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리

 

[청소년 테마소설]

몸과 욕망_여섯번째

 

 

봉우리

 

정승희

 

 

 

 

   알맞게 살이 붙은 허벅지에, 알맞은 키에, 알맞은 눈에, 알맞은 입술에, 알맞은 팔뚝에, 알맞은 허리에, 알맞은 가슴에, 알맞지 않은 게 어디 하나라도 있는가 말이다. 성격까지도 알맞게 착하다.

   어제 체육시간에 매달리기를 하는데, 선해의 체육복 윗도리가 살짝 올라가 배꼽이 보였다. 어쩌면 배꼽도 저리 알맞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봉긋 솟아 오른 가슴도 어찌 그리 알맞게 탱글탱글하게 보이는지.

 


   선해 

 

   마의 작은 눈이 퉁퉁 부어 있다.

   엄마는 어제 몇 달 만에 미용실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파마를 하러 갔는데 미용실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새로 온 주인은 오픈 기념으로 속눈썹 파마를 공짜로 해준다고 했단다.

   엄마는 쌍꺼풀 수술을 하는 게 소원인 사람이다.

   “요즘 쌍꺼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 지영이 엄마도 엊그제 했더라. 사람이 싸~악 변했어. 몰라보겠더라고. 느이 아빠는 나한테 당최 신경을 안 써요.”

   엄마는 아빠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목소리를 높이고는 했다.

   “미치~인, 지랄!”

   아빠의 묵직한 대답.

   엄마는 쌍꺼풀 수술 대신 속눈썹에라도 파마를 하면 그나마 눈이 더 커 보이지 않을까 해서 했단다. 거기다가 공짜라니 뭐, 말 다 했다. 쌍꺼풀이 없는 엄마의 눈은 지방질이 많아 두껍기까지 하다. 조금만 울어도 그야말로 ‘눈탱이가 밤탱이’처럼 엄청나게 붓는다. 그런데 속눈썹, 그것도 숱도 거의 없는 속눈썹에 파마를 하고 왔으니……쩝.

   “선해야, 선해야!”

   엄마는 가라는 병원에는 안 가고 시력도 안 좋은 나한테 자꾸 엄마의 퉁퉁 부은 눈을 보라고 한다.

   “이 기집애가 뭐 한다냐? 신선해! 와서 눈 좀 봐보라니까!”

   “내가 보면 뭐 하는데! 이미 확 부풀어 올라왔다고. 안과에나 가봐!”

   “안과 가면 쌩돈 날아가잖아.”

   “그럼 그 눈으로 어떻게 다닐 건데?”

   “본 헤언지 볼 헤언지 어디서 굴러먹다가 우리 동네로 기어 들어와서, 실력도 없는 것들이 내 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네. 아고, 재수 없어.”

   “그러길래 누가 공짜로 해준다고 덥석 하래?”

   “이것아, 속눈썹 파마하는 데 2만 원이야, 2만 원. 써비스로 해드릴게요, 하는데 해야지 그럼 안 하냐?”

   나는 한심한 눈으로 엄마를 보다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속눈썹 파마 약이 세긴 센가 보다. 엄마 눈은 지금 막 쌍꺼풀을 만들고 수술실에서 나온 눈처럼 부풀어 올라있다.

 

   풀어… 올랐다……?

   내 가슴도 부풀어 오를, 그런 날이 올까.

   고개를 아래로 꺾어 내 가슴을 보았다.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보았다.

   시베리아 평원처럼 평평한 벌판.

   비참해.

   탱탱하게 부은 엄마의 흉측한 눈마저 부러움의 대상으로 보게 만드는 밋밋한 내 가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팽개쳐놓은 내 가슴가리개를 보았다.

   뽕이 잔뜩 들어간 브라자.

   엄마는 브래지어를 브라자라고 부른다. 정말 촌스럽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런데 탱탱하게 솟아 있는 솜뭉치를 보니 브래지어보다 브라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긴 하다.

   슬프다.

