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일 픽션에세이]삼십대 그리고 작별이란 말

 

[김중일 픽션에세이]

 

 


삼십대 그리고 작별이란 말

 

 

 

김중일

 

 

 

 

    변변한 작별도 없이 삼십대가 가고 있다. 작별 위에 누워 작별을 덮고 작별을 먹고 작별을 마시며 작별을 타고 작별을 지나 작별에 도착하여 작별을 열고 작별 속으로 들어가 작별의 한가운데에서 매 순간 작별의 시간을 살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나의 삼십대. 나는 곧 삼십대를 떠나야 한다. 나는 내가 지나온 시간의 의미를 정리할 능력이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부끄러움을 부끄러움 없이 모조리 고백하고 기록한다면 조금은 가능하다. 모든 고백의 문장들은 의미가 있다. 문장의 끝에는 마침표가 찍히기 마련이다. 내 삼십대를 고백하는 문장의 마침표로 나는 ‘작별’을 찍고 싶다. 물론 작별 이후에도 문장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문장 역시 무엇의 기록이든 한 점 작별로 모일 것이다. 나는 의도치 않게 「삼십대」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 있다. 그저 밤마다 조용히 시간을 더듬던 손가락이 알아서 쓴 시. 이별의 직전까지, 작별의 시간을 기록한 시다.

 

나뭇잎은 나무의 눈꼬리에 매달린 채
여름내 녹슬어 가는 눈물이야
나무는 공중이라는 텅 빈 눈동자로
늘 너를 지켜봐
어제의 눈과 오늘의 눈과 내일의 눈으로
한꺼번에 녹슨 눈물 쏟고 있는 나무가
나무의 말로 전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과 너와 나의 불행이
평등해지길 기대하지 마라
그러나 끝끝내 평등해질 때까지
지금 이 시각의 날씨를 따라
얼음 냄새 진동하는 깊은 숲으로
왈칵 비처럼 쏟아져라

 

― 「삼십대」 중에서

 

    누구든 삼십대를 맞는 마음은 특별하다. 몇몇은 청춘이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십대에서 이십대가 되는 시간을 비롯해 생의 절기마다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하지만 ‘청춘’이라는 이름만큼은 삼십대에게만 주고 싶다.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막 건너가는 그 순간이 생에 거의 유일하게 주어지는 청춘의 환절기라고 생각한다. 청춘은 갔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가 바로 청춘이라는 말은 허언이다. 반면 청춘을 인지하지 못하는 청춘 또한 반쪽짜리다. 많은 사람들이 삼십대가 되어 새삼 청춘을 발견하고 비로소 청춘을 산다. 온전한 청춘은 빠르게 소멸되는 ‘청춘’의 속성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청춘’을 의심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이다. 삼십대의 몸은 여전히 젊음 속에 있으며 생을 통틀어 청춘이란 관념과 가장 치열하게 응전한다는 점에서 온전한 청춘의 시간이다.

 

