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선정작 리뷰] 입속의 검은 시

 

[2014년도 차세대 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리뷰 ]

 

 

입속의 검은 시

― 최백규의 시 「소년들의 공화국」 외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

 

 

 

 

 

    시는 참으로 사람을 진실 되게 한다. 진실 운운하는 일이 진부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 제목을 대하는 순간부터 시인과 상관없이 나와 대면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귓전에 따라붙어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왜 그래’ 귀엣말을 하지만 손사래를 치며 얼른 자기 세계로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 최백규의 시는 당혹스럽다. ‘소년공화국, 드림 월드, 피터 팬, 천국, 소풍’ 등의 기표들이 실어 나를 것만 같은 환상과 모험의 세계는 자못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은유의 기의들은 자꾸 미끄러져 현실로 곤두박질친다. 알록달록 눈부신 포장지를 벗겨 보니 상자 안에는 축축하게 젖은 과자들로 가득하다. 꿈꿨던 달콤한 미각을 쓰디쓴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힘없이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 같은 시의 파편들을 몇 번씩이나 오므려 쓸어 담아 올려 한 움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로테스크하다. 최백규의 시는 유기(遺棄)된 자의 시일까.
    시 「소년들의 공화국」을 읽으며 2014년 4월 16일, 그날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시는 이렇게 현실을 찾아가고 있다. 사람도 신도 버린 아이들의 최후를 끔찍하게 안고 살아가는 남은 자들의 쓸쓸함. 그런데 정작 죽음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버려진 처지를 헤아려 보지 못했다는 자책이 밀려온다. ‘여전히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며 살게 된 시인과 나의 비극 앞에 아프다. 그리고 모두에게 열려진 죽음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시 「엔드 오브 드림 월드」 역시 기아(棄兒)의 이미지로 채색돼 있다. 죽음의 퍼레이드는 멈추지 않고 아이들을 사지로 이끌고 간다. 이 유기 모티프는 ‘오이디푸스 시나리오’를 연상시킨다.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보면 시인은 거울 단계에 있다. 엄마와의 동일시를 꿈꾸며 통합된 자기 전체를 보고자 한다. 그런데 지금 엄마와 분리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나의 등을 따뜻하게 안아 줄 사람’은 그 존재가 불확실하다. 이 안온함의 상징계는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최백규의 시는 입사식의 행로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성장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만 있으면 될까.
    ‘기아’ 모티프는 고대 건국 설화와 영웅 신화 이야기의 씨앗이다. 영웅들의 통과제의적 내용들을 풀어 가기도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겪는 인생행로의 과정이기도 하다. 최백규의 시에 무수히 등장하는 죽음도 현실과 동일시하기에는 버거운 상징적 의미일지도 모른다. 시인 또한 현실과 거리두기를 애초에 도모했을 수도 있다. ‘죽음’을 통해 ‘유기’의 과정은 통과의례를 거쳐 한 사람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삶의 정연한 패턴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최백규의 시가 펼치는 버려진 아이들의 영웅 신화는 곧 어린 시인이 소외와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여 번듯한 자기만의 시 영역을 구축하리라 상상하게 하는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돌연 시 「피터 팬은 죽었다」에서 시인의 통과의례는 중단되고 만다. 종래 피터 팬을 호명하는 일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영국 사회의 타락을 배경으로 동심에서 추방당한 어른들을 영원한 세계로 초대하려 했던 제임스 배리의 뜻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니면 관습적인 사회에서 어른 역할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반항아로서 피터 팬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시인은 오히려 피턴 팬의 반복적 영원성을 거부한다. 완전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죽음이 재생의 의미로 상징화되지 않는다면 죽음은 비극적 현실의 문제로 다가서며 인간 실존의 차원으로 소급하게 된다.