   친구들은 가슴이 커서 달리기를 하는 체육시간이 싫다는 둥, 달라붙는 옷이 부담된다는 둥 잘난 척들을 하고, 그야말로 지랄들이다. 나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한다.

   내 가슴은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껌딱지다.

   엄마는 나의 성장속도가 늦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딸내미 속 타는 줄은 모른다.

   다음 체육시간에는 브라자가 올라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슴이 절벽이라 브라자를 꽉 조이지 않고 철봉이라도 할라치면 이게 눈치 없이 기어 올라간다. 지난번 철봉에서 매달리기를 하다가 브라자가 기어 올라가서 진짜 애 먹었다. 월요일에는 매달리기 시험을 본단다. 정말 콱, 죽고 싶다. 아니, 아니 껌딱지 같은 가슴 때문에 죽는 건 너무 억울할 것 같고. 정말 콱, 학교에 불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학교에 가기 싫다.

 

   ~아. 정말 한심한 내 가슴.

   이렇게 가슴이 빈약한 나 같은 애를 누가 좋아할까?

   무슨 수를 쓰긴 써야겠다.

 

   실에서는 엄마가 매일 틀어놓는 음악이 쫘~악 깔리고 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애창곡. 엄마는 저 노래만 나오면 눈을 감고 온갖 폼을 잡으며 다른 사람이 된다. 지겹다. 남자 가수가 작은 목소리로 나긋나긋 말하는 게 먼저 나오는 노래.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맞아, 사람들은 높고 탱탱한 가슴을 좋아하지.)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맞아, 나한테는 내 작은 봉우리가 전부야. 흑흑.)

 

 

   사이

 

   형은 오늘도 농구를 하고 왔다.

   그것도 반바지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형의 쭉 뻗은 허벅지가 보였다. 근육이 불뚝거리는 장딴지를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털까지 거뭇거뭇하니 야성미가 철철 넘쳐흐른다. 나는 집에서나 반바지를 입을 수 있는 처지다. 내 다리가 하마 다리마냥 두껍기 때문이다. 3학년 올라와서는 살이 더 쪘다. 89kg. 뱃살이 출렁거리고 팔뚝과 허벅지 살이 접히고 쓸려 벌겋다. 형의 꿀벅지를 보니 괜히 부아가 치민다.

   알프레드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기는 한데,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도 형처럼 쭉 뻗은 꿀벅지를 만들 수 있을까? 살을 뺄 수는 있을까?

   여름에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닌 기억은 초등학교 때까지밖에 없다. 정확하게 6학년 때까지다. 내가 짝사랑했던 선해가 내 다리를 보고 “우웩, 그 다리로 어떻게 학교에는 다닌다니?”라고 말하는 소리에 충격 먹고 그 다음부터는 절대, 저얼~~~때 반바지를 안 입는다.

   퉁퉁하게 불어터진 맨살을 내보일 수는 없다. 절대 못 입는다, 반바지는.

   어제는 체육시간에 선생님께서 눈치 없이 소리를 질렀다.

   “김사이! 너는 인마, 왜 긴 바지야? 반바지 안 입어?”

   어이구, 까마귀 고기를 잡수셨나?

   “저어~”

   “저, 뭐?”

   “저어기…….”

   다리에 흉터가 있어서 반바지 못 입는다고 말했는데도 또 저 소리다.

   “다음 시간엔 반바지 입어! 보기만 해도 덥다.”

   “저어…, 다리에 흉이 있어…서…요.”

   “그럼 알아서 해.”

   우리 반 애들이 몽땅 나를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특히 여자 애들이.

   “어이, 사이다! 하마처럼 뚱뚱하고 뒤뚱거리는데다가 다리에 흉터까지 있으니 너는 연애하기는 애시 당초 글렀다. 쯧쯧.”

   이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놈들 뒤로 선해랑 다른 여자 애들이 오고 있었다.

   ‘으이구, 저 자식을. 그냥. 확!’

   여자 애들은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지나갔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월요일 체육 시간에는 아파서 못 한다고 둘러대든지 해야겠다. 아차, 매달리기 시험이라고 했지. 철봉에 손바닥 대자마자 밑으로 주르륵 떨어질 텐데, 뭐. ……하나마나다.

