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노트] 삼십 년 동안, 이 펜pen이라니.

 

[ 편집위원 노트 ]

 

 

삼십 년 동안, 이 펜pen이라니.

 

 

이영주(시인)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베이지색 양복을 맵시 있게 차려 입고 아버지가 은색 슈트케이스를 들고 손을 흔들던 모습. 나는 어머니 품에 안긴 채 아파트 입구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를 안은 두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어머니는 조금씩 눈물을 훔친다. 아버지는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사각의 슈트케이스 위로 뜨거운 햇빛이 떨어진다. 섬광 같은 빛이 순간 내 눈을 찌른다. 어머니는 왜 울고 있지?

 

    아버지는 사막에서 찍은 사진들을 우편으로 부쳐왔다. 검게 그을린 젊은 사내가 흰 이를 드러내며 건강한 미소를 띠고 있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서. 이상하게 사진 속의 사내는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막에 있지만 이국을 떠도는 여행자의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사는 종족의 얼굴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어딘가에 유배된 사람. 하지만 그곳에서 씩씩하게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
    누구인가, 보다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 더 궁금해지는 존재. 그래서 누구인지는 결국 알 수 없는. 그렇게 규정할 수 없는 쓸쓸함이 서려 있고, 그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놀이터 정글짐에 올라타며 야생 고양이처럼 놀던 어느 날, 슈트케이스를 들고 베이지색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얼굴보다 섬광 같은 슈트케이스의 은빛을 다시 떠올렸다.
    아빠!
    한달음에 달려가 순식간에 아버지 품에 안기자 뜨겁고 습한, 강한 향이 훅 끼쳐들었다. 사막에서 가져온 냄새인가? 모래의 냄새인가? 나는 이질적인 향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는 나의 아버지인데…… 낯설고 더없이 먼 곳처럼 비실재적이었다.
    천일야화의 고향에서 아버지가 돌아왔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노동자로 지내다 돌아온 아버지. 슈트케이스 안에는 선물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것저것 신기한 물건들 중 아직까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독일제 연필 세트. 연필 세트에는 긴 지우개도 들어 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연필심이 있는 부분에 지우개 고무가 달려 있고 끝부분에는 빗자루 같은 것이 달려 있는.
    잘못 쓴 글씨를 지우고, 가루는 끝부분에 붙은 솔로 쓸어낸다는 이 첨단 기능은 나를 흥분시켰다. 지우개 고무가 닳을까, 솔이 망가질까 나는 전전긍긍하며 이 진기한 물건을 조심스럽게 갖고 놀았다.

 

    알림장 노트에는 문장이 될 수도 없는 파편화된 단어들이 쓰였다가 지워졌다.
    단어를 지우기 위해 단어가 쓰이고, 지워진 가루들을 쓸어내기 위해 단어가 쓰였다.
    단어가 지워지면 나는 다시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지우기 위해 떠올리는 단어들은 나의 새로운 비밀놀이가 되었다.

 

    나는 삼십 년 가까이 이 연필 세트를 가지고 있다. 이곳저곳 수없이 이사를 다니며 공간을 옮겼지만, 이 연필과 지우개는 그때의 모습 그대로 서랍 안에 담겨 있다. 나는 남은 두 통의 세트를 사용하지 않고 가끔씩 꺼내어 쓰다듬어 보곤 한다.
    사물의 촉감.
    모든 향이 사라지고, 내 안에서만 번져 가는 아주 오래된 이국의 향이 담긴.
    사물의 부드러움.

 

    중동에서 돌아올 때는 독일제 연필 세트를 사오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나무펜촉과 펜글씨 교본을 사오고, 계몽사 문학전집 세트를 집 안에 들이면서 아버지는 내가 어떤 꿈을 꾸기를 바랐을까.
    나의 이십대에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종이밥은 절대 먹지 마라’라는 아버지의 명언(?)이다. 아버지는 노래처럼 그 명언을 반복했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책장을 찢어 뜯어먹는 괴물을 떠올렸다. 책장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허기가 지는 이상한 괴물이었다.
    괴물은 슬프고, 배고프다. 아무리 책장을 뜯어먹어도 소용없는 허기. 허기는 점점 더 심해지고 책은 점점 더 얇아지고 괴물은 점점 더 말라 가는.
    아마 아버지는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찌 되었든 책과 관련된 인생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아날로그 펜과 형태는 다르지만, 첨단의 펜을 든 《문장 웹진》 2월호가 꾸며졌습니다. 풍성합니다. 조금씩 소개되고 있는 미국의 현대시인 인터뷰는 어떠신가요? 외국 시의 현장성, 생생하게 느껴 보시면 좋겠습니다. 김언, 함성호, 최명진, 김현, 정재학, 박찬세, 황유원 시인의 아름다운 작품, 감사합니다. 또한 임현, 황현진, 이지민 소설가의 서늘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안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면 어떨까요. 에세이 테라스와 장편 연재는 새롭게 리뉴얼을 해서 선보일 예정입니다. 기대 많이 부탁드립니다.
    봄에는 꽃과 함께 황사가 오지요.^^ 무엇이든지 동전의 앞뒷면처럼 희비가 있습니다. 그 세목들은 늘 내면의 ‘펜’에 의해서 기록됩니다. 펜으로 진심을 담아내는 것. 인간의 유일한 희망 같은 것일까요.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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