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주사위를 굴려보세요.

인생의 주사위를 굴려보세요.

진산(작가)

여러분은 혹시 TRPG(Table Talk Role Playing Game)를 아시나요? 처음 들어보시는 분이라도 RPG라는 말은 익숙할 겁니다. 와우(World of Warcraft)나 아이온 같은 게임들은 MMORPG라고 하지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XBOX 같은 게임기로 즐기는 RPG 게임도 있고요. Role Playing Game 이라는 것은 보통 게임 속에 자기의 분신인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의 ‘역할’을 가지고 노는 게임입니다. 전사라든가, 성기사라든가, 사제, 마법사 같은 게임 속의 ‘역할’을 Role 이라고 하죠.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거 안 해보면 후회할’것이라고 소개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RPG 게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TRPG입니다. TRPG도 분명히 RPG입니다. 그러나 테이블에 모여서 말로 하는 RPG죠. 컴퓨터나 게임기 없이 어떻게 말로만 RPG를 하느냐고요? 간단합니다. 와우나 아이온 같은 게임에서 캐릭터들이 하는 일을, 그냥 사람이 하는 겁니다.
TRPG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게임을 하고 싶은 사람, 모일 장소, 게임을 운영해줄 마스터, 그리고 게임의 규칙입니다.
우선 게임의 규칙. 윷놀이를 하려고 해도 서로 규칙이 필요하지요? TRPG에서도 규칙이 필요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TRPG 규칙은 D&D(Dungeons & Dragons)입니다. 반지의 제왕으로 대표되는 서양식 환상 세계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TRPG의 원조지요. 이 규칙으로 TRPG를 하기로 결정하면, 그것이 바로 게임의 규칙이 됩니다. D&D뿐만이 아니라 세상에는 수많은 TRPG 규칙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 규칙을 운영해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마스터라고 부릅니다. 혹시 블루마블 같은 보드 게임을 해보신 분이라면, 게임에 직접 끼지는 않지만 은행 역할을 해서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아실 겁니다. 마스터는 TRPG의 규칙을 실제로 적용하고 판정해줄, TRPG의 심판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TRPG의 세계를 만들고, 운영하고, 몬스터를 연기합니다.
이제 장소가 필요합니다.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친구 집에 모여도, 커피숍에 모여도 좋습니다. 다만 한 번 모여서 장시간 자유롭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장소라야 합니다. 요새는 온라인으로 채팅이 가능한 곳에 모여서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는 TRPG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모여서 ‘말’로 떠들며 한다는 본질은 비슷합니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면 마스터의 진행에 따라 규칙대로 모든 참가자들이 자신의 ‘분신’을 만듭니다. 이것은 마치 소설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냥 상상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규칙에 의거해서, 그리고 참가자들 사이에 역할을 나눠 맡아서 합니다. 예를 들자면 전사/마법사/사제/도적 등등의 역할을 나누는 거지요. 저런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 규칙에 따라 뱀파이어/늑대인간/요정/마법사 식으로 나눠서 하기도 합니다. 캐릭터들은 저마다 특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처럼 과거의 사연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여러분이 만들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고 모험할 세계를 마스터가 만듭니다.
캐릭터와 세계가 모두 완성되면, 이제부터 게임이 시작됩니다. 마스터는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을 제시하고, 플레이어들은 자기 캐릭터의 입장에서 그 상황에 대처합니다. 때로는 위험으로 가득 찬 던전에 들어가 보물을 찾는 모험자가 되고, 때로는 영생불멸의 삶에 지친 뱀파이어가 되고, 때로는 왕좌의 주인을 두고 다투는 치열한 정치판의 귀족이 되기도 합니다. 마스터가 제시하는 상황 속에서 그 캐릭터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여러분이 선택하고, 그 선택이 성공할지 안할지를 주사위로 결정하는 게임, 이것이 바로 TRPG입니다.
요즘처럼 수많은 디지털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화려한 그래픽 효과도 없고, 고작 5-6명의 사람이 모여서 하는 TRPG. 이 게임을 제가 ‘안하면 후회할 거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MMORPG에서는 내 캐릭터가 방어도가 얼마, 쓸 수 있는 기술이 뭐, 파워가 얼마, 하는 식의 데이터가 중요하지요. 하지만 TRPG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TRPG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결단력,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교감입니다.
눈과 귀를 현혹하는 아무런 멀티미디어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드래곤이 당신을 덮칩니다, 라는 말을 들으면 드래곤에게 덮쳐지는 사람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고, 200년을 살아온 뱀파이어의 역할을 한다면, 정말 그런 뱀파이어라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갈망할까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게임. 또한,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결단을 해야 하는가,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들 앞에 섰을 때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는 게임. 마지막으로, 그런 결단을 다른 사람의 캐릭터, 즉 나의 ‘동료’와 함께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게임. 이것이 TRPG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무수한 선택의 연속들입니다. A와 B 사이에서 B를 선택한 순간, A의 길은 체험해 볼 수 없게 되지요. 살아가다보면 가지 않은 길, 그 A에 대한 회한을 느끼게 될 때도 많을 겁니다. 과거의 일들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미래에도 여러분은 계속 그런 일을 겪게 되지요. A를 선택함으로써 B를, B를 선택함으로써 A를 포기해야할 순간을 꾸준히 겪는 것, 그러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믿음을 버리지 않고 나가야 하는 것.
TRPG라는 게임은, 여러분이 겪어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대리체험을 오직 사람과 주사위라는 도구만 가지고 느껴볼 수 있는 놀이입니다. 아직 여러분의 상상력이 나이라는 단단한 껍데기에 둘러싸여 굳어지기 전에 부디 이것을 접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쩌면 절대 해보지 못할 수도 있는 선택을, 여러분의 ‘분신’을 통해 해보세요. 인생의 주사위를 굴려보세요.

필자 소개 / 진산(작가)

1969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우지연.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하이텔 단편무협 공모전에서 「청산녹수」로 입상하면서 데뷔하였고, 무협, 로맨스, 판타지 등을 아우르며 본명 외에 진산, 민해연, 마님, 기타 이름으로 총 서른다섯 권의 장편과 단편집, 비소설과 게임 소설, 동화 등을 썼다. 대표작으로 『홍엽만리』, 『색마열전』, 『대사형』, 『정과 검』, 『사천당문』, 『결전전야』, 『무혼』, 『커튼콜』, 『오디션』, 『가스라기』, 『진산무협단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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