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우리들의 타화상 [2]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 사진 오른쪽)에 나오는 말이다. 현실이 답답하고 억압적이라 느낄 때,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옥죄이는 현실을 떨치고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고 싶을 때 이보다 더 큰 마력을 지닌 말이 또 있을까.
‘알’은 보호와 안정을 보장해 주지만, 날고자 하는 새에게는 구속이 될 수 있다. 알 속의 새는 ‘알’을 파괴해야만 비상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파괴는 새로운 출발과 창조의 전제이다. 이 말이 특히 청소년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알’과 ‘새’가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이경화는 <나의 그녀> (바람의 아이들, 2004. 사진 아래 오른쪽) 에서 <데미안>을 직접 인용하며 그 비상의 모색과 가능성을 열여섯의 나이에 부여한다. 이런 직접 인용에서도 드러나듯이 <나의 그녀>의 작중화자인 '나' 김준희와 ‘그녀’와의 관계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에 대입시킬 만하다. 그러나 두 작품은 당연하지만 많이 다르다. 우리는 여기서 이 다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의미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나의 알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의 독일과 2000년대 한국의 현실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데미안>의 시대적 배경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무렵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실마리는 겨우 말미에 와서야 드러난다. 그만큼 이 소설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나를 찾아가는 길'에 집중한다. 이야기는 싱클레어가 열 살 때 악동 크로머와의 만남을 통해 어둠의 세계를 알게 되는 데서 시작되는데, 그때까지 싱클레어는 가정으로 대표되는 '빛'의 세계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보호와 아늑함으로 충만한 세계, 즉 ‘알’이 일차적으로 상징하는 바가 그대로 충족된 세계다.

그러나 <데미안>에서의 그러한 빛의 세계는 <나의 그녀>에게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나의 그녀>에서의 현실은 구질구질하기만 하다. 적어도 '나' 김준희가 파악한 자신의 현실은 그렇다.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집안에서 유일한 고졸이면서 직업도 없이 살아온 아버지는 "담배 냄새가 배어 있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수염도 깎지 않은 지저분한 얼굴을 하고는 새벽녘에 술에 취해 잔뜩 토악질을 해" 댄다 ( 나의 그녀 , p 166). 그렇다고 ‘나’는 엄마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엄마는 남편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고, 늘 울거나 찡그리고 있었으며, 죽기 전에 재산을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 남은 사람들에게 엄마는 "애초에 없었던 사람"과 같다 (나의 그녀,p 25) . 한 마디로 ‘나’의 가정은 어디 마음 둘 곳 없는 세계인 것이다.

이는 가정이 흔들리고 파괴되어가는 우리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바깥의 문제만으로도 벅찬 ‘나’의 현실은 헤세 식의 '나'를 찾는 치열한 모색을 피해가는 데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나’ 준희는 구질구질한 현실로부터 '상상의 세계'로 기꺼이 도피한다. 그곳은 “철저하게 혼자일 수 있는 곳,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못하는 곳, 나만이 주인공이고 나만이 빛나는 곳” (나의 그녀, p 57) 이다. 그리고 그 상상 속의 나는 "현실에서 받은 상처가 아물 때까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커튼을 쳐 주고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준다. (나의 그녀, p 57)

하지만 준희는 일찌감치 이 세계가 부수어야 할 알과 같은 세계임을 예감한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스스로 지치는 걸 느끼다가 마침내 작품 말미에서 "이제 상상만 하면서 사는 건 재미없" (나의 그녀, p 193) 다고 토로한다. 시간이 흐르고 여러 인물을 만나며, 고독과 침묵, 냉소와 방탕, 두려움과 불안을 통해 조금씩 허물이 벗겨지고 알껍데기가 부수어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던 싱클레어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진행되는 깨달음이다. 작가는 독자의 나이를 고려해서 일부러 가볍게 처리했는지는 모르지만, 깊이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실망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그녀>에서 그려지는 상상의 세계는 현실도피라는 부정적 측면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세계는 준희의 글과 그림, 즉 창조적 세계의 원천이기도 하다. 도피적 상상의 세계는 떠나야 할 것이지만, 창조적 상상의 세계는 만화라는 잠재적인 터전을 확보한다. 그것이 꼭 만화학과라는 틀에 끼워져야 하는지는 별다른 문제지만.