   에이 씨, 학교 가기 싫어. 누가 학교를 확, 폭파시켜버렸으면 좋겠다.

   알프레드! 제발 도와줘!

 

 

   선해

 

   “빠! 아빠도 엄마랑 성관계 해서 나 낳았어?”

   선미가 현관문을 열고 쿵쾅거리며 들어왔다. 선미는 들어서자마자 신발 벗기 무섭게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던 아빠한테 냅다 물었다. 나는 엄마 몰래 우유 곽을 통째로 들고 마시는 중이었다. 느닷없고 엉뚱한 질문에 우유가 목에 콱, 걸렸다. 켁, 나는 입술 사이로 우유를 줄줄 흘리고 말았다.

   선미는 12살이다. 친구 생파(생일파티)에 갔다가 어디서 무슨 얘기를 주워듣고 왔는지 대낮부터 낯 뜨거운 질문질이다. 아빠는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졸고 있다가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이냐, 하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아빠도 엄마랑 성관계 가져서 나 낳았냐고?”

   아빠는 귀까지 벌개져서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엄마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웬 개뼉다구 같은 말이냐? 생일파티 갔으면 맛있는 거나 먹고 올 일이지, 어디서 요상한 야그는 듣고 와서.”

   나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우유 곽을 냉장고에 넣고 바닥에 흘린 우유를 닦았다. 완전범죄 성공!

   “신선미. 그걸 말이라고 하니? 그럼 너랑 나랑 다리 밑에서 주워왔겠냐, 삼신할미가 데려왔겠냐. 엄마 아빠가 거시기 해서 낳은 거지.”

   나는 알 건 다 아는 중딩이다. 그것도 3학년. 저런 거나 물어보고 있는 선미가 한심했다.

   “아이, 불결해.”

   가만히 눈치를 보던 선미가 말했다.

   “그려. 거시기 혀서 낳았다.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니까 거시기도 했지.”

   엄마는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면서 말했다. 아빠는 괜히 콧구멍만 파면서 킁킁거리고 있었다.

   “신선해! 신선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그만 하고 시험공부나 하시지. 기말고사가 내일모레잖아.”

   “엄마, 나 서현이랑 시험공부 같이 하기로 했거든. 갔다 올게.”

   나는 전쟁터에서 빠져나갈 적당한 핑계를 찾아 도망쳐야 했다. 이럴 때는 머리가 잘 돌아가신다는 말씀.

   “같이 모여 수다나 떨지, 공부가 되겠어? 집에서 해!”

   “걔네 집에는 빵빵한 에어컨 돌아가. 우리 집은 너무 더워서 집중이 잘 안 된다고.”

   “하긴. 저 에어컨 고장 나서 바꾸기는 해야 할 텐데. 에이그, 저 화상은 에어컨 바꿔줄 생각을 안 하네.”

   엄마는 콧구멍을 파고 있던 아빠한테 눈총을 주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아빠는 엄마가 에어컨 얘기할 때는 ‘화상’이 되고 쌍꺼풀 얘기할 때는 ‘느이 아빠’가 된다.

   선미는 멍 때리는 얼굴로 나한테 이렇게 물었다.

   “언니, 근데 저 둘은 정말 좋아하기는 한 거야?”

   “낸들 알겠냐.”

   “근데, 언니 가슴은 납작 가슴이잖아? 그래도 애는 나을 수 있는 거야?”

   “이걸 그냥 확! 애 낳는 거랑 가슴이랑 뭔 상관인데?”

   드디어 내 머리 꼭지가 돌았다.

   “나, 결혼 안 할 거거든. 초딩인 주제에 네가 뭘 안다고 쫑알거리냐?”

   나는 선미 머리를 콱, 쥐어박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선미는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이것들아, 너희들은 왜 붙었다 하면 쌈박질이야?”

