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파우스트」를 통해서 본 ‘구원’의 의미 (2)



   

   
 
괴테는 『파우스트』의 2부를 1825년에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이미 76세였지요. 그리고 죽음을 불과 반 년가량 앞둔 1831년 8월 중순에 다 마쳤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2부는 여러 면에서 젊은 시절에 썼던 1부와는 전혀 다르지요. 우선 작품의 성격부터 그렇습니다. 1부에서 보여준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사랑이야기는 “질풍노도운동(Strum und Drang)”을 일으켰던 당시 낭만주의 작가들이 좋아할 만한 사실적 ‘가정극’의 성격을 갖고 있지요. 하지만 2부는 시간적으로는 약 3000년을 망라하고 공간적으로는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환상세계, 지하세계와 지상세계 그리고 천상세계까지를 아우르며 전개되는 일종의 ‘환상극’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들과 요정들, 예언자들, 마녀들, 그리고 괴물들이 나오지요. 머리는 여자이고 몸통은 사자인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며 몸통은 역시 사자인 우랄지방의 그뤼프스도 등장합니다.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헬레나와 파리스,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스의 스승인 케이론, 바다의 요정 세이레네스 등 호메로스(Homeros, B.C. 800?~750)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나오는 인물들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탈레스와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과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 여인들까지 등장하지요.

한마디로, 괴테는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주요 캐릭터들을 시간과 공간의 구애 없이 총동원하여 흥미롭고도 광대한 한 편의 판타지를 구성한 겁니다. 1827년 봄, 괴테는 총 5막으로 되어 있는 2부 가운데 제 3막만을 떼어 독립된 한 편으로 발표했는데, 이때 작품 제목이 『헬레나 고전적․낭만적 환상극 – 파우스트의 막간극』이었다는 것이 그의 이러한 의도를 확인해주지요. 내용에 있어서도 2부는 1부와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1부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개인적 사건을 다룬 반면 2부에서는 전쟁과 간척사업과 같은 사회적 사건들을 다루지요.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인물의 성격뿐입니다! 파우스트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아이러니하며 한 점의 도덕의식조차 갖고 있지 않지요. 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인을 탐하고 살인도 저지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 닥칠 운명에도 전혀 관심이 없고 단 한 번도 기도하거나 교회에 가지 않지요. 1부의 서두에서 신은 그를 “나의 종”이라고 불렀지만 파우스트는 결코 신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극의 마지막에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천사들의 합창들은 – 물론 감격스럽긴 하지만 – 왠지 어색하고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차라리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 박사의 생과 사의 비극적 역사』에서처럼 메피스토펠레스가 내기에서 이기고 파우스트가 지옥으로 끌려간다면 극은 훨씬 탄탄해지고 이야기는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신은 왜 파우스트를 구원했을까요? 아니, 괴테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파우스트를 악마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었을까요? 내용을 보시죠.       
 

     
1막의 이야기는 꽃이 만발한 어느 아름다운 잔디밭에서 파우스트가 누워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레트헨의 비극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정들로 상징되는 자연의 치유력에 의한 심신의 회복이 필요했던 거지요. 원기를 회복한 파우스트가 이번에 상대하는 것은 황제입니다. 그는 황제의 요청에 따라 헬레나와 파리스를 불러올 것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하지요.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 능력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내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의 모든 존재물의 근원이자 신비로운 여신인 “어머니들(the Mothers)”에게 청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쇠를 하나 주며 그 열쇠를 따라가 “어머니들”이 있는 곳에서 “세발솥”을 가지고 돌아오면 “영웅이든 미인이든 밤의 나라에서” 불러낼 수 있다고 하지요.

