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민들레문학상 우수상_수필]천호동 연가

 

[제3회 민들레문학상 우수상_수필 ]

 

 

천호동 연가(戀歌)

 

 

 

이규원

 

 

 

 

    서울과 경기도 하남시 사이에 위치한 천호동은 이름 그대로 천호(千戶)-집이 천 호에 불과한 동네라는 뜻으로 지어졌지만,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70년대 중반 무렵에도 이미 천 호를 훨씬 넘는 동네였다. 그럼에도 변두리 동네의 허름한 구석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낮은 주택들이 이어진 골목길을 지나노라면 철커덕철커덕 요꼬를 짜는 가정집 공장이 수두룩했고, 곳곳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집들이 길게 이어진 기차집의 지붕은 칙칙한 짙은 색깔의 천막으로 덮여 있었다. 기차집 앞에는 공동수도가 있어 늘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으며, 여기에는 어김없이 공중변소가 있어 천호동의 변두리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충청도 시골뜨기인 내 눈에는 모두가 정겨웠다.
    버스를 타고 지나며 보는 화려한 고층빌딩 군락을 보면 그곳에 사는 이들은 어디서 밥을 해서 먹는지 궁금했고, 모두 굶주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일었다.
    크고 높은 빌딩들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밥도 쌀도 라면을 파는 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천호동은 눈만 돌리면 국수집, 호떡집, 쌀집, 구멍가게가 자리한 곳으로 사람들이 깃들어 살 안심이 되는 곳으로 보였다. 시골뜨기다운 근심걱정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15년을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미 천호동을 떠난 지 오래건만, 마음이 심란한 날에는 천호동 골목골목을 걸으며 옛 추억을 곱씹으며 거칠어진 마음을 진정시키곤 한다.
    거기엔 소녀인 내가, 청춘의 내가 퇴적층에 간직된 고생대의 화석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호동을 찾는 일은 청춘의 나를 찾아가는 시간여행인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여기서 공장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 8시에서 밤 8시까지 일하는 곳으로, 셋째 다섯째 일요일 한 달에 두 번 쉬는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수요가 급상승하는 명절 무렵이나 겨울 초입에는 어김없이 밤 10시까지 야간작업을 해야 했다.
    당시 열네댓 살 소녀들인 우리들이 먹는 점심은 근처 논밭 언저리에 천막을 치고 가게를 낸 호떡집에서 호떡 두세 개를 사먹는 정도였다. 늘 허기를 채우지 못하는 생활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때는 경제가 성장하던 시절이라 내수도 수출도 하루하루 늘어났다. 달마다 월급날이면 월급이 나왔고, 우리들은 그 돈의 반을 고향집으로 보내 동생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다.
    한강도 살아 있었다고 할까.
    지금처럼 정비되지 않았던 한강변은 넓은 백사장이 곳곳에 펼쳐져 있어, 한여름이면 솥단지를 들고 나가 걸어 놓고 라면을 끓여먹으며 물놀이를 하던 장소였다.
    그때 우리들이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월세방을 전세방으로 옮겨가는, 봉지쌀로 사먹는 게 아닌 한 가마니로 사서 먹는 일이었으며, 김장독 가득 김치를 담아 놓고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정도였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졌다!!
    오히려 넘치게, 이루어진 게 좀 불안할 정도로.

 

    그게 마였을까. 우리가 이룬 꿈은, 우리들보다 앞서 더 높은 꿈을 이룬 이들에 의해 늘 빛이 바랬다. 우리들이 노동으로 이룬 삶은 어느 순간 미련곰탱이들이나 걷는 답답한 인생이라는 느낌을 안겨 주며 굶주리던 시절보다 더 쓰라린 기분을 안겨 주었다. 이런 기분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부가가치가 균형 잡히게 자리 잡지 못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공장이 쉬는 일요일은 늘 무언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날들이었다.
    서울살이에 익숙해지자,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버스여행을 하거나,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니며 농촌에만 익숙했던 생활에 또 다른 도시의 다양한 삶을 알아 가는 날들이었다.
    날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던 중, 새로움의 백미가 열렸다.
    한 달에 두 번 일요일마다 고참 미싱사 언니의 손에 이끌려 나는 천호동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성당은 뭐랄까, 세상을 훌쩍 넘어버리는, 뭐라 감당키 어려운 복잡한 심정을 불러 왔다. 하얀 석고로 만들어진 마리아상이 그러했고, 색유리 속의 기하학적 문양이 빛을 받아들여 물들이는 색채와 고요가 그러했다.

 

