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선정작 리뷰] 참을 수 없는 무의미의 축제

 

[2014년도 차세대 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리뷰 ]

 

 

참을 수 없는 무의미의 축제

― 조영한, 「심사」

 

 

양윤의(문학평론가)

 

 

 

 

 

    조영한의 「심사」는 노벨문학상 심사 현장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다. 스웨덴 한림원에 속한 아홉 명의 심사위원들이 설전을 벌인다. 스웨덴인 의장과 일본인 고모리, 영국인 앳킨슨, 중국인 탄샤오, 프랑스인 클라비에, 독일인 한스,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보이는 시먼스, 캐나다인 존스 그리고 처음 이 심사에 참여하는 한국인 김이 그 구성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무력하고 욕심 많은 노인들일 뿐이다. 회의는 엄밀하고 예의바르게 진행되지 못하고 권위를 내세운 고성이 오간다.
    이들이 보여주는 논쟁적인 대화는 문학이 관습과 제도로 변할 때 발생하는 매너리즘을 보여준다. 문학은 영감과 감응이 우선시되는 장르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는 것은 타성과 권위의식이 밀어올린 오만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문학성보다는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한 작가의 성취보다는 문학상의 위상을 우선시한다. 심사자로 참여하고는 있으나 관찰자에 속해 있는 김은 한국의 시인 오를 떠올린다. 오 시인은 몇 년째 수상후보로 거론되어 온 민중 시인이다. 그는 문학상 후보로 회자되는 것에 대한 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긴 시간의 논쟁 끝에 결국 수상자는 고령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로 결정된다. 쿤데라를 강하게 추천한 의장은 “얼빠진 도박사 놈들의 예상을 따돌릴 만한 결과”를 얻었다는 데 크게 만족한다. 문학상 심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은 우연히 오디션 프로그램인 ‘브리티시 갓 탤런트’ 본선 장면을 본다. 문학상 심사위원들만큼 나이 든 심사위원의 엄숙한 표정과 낙방하여 눈물 흘리는 도전자. 어쩌면 모든 심사 현장은 통속적인 쇼의 일부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때 뜻밖의 상황이 발생한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하던가요?”
    “글쎄요…… 어떤 이유든지 간에 자기를 찾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뭐라더라…… 남은 생을 식물처럼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김이 식물이라는 말을 되뇌는 동안 노인들은 의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 마음대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 조영한, 「심사」, 11쪽

 

    이 소설의 반전은 바로 여기 있다. 쿤데라가 여생을 “식물처럼 살고 싶다”고 선언하면서 상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쿤데라의 수상 거부는 앞서 있었던 논쟁을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젊은 작가 조영한이 저명한 문학상이 요구하는 엄숙주의를 조롱하고자 한 것일까? 이미 문학상은 온라인 도박 사이트(래드브록스Ladbrokes)의 베팅을 위한 유희거리가 되어 있지 않은가. 오히려 이 소설은 쿤데라에 대한 오마주로 읽힌다. 줄곧 무심한 관찰자를 자처하던 김이 마지막에서야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라고 발언한 것의 의미에 주목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세속적인 인정으로부터 초연할 뿐 아니라, 삶의 ‘무의미’에 주목한 쿤데라의 소설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노벨상 선정 기간에 맞춰서 진행된 불꽃 축제는 그 무의미의 아이러니를 증폭시킨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문학상의 가벼움이자, 무의미의 축제 그 자체가 아닌가.
    여기서 잠시 쿤데라의 근작 『무의미의 축제』(방미경 옮김, 민음사, 2014)의 일부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보다시피 여기 공연이 아주 대단해요. 저 두 사람, 완벽하잖아요. 틀림없이 출연 계약이 없는 배우들일 거예요. 실업자들. 저거 봐요! 저 사람들은 연극 무대조차 없어요. 공원 산책로면 충분하죠. 살려고 발버둥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자기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상기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낮춰 덧붙인다. “나도 싸우고 있지요.”
    “알아요, 그리고 그렇게 담대한 게 놀라워요.” 라몽이 말한다. 그다음, 불행에 빠진 그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어서 덧붙인다.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에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어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서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바로 당신 입으로, 완벽한, 그리고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도 모른 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들이마셔 봐요,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고,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146-147쪽.

 

    다르델로와 라몽의 대화다. 다르델로는 자신이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고 라몽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말은 다르델로에게 알 수 없는 유쾌함의 원천이 된다.(20쪽) 그런데 라몽에게서 의외의 말을 듣게 된다. 하찮은 것의 가치에 대해서.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유머와 농담이 중요한 것은, 쿤데라가 여러 차례 반복해 왔듯이,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 때문이다.(『무의미의 축제』, 147쪽) 라몽의 말은 (쿤데라의 육성을 상기하게 만드는) 진지한 조언이지만, 무의미한 격려일 수도 있다. 다르델로의 병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담과 거짓말의 차이처럼,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의미의 틈새 그 자체다.
    조영한의 소설로 돌아와 보자. 심사위원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중대한 결정을 내렸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위의 순간은 이들이 평생 동안 헌신해 온 문학의 의미나 문학상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이들의 대화를 중지시킨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노년의 삶에 저 무의미한 중지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 그저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라고 말할 정도. 물론 그것이 저들(노인들)을 위한 중지만은 아닐 것이다. 저 중지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거라고 믿어 온 안전해 보이는 삶에 구멍을 낸다.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배꼽이다. 그 구멍은 일회적인 결락이나 예외적인 결여가 아니다. 그런 구멍이야말로 축제의 정점을 구성하고 있으며, 생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만나는 고양된 무의미다. 조영한은 등단작 「무너진 식탁」(《경향신문》 신춘문예, 2013)에서 삐거덕거리는 식탁에 삶을 올려놓고 관찰했다. 이 소설에서도 그는 무의미의 축제 속에서 생의 고양된 한순간을 보여준다.

 

 

 

작가소개 / 양윤의(문학평론가)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 시작.
2013년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문학동네)를 출간

 

 

   《문장웹진 2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