   나는 가방에 책과 프린트해둔 종이 그리고 끈을 집어넣고 얼른 집을 나왔다. 요즘 이거라도 붙들고 있어야 그나마 마음이 편하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느니 집을 나오는 게 백 번 천 번 나았다. 갑자기 집을 탈출하게 된 터라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일요일인데 남의 집에 가는 것도 실례이고. 누구를 불러낼까, 고민하다가 수연이한테 전화를 했다.

   “야, 나와서 놀래?”

   “더워. 엄마가 집에서 시험공부 하래.”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살짝 끼어 있었지만 구름 뒤에 숨어 있는 태양이 뜨겁게 보이는 날이다.

   ‘그래. 저렇게 내 가슴도 활활 타오른단 말씀이다.’

   뒷산이나 올라가서 정자 그늘에 앉아 있다 와야겠다. 산이라고 해봐야 작은 언덕배기일 뿐이지만 운동 기구랑 정자가 있어서 애들이랑 가끔 몰려가는 곳이다. 생각나는 곳이 거기밖에 없다니.

   꿀꿀한 날이다. 아마 가슴 때문에 고민하는 애는 나밖에 없을 거다. 친구들이 찜질방에 가자고 해도 납작 가슴이 창피해서 같이 목욕을 할 수가 있나, 수영장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가 있나, 정말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다. 처음부터 비밀을 만들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난 찌질이에 못난이 겁쟁이다.

 

   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물통이라도 들고 나올걸. 목이 탄다.

 

 

   사이

 

   신을 정상적인 몸매로 만들어 드립니다.

   무의식 속의 마음을 훈련시켜 원하는 몸매로 만드는

   강력한 훈련을 지금 바로 시작하십시오.

   – 알프레드 박사의 프로그램

 

   1단계 : 자신이 원하는 몸을 상상하십시오.

   2단계 : 당신이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눈앞에 그려보십시오.

 

 

   상 위에 붙어있는 종이를 노려보았다. 나는 매일 알프레드 박사가 시키는 대로 ‘정상적인 몸매 만들기 프로젝트’를 10단계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 무의식에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도 소용이 없다. 오늘은 성질이 나서 확, 종이를 뜯어버렸다. 갈가리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무의식보다는 의식에 투자를 하고 훈련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같다.

   형은 오늘도 농구를 하러 간다고 했다. 오늘따라 더 짧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같은 반 여자 애들이 응원하러 온다나 뭐라나 하면서.

   “사이야, 넌 오늘도 방구석에 콕, 처박혀 있을 거냐?

   “더워죽겠어. 이런 날은 집이 최고야.”

   “그러니까 돼지처럼 자꾸 살이나 찌지. 잘 하면 은둔형 자폐아 나시겠다.”

   “에잇 씨! 자폐아가 되든 너폐아가 되든 뭔 상관인데?”

   “그럼, 이 몸은 나가신다. 빠이빠이!”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어 형에게 엿을 먹였다. 형은 낄낄거리면서 혀만 쏙 내밀고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형은 더운 날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하고 나갔다. 돌겠다.

   그래도 형의 뒷모습이 멋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안 되겠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을 빼서 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야지. 그런데 어떻게 하지? 우선 매일 뒷산에 올라가 보는 거다. 거기 운동 기구도 있으니 죽어라 운동도 하고. 그리고 저녁 6시 이후로는 물 한 모금이라도 절대 먹지 말자.

   지금 당장, 고우!

   겁나게 운동을 하려면, 이 더운 날 긴 바지를 입고 나갈 수는 없다. 반바지를 입는 게 좋겠지.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는 반바지를 입고 밖에 나가본 적이 없으니 끼워 입고 나갈 반바지가 있나. 집에서 입는 반바지는 차마 입고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나마 제일 헐렁하게 입을 수 있는 바지는 이거밖에 없다. 바지 단에 유치하게 파란색 단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할 수 없다. 이것밖에는 없으니.

   혹시 모르니까 모자를 쓰고 나가자.

   ‘아는 여자 애들이라도 만나면 모자를 푹 눌러 쓰는 수밖에.’