    내게도 삼십대는 청춘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작별의 시간이었으므로 청춘의 시간이었다. 나 역시 삼십대를 맞으며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의 노랫말에 공감했지만, 삼십대를 보내며 그 노랫말의 단어 하나만 살짝 바꿔 주고 싶다. 요컨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속의 ‘이별’을 ‘작별’로 바꿔 주고 싶다. 나는 우리가 이별이라고 불렀던 거의 모든 것들이 사실 작별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별과 작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그만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작별을 이별까지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과정 없는 결과처럼, 작별 없는 이별로 인해 우리는 불행해진다. 작별은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며, 깊이 인사하는 것이고, 이별의 문이 열리기까지 저마다 한 생(生)을 창작한 것이다. 離(떠날 리) 자를 쓰는 이별과 달리 작별이 作(지을 작) 자를 쓰는 이유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이별이 아닌 작별의 시간 속에 있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한, 사람은 이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작별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의 전부다.
    생(生)이라는 말. 오늘 밤이 지상으로 엎질러지듯 매일 내게 너무 많이 쏟아지는 말. 나를 침묵하게 하는 말. ‘작별’은 거의 유일하게 ‘생’에 빗댈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별은 끝까지 차오른 생이 급기야 죽음 이후의 망각 쪽으로 흘러넘치는 것이라면, 작별은 이별 직전까지 한 생을 서서히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 밖으로부터, 이별은 반드시 온다.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색색의 작별이라는 옷이다. 이별이 생과 생을 잇는 정류장이라면, 작별은 정류장 사이를 잇는 시간의 길이다.
    작별이란 말은 오늘밤을 정점으로 검게 스러지기 시작할 꽃의 이름이다. 작별은 지금부터 스러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최대한 활짝 핀 꽃의 이름이다. 작별이란 꽃은 생을 가장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뜨거운 이마에 열꽃처럼 피어난다. 확실한 건 작별이 잦은 사람은 열정적인 사람이다. 생을 몇 배의 시간으로 사는 사람이다. 나는 시간 냄새를 풍기는 그런 사람이 좋다. 가령 근래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는 시간 냄새가 난다. 오래 슬퍼 말라고, 네가 살아 있는 한 너는 너의 가족과 함께 작별의 시간을, 그러니까 지금의 생을 ‘여전히’ 살고 있으며 아직 이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고백하고 싶다. 허락한다면 나는 너를 내 친구로 삼고 싶고, 내 애인으로 끌어안고 밤을 건너고 싶다고. 네 모든 울먹임과 속삭임을 한 움큼의 모래처럼 호주머니에 넣어오고 싶다고. 물론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 달빛처럼 반짝이는 그것을 지금 이 글을 읽는 네게 보여주려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다 흘러내리겠지만.

 

    작별이란 말이 좋다. 작별은 뚜렷한 계절이 아니며 계절을 잇는 환절기다.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5월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을과 겨울 사이 11월 같다. 작별이란 말에는 이별이란 말과 다른 심박동이 있다. ‘작별하다’는 말은 마치 작사 혹은 작곡이란 말처럼 이별을 창작하는 것이다. 그 말에는 죽음이 이별을 싣고 떠날 리듬과 노랫말을 밤새 고심하는 진심어린 창작의 시간이 녹아 있다. 혹시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작별의 시간을 훌륭하게 보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작별의 시간은 선물이다. 작별의 시간은 내가 네게,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다.
    작별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단언하건대 행운이다. 살면서 우리는 작별의 시간을 가질 기회조차 없이 이별을 떠안아야 할 때가 있다. 작별의 시간을 통해 삶의 근력을 키우지 못한 상태에서 안아야 하는 이별은 태산만큼 예측 못할 무게로 덮쳐온다.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기 마련이다. 세월호 사건이 진정 아픈 것은 유족들이 작별의 시간을 한순간에 일방적으로 빼앗겼기 때문이다. 속수무책 뺏기기에는 작별의 시간은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작별의 상실은 치명적인 일이다. 유족들은 이별을 먼저 떠안은 채 작별의 시간을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은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과 같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작별은 시작된다. 나무나 꽃들 같은 식물들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작은 작별의 시간을 선물한다. 봄의 꽃은 작별 이후 더 무성한 나뭇잎을 피우고, 가을의 나무는 작별 이후 눈꽃을 가득 매단 넓은 공중을 낙엽 대신 매단다.

 

    작별이란 이별까지의 생의 전 과정이다. 누가 지금 이 순간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든 그들은 작별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작별은 꽃처럼 노랗고 잎처럼 푸르고 낙엽처럼 붉으며 눈처럼 새하얗다. 우리는 지금 작별의 계절을 살고 있을 뿐이다. 이별을 미리 걱정할 겨를이 없다. 작별로 인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별을 얻지 못함으로 인해, 즉 작별의 상실로 인해 우리는 정말 불행해진다. 그러니 온힘을 다해 작별해야 한다. 나는 지금껏 작별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어쩌면 작별에는 그런 성분이 있는 것도 같다. 늘 최선을 다하지 못한 느낌이 들게 하는 성분. 작별만큼 삶의 냄새가 진하게 밴 것이 있을까. 나의 작별은 이별로 향하며 네게 건네는 뜨거운 ‘인사’다.

 

 

 

작가소개 / 김중일(시인)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가 있음.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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