파우스트는 모험 끝에 결국 밤의 나라에서 헬레나와 파리스를 불러내는데, 신화 속의 아름다운 여인 헬레나를 보고는 한눈에 반합니다. 그래서 “그대야말로 내가 모든 힘의 활동을 / 정열의 정수를, 사모를, 사랑을 / 예배를, 미칠 듯한 마음을 바쳐야 할 사람이다.”라고 외치지요. 1부에서 그레트헨을 처음 보고 “그 붉은 입술과 빛나는 뺨을 / 나는 이 세상이 다할 때까지 잊을 수 없다!”라고 고백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2막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예전에는 파우스트의 조수였으나 지금은 인조인간을 만들고 있는 바그너 박사를 만나, 그가 만든 호문쿨로스라는 아직 육체를 갖지 못한 작은 인간영혼과 함께 온갖 마녀들, 괴물들, 여신들, 요정들, 예언자들, 철학자들이 등장하는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축제에 참가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괴테는 여기에서 자신이 가진 온갖 신화적, 문학적, 역사적, 철학적 지식들을 모두 쏟아 놓지요.    

3막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파우스트가 헬레네를 얻는 과정, 두 사람의 아들 오이포리온의 출생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어두운 나라에 / 어머니, 나만 홀로 내버려 두지 마세요!”라는 아들의 마지막 말에 헬레나는 “행복과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이별의 말을 파우스트에게 남기고 다시 하계로 돌아가지요.

4막에서는 파우스트가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황제로부터 훈장과 해안에 엄청난 땅을 상으로 받지요. 괴테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런 사실을 극중 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사 가운데서 드러나도록 처리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파우스트도 땅이 생긴 바에는 교회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대주교의 말을 통해서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지요.

5막은 오비디우스의 『변형 설화』에 나오는 착한 노부부 바우치스와 필레몬이라는 두 인물이 나그네와 함께 파우스트의 간척사업을 비난하면서 시작합니다. 같은 시간 파우스트는 이 노부부가 사는 오두막이 자신의 간척사업장 전망을 망친다며 짜증을 냅니다. 그리고는 이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그들을 처리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부하들을 데리고 노부부의 오두막과 부근의 교회를 불태우지요. 그런 가운데 노부부와 나그네가 불에 타 죽습니다. 파우스트는 이미 백 살 정도로 늙었지만 그의 가슴은 오직 간척지를 개척해 거대한 새로운 영지를 건설하려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인간의 마음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네 명의 “잿빛 여인”들이 파우스트의 궁전으로 찾아오지요. 첫째는 결핍이고, 둘째는 죄악이며, 셋째는 근심이고, 넷째는 곤궁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작품이 가진 심리극으로서의 탁월한 측면을 볼 수 있지요. 파우스트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거대한 땅의 개척과 같은 빛나는 사업을 달성했지만 착한 노부부 바우치스와 필레몬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에서 오는 죄의식이 그의 양심에 생겨났던 겁니다. 그것을 틈타 네 가지의 어두운 힘이 숨어들려고 하는 거지요. 

주목해야 할 것은, 죄의식에 대한 파우스트의 태도가 1부에서 본 그레트헨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그레트헨은 자신의 양심에 죄의식이 일어났을 때, 뉘우침을 통한 “최고의 자기부정”, 곧 “무한한 자기체념”을 했지요.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녀가 받은 구원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죄의식이 나타나자 뉘우침은커녕 오히려 자만심으로 그것과 맞싸우려 하지요. 그래서 결핍이나 후회, 곤궁 따위는 감히 그의 방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이다가 물러갑니다. 오직 “근심(care)”만이 – 그것도 열쇠구멍을 통해서 – 숨어들어가지요. 그럼으로써 파우스트의 내면에서는 근심과 자만심 사이의 심리적 갈등이 시작됩니다.

근심은 파우스트에게 세속적인 야망을 그만 접고 죽음과 영생에 관심을 갖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자만심은 “나는 한결같이 이 세상을 줄달음쳐 왔다. / (…) / 나는 오로지 갈망으로 그것들을 이루었고 / 다시 희망을 품고 폭풍같이 내 일생을 헤쳐 왔다.”라며 오히려 근심을 꾸짖습니다. 그러자 근심은 파우스트에게 “인간은 평생 눈먼 장님이라오. / 자, 파우스트 선생! 당신도 장님이 될 것이오.”라며 입김을 불어 눈을 멀게 만듭니다.

