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은의 「사막을 건너는 법」을 통해서 본 ‘거짓말’의 의미


 

누구에게나 산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도 각자의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람이나 희망도 없이 힘들고 지겨운 일들을 참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오죽하면 카뮈는 이러한 우리의 삶을 ‘시지프의 형벌’에 비유했겠습니까?


우리가 「사르트르의 『구토』를 통해서 본 ‘삶’의 의미」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시지프의 형벌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 일이 너무 가혹해서뿐만은 아니지요. 힘들여 밀어올린 바위가 항상 곧바로 굴러 떨어져 그 힘겨운 노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카뮈는 인간에게는 보람 없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이 없다고 했지요. 이유인즉, 인간이란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카뮈는 그의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렇듯 고단하고도 무의미한 우리 삶을 ‘사막’에 비유하고, 그 고단함과 무의미함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을 ‘버티기’라는 말로 표현했지요. 즉,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사막에서 버티기”라는 것이 카뮈의 생각입니다. 그는 “쓰라리고도 멋진 내기를 지탱하는 것”이라는 표현도 썼습니다. 그런데 서영은은 같은 말을 ‘사막을 건너기’라고 표현했군요.

 

‘버틴다는 것’은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꿋꿋이 견딘다는 것을 뜻하지요. ‘내기를 지탱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건넌다는 것’은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막에서 버티기’보다는 ‘사막 건너기’가 훨씬 희망적이고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번 알아보려고 합니다. 실존주의적 경향이 다분한 단편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서영은이 말하는 ‘사막을 건너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소설을 해석하며 정말로 사막을 건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낯설고 삶은 무의미하다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일상적 삶으로 돌아온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처음 제대증을 휴대하고 배가 부산항에 닿을 때까지도 그는 그런 묘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지요. 그런데 “기차 속에서, 짐보따리를 옆에 낀 채 입을 벌리고 자는 아낙네, 남의 눈을 피해 몰래 희롱하고 있는 남녀, 껌을 찍찍 씹으며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를 보았을 때” 뭔가 크게 어긋난 기분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서울역에서 내려 점점 낯익은 풍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점점 더 심해졌지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반대로 낯선 땅으로 뒷걸음질쳐 가는” 느낌을 갖게 되지요. 이윽고 “집에 도착한 그 첫 순간에 베일에 가린 듯 모든 사물,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된” 자신을 느낍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주인공이 갖는 이러한 의식을 흔히 실존의식(實存意識)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실존의식이란 자기 자신과 자기와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의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고 그것들의 존재의미를 알고자하는 정신작용이지요. 그런데 존재의 의미는 보통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나 가치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실존의식은 언제나 세계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나 가치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지요.

 

사람은 태어나면 처음에는 누구나 남이 사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법입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조금 자라면 친구들을 따라서,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대강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며 산다는 거지요.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볼 필요도 없고 또 생각해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이러한 자기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합니다. 실존의식이 생긴 거죠.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주인공이 이러한 실존의식을 갖게 된 계기는 월남전에서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임무수행 중 적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동료를 잃고 자신은 부상을 당하는 극적인 일을 당했습니다. 그 덕에 을지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하게 되지요. 하지만 아무런 이유나 까닭도 없이 삶과 죽음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이 특별한 사건에 대한 경험은 그때까지 그저 남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실존의식을 갖게 했던 거지요. 즉 ‘삶과 죽음에는 무슨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일까?, 또한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일까?’와 같은 실존적 질문들을 자기 스스로에게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실존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겁니다. 눈을 뜨기 전에도 그는 세계와 자신의 삶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눈을 뜨고 나면 그것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카뮈는 인간이 실존의식을 갖게 되는 순간을 “위대한 의식의 순간”이라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존의식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세계와 인간의 삶은 그 이전보다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데에 있지요. 오히려 그것은 모순과 불합리성으로 가득 차 더욱 흐릿하게 보일 뿐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왜 그런지, 사람은 왜 사는지 등등, 세계와 삶의 의미를 묻는 모든 물음들에 대해 우리의 이성은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는 거지요. 카뮈는 세계와 삶에 대한 인간정신의 이러한 ‘이해할 수 없음’을 부조리(l'absurdite)라는 특별한 단어로 불렀습니다. 

 

부조리(不條理)란 ‘조리에 맞지 않음’, 또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음’, ‘비합리적임’을 뜻하는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부조리에 관하여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둥근 삼각형’이나 ‘검은 흰색’을 우리가 생각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카뮈는 마침내 다음과 같이 탄식하지요.