    이제 다시 최백규의 시는 난해한 지경으로 떨어져 버렸다. 시 「천국으로 떠나는 소풍」을 읽으며 우선 김춘수의 ‘천사’를 데려와 보기도 했다. 천국에 들어갈 존재는 천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닌 것 같아 되돌려 보냈다. 김춘수는 역사의 흉포한 현장으로부터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순수영혼으로 천사를 차용하였는데, 이 시 속의 소풍 가는 아이(천사)는 천국에서 떨어져 나간 존재로서 하늘의 사도도, 인간 수호자도, 예언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윤동주를 데려와 보기도 했다. 혹시 그대가 이 친구를 아느냐고 혹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철망을 경계로 좁은 곳에 있는데, 그는 넓은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네.”라 대답하여 둘 간의 차이를 적시했다. 적어도 윤동주는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넓은 곳’은 광야의 상징을 통해 시적 화자를 유기된 존재로 인식시키는 공간성을 띤다.
    이처럼 최백규의 시를 어느 한 곳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오히려 여러 문으로 길을 내고 있어 다행이다. 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화두가 있다면 ‘죽음’이 아닌가.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형도의 시를 떠올렸다. 계륵처럼 뱉지도 삼키지도 못했던 기형도의 ‘죽음’ 이미지의 다발이 최백규의 시에서도 똑같이 징그럽게 똬리 틀고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이며 두려움이자 미래에 닥칠 분명한 사건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런데 또 한편 죽음은 삶의 문제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게 하는 유일한 기제이기도 하다. 죽음을 통해 삶을 간파하려는 시도에서 기형도와 최백규는 만나고 있다. 기형도의 시에는 죽음과 함께 ‘침묵’이 따라다닌다. 그것은 침묵을 강요하는 시대적 상황의 개입일 수도 있고 잡스런 말들의 홍수로부터 벗어나려는 적극적 태도일 수도 있다.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도 또 완전히 몰입할 수도 없는 이 실존적 불안을 최백규도 앓고 있다. 너무 거창한지는 모르지만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의 선구(先驅)’라 말할 수 있다. 스스로를 죽음 앞에 버려지게 하고 어느 때든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죽음을 죽는’ 행위는 죽음에 앞서 달려 나가려는 적극적 삶의 의지다. 곧 닥칠 죽음을 앞서 죽는 사람들은 ‘좁은 공간’을 지향하지 않는다. ‘넓은 공간’에 던져진 존재이길 선택한 것이다.
    최백규의 시에 담긴 유기의 불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기형도가 시 「엄마 생각」에서 불안에 떨며 적었던 분리와 유폐의 두려움은 죽음의 공포다. 죽음은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죽음의 시간에 앞서 달려 나가 자기 실존과 만났기 때문에 그의 고유한 세계를 우리도 영원히 간직하게 되었다. 그처럼 시 「천국으로 떠나는 소풍」의 다음 구절은 최백규의 고유한 시 공간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꽃은 다 지고, 혼자 남아 울었던 마지막 소풍.” 이는 그가 미래에 직면할 죽음의 풍경이다. 그래서 앞으로 그의 시에서 빈말이나 잡담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시간은 현재의 공간 속에서 함께 거주하게 될 것이다. 과거이거나 미래이거나. 단 조건이 있다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버리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이 순간을 하이데거는 ‘결단의 눈길(der Blick der Entschlossenheit)’이라 말한다. 기형도는 죽음과 함께 동거하기는 했지만 죽음을 뱉어내지는 못했다. 그만큼 자유롭지 못했다.
    시 몇 편으로 한 시인의 미래를 점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최백규가 곁에 두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들은 대부분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삶의 간극이다. 죽음을 통과하여 성장하는 시인의 모습도 기다려지고 유기된 삶들의 얼굴을 향해 가는 시인의 따뜻한 눈길도 주문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결단하는 순간이 많았으면 한다.

 

 

 

작가소개 /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비평서 『한국문학 첫 새벽에 민중은 죽음의 강을 건넜다』, 연구서 『흉포와 와전의 상상력』, 『김종삼의 시적 상상력과 텍스트성』이 있음. 현재 리얼리스트100회원,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주간, 《거와 미》 동인.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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