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환상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다


   환상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다

  황정은 「모자」, 김유진 「늑대의 문장」 속  환상이 그려낸 현실-

 

 

"소설에서의 ‘환상’이란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기 이전에 ‘현실’이라는 관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래서 늘 ‘현실’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상이란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 안에서만 출현하는 것이지요… …"                                                                                 

 


소설은 반드시 개연성의 장르인가?

 

  흔히 소설을 가리켜 ‘개연성’의 장르라고 합니다. 개연성이란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그러니까 현실과 상상의 결합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의 기원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근대소설의 기원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괴테의 『파우스트』 정도로 설정할 수 있다면, 소설은 현실과 연관된 개연성보다는 현실을 초월하는 환상의 세계에 더 가까운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소설은 ‘여행?환상’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소설은 내가 살고 있는 곳,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곳’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였고, 현실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내적인 구조에 의해 설득력을 획득하는 장르였던 셈입니다. 소설가는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고 했던가요. 만일 소설이 상상력을 통한 ‘현실’의 변주여야만 한다면, 우리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물론이고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시종일관하는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리엘』, 카프카의 『변신』 등을 ‘소설’에서 제외시켜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에는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개연적인 작품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소설이 만들어내는 ‘세계’ 안에서의 개연성

 

  소설은 19세기를 지나오면서 당대의 시대정신이었던 ‘역사’와 결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설은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개연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19세기의 소설가들발자크, 플로베르, 프루스트이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개인의 행동을 묘사하려 했을 때, 그들은 개연성을 위반하면 부적절하고 미학적인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는 이 개연성이라는 소설적 국경선을 침범했습니다. 카프카의 소설은 현실에 대한 응시 안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읽고 있으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계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카프카는 개연성의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위대한 작품이 쓰여질 수 있음을 보여준 작가입니다.

 우리는 흔히 개연성에 충실한 소설을 ‘리얼리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개연성이 ‘현실’과 맺고 있는 연관성 때문인데요, 문제는 소설에서의 개연성은 소설 바깥의 ‘현실’과의 관계가 아니라 소설이 만들어내는 ‘세계’ 안에서의 개연성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20세기 이후의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20세기 이후 ‘개연성’은 점차 희미해지거나, 소설 안에서의 개연성에 제한되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이제 현실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 즉 메타현실이 되었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르기

하나, 모자가 되는 아버지


 
최근의 한국문학에서 개연성의 위반은 ‘환상’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개연성의 위반이 곧 환상은 아닙니다. 오늘의 소설이 추구하고 있는 ‘환상’은 재현적인 태도만으로는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해서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는 자각, 그래서 독자들의 심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르겠다는 의식의 발현처럼 보입니다.

황정은 가령 황정은(왼쪽 얼굴사진)의 「모자」(《문예중앙》, 2006년 가을)는 “세 남매의 아버지는 자주 모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 소설에서 ‘모자’는 은유나 상징의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시적 진술이었다면 아마도 ‘아버지는 자주 모자처럼 보잘 것 없고 사소하게 느껴졌다.’라고 발화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모자가 되었다”라는 진술과 “모자처럼 보잘 것 없었다.”는 의미가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황정은의 소설에서 아버지는 ‘진짜’ 모자가 됩니다. 아버지는 세 남매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세 남매는 이사를 다닐 때마다 먼저 장도리로 벽에 박힌 못을 뽑습니다. 못이 박혀 있으면 아버지가 모자가 되어 거기에 걸릴 테고, 그러면 또 언제 아버지로 되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물론, 못 때문에 아버지가 모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아버지는 “남이 보는 곳”에서 곧잘 모자가 되고, 소문이 번져서 또 그들은 어딘가로 이사를 가야 합니다.

  모자로 변신한 아버지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소설은 아버지의 변신을 불가능한 사건이 아니라 당혹스러운 사건으로 처리합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모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우리 부부는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런 해로움도 끼치지 않지만 모자로 변신하는 아버지는 곳곳에서 경계의 대상이 됩니다. 아버지의 변신이 당혹스러운 까닭은 그것이 객관적인 현실의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설에서의 ‘환상’이란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기 이전에 ‘현실’이라는 관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래서 늘 ‘현실’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상이란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 안에서만 출현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소문이 번지면 또 그들은 이삿짐을 싸야 합니다.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이사’입니다.