 

“나는 모든 것이 설명되거나 아니면 무(無)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성은 마음의 이 외침 앞에 무력하다. 이러한 요구에 의하여 정신은 탐구를 계속하지만 모순과 헛소리밖에는 발견하지 못한다. 합리적인 것이 아니면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세계는 비합리로 가득 차 있다. 단 하나의 의미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이 세계는 거대한 비합리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단 한 번만이라도 ‘이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은 구원될 수 있으리라.”      

 

자신이 사는 세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심지어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마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맨 먼저 갖는 감정은 낯설음, 생경함, 서먹서먹함과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의미마저 납득하기 어려울 때, 타인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는 더욱 이해되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그 결과 삶은 카뮈가 말하는 ‘사막’이 되는 것이며, 우리는 모두 소위 ‘이방

인’(異邦人)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월남에서 돌아온 주인공에게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지요. 즉, 그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타인들을 보면서 뭔가 크게 어긋난 기분을 갖는 것, 낯익은 풍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도 점점 더 낯선 땅으로 뒷걸음질쳐 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 집에 도착한 그 순간에 베일에 가린 듯 모든 사물,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 등이 모두 사막에서 이방인이 된 사람들이 먼저 경험하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애인인 윤나미에게마저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 가지요.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말합니다. “… 월남에 갔다 온 뒤로부터 사뭇 딴 사람이 된 듯싶으니까. 단지 나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만 아니라, 인생 전부를 포기하는 듯한 태도랄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거야. 기다려 봤지. 자기 스스로 내게 말해주든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그 낯설어하는 표정을 버리고 옛날처럼 친근한 미소로 내 앞에 서주기를. …”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그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미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에게는 그녀가 요구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결국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의 곁을 떠납니다.

 

 

                          ‘사막에서 버티기’에서 ‘사막을 건너기'로?

 

 

시지프는 자신이 밀어 올린 바위가 순식간에 굴러 떨어졌을 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또한 헛된 희망을 갖고 신들에게 애원하지도 않고 다시 그것을 끌어올리려고 계곡 아래로 묵묵히 걸어 내려갑니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뮈는 이러한 시지프는 자신의 형벌과 그 형벌을 준 신에게  반항하는 것이며 그 ‘반항’을 통해 승리했다고 해석합니다.

 

반항이라면 몰라도 웬 승리냐고요? 한번 생각해 보지요! 신들이 시지프에게 준 형벌은 무의미한 노동을 견디어야 하는 삶, 곧 ‘사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지프는 이 무의미한 삶에 스스로 ‘반항’이라는 의미를 주지요. 그럼으로써 스스로 그 형벌에서 이미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전능한 신들이라 하더라도 이렇듯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주는 자의 삶을 또 다시 무의미하게 할 방법은 더 이상 없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카뮈가 말하는 ‘사막에서 버티기’란 무의미한 삶에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또한 헛된 희망을 가지고 신들에게 기도하지도 않고 무의미한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주며 묵묵히 사는 것 곧 ‘반항’하는 것이지요.  

 

헌데 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서영은이 개발한 방법은 여기에서 한 걸음 나갑니다. 그런데 그 걸음걸이가 상당히 흥미로우며 예사롭지 않지요. 서영은은 주인공이 사는 동네의 물웅덩이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한 노인을 통해 한국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그 기묘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버티기’에서 ‘건너기’로 말이지요.

 

노인은 주택가 공터에서 파라솔을 펴놓고 뽑기를 팝니다. 헌데 파라솔 밑은 비워놓고 언제나 쓰레기더미와 물웅덩이 속을 헤치며 뭔가를 열심히 찾지요. 그러다 동네꼬마가 뽑기를 하러 오면 그제야 파라솔 밑으로 돌아갑니다. 주인공은 이 노인에게 “뭔가 강한 지남철에 이끌리듯이” 빠져들어 가지요. 그리고는 차츰 이 노인에 대해 알아갑니다.

 

노인이 찾고 있는 것은 아들이 월남전에서 받은 훈장이었습니다. 노인은 아들이 어려서부터 힘이 센 장사였고 공부도 잘해 중, 고등학교를 모두 우등생으로 졸업했다고 합니다. 월남전에서도 커다란 공을 세워 훈장을 탔는데, 전사했다고도 하지요. 그래서 노인은 아들이 남긴 훈장을 늘 품속에 지니고 다니다가 동네 꼬마 녀석에게 보자기를 꺼내주었는데 그 녀석이 그 귀한 훈장을 그만 잃어버렸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는 것이라지요.