그래도 파우스트는 전혀 개의치 않지요. “밤이 점점 깊어지는 모양이구나. /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밝은 빛이 빛난다. / 내가 생각한 일을 완성시키자.”라면서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불굴의 의지를 보이지요. 이렇듯 그레트헨이 보이는 뉘우침과 파우스트가 보이는 자만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얼음 계곡이 놓여져 있고, 이 아스라한 차이가 결국 이들이 받는 구원의 성격을 갈라놓게 합니다.

이어지는 「궁전의 큰 앞뜰」 장면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죽음의 망령들을 불러 파우스트가 묻힐 무덤을 팝니다. 이미 눈이 멀어 그것을 간척사업을 위한 배수로를 파는 것으로 아는 파우스트는 작업을 더욱 독려하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 그때는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하고. / 내가 이 지상에 남긴 흔적은 /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친 다음 이내 쓰러져 죽지요.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가 “시계는 멈추었다.”라면서 애초의 계약대로 파우스트의 영혼을 챙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천사의 무리들이 내려와 파우스트를 구원하지요. 이 때 이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시구인 “누구든 줄곧 노력하며 애쓰는 이를 /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가 천사들의 합창 가운데 나옵니다. 그레트헨도 “참회하는 한 여인”으로 다시 등장하여 성모에게 그의 구원을 간청하지요. 이어 파우스트의 구원을 알리는 “영원한 여성이 / 우리들을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린다.”라는 신비로운 합창이 울려 퍼지며 『파우스트』는 막을 내립니다.

 


액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1831년 6월 6일자에 보면, 괴테는 “누구든 줄곧 노력하며 애쓰는 이를 /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라는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구 속에 파우스트의 구원에 대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 파우스트 자신 가운데 점점 더 높고 깨끗한 활동이 그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있으며 하늘에서는 영원한 사랑이 그를 구원하러 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싶었던 문제, 곧 괴테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었을까에 대한 해답은 괴테 자신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노력하거나 애쓴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말이 뜻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은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 것을 위해서 그저 노력하고 애쓰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오직 파우스트가 진정 노력하고 애썼던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만 얻을 수 있겠지요. 살펴보시죠!

파우스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이성보다는 욕망, 도덕보다는 쾌락을 좇아 그야말로 “폭풍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는 갑자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라고 외치기 때문에, 그가 마치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계몽주의적 민주사회를 꿈꾼 것같이 보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괴테가 당시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냄새를 잠시 맡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파우스트라는 인물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파우스트는 도덕을 초월한 개인주의자이며 반사회적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파우스트가 애초에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한 것도 어떤 사회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개인적 욕망과 쾌락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지요. 실제로 그는 민중을 경멸하고, 독재적이며, 이기적이지요. 예를 들어, “나는 몇 백만 명의 백성을 위해 토지를 개척”하였다고 외치지만, 토지는 여전히 그의 소유이고, 일꾼들은 강제로 징발되었습니다. 당연히 간척사업에는 노인 바치우스의 비난대로 “제물의 피도 틀림없이 흘렸을 것”이고 “밤중에는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지요. 하지만 파우스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봉건군주나 자본주의 엘리트 기업가처럼 자기만족에 넘쳐 “쟁기와 괭이를 써라. / 지시한 것을 곧 해치워라. / (…) / 최대의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 수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충분하리라.”라고 외치지요. 그는 계몽주의적 민주사회를 위해 노력하거나 애썼던 인물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파우스트가 노력하고 애썼던 일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낭만주의적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입니다. 물론 이때 말하는 자기실현에는 그레트헨이나 헬레나를 소유하려는 개인적 욕망뿐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 간척사업과 같은 사회적 욕망도 함께 포함되어 있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일, 오직 이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파우스트는 수많은 죄악과 슬픔 그리고 절망을 견디면서 “다시 희망을 품고 폭풍같이” 일생을 헤쳐 왔지요.