 소설가 황정은의 첫 작품집 표지 사정이 이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도대체 언제부터 ‘모자’로 변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세 남매의 기억은 모두 다릅니다. 첫째의 기억에 따르면, 지난겨울의 어느 토요일,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던 아버지는 첫째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모른 척하고 지나갔을 때부터 모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둘째의 기억은 달랐습니다. 둘째에게는 굉장히 아끼던 카세트라디오가 있었는데, 둘째는 그것을 고쳐보기 위해 분해했다가 완전히 망가뜨리게 되었고, 그 일로 속이 상해서 며칠 동안 라디오를 껴안고 울기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투병중인 그 무렵, 아버지는 그런 둘째에게 손찌검을 했고, 아버지의 손찌검에 맞서 둘째는 “고치지도 못하고 사다주지도 않을 거잖아”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모자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셋째의 기억은 또 달랐습니다. 셋째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는 학부모 참관일에 모자가 되어 사물함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인간으로서의, 부모로서의 자존감이 훼손당하고, 자신의 무능함이 확인될 때마다 ‘모자’로 변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좋아서 모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아버지가 예비군들의 추행을 고발하기 위해서 파출소를 찾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파출소에서 아버지는 또 다시 ‘모자’가 됩니다. 자신의 고발 내용에 대해 아무도 대꾸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매는 모자가 된 아버지를 데리고 오면서 또 다시 ‘이사’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거처를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세 남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황정은의 「모자」는 무능한 가장과 그의 변신담,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따뜻하게 감싸며 삶을 견디는 세 남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변신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훼손당하는 불행한 현실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입니다. 아버지가 ‘모자’로 변한다는 설정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가 이런 경험의 상처를 껴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르기,

둘,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의 폭력성

 

