 보니.”

 

“대체 무슨 소리요?”
 

“모르겠나?”

 

“모르겠소.”

 

노인은 허허 웃더니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장대에 꽂힌 묵란의 목이 노인의 소매 속으로 빨

려들 듯이 들어갔다.

 

“그 아이는, 마지막 순간에 자네의 마음을 읽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를 한 거라네. 누구도 미워하지 못할 아이였지만, 아마도 자네만은 미워했던 모양이지. 알겠나. 자네는 자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복수를 당한 걸세. 살아남는 자의 고통이라는 복수를.”

 

그리고 노인은 떠나갔다.
나는 홀로 남았다.
풍적회의 성쇠를 모두 지켜본 나. 나의 방파 또한 언젠가는 그리 될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삶의 법칙이라는 것을 아는 나. 나만이 이 강호에 홀로 남았다. 뭇 악다구니들 속에. 나는 고독했다. 나는 나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아아. 이렇게 나는 복수당한 것인가. 홀로 남겨진 채로.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목이 꽂혀 있지 않은 빈 장대가 꽃송이 떨어지고 남은 빈 대궁처럼 달빛 아래 스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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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번어기’는 자객 형가가 진시황을 만나도록 해주기 위해 스스로의 머리를 내놓은 장군.

 

<필자소개>

 

진산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무협, 판타지, 로맨스 등 장르를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청산녹수」, 「대사형」, 「사천당문」, 「가스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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