   밖은 무지 더웠다. 땀이 차서 바지가 들러붙었다. 윗도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몸매를 위해 이 정도 투자쯤이야 충분히 각오해야 한다. 뒷산에 올라가니 그래도 나무 그늘은 시원했다. 그런데 저게 누구신가?

   ‘오잇! 선해다, 신선해. 쟤가 웬일로 여기에 왔을까?’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가슴은 원래부터 두근거렸다. 안 그러면 난 이미 벌써 죽었겠지. 크크크.

   나는 얼른 나무 뒤에 숨었다. 이 몰골로 선해 앞에 나설 수는 없다.

   선해는 내가 초딩 때부터 좋아하던 애다. 사실 나에게 던진 심각했던 한 마디에 내 중딩 생활이 완전 지옥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선해가 좋다. 안경 너머로 가끔씩 웃는 눈하고 마주치면 그야말로 뿅 간다.

   알맞게 살이 붙은 허벅지에, 알맞은 키에, 알맞은 눈에, 알맞은 입술에, 알맞은 팔뚝에, 알맞은 허리에, 알맞은 가슴에, 알맞지 않은 게 어디 하나라도 있는가 말이다. 성격까지도 알맞게 착하다.

   어제 체육시간에 매달리기를 하는데, 선해의 체육복 윗도리가 살짝 올라가 배꼽이 보였다. 어쩌면 배꼽도 저리 알맞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봉긋 솟아 오른 가슴도 어찌 그리 알맞게 탱글탱글하게 보이는지.

   얇은 체육복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을 보고 있자니 괜히 헐떡거리다가 숨이 막혔다. 보드라운 두 개의 가슴 봉우리가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상상을 하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알프레드 박사의 10단계 프로그램에서는 그렇게 상상력이 부실했던 내가, 선해를 상상할 때는 온 몸의 세포가 다 알아서 일어서는 것만 같았다. 가서 확,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침만 꼴깍 삼키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선해 얼굴이 완전 똥 씹은 얼굴이다. 가방까지 메고 앉아서 무슨 생각을 저리 하고 있을까? 선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작은 오솔길이 나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쪽으로 슬금슬금 가보았다. 선해는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가방에서 끈을 꺼냈다. 하얀색 끈인데 제법 굵직하다. 선해는 여기 저기 나뭇가지를 살펴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끈을 나뭇가지에 걸었다.

   ‘설마, 쟤가…….’

   어떻게 하지? 이 꼴로 선해 앞에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세상을 뜨려는 안타까운 목숨을 못 본 체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더군다나 나의 짝사랑 선해 아닌가.

   선해는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똥 씹은 얼굴을 하더니 무슨 종이쪽지를 꺼냈다.

   ‘틀림없어. 쟤가…….’

   마음이 급했다.

   나는 다다다다, 달리고 싶었지만 엉거주춤 헉헉 달려갔다.

   선해한테가 아니라 운동기구 옆에서 운동을 막 시작하려고 하는 어떤 아저씨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는 나설 수 없으니 아저씨가 가서 말리라고 말이다. 착하게 생긴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오솔길 쪽으로 갔다. 나는 아저씨의 뒤를 따라 선해가 있는 쪽으로 살금살금 따라갔다. 선해는 아까 그 자리에 있었다. 끈을 만지작거리면서 종이쪽지를 보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마지막 최후의 얼굴. 모든 집착을 버리고 초월한 듯 보이는 저 모습. 여전히 봉긋 솟아오른 가슴은 오르락내리락.

   ‘저 알맞게 솟아오른 가슴을 저버리고 가서는 안 된단 말이다, 선해야…….’

 

 

   선해

 

   라는 게 뭐, 이렇게나 많은 걸까. 하지만 여기에 적힌 대로만 해서 가슴이 커진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

 

   작은 가슴을 크게 만드는 방법

 

   1. 양손에 끈을 잡고 팔꿈치를 들어 올린다. (이 때 끈은 안전한 곳에 걸쳐둔다.) 이 상태에서 머리 위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가 내린 다음 가슴 앞으로 양팔을 모은다. 이 동작을 10회 반복.