‘나’의 그녀와 데미안



‘내’가 자신의 재능을 미래와 연결시켜 생각하도록 도와준 것은 친구 정아와 열여섯 살이 더 많은 ‘그녀’이다. 그러나 처음 ‘나’의 안중에는 정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눈은 오로지 ‘그녀’에게 향한다. 비록 선생과 제자 사이이긴 하지만 ‘나’에게 ‘그녀’는 감각으로 다가오는 이성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보통 어른과는 생각도 화법도 말투도 다르다. 그런 그녀를 ‘나’는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일컫듯이 "누이이고 연인이며 여신" (나의 그녀, p7) 이라 부른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환상도 그리움도 없는 ‘내’가 원하는 것은 어머니 같은 사랑이 아니라 이성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종종 관능적 욕망의 투사이다. 열여섯의 나이는 이제 눈뜨기 시작한 관능적 욕망을 투사할 대상을 찾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투사한 ‘그녀’의 상이다. 따라서 ‘어른’인 그녀가 자신을 향한 ‘나’의 관능적 욕구의 물길을 ‘나’의 나이와 처지에 맞는 정아에게 돌려놓고 사라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싱클레어에게 있어 데미안은 관능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친구이자 인도자” (데미안, p 231) 로 규정된다. 데미안은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현실적인 인물로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성격을 보여준다. 데미안은 “남자답거나 어린이답지 않고, 나이 들었거나 어리지 않고, 왠지 수천 살은 된 듯, 왠지 시간을 초월한 듯, 우리가 사는 것과는 다른 시대의 인장이 찍힌 듯 보였다. 짐승들이 아니면 나무들, 아니면 별들이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데미안, p69) . 또한 그는 생명과 죽음을 뛰어넘는 존재이기도 하다. “저렇게 돌 같은, 태고처럼 늙은, 동물 같은, 돌 같은, 아름답고 찬, 죽었는데 남모르게 전대미문의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다.” (데미안, p89)

데미안은 결국 사라지지만 그러나 싱클레어 안에서 ‘자신 속에 있는 뛰어난 존재’(데미안, p116)로서 살아남는다. 싱클레어는 자신에게서 데미안과 닮은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싱클레어는 빛과 어둠, 선과 악, 그리움과 번민, 모든 것이 긍정되고 해결되며 시인되는 신, 아프락사스에 도달한다.



‘나’의 아프락사스



‘나’, 즉 준희에게는 자신과 하나로 합쳐지는 인물은 없다. “누이이고 연인이고 여신”으로 불렀던 그녀조차 ‘나’의 표피에 머물다 사라진다. 어쩌면 하나가 될 인물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준희에게는 자신의 아들의 아들이 되고 싶어 하는 아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준희는 자신의 진로를 구체화시키면서 도피적 상상의 세계를 창조적 상상의 세계로 전환시키고,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아니다’며 처한 현실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문제적 현실의 중심이었던 아빠를 ‘친구’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한 번 현실과 화해한다.

한심함과 연민이 뒤엉킨 감정으로 바라보던 아빠와 모처럼 낚시여행을 떠난 밤, 준희는  아빠에게 아프락사스에 대해 설명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신이야. 그 신은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알은 곧 세계다.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한 나래를 펼친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 한다.’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야.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 이제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 (나의 그녀, p193)


화해는 엄밀히 말해 파괴를 전제로 한 새로운 탄생은 아니다. 따라서 준희가 아프락사스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만 비상할 수 있음을 안다. 준희는 이를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다짐으로 순화한다. 이렇게 <나의 그녀>에서 헤세의 <데미안>의 인용을 통해 전해주는 메시지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라는 구절 하나로 축약되는 듯이 보인다. 결국 <나의 그녀>는 <데미안>의 문제의식을 묽게 희석한 작품으로 읽힌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감각적인 언어구사라든가 이중감정의 섬세한 심리묘사, 그동안 거의 금기나 다름없던 자위라든가 동성애, 성적 욕망에 대한 거침없는 언급 등은 그러한 희석을 상당부분 상쇄하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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