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서 본 ‘권태’의 의미





“폭 좁은 철도를 끼고 있는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 우리는 앉아 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 온다. 기차역 일대는 삭막하기만 하다. 우리는 배낭 속에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 꺼내 읽어 볼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어떤 물음이나 문제에 관해 골똘히 사색에 잠겨 볼 것인가?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기차운행 시간표를 훑어보거나 또는 이 역과 – 우리는 더 이상 잘 모르는 – 다른 낯선 곳과의 거리가 다양하게 표시되어 있는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다 우리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겨우 15분이 지났다. 그래서 우리는 국도 쪽으로 건너가 본다.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 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제는 국도변의 나무들을 세어 본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처음 시계를 보았을 때보다 5분이 더 지났다. 이리저리 거니는 것도 싫증이 나 우리는 돌 위에 앉아 갖가지 형상들을 모래 위에 그려 본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우리가 또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누구나 한번쯤은 체험해 보았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 글은 일생을 오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만 사유하는 데 보냈던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 1888~1976)의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삶의 무의미성’과 그것의 극복을 ‘권태(倦怠, Langweile)’의 문제와 연관하여 다루고 있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권태란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는 현존재(Dasein; 하이데거가 ‘인간’을 부르는 말)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기분(Grundstimmung)’인데, 그것의 구조는 ‘붙잡고 있음(Hinhaltende)’이자 동시에 ‘공허 속에 놓아둠(Leerlassende)’이라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위에서 우리가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서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 오는 기차를 기다릴 때를 예로 들었지요. 이때 우리는 기차 시간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데, 이것이 우리를 권태롭게 하는 권태의 존재론적 구조랍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시간 죽이기(Zeitvertrieb)’를 시작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이 가진 근원적인 모습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 누구 하나 예외 없이 – 언제 올지도 모르고 또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요? 그래서 하염없는 권태 속에서 시간 죽이기를 해야만 하는, 참으로 권태로운 존재가 아니던가요? 그래서 하이데거도 권태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규정한 것이 아니던가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하이데거가 제시한 바로 이 ‘예사롭지 않은’ 권태에 관한 문제들을 – 제가 아는 한 – 그 어떤 작품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희곡이지요. 1953년 1월, ‘바빌론’이라는 파리의 한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이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은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일’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극 내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 죽이기’를 하지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일단’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느끼지요. 하지만 그 지루함이 왠지 전혀 낯설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흥미롭지 못한 작품들이 주는 지루함과 다른 점이죠. 알고 보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는 지루함은 단순히 ‘흥미 없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근본적 구조에서 나온 ‘권태’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 작품은 우리 모두가 언제나 외면하고 살지만 사실인즉 항상 끌어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폐관 직전에 있었던 바빌론 소극장에서의 공연만 400회를 넘기고, 곧이어 수십여 개의 언어로 번역, 공연되어 20세기를 대표하는 희곡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사건도 이야기도 없는 이 연극을 보며 한없이 지루해하지만 결코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 보시죠.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세계와 삶의 무의미성   

  
                           
막이 오르면, 무대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한 그루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희곡에는 “시골길, 나무 한 그루”, 이 두 마디가 씌어 있지요. 거기에 등장한 블라디미르(Vladimir)와 에스트라공(Estragon)이라는 두 인물은 어디에서 오는지, 왜 오는지, 언제 오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온다는 고도는 끝내 오지 않고, 그렇다고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요. 그 가운데 럭키와 포조라는 인물들이 그곳을 지나가지만 역시 아무런 사건도 없고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1막이 끝나고 2막이 다시 한 번 같은 것을 반복한 다음, 연극이 끝나지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흔히 반(反)연극, 신(新)연극, 부조리연극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지요. 전통적인 연극이 무엇인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연극을 반(反)연극 이나 신(新)연극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을 ‘부조리연극’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부조리(不條理)란 – 서영은의 「사막을 건너는 법」을 통해서 본 ‘거짓말’의 의미에서 이미 보았듯이 –  ‘조리에 맞지 않음’, 또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음’, ‘비합리적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이 부조리(l'absurdite)를 말할 때는 보통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지요. 이들의 작품들, 예컨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와『구토』, 카뮈의 『이방인』이나 『페스트』등은 바로 이것을 철학적 또는 문학적으로 설명하며 이해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와 다르지요. 매우 특이한 이 작품은 부조리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하는 대신 부조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관객들 스스로가 부조리와 맞부딪혀 그 자체를 느끼게끔 하는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연극을 예컨대 카뮈의 『칼리큘라』나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No Exit)처럼 ‘실존주의 연극’이라 하지 않고, ‘부조리연극’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부조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베케트가 한 일은 – 제가 보기에는 – 적어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변화 없는 시공간(視空間)’을 창조한 일이지요. 전통적 연극에서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변화는 사건의 전개를 통해 표현됩니다. 하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전개되지 않지요. 에스트라공의 말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끔찍한” 시공간에 두 사람이 그저 내던져져 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고 행동을 하지만, 그 대화나 행동은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지요. 때문에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 것이고 전통적 연극에서 보여주는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시간은 반복되고 공간은 고정되어 있지요. 여기에서는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자체가 부조리인 것이죠. 예를 들면 다음 두 대화들은 1막과 2막에서 똑같이 반복되는데,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시공간의 무의미성을 잘 보여줍니다.