 

이 말을 들은 주인공은 한 가지 특별한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이 탄 훈장을 물웅덩이에 던져놓았다가 마치 노인이 잃어버린 훈장을 찾은 것처럼 건네주기로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그 갸륵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요. 웅덩이와 쓰레기더미를 한참 뒤지는 척하다, 전날 물웅덩이 속에 숨겨놓은 훈장을 꺼내들고 노인에게 자랑스럽게 외칩니다. “뭔가 비슷한 걸 찾은 것 같습니다. 이것 보세요!” “찾으시던 게 바로 이거지요. 네? 맞습니까?”

 

그런데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지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척 다그치는 주인공에게 노인은 노여움과 차가운 경멸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대답합니다. “바보 같으니라구!” 그리고는 획 돌아서 가버리지요.

 

그 후 주인공은 할아버지를 잘 아는 꼬마에게서 노인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됩니다. 노인이 아들의 훈장을 꼬마에게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웅덩이 속에 빠트렸다는 것, 손녀딸이 노인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기르고 있는 개도 아들이 키우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버린 것을 주워 기른다는 것 등을 말입니다. 그동안 노인으로부터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주인공은 비로소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는 생각합니다.

 

“… 노인은 죄다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냉혹하게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덮고 있는 허망과 무의미와 그 밖의 모든 것을. 저만큼 노인이 짐을 챙겨 공터를 떠나려는 것이 보인다.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어디선가 다시 시작하겠지. 나는 정말 바보였다.”            

 

여기에서 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은 끝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는 정말 바보였다.”라고 탄식할 만큼 주인공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나는 정말 바보였다.”라는 탄식은 동시에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는 감탄을 뜻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주인공이 노인을 통해 그제야 깨달은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에 서영은이 말하는 사막을 건너는 비법이 들어있는 겁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서영은의 비법과 같은 종류의 사막을 건너는 비법을 보여주는 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폴란드 출신 작가 유레크 베커의 『거짓말쟁이 야콥』(1969)이지요. 프랑크 바이어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1974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받은 이 작품은 1940년대 유대인 거주지역(ghetto)인 로츠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독일군은 로츠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4평방킬로미터 넓이의 거주지역에 몰아넣고, 외부세계와 완전 차단시킵니다. 신문, 책, 라디오 심지어는 시계마저도 압수하고 재산권 행사도 금지시켰지요. 그러니 아무런 희망도 보람도 없이 아우슈비츠나 헤우무노 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까지 단지 독일이 꿈꾸는 제3제국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로 봉사해야만 하는 거주지역 유대인들의 삶은 ‘시지프의 형벌’처럼 고통스럽고도 무의미했지요. 그들은 나치독일군이 만든 인위적 사막에 갇힌 것입니다.

그들 중 야콥 하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령부 주위에서 우연히 러시아군대가 400킬로미터 밖 인근까지 진격해왔다는 뉴스를 듣게 되지요. 그리고 생각합니다. “기대를 걸 만하다.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희망을 버린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나에게 라디오가 한 대 있다.”라고 거짓말을 하지요.

 

이 말이 퍼지면서 동료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는 매일매일 거짓 뉴스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다 스스로 불안해진 야콥이 어느 때 한 친구에게 사실을 털어놓지요. 자신은 라디오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래도 사람들이 자기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친구가 자살하지요. 그러자 야콥은 자신이 하는 1그램의 거짓이 1톤의 희망을 만들어낸다는 것, 곧 수많은 동료들을 사막을 건너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서영은의 「사막을 건너는 법」에서 노인은 알고 있었지만 주인공이 몰랐던 것, 곧 사막을 건너는 비법이지요.

 

노인이 아들의 훈장을 꼬마에게 빌려주었더니 물웅덩이 속에 빠트려 잃어버렸다고 한 것이

나 손녀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 것, 그리고 기르고 있는 개가 아들이 키우던 것이라고 한 것, 이 모두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노인에게는 그것이 사막을 건너는 법이었고, 스스로에게 하는 야콥의 거짓말이었지요.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서영은이 말하는 사막을 건너는 비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도 가끔은 사막 한가운데 서 있다고 느끼시나요? 그래서 무의미하고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만일 그렇다면 한번 스스로에게 거짓말해 보시죠. 그리고 새해부터는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살아보시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 빅토르 프랭클(V. E. Frankl)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설사 해방군이 오지 않더라도 마치 오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거짓말했던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해서 하는 말입니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라도 
                               삶에는 의미가 주어져야 한다.”   

                                                          – 헨리 밀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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