 

   2. 양손에 책을 한 권씩 잡고 팔꿈치를 굽혀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리면서 숨을 들이쉰다. 숨을 내쉬며 가슴 쪽으로 팔을 모아준다.

   팔꿈치는 서로 닿도록 해서 팔꿈치에서 손까지 V 자 모양이 되게 한다.

   이 동작을 20회 반복.

 

 

   는 종이에 프린트를 해서 가지고 온 ‘가슴 커지는 방법 10가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일단 동작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니 무척 까다롭다.

   “휴~우, 힘들어. 꼭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때였다. 웬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나 내 손목을 붙들었다.

   “무슨 소리야, 학생. 살아야지.”

   난 너무 깜짝 놀랐다. 치한인가 싶어서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네에? 뭐가요?”

   “힘들어도 이러면 못 써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요. 저 살아갈 날 많아요.”

   나는 안경 너머로 이상한 아저씨를 바라보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죽느냐고.”

   “죽긴 누가 죽어요.”

   “그럼 이 끈은 왜 나뭇가지에 걸었어?”

   “아~하. 이거요? 우헤헤헤.”

   나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이 학생이…….”

   “이거요? 운동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저씨는 나보다 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껄껄 웃으며 정자 쪽으로 갔다.

   참 별일이다. 요즘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자빠져도 나 몰라라 하는 세상인데 저런 아저씨도 다 있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는 1번 동작을 하려고 다시 한 번 프린트해온 종이를 뚫어지게 보았다.

   ‘가슴 키우기 증말 힘들어.’

 

 

   사이

 

   는 멀리서 가슴을 졸이며 선해와 아저씨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선해가 허리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어서 아저씨도 껄껄거리며 웃었다.

   ‘저게 어떤 씨츄에이션이란 말인가.’

   아저씨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저씨, 어떻게 된 거예요?”

   “인석아, 운동중이시란다.”

   아저씨는 내 뒤통수를 살짝 한 대 치고는 갔다.

   ‘운동? 운동을 하려고 끈을 나뭇가지에 걸었단 말이야?’

   황당했다. 선해는 종이쪼가리를 보며 이상한 동작들을 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괜히 오버했네.’

   모든 게 다 알맞은 선해도 운동을 다 하다니. 그런데 운동도 별 희한한 운동을 다 하고 있다. 짝사랑 선해마저 운동을 하는데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느냐 말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산봉우리를 쳐다보았다. 산은 참 높다. 밑에서 보는 산은 더 높게 보인다. 등산 코스로 뻗어있는 산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동이라면 ‘ㅇ’자도 싫어하는 나다. 다시 내려올 산을 뭐 하러 낑낑대며 올라가는지, 등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산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나는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산은 처음에는 만만했지만 올라갈수록 숨통을 조여 왔다. 정상까지 어떻게 가나, 한숨이 나오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미친 짓 같다. 한참 올라가다가 작은 그루터기에 퍼질러 앉아 땀을 식혔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으니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내려갈까?’

   입을 벌리고 숨을 쉬어도 숨 쉬는 게 힘들다.

 

 

   선해

 

   “마! 나는 왜 가슴이 이렇게 작은 거야. 아무래도 수술해야 할 것 같아. 완전 빈대야. 절벽이라고!”

   나는 교복을 입으면서 투덜거렸다.

   “신선해 양, 뽕 브라하면 되거든요. 수술은 뭔 수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수술은.”

   “엄마는 허구한 날 쌍꺼풀 한다고 난리면서 나는 왜 안 되는데?”

   “너 대학 졸업해서 좋은 직장 잡아 돈 많이 벌면 수술해라~아. 아니면 결혼해서 남편 보고 시켜 달라고 하든지.”

   엄마 말에 나는 풀이 죽어 문을 열고 나왔다. 내 성적에 좋은 대학 가기는 글렀고, 그러니 수술하기도 글렀다. 날은 왜 이렇게 팍팍 찌는지. 뽕이 잔뜩 들어간 브라자에 손수건까지 끼워 넣었으니 더 더운 것 같다.