돌이켜 보시죠! 그는 학문을 위해 평생을 다 보낸 어느 날에야, 자기 안에서 외치는 진정한 내면의 소리를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오직 그것의 실현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했지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지하세계에 내려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고, 그 무엇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지요.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 때문에 영원 속에서 헤맬 필요가 있을까! / 자기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다 이룰 수 있다. / 그런 식으로 지상의 날들을 보내라.”라고 외치며 오직 자기실현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했던 겁니다. 자기실현을 위한 이 무차별적인 열정, 이 무참한 용기가 그를 구원한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줄곧 노력하며 애쓰는 이를 /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라는 시구 속에 파우스트의 구원에 대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는 괴테의 말은 다름 아닌 누구든 자기실현을 위해 줄곧 노력하며 애쓰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되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독일 낭만주의의 궁극적 이상이자 긍정적 목표였습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 자기실현이란 단순한 자아의 완성이 아니라 신적인 것을 닮아가는 것이며 진리의 구현이자 구원의 길이었지요. 
 

 

1770년 9월에 괴테는 당시 슈트라스부르크에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던 고트프리트 헤르더(J. G. v. Herder, 1744~1803)를 만났습니다. 이미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신진 비평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헤르더에게서 21살의 젊은 시인 괴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강한 영향을 받았지요. 물론 말년에는 당시 낭만주의 작가들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그들을 표현의 과잉으로 재능의 결핍을 감추는 싸구려 예술가로 생각하여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고, “낭만주의는 질병이고, 고전주의는 건강한 상태”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괴테의 주요 작품들을 낭만주의와 분리하여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지요. 왜냐하면 그의 대표작들, 예컨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낭만주의 문학의 정수로 꼽히고 있고, 특히 독일 낭만주의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인 자아실현에 대해서는 그가 평생 동안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손질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파우스트』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낭만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철학자이자 관념사학자인 러브죠이(A. Lovejoy)가 “낭만주의의 다양성”을 지적하며 난감해했던 것처럼, 낭만주의(Romanticism)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정의한다면, 낭만주의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당시 유행하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범유럽적 문화 및 사상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특성이기도 한 17세기 합리주의와 그것의 사회적 형식인 18세기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세의 신(神)’이 앉았던 바로 그 전능한 자리에 올려 앉혔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성에 의해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까지도 새롭게 조명하고 규제하기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드러난 것이, 곧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 계몽된 사회, 그리고 마치 시계(時計)와 같이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이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인간관과 세계관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답답할 정도로 편협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비합리적 또는 비도덕적 인간과 비과학적 세계를 옹호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이성보다 감성, 사고보다는 의지, 과학보다 신화나 예술, 차가운 도덕보다 뜨거운 열정,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론적 세계보다는 수많은 신들과 요정들이 함께 살고 있어 그것들을 변화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유기체적 세계가 더 진실하고 가치 있게 생각되었던 겁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솟아 있는 ‘처녀의 집’ 곧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의 서쪽 박공(牔栱; 지붕과 벽을 잇는 부분)에는 아폴론을 상징하는 뮤즈들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고, 반대편 동쪽 박공에는 디오니소스가 새겨져 있답니다. 아폴론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 이성적인 것, 즉 균형, 조화, 절제, 지식을 추구하고 다스리는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생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삶, 감성적인 것, 즉 도취, 무질서, 본능, 광란, 열정을 다스리는 신이지요.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의해 비로소 강조되었지만, 이렇듯 대립하는 성질을 가진 두 신이 한 신전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는 올바로 설 수 없는 우리 내면의 이중성, 우리 삶의 양면성을 말해 주고 있는 거지요. 이 둘은 언제나 함께 있지만 주기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 곧 어느 한 쪽이 일어나면 다른 한 쪽도 곧바로 들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함께 말해 줍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이 바로 그랬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예로 들어보면, 욕망과 쾌락, 열정과 의지를 추구하는 파우스트의 비합리적 또는 비도덕적 성격과 특히 2부에서 전개되는 수많은 여신들과 요정, 괴물들이 등장하는 신화적․환상적 세계가 바로 이런 관점에 근거하여 창조된 겁니다. 세계는 합리적 구조를 가졌고 모든 문제에는 단일한 해답이 존재하며 학문과 예술에는 완전한 진리가 있고 인간의 삶에는 객관적 도덕이 주어져 있다는 등, 일체의 합리주의 내지 계몽주의적 생각에 대해 반기를 듦으로써 낭만주의는 후일 니체의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라날 수 있는 선구적 토양을 마련했지요. 이런 관점에서는 디오니소스가, 곧 괴테의 파우스트이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이며,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새로운 신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낭만주의에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수동적 또는 해체적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낭만주의는 계몽주의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추상적 개인(Man)’을 보았던 곳에서 욕망과 쾌락에 몰두하는 ‘구체적 인간(man)’을 발견했지요. 그럼으로써 자기실현이라는 개인주의적 가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20세기를 휩쓸었던 실존주의라는 후계자를 낳은 거지요.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그의 『존재에의 용기』에서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낭만주의와 실존주의는 모두, 인간이 진리도 신도 없는 공허한 세계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실현이라는 개념은 독일의 낭만주의자들 특히 헤르더(J. Herder), 훔볼트(W. Humboldt), 쉴레겔(F. Schlegel), 노발리스(Novalis), 슈라이어마허(F. Schreiermacher) 등에 의해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으로까지 이어지는 자기실현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모범적인 예를 우리는 쉴러(J. C. F. Schiller, 1759~1805)의 인간성장의 삼 단계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쉴러의 이 주장을 1부에서 소개했던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설」과 비교해 보면, 파우스트의 구원이 그레트헨의 구원과 어떻게 다른지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더구나 쉴러가 괴테와 자웅을 겨루던 시인이자 동시에 우정어린 동료로서 무엇보다도 괴테에게 『파우스트』를 다시 쓰게끔 격려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흥미롭지요.    