에스트라공 : 자, 그만 떠나자.
블라디미르 : 안 돼.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에스트라공 : 참, 그렇군. 

……

에스트라공 : 자, 그럼 가볼까?
블라디미르 : 응, 가세나.
 (그들은 꼼짝 않는다.)



형식적으로 보아, 이 작품은 1막과 2막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막이 바뀌어도 역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요. 나무에 잎이 너댓 개가 돋아 있고, 럭키와 포조가 각각 눈이 멀고 실어증에 걸렸다는 것 같은 약간의 외관상 변화는 있지만, 그것들 역시 아무 의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대에는 1막에서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행위가 반복됩니다. 베케트는 이렇듯 무의미한 대화와 행동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역사적 시간의 전개가 불가능한 시공간을 창조했지요.


‘부조리 그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 베케트가 한 또 하나의 일은 ‘성격 없는 인물’을 창조한 것입니다. 전통적 연극에서 인물은 성격에 의해 창조되지요. 하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통적 의미에서 보면 성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부조리하지요. 
연극에서 한 인물이 어떤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그가 하는 말과 행동(action)에 확실한 의미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케트의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어떤 의미도 목적도 갖고 있지 않지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블라디미르와 아스트라공은 그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고도가 누구인지, 그가 오면 어떻게 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사실은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요. 베케트의 두 인물은 고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지만, 이 기다림 역시 아무런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대사와 행동(action)이 없는 겁니다. 인물들은 단지 ‘수동적’ 또는 ‘반사적’으로 대화하고 행동을 할 뿐이지요. 



에스트라공 : 아이구 배고파!
블라디미르 : 당근이라도 먹겠나?
에스트라공 : 그것밖에는 없나?
블라디미르 : 순무도 좀 있을지 몰라.
에스트라공 : 당근 좀 줘봐. … 이건 순무잖아!
블라디미르 :  아, 미안하이! … 틀림없이 당근인 줄 알았어.

……

블라디미르 : 참을 수 없대.
에스트라공 : 더 이상은.                        
블라디미르 : 미치려나봐.               
에스트라공 : 끔찍한 일이야.



이러한 인물들에게 성격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베케트의 이 드라마는 매우 연극적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햄릿과 클로디오스왕, 오셀로와 이아고 사이에서 생기는 그런 대립이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프로태거니스트(Protagonist, 주인공)’도 없고, 이와 갈등하는 ‘앤태거니스트(Antagonist, 대립자)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베케트는 결국 ‘변화 없는 시공간’ 안에 ‘성격 없는 인물’들을 그저 내던져 놓은 겁니다. 마치 텅 빈 무대 위에 아무 대본도 없이 배우들을 올려놓은 것과 같지요. 이것이 베케트가 관객들에게 부조리를 그 자체로 보여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은 일찍이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이 “인간은 피투성(被投性, 내던져진 자)이다.”라는 말로 묘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하이데거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에 의하면, 인간은 그 어떤 특별한 의미[本質]없이 그저 세계로 “내던져진 자”입니다. 이 “내던져짐(Geworfenheit)”에는 거룩한 신의 섭리도, 정해진 운명도 없지요. 인간의 모든 것은 오직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겁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그저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고 ‘현존재’라고 부르는 뜻이 여기에 있지요.
우리말로 ‘현존재’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Dasein’은 ‘거기(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일까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거기’란 인간이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내던져진 자리,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이 오직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만 맡겨져 있는 자리, 베케트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간은 일단 자신의 “내던져짐”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만 맡겨져 있음에 대해서 언제나 “불안(Angst)”해 하며 그것 때문에 항상 “염려(Sorge)”하지요. 이 불안과 염려는 일찍이 파스칼이 『팡세』의 제 1부, 「신 없는 인간」에서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라고 고백한 바로 그 두려움과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베케트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텅 빈 무대’ 위에 내던져진 ‘대본 없는 배우’처럼 ‘무의미한 시공간’ 안에 ‘성격 없는 인물’로 구성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실로 천재적이라 할 수 있지요.