  김유진(사진 오른쪽)의 「늑대의 문장」(《문학동네》 2004년 가을)은 “첫 번째 희생자는 세 명의 여자아이였다.”라는 불길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 소설은 ‘폭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의 공간은 섬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어느 날부터 끔찍한 일이 발생합니다. 섬 주민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폭사’로 죽어갑니다. 폭사는 사람이 외부의 자극에 의해 상처받는 게 아니라 내부적인 원인에 의해 스스로 터져 죽는 것입니다. 소설은 “단무지처럼 얇은 다리와 덜 자란 내장이 흩어져” 있는 장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합니다. 우선, 폭사는 인간의 유기체적인 흔적을 말소시킨다는 점에서, 혹은 인간이 한낱 물질의 덩어리에 불과함을 확인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죽음입니다. 폭사로 죽은 시체에게는 소위 ‘인간’의 형상이 없습니다. 처음 폭사가 발생했을 때 마을 주민들은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지만, 원인 모를 폭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집단적인 히스테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동시에 마을의 야산에 하나둘씩 생겨나던 무덤도 점차 해변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 사이에 설정되어 있던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폭사는 ‘소문’을 낳습니다. 폭사에 규칙성이 없듯이, 소문 또한 근거가 없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소문은 또한 ‘터부’를 만들어냅니다. ‘딸기’를 먹으면 죽는다, ‘해삼’을 먹으면 죽는다는 식의 소문들이 마을 여기저기를 굴러다닙니다. 실수로 해삼을 밟은 횟집 여주인은 식당 앞에서 나흘 동안 곡을 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도움 요청을 냉정하게 뿌리쳤습니다. 폭사는 구원의 상징인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배를 주도하던 복사가 찬송가를 펼치다 폭사한 다음 교회는 문을 닫습니다. 폭사를 피할 수 있는 방법들은 곳곳에서 떠돌아 다녔지만, 결론은 어느 누구도 폭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시체가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불로 몸을 감싸고 다녔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자의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단 히스테리에 걸린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우는 개들을 함부로 학대했습니다. 이미 이성을 상실한 그들은 밥을 주면 개가 울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마음은 두 갈래로 찢기기 마련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한사코 부정하려는 마음이 생기는가 하면, 다가올 죽음에 체념하려는 마음도 생깁니다.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대개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소녀의 아버지가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는 자세로 폭사합니다. 타인의 죽음이 어느새 가족의 죽음에까지 근접한 것입니다. 폭사가 늘자 당연히 마을에는 주인을 잃은 개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개들은 점차 들개로 변해가고, 폭사와 더불어 어둠 속에서 울어대는 들개의 존재가 마을 사람들의 골칫거리가 됩니다. 야성을 되찾은 버려진 개들은 밤마다 떼를 지어 다니면서 밭의 채소에서 가축, 심지어 폭사당한 인간의 시체마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웁니다. 그 무렵 텔레비전에서는 수목원으로 이동하던 중 탈출한 늑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늑대이야기와 겹쳐지면서 이제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들개’에게로 향합니다. 자신들의 분노를, 아니 폭사의 원인을 뒤집어씌울 대상을 찾아야 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들개’는 좋은 먹잇감이지요. 그 선두에 소녀의 엄마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엄마’와 ‘이모’라는 두 갈래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늑대, 아니 들개에게 있다는 것을 확신한 소녀의 엄마는 광기에 사로잡혀 난폭하게 개를 죽입니다. 불행에 대한 엄마의 대처법은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되는 대상, 즉 개들을 때려죽이고, 집을 온통 돌로 둘러싸서 늑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이제 마을은 “낮엔 사람이 늑대의 자식을 죽여나갔고, 밤이 되면 늑대가 사람을 습격”하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먼저 소녀의 엄마와 사람들은 늑대의 자식인 들개들이 “과거에 자신들의 개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고무옷을 입은 어머니는 이제 늑대와 달라 보일 것이 없었다.”라는 진술은 광기에 사로잡힌 한 인간이 어떻게 비()인간이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녀를 버티게 하는 힘은 “동물 같은 공격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모는 그런 어머니를 늑대보다 더 두려워합니다. 어머니의 신념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반면 폭사에서 살아난 이모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이모의 방에는 몇 마리의 강아지들이, 아니, 몇 마리의 들개 새끼들이, 아니, 몇 마리의 늑대 새끼들이 모여 있었다. 소녀는 가까이 다가갔다. 이모는 소녀가 온지 모른 채 자신의 한 짝밖에 남지 않은 가슴을 연신 늑대 새끼의 주둥이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음응흐흑……으으으흐……소녀는 그녀의 알 수 없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개들의 교미 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알다시피, ‘이모’는 엄마의 자매입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엄마를 가장 닮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지요. 그런 이모의 특기는 ‘바느질’입니다. 그녀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구보다 바느질에 능숙했고, 섬을 통틀어서도 그러했습니다. 이모의 바느질에는 중요한 암시가 있습니다. ‘폭사’가 해체의 일종이라면. ‘바느질’은 그와 정반대로 해체된 것들을 이어붙이는 통합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모의 바느질이 무엇을 통합시키는 것이냐일 겁니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모는 마을공동체에서 추방과 살해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개’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입니다. 엄마의 모성이 “동물 같은 공격성”으로 드러났다면, 이모의 모성은, 바느질이 그렇듯이, 이질적인 타자를 껴안는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엄마가 분리와 배제의 신이라면, 이모는 통합과 화해의 신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두 개의 배타적인 방향이 ‘자매’라는 혈통적 유사성에 의해 묶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낯선 것들은 언제나 익숙한 것 안에서만 생겨난다

 

 섬사람들이 마을을 공격하는 들개들이 “과거에 자신들의 개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대목을 기억하시죠?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서 섬사람들의 현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프로이트라면 이것을 기괴함(uncanny)라고 불렀을 겁니다. 기괴함이란 익숙한 것이 낯선 얼굴로 다가올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 즉 낯선 것의 출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 타자의 형상인 늑대는 실상 섬사람들이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던 개들입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소녀가 늑대에게 끌려갑니다. 그런데 소녀의 믿음 속에선 늑대가 “온전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어둠을 지킵니다. 마을의 인간들은, 엄마가 그러했듯이, 점점 늑대가 되어가는데, 정작 산정의 늑대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어둠’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장면을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고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질적인 존재를 껴안는 이모의 봉합술이고, 나아가 그 이질적인 존재들이 한때나마 마을의 내부에서 살았던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낯선 것들은 언제나 익숙한 것 안에서만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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