 

   디어 체육 시간.

   올 것은 오고야 만다. 우리 학교 체육복은 옷감도 진짜 후졌다. 속옷이 다 보일 지경이다. 나는 잔뜩 신경을 써가며 맨손 체조를 했다. 팔을 올릴 때도 조심조심. 내릴 때도 조심조심.

   우리 학교 체육 선생님 매달리기는 특이하다. 1단계, 철봉을 목 근처에 대고 팔을 굽혀서 매달리기. 2단계, 그렇게 매달리다가 힘이 빠지면 팔을 쭉 펴고 그야말로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리기. 나한테는 2단계가 죽음의 코스다.

   “야! 야! 두 사람씩 나온다. 번호순으로!”

   앞에서 악다구니로 버티는 애들을 보고 있자니 눈은 자꾸 가슴 쪽으로만 쏠렸다. 다른 애들 가슴은 통통하니 봉긋했다. 슬쩍 아래로 눈을 깔고 내 가슴을 보았다. 내 것도 봉긋하게 솟아 있다. 빵빵하게 들어간 뽕에다가 손수건까지 집어넣었으니 봉긋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드디어 내가 할 차례.

   나는 철봉에 눈을 고정시킨 체 손가락을 잘 펴고 철봉을 꽉 쥐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와아!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학교 매점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오는 게 보였다.

   “오늘 내가 쏜다고 했지? 내가 쏜다면 쏘는 사람이거덩.”

   체육 선생님이 거들먹대며 말했다.

   “이쪽 한 줄이 한 팀이고, 저쪽 한 줄이 한 팀이다. 지금 이기는 사람이 속한 팀한테 아이스크림 몰아주기!”

   선생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알아듣기 힘든 광란의 소리를 질러댔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나는 대충 매달리는 척하다가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앞에 앉아 있는 우리 팀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신선해! 신선해! 신선해! 힘내라 힘!”

   그러자 다른 팀 아이들이 질세라 짝꿍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마리! 이마리! 이겼다! 이겼다!”

   삑! 호각 소리가 들렸다. 나와 내 짝꿍은 눈을 감고 매달리기를 시작했다. 나는 대충 하고 내려올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내 이름을 크게 소리칠수록 뭔가 손에서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래, 알았다고. 알았어, 이겨야지.’

   그 순간 얼굴에 피가 확, 몰리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철봉을 쥔 손목에 모든 힘을 한데 그러모았다. 손에서 벗어나려는 철봉을 부여잡느라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떨렸다. 으드득, 어금니에 힘을 꽉 주었다.

 

   “선해! 신선해!” 라고 불러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그만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눈을 떴다. 내가 이겼다. 우리 팀이 이긴 거다. 순간, 나는 손목에서 힘이 빠져 밑으로 털썩 떨어졌다. 그제야 나가 있었던 정신이 돌아왔다.

   나의 뽕 브라자!

   나도 모르게 얼른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두 개의 봉우리가 거의 턱 밑까지 기어 올라와 있었다. 게다가 브라자 속에 끼워둔 손수건이 어쩐 일인지 브이자로 파진 체육복 목둘레 바깥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오마이 갓!’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서로 먼저 차지하느라 나한테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나는 그 틈에 고개를 숙이고 운동장 끝에 있는 화장실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야! 신선해! 어디 가! 아이스크림 안 먹어?”

   ‘안 먹어. 너희들이나 많이 먹으셔.’

 

 

   사이

 

   히 알프레드를 버렸나 보다.

   책상 위에 붙어 있을 때는 그거라도 보면서 위안을 삼아 10단계까지 열심히 했는데, 알프레드의 몸매관리 프로젝트가 없으니 허전해 미치겠다. 어제 산 정상까지 갔다 와서 그런지 장딴지가 딱딱하게 뭉쳤다. 만져보니 아프다. 산을 계속 오르다보면 근육이 생겨 더 뚱뚱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앞으로 계속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할지 고민이다.