이제, 문제는 대본도 성격도 없는 배역을 맡은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한번 무대에 오른 배우는 아무리 무대가 비어 있더라도, 설사 대본이 없더라도, 그가 무대에 서 있는 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거지요. 연극이 끝나 그가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래서 ‘시간 죽이기’를 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보면,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시간 죽이기’이지만, 우선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요. 기다리는 동안에라도 당장 지루함을 달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블라디미르 : 이제 무엇을 하지?
에스트라공 : 기다리지.
블라디미르 :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야.
         (침묵)
 


그래서 이들은 “시간 때우기 삼아서”, “일종의 휴식 삼아”, “기분전환용으로” 온갖 방법을 통해 ‘시간 죽이기’를 합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놀리던 포조와 럭키를 흉내내는 놀이도 합니다. 연극 속에서 다시 연극까지 벌이는 거죠.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지루해지거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지루해지는 것은 베케트의 인물들이 벌이는 ‘시간 죽이기’가 전통적인 연극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이끄는 몰입을 철저하게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충격을 받는 것은 그 ‘시간 죽이기’가 우리의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과 허망함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이 연극을 보았다면 매우 흥미로워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우리의 ‘일상적 삶 자체’를 이러한 ‘시간 죽이기’로 규정하고 철학적으로 분석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자기 자신의 ‘내던져짐’과 모든 것이 자기에게 ‘맡겨짐’에 대해서 언제나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현존재가 ‘시간 죽이기’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우선 남들이 보통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즉 ‘평균적 일상성’을 따라 살아갑니다. “대개 사람들이 그리 하듯” 자기 자신보다는 자기 밖의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잡담”을 하고, 그들을 따라 “애매하게” 행동함으로써, 서로서로 동질화 및 평균화를 꾀한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위안을 얻는 거지요.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상적 삶을 “비본래적 삶(uneigentliches Leben)”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사는 “본래적 삶(eigentliches Leben)”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상사람(das Man, 世人)’이라고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퇴락(頹落, Verfallen)’, 곧 ‘무너져 내림’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그저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고, 남들이 행동하는 대로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삶은 무너져 내린다는 의미이지요. 마치 베케트의 인물들이 ‘반사적’으로 말하고 ‘수동적’으로 행동하면서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분석한 ‘시간 죽이기’의 존재론적 구조이지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시간 죽이기’에 불과한 자신의 비본래적인 삶에 – 마치 그것이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한 자시의 본래적 삶인 것처럼 – 위장도 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스스로를 위안도 한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 죽이기’에 분주히 몰입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한다는 거지요.



