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퓨처 – 멋진 신세계? (3)


맞춤 아이

왜 인간은 인간 수정을 원하고, 복제를 원하는가?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1999년생>, <블루프린트>, <전갈의 아이>에서는 개인적인 동기가 부각되었다. 불임 부모들을 위해, 자신의 영생을 위해, 질병 치료를 위해, 또는 질병 치료를 위한 장기 이식을 위해 사람들은 인공수정 또는 복제를 행한다. 유전자 조작 문제에서도 개인적인 동기가 읽힌다. 유전자 변형 생물체를 지엠오(GMO)라고 하는데, <지엠오 아이>(문선이 지음, 창비 2005. 사진왼쪽)에서는 바로 그렇게 우성 유전자를 조작해 태어난 ‘맞춤 아이’를 다룬다. 남보다 잘난 아이, 뛰어난 아이, 특출한 아이에 대한 우리나라 부모의 바람이 투영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살펴본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지엠오 아이>에서는 인간 기술의 한계를 짚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문제는 유전자 조작 인간이 유전자 조작 식품을 장기적으로 먹었을 때, 또 일반인도 유전자 조작 식품을 장기적으로 먹었을 때, 또 일반인도 유전자 조작 식품을 오랫동안 먹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질병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알레르기 증상이나 알 수 없는 면역 결핍, 유전자 파괴, 정상 세포의 자살 등을 일으키는 희귀병 말입니다.(<지엠오 아이> 32쪽)


반(反)자연적인 인공의 결과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 작품은 유전자 조작 인간한테 ‘별다른 치유책이 없는 희귀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경고로써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정복과 극복의 대상으로 보아 온 서구의 사상 전통과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자연의 순환을 따르는 존재로서 보아왔던 우리 사상 전통과의 차이인지, 아니면 서구와 우리나라 현단계 기술 수준을 반영하는 것인지, 과학 기술의 확실성에 대한 작가 개인의 관점의 차이인지, 이 자리에서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차이가 아닐 수 없다.



멋진 신세계



하지만 인간 복제의 동기를 사회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 복제를 다룬 최초의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사진 오른쪽)의 <멋진 신세계>로 가보기로 하자. 그의 인간 복제는 어떤 개인의 욕구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회’의 안정을 위해 행해지는 것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어머니, 일부일처제, 낭만.[…] 충동의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아기뿐이다. 이 전근대적인 인간들이 미치고 사악하고 비참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 어머니라든가 연인으로 인해서, 조건반사적으로 따를 줄 모르는 여러 가지 금기로 인해서, 유혹이라든가 고독한 회한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질병과 끝없이 고립화되는 고통에다 불확실성과 빈곤으로 인해서 — 그들은 모진 감정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강한 무엇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들이 더구나 고독 속에서, 희망도 없는 개인적인 고립 속에서 모진 감정을 반추하면서 어떻게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멋진 신세계>, 이덕형 옮김, 문예출판사, 54쪽)


헉슬리의 신세계에서는 생물학적 부모를 갖는다는 것을 모르며, 어머니라는 단어 자체를 수치로 여긴다. 아기들은 모두 실험실에서 태어나, 병에서 배양된다. 한 개의 난자에서 하나의 태아를 수정시키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 되게 하는 것은 지도계층에 속하는 알파나 베타 계급에게만 해당된다.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 즉 이른바 생산계층은 보카노프스키 법에 의해 복제인간들로 처리된다. 이 보카노프스키 법이야말로 ‘사회 안전’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안전장치이다.

그렇다면 이들 복제인간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회의하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의 회의와 불만은 원천봉쇄 당한다. 그 수단은 ‘신(新)파블로프식’ 조건반사 학습과 ‘소마’라는 행복의 약이다. 물론 이 수단은 알파 계급과 베타 계급에게도 똑 같이 적용된다. 아무도 불행하지 않은 사회, 그 자체로 그것은 진정 이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그 이상사회가 절대로 이상사회가 아니며, 철저한 인간소외를 야기하는 사회임을 이 작품은 존이라는 보호구역의 야만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일인 통제의 사회는 전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개인적이며 실존적 접근에서도 공유하고 있는 바이므로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헉슬리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다.



행복의 조건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또한 갈등 없는 안정된 사회에서 살고 싶어 한다. 멋진 신세계의 총통은 그 두 가지를 실현시킨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인 생로병사를 넘어서는데서 출발한다. 인간 재생산, 다시 말해 출산을 사회화시킴으로써 성차별과 가족주의를 넘어선다. “가족, 일부일처제, 로맨스. 어느 곳이나 배타주의가 지배한 것이다.”(<멋진 신세계>, 사진왼쪽, 52쪽) 내 것에 대한 집착, 내 이익에 대한 추구, 배타주의가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는 오늘날의 현실도 여실히 보여주지 않는가. 또한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도 인간을 가장 두렵고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주민들은 그러한 두려움과 고통에서 자유롭다.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늙고 병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노령의 생리학적 특성은 모두 근절되고, 동시에 노인의 정신적 특성도 없어진다.