쉴러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에는 정욕과 쾌락에 필연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필연의 국가”를 거칩니다. 이 단계를 쉴러는 “미개한 상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미적 단계”의 인간이 “순결의 상태”, 곧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에 해당하지요. 그 다음으로 거치는 단계가 도덕과 법 같은 명령들이 지배는 “이성의 국가”입니다. 이 단계는 미개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이 만든 원리를 일종의 신, 곧 우상으로 섬긴다는 점에서 쉴러는 “야만적 상태”라고 불렀지요. 이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도덕적 단계”에 해당합니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말하는 인간성숙의 단계가 평행을 이루지요.

그러나 세 번째 단계에서 갈라집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무한한 자기체념”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로 그 자리에 쉴러는 “유희(遊戱)”, 곧 ‘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입니다. 그는 인간이 본능만의 지배를 받는 미개한 상태나 이성만의 억압을 받는 야만적 상태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놀이를 하는 아이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놀이를 하는 아이’는 예술가들이 창작을 할 때 그리 하듯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구현하는 인간의 상징입니다. 놀이에도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기에 억압이 아니라 자유라는 거지요.

쉴러가 말하는 이러한 인간은 결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최고의 자기부정” 내지 “무한한 자기체념”을 통해 도달하는 ‘종교적 인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의 자기긍정’ 내지 ‘무한한 자기실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실존적 인간’이지요. 또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시한 초인(超人), 곧 낙타(駱駝)의 정신과 사자(獅子)의 정신을 거쳐 제 스스로의 세계를 얻으려고 “창조적 유희”를 하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진 그런 인간이지요. 이처럼 오로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해가는 것, 바로 이것이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에 이르는 길이자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실현의 길, 이러한 종류의 구원의 길, 그 선두에 파우스트가 서 있는 겁니다. 그
옆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빌헬름이 나란히 서 있다는 것도 잊어선 안 되지요. 그리고 그 뒤에는 소위 ‘성장소설(Bildungsroman)’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양식의 독일소설의 주인공들, 예컨대 헤르메스의 소핀, 크니케의 페터 클라우스, 토마스 만의 한스 카스토르프 등이 꾸준히 줄을 잇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물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싯달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리고 크네히트도 들어 있지요. 이들에게는 “유령이 나오든 말든 자기의 길을 나아가라. /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괴로움도 행복도 만날 테지.”라는 파우스트의 외침이 신념이자 복음인 것입니다.

정리하지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 그레트헨이 갔던 무한한 자기체념을 통한 ‘종교적 구원의 길’과 2부에서 파우스트가 보여준 무차별한 자기실현을 통한 ‘인간적 구원의 길’이 그것이지요. 전자에 비해 후자가 ‘세속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도 한번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것인가? 아니면 ‘무차별한 자기실현’을 할 것인가? 대답은 오직 그대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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