블라디미르 :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좀 해 봐.
에스트라공 : 뭐라고 얘기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해 봐.
에스트라공 : 나는 행복하다.
블라디미르 : 나도 그렇다.
에스트라공 : 나도 그렇다.
블라디미르 : 우리는 행복하다.
에스트라공 : 우리는 행복하다. (침묵) 이제 우리는 행복하니까, 이제 뭘 한다?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하지만 이러한 ‘시간 죽이기’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진정한 자기로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삶은 인간을 점차 전락(轉落, Absturz)시킨다고 했습니다. ‘나쁜 상태로 굴러 떨어진다.’는 말이지요.
베케트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등장인물들이 신체적으로 점점 불구가 되어가고, 의사소통은 더욱 불가능해지며, 절망은 한없이 깊어만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간 죽이기’를 통해 점차 퇴락해가고 전락해가는 모습이지요. 특히 흥미로운 것은, 1막과 2막에 똑같이 반복되는 대사들이 여러 번 있는데 이러한 반복이 오히려 등장인물의 ‘전락’을 드러내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에스트라공) 자, 그럼 가볼까? (블라디미르) 응, 가세나. (그들은 꼼짝 않는다.)”라는 대사는 1막과 2막의 끝에 똑같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2막에서 이 대화가 가진 절망감과 허망함은 1막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깊어진다는 거지요.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처럼 그냥 그렇게 ‘시간 죽이기’에 몰두하며 전락하는 수밖에 없을까요? 텅 빈 무대에 대본도 없이 올라선 불안과 염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 분주하게 몰입하여 때로는 행복한 것처럼 스스로를 위안도 하고 위장도 하며, 그냥 그렇게 굴러 떨어져 내려야만 할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삶의 방법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베케트는 도저히 잠 못 이루게 하는 이 문제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쳐 무대 위에 올려놓았지만, 굳게 다문 입으로 대답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이데거에게로 돌아가 알아보려 합니다. 어쩌면 문제를 던지는 일은 작가의 일이고, 답을 하는 것은 철학자의 몫인지도 모르지요.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서 권태를 ‘표면적 권태(oberflchige Langweile)’와 ‘깊은 권태(tiefe Langweile)’로 나누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또는 상대 때문에 생기는 이런저런 특수한 상황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지루해지는 것이 ‘표면적 권태’ 또는 ‘비본래적 권태’이지요. 이런 권태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항하는 ‘시간 죽이기’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몰입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권태를 잊는 것이지요.

“호기심(die Neugier)”이 가는 대로 관광, 관람, 패션, 레저, 관음증, 인터넷 서핑, 대중잡지 등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니며, ‘누가 … 했대.’라는 어법으로 “잡담(das Gerede)”을 나누고 또 퍼뜨리면서, 시간을 죽이는 겁니다. 사회문제와 같은 자기 밖의 문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문제마저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신 잡담이나 호기심에 의존하여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대.’하는 식으로 “애매(Zweideutigkeit)”하게 결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거지요. 물론 이러한 ‘시간 죽이기’는 그 대가로 퇴락과 전락을 반드시 치르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이에 반해, 아무런 이유가 없이 “아무튼 그냥 지루해(es ist einem langweilig)”라고 표현되는 무조건적인 권태가 있는데, 이것은 ‘깊은 권태’ 또는 ‘본래적 권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권태에 대해서는 ‘시간 죽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아무리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분주하게 몰입해 보아도 ‘깊은 권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모두가 근원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권태가 바로 ‘깊은 권태’입니다. 알고 보면 이 권태는 언제 올지도 모르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인간적 상황이 가진 근원적이면서도 숙명적인 권태이지요. 따라서 이 권태는 그 어떤 ‘시간 죽이기’로도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시간 죽이기’가 실패로 끝나는 것도 그래서이지요.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실존(實存, Existence)'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사람(世人)’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능성(Seinsknnen)’을 기획하고 그것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는 이러한 행위를 ‘기획투사(企劃投射, Entwurf)’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기획투사는 단순히 미래의 계획을 세운다는 말은 아니지요. 기획투사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에 자신을 던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기를 새롭게 구성하는 실존적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진정한 자기, 본래적 자기로 살아간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분명해진 것이 하나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세상사람’으로 살 것인가? 본래적 삶을 살 것인가, 비본래적 삶을 살 것인가?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이 두 가지 길이 갈라서는 갈림길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현존재(Dasein)’로서 인간은 ‘언제나 그리고 매 순간마다’ 이 갈림길, 바로 ‘거기(da)’에 서 있지만, ‘세상사람(das Man)’으로서 우리는 그것마저도 망각한 채 매일매일 ‘시간 죽이기’에 몰입하여 분주하게만 살아가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들 모두의 가엾은 모습이랍니다. 그래서 한번 이런 생각도 해보지요. 어느 눈 내리던 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왠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차마 찻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자꾸만 걸었던 ‘아픈’ 기억은 분명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이제 결정 하시죠!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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