    당시 장갑공장의 시다로 일하던 내가, 실밥을 따고 일감을 가져오고 완성된 장갑을 내보내는 등, 감당해야 하는 미싱이 두 대였는데, 하나는 장갑의 엄지 부분을 한 번 박아내는 미싱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갑을 마무리하는 박음질을 하는 고참 언니의 미싱이었다. 이 마무리 고참 언니가 나를 성당에 데려간 분인데, 몸이 불편한 곱추였다. 이십대 후반이었던 언니는 그 공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같이 시다로 미싱을 배워 미싱에 오르며 일을 시작한 이들이 결혼을 하거나 독립해서 하청업체를 만들어 이른바 자기 사업을 하는 나이에, 언니는 공장에 남은, 말 그대로 고참 언니였다. 그 시절 그 공장에 다니던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그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공장 생활이, 이십대 후반에 이르면 근 15년을 일한 셈이니, 뭔가 도약을 해야만 하는 나이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하다.
    고참 언니는 뭔가 자신의 인생을 변신해야 한다는 무게에 짓눌렸던 것일까.
    아무튼 언니는 쉬는 일요일마다 나를 불러내 같이 천호동 성당에서 보냈다.
    넓은 방을 얻어 미싱을 서너 대 놓고 일감을 받아다 하는 하청업체를 여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닌 뭔가 비밀스러운 미래를 열어낼 셈인지, 언니는 그 시절 성당 다니는 일에 열중했다. 더불어 나까지.
    천호동 성당은 그 당시에도 지금의 자리에 있었다. 높은 언덕배기에 붉은 벽돌로 크고 넓게 들어앉은 데다, 뒤로는 구릉으로 이어진 뒷동산이 있었다. 언덕배기에는 해마다 개나리가 늘어져 노랗게 피었고, 넓은 마당 한편에는 수녀원이 있었고 수녀원 앞에는 밭이 있어, 여름 채소들이 싱그럽게 자랐다.
    그런데 늘 성당에 갔을 뿐 한 번도 미사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저 뒷동산을 오르며 고참 언니가 어디서 들은 성경 이야기를 해주거나, 수녀님들이 채소밭 옆 펌프 물에서 채소를 씻으면, 언니는 가만히 옆으로 가서 채소를 씻어주었고, 나는 펌프 물을 퍼주는 역할을 했을 뿐. 하얀 미사포를 쓰고 기도문을 외우는 미사에 참석할 생각은 못 했다. 돌아보니, 그 언니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참 언니가 수녀님들을 도우며 채소를 씻으며 하는 얘기도 한 마디뿐이었다.
    “수녀원에 가려면 고등학교 졸업해야 하지요?”
    그에 대한 응답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물음만은 지금도 굵은 대문자로 남아 있다. 고참 언니는 초졸, 당시의 표현으로 국졸이었다.
    언니가 긍정적인 답을 듣지는 못했던 것 같다. 차츰 우리의 성당 나들이는 막을 내렸으니까. 아마도 수녀원 입소로 변화를 꾀하려던 언니의 소망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조차 공순이에게는 의붓아버지 정도의 느낌이었던가.
    언니와 나는 깨끗이 차려입고 엄격한 격식에 맞춰 고요히 기도하는 이들 속으로 끼어드는 일을 분수에 넘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이들이었고 우리들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로 보였던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이들의 아버지였지, 공순이로 겨우 국졸에 불과한 우리들의 아버지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아직은 노동력만으로 삶을 일군 이들이 대우받는 곳은 아니다. 다만 조금씩 노동의 가치가 물려받은 재산보다 더 귀하다는 것만은 공감하는 데서 우리의 미래는 나아질 것을 믿는다. 노동이 돈을 버는 사회가 재산이 돈을 버는 세상보다 더 존중받아야만 일할 기운이 나는 법 아닐까.
    그 재산도 처음 형성되었을 때는 물론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재산에 덧붙는 부가가치가 상식을 넘어 부를 형성하는 일이 많았기에 노동력만으로 살아온 이들은 상실감에 빠지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인생은 살 필요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람마다 성격이 빚어내는 어떤 패턴, 길, 경향이 있어 한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일정한 노선이 있다는 기분은 든다.

 

    내가 천호동을 찾는 날은, 옛 추억을 회상하며 추억 속의 나를, 미싱사 언니를 불러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다. 그런데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 그중에 가장 부족했던 건 상대에 대한 이해였다. 공장에 다니는 소녀는 여중, 여고생들을 감히 친구라고 부르지 못했고, 수녀님들은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성당은 늘 싸늘한 기분이 들었던 걸 기억하면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이 극단적인 둘로, 화합할 수 없는 이질적인 부분으로 보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차츰 나이 들며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돌아보며 후회하는 건 내 경험이나 가치관만으로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데 머물렀지, 결코 그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사람이 저지르는 오류 중 대부분은 상대방을 배제하는 데서 일어난다. 다행이라면, 나이 들며 이러한 오류가 이해에 이르는 길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흔히들 젊어서는 진보적이고 좌파적 사유를 하는 게 열정을 지닌 젊은이의 마땅한 처신이고 나이 들어서는 보수적 처신을 하는 게 철든 어른다운 처신이라 여긴다.
    그러나 나는 나이 들며 점점 진보적 입장으로 변하는 나를 느낀다. 그렇게 변하는 이유는, 살아 보니…… 삶은 너무 짧고 모두의 길이 애달픈 여정이라는 성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나아가는 길은 불안을 품고 가는 길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길을 청춘의 날보다 더 많이 생각한다. 나이 들며, 우여곡절을 겪으며, 생명에 대한 연민이 생기며 드는 생각이다.

 

    서울의 동부, 경기도 서부의 경계선인 천호동, 그곳에서 나는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서른 살 무렵까지 살았다. 천호동은, 천호동에서 살던 내 청춘은 비유하자면, 많이 사랑했지만, 사랑으로 감싸지 못해 헤어진 연인을 떠오르게 한다.
    미련이 먼저 나고 지혜는 나중에 나온다는 옛말처럼, 우리는 꿈을 잃어버리고 사랑이 떠나간 후에야 그 사랑을 완성할 여유를 얻는다. ……아쉽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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