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장밋빛 인생> 중에서

 
  최아영

정미경의 『장밋빛 인생』은 일상적 삶을 송두리째 축제의 공간으로 몰아넣는 화려한 광고의 세계와, 그 이면의 환멸을 감각적인 문체로 포착하고 있다. ‘노동 없는 축제’의 허상을 해부하고 있는 셈이다.
섬세하면서도 속도감 넘치는 문체는 조작된 환상을 유포하는 광고의 세계에 독자를 흠뻑 젖어들게 하면서도, ‘인생은 15초, 30초를 지나서도 꿈틀거리고 소금 냄새를 풍기며 자꾸만 감겨오는 지독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환기하며,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민’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 소설은 ‘강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에 ‘강호’와 ‘민’은 화자의 정체성을 심문하는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강호’는 광고로 대변되는 일상적 삶을 되짚어보게 하는 인물이며, ‘민’은 광고 너머의 삶을 응시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화자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이강호는 광고에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광고를 보며 옹알이를 배우고, 동요보다 시엠을 먼저 외운 ‘광고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세대’에 속한다. 그에게 지난 광고는 묵은 일기장이고, 새로운 광고들은 일상의 이정표가 된다. 이러한 강호를 보면서 화자는 ‘도플갱어’, 즉 십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강호는 일에 대한 열정과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지만 몸에 결함이 있다. 심장이 약해서 수술을 받아야 할 형편이다. 동맥의 괴사가 심해서 언제 쓰러져 심장이 멈추어 버릴지 모르는 처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도 기피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전존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망가져서 상대에게 반칙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이강호의 모습은 언밸런스한 현대 젊은이들의 삶을 상징한다. ‘완강한 턱선 아래, 탄탄한 근육 아래 겨우 존재하는 심장’은 정신과 몸,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과 균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꿈을 미처 펼쳐보기도 전에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광고 제작 현장에서 교통사고로 죽는다. 이러한 이강호의 죽음은 화자의 과거와 현재를 순식간에 삼켜버린다. 이는 화자가 가졌던 열정의 스러짐이며, 현재의 삶이 가상현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각인시킨다.
한편,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화자 앞에 ‘민’이란 인물이 나타난다. ‘민’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다. 그녀는 모델들을 포장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자기 얼굴에는 전혀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델들과는 달리 ‘지우개로 슬쩍 문지른 그림’으로 다가온다. ‘선명하면서도 아득하고 다만 완전한 집중을 요구하는 오만함’으로 다가온 민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매혹으로 화자를 빨아들인다.
이러한 ‘민’의 모습은 ‘푸른 바다와 검은 잠수복 차림의 인간의 얼굴,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펼쳐든 아기 고래의 암회색 꼬리가 어우러진’ ‘지독하게 낯선’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 사진은 화자에게서 김민희, 그리고 강호에게로 전달된다. 이들 광고 제작자들은 이 사진이 주는 ‘놀랍고도 평화로운 느낌’에서 전쟁터 같은 ‘지금 이곳’의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은 본다. ‘아득히 먼 곳으로 이끌려갔다가 문득 내가 딛고 선 이곳을 보여주기’, 사진의 풍경과 현실의 ‘콘트라스트(contrast)’야말로 광고제작자들의 꿈이다.
화자는 ‘민’의 모습에서 사진의 풍경을 본 것은 아닐까. 그녀를 통해 화자는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계를 ‘콘트라스트’한다.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 광고의 역설. 이러한 광고의 운명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가 되려고 열망하는, 소통의 불가능을 알면서도 그것을 갈망하는 사랑의 운명과 동궤에 놓인다.
이에 『장밋빛 인생』에서 사랑은 광고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모순적 운명을 온전하게 짊어지는 방법은 죽음밖에 더 있겠는가? 자살로써 사랑의 운명을 증명한 ‘민’의 죽음은 이렇게 가상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광고의 운명을 보여준 ‘강호’의 죽음과 연결된다.
이러한 ‘삶의 개 같은 우연성’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감수하고라도 다음과 같이 외쳐볼 밖에…….

제발 부탁이야. 누군가 날 좀 꺼내줘. 이토록 현란한 동영상 속에서 날 꺼내줘. 오프 버튼을 눌러달라구. 이 어지러운 화면 속에서 이제 그만 나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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