 일과 유희 – 예순이 되어도 우리의 능력과 기호는 열일곱 살 때와 전혀 다를 바 없게 되었지. […] 노인도 일하며 노인도 이성과 교합하며 노인에게도 시간이 없게 되었지. 쾌락으로부터 벗어날 여가가 없으며 잠시도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없어졌지. 또한 불행히도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미한 시간의 터널이 입을 벌린다면 항상 소마가 대기하고 있는 거야. 유쾌한 소마가 있지.(<멋진 신세계> 71쪽)


그러나 필멸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조건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은 죽어야 한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의 주민들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조건반사식 학습을 통해 죽음을 축하할 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와진 인간들의 삶을 ‘살 맛’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헉슬리는 우선 자유로운 성관계에서 찾는다. 특정인과의 특정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배타주의라는 맥락에서 사회적인 악으로 제시된다. 또 하나는 –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돋보이는 통찰의 하나로 보이는데, 바로 ‘일’,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야 —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 모든 조건반사식 단련이 목표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야. 자신들의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숙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해.(<멋진 신세계> 23쪽)


하지만 정말 모든 인간의 행복을 원한다면, 왜 모두들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는 알파나 베타 집단으로만 세상을 구성할 수는 없는 걸까? 과학기술과 사회적 학습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데, 왜 보카노프스키 집단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보호구역에서 온 야만인도 이에 대해 의문을 갖자 총통은 대답한다.

 알파 계급으로만 이루어진 사회는 불안정하고 비참해지지 않을 수 없는 걸세. 알파 노동자로 채워진 공장을 상상해보게 – 다시 말해서 좋은 유전인자를 지니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책임을 떠맡는 일이 가능하게끔 조건반사적으로 단련된 개별적이고 상호연관이 없는 인간들로 채워진 경우를 상상해보란 말일세. […] 그렇다면 부조리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알파의 병에서 태어나 알파로서 조건반사 훈련을 받은 인간이 엡실론 세미 모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미쳐버릴 거야 — 미치든가 아니면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할 거야. 알파도 완전히 사회화되는 것은 가능하겠지 —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알파에게 맞는 임무를 맡길 때에 한해서 가능한 일이야. 엡실론적 희생은 단지 엡실론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거야.(<멋진 신세계> 276-277쪽)


물론 이 모든 생산을 기계가 맡을 수도 있다. 오늘날의 과학 발전에서 보면 오히려 그 편이 설득력이 있다. 이 작품이 나온 1932년에 기계 사회를 예상할 수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1908년 자동차 회사 헨리 포드의 유명한 T모델 자동차가 세계 최초의 컨베이어 시설에서 생산되어 미국적 소비사회로의 길을 열었던 때이기 때문이다.(참고: <책> 420쪽) 그런데도 모든 일이 기계로 대치될 수 있을 가능성을 배제한 것은 헉슬리의 개인적인 관심 이외에도 문명 및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토피아, 갈등도 없고 예술도 필요없는…  

우리가 이 사회를 끔찍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아직은 ‘야만인’ 존 새비지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로병사의 조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특정 인간과의 특정 관계를 원하고 또 유지하며, 불평등과 격정과 갈등이 있고, ‘신’의 개념이 있으며 ‘예술’ 특히 ‘문학’이 있는 사회. 그러나 “불쾌감을 안겨 주는 것이면 참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제거”(<멋진 신세계> 298쪽)하는 것으로 건설된 유토피아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참는’ 것이 과연 대안일까?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인간 복제를 사회적 동기에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문명에 대해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통찰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았으나 과학관과 예술관도 흥미롭다. 그러나 지금의 과학 수준에서 보면 거의 아날로그적 발전 단계의 설정이 이따금 눈에 띄며, 문학적으로 보면 인물 성격의 일관성 혹은 발전적 전개라든가 심리묘사에는 그다지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지 않는다. 특히 야만인 새비지의 격정은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부분들도 더러 있다. 다른 한편 이름의 선택(버나드 마르크스, 헬름홀츠 왓슨, 무스타파 몬드 등)이라든가, 야만인 존 새비지의 끊임없는 셰익스피어 인용 등은 상호텍스트적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과학문명의 발달이 인류에게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해주리라는 소박한 믿음은 여러 작품이 의문을 던지고 있다. 멋진 신세계의 총통이 갈파하듯이 ‘진보’를 위한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이제는 진보 개념 자체에 대해 물음을 던질 때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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