 

   윽, 체육시간.

   오늘도 난 긴 바지다. 체육 선생님이 왜 긴 바지 입었냐고 물어보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날씨는 무지하게 덥다. 여자 애들이 먼저 철봉에 매달렸다. 악착같이 매달리는 애들도 있고, 올라가자마자 톡 떨어지는 애들도 있다. 조금 있으니 나의 선해가 올라갔다. 선해의 가슴은 오늘도 알맞은 모습으로 아름답게 솟아있다.

   갑자기 아이들이 내지르는 소리에 뒤를 보니 매점 아저씨가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오셨다. 체육 선생님이 쏘는 거란다.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저 구두쇠가 웬일일까? 뭔가 잘못한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이들 입막음용으로 뇌물을 쓰는 게 확실하다.

   오우! 선해가 끝까지 버티고 있다니. 대단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선해의 봉긋 솟은 가슴이 자꾸만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이상해.’

   얼굴을 점점 벌겋게 물들이며 선해가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동안,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선해의 체육복 윗도리 목 근처에 뭔가 허연 게 삐죽 튀어나온 것이다.

   ‘저게 뭐지?’

   드디어 선해가 이겼다. 그런데 철봉에서 내려온 선해 얼굴은 완전 똥 씹은 얼굴이다. 정자에서 봤던 얼굴보다 더 심각하다. 선해 팀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게 되었다고 난리들이다.

 

   . 런. 데.

   선해의 올라간 가슴이 내려올 줄을 모른다.

 

   . 리. 고.

   나는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선해가 올라간 가슴을 아무도 모르게 손으로 쓰윽, 내리는 모습을.

 

   근처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가슴은 무슨 가슴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저것은 선해의 원격조정 가슴? 매달리기에서 이겨놓고도 풀이 죽은 선해는 고개를 숙이고 운동장을 가로 질러 화장실로 뛰어갔다.

 

   가 그동안 선해에 대해 모든 것이 알맞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선해의 탱탱하게 봉긋 솟아올라있던 가슴은 허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무슨 상관이겠냐. 다른 게 알맞은데.

   알맞은 얼굴, 알맞은 입술, 알맞은 허벅지, 알맞은 허리, 알맞은 키, 알맞은 팔뚝, 또 거기다가 알맞게 착한 성격까지. 나보다는 모든 게 훨씬 알맞게 자란 아이인걸.

   내가 자기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 줄 쟤는 알까?

 

 

   선해

 

   쟁 같은 하루가 지났다. 현관문을 열었다. 털썩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거 내가 뭐하며 사는 거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누구를 위해서…….혹시 누가 봤을 수도 있어. 기어 올라간 가슴을. 또 이런 일 생기지 말란 법도 없고. 그때는 완전히 아이들 웃음거리가 될 거야. 아, 내일은 어떻게 학교에 가나.’

   나는 내 방에 들어가 그놈의 뽕 브라자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작은 브래지어를 꺼내 입었다. 이제야 브래지어는 내 몸에 잘 맞았다.

   ‘진작부터 이러면 되는걸…….’

   “선해 왔냐? 엄마 눈! 드디어 내려갔다! 정상으로 말이야!”

   안방에 있던 엄마가 거실로 나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내려왔어요. 뽕브라산에서요.’

   엄마가 매일 틀어놓는 그 노래 소리도 따라 들려왔다. 엄마가 좋아하는 애창곡. 김민기 아저씨의 노래.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이고, 더워서 쪄죽겠네. 이 화상은 언제 에어컨 바꿔주려나…….”

   엄마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문틈으로 들려왔다.

 

 

 

 

작가소개

정승희(소설가)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쳤다.「기다려, 엄마!」로 새벗문학상을, 「우리 동네 복덕방」으로 마로니에 전국 여성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우리는 섬에서 살아」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지은책으로는 『알다가도 모를 일』, 『눈으로 볼 수 없는 지도』, 『손을 들면 흥이요, 발을 들면 멋이라』, 『공주의 배내저고리』(공저)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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