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선정작 리뷰] 엎질러진 물의 절반

 

[2014년도 차세대 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리뷰 ]

 

 

엎질러진 물의 절반

― 김준현의 시 「시에스타」 외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

 

 

 

 

 

    플라톤의 말을 따라 시가 실재를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을 믿기로 하고 김준현의 시를 읽었다. 그래서 무엇을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고자 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시라고 서둘러 결론을 맺고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준현의 시는 어떤 그럴듯한 말로도 시에 담긴 이미지들의 세련됨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잘 만들어진 이미지의 감각을 공유하려면 예술 전반의 고양된 자질이 절실하다. 결국 정치한 분석과 이해를 도모하기보다는 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자는 감상의 역할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받아든 시들의 제목은 앞서 중언부언했던 변명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만큼 실재를 연상하기에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시 「시에스타」, 「시간여행자-수화-」, 「낯선 곳」, 「남미의 아이」는 잠과 시간과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이 세 층위의 징검다리를 건너 시인과 만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레비나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예술의 본질이 실재를 이미지로 대체하는 데 있기에 이미지 자체가 곧 실재와 같은 체계라는 말. 그러므로 김준현의 시에 담긴 이미지를 환상이나 환영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이미지 자체로 드러난 실재로 보고자 한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잠’은 시적 영감의 저장 공간과 같다. 일찍이 멋진 예술가 장 콕토는 잠 혹은 꿈의 상태와 깨어 있는 현실 사이를 절뚝거리며 걸었다고 말한다. 그러한 보폭의 소유자가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 비정상적이며 불구의 체계가 곧 시의 바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면의 시간은 꿈 꿀 수 없기에 시인에게 죽음과 같다. 시 「시에스타」는 불면이라고 하는 시의 불임상태와 날카롭게 대립하며 잠의 몽상에 빠져들고자 하는 시인의 곤두선 시 정신과 만나게 된다. 시적 영감의 원천으로서 잠의 속성은 물과 연관돼 있다. 시에서 볼 수 있듯 방에서 자라는 ‘웅덩이’와 성격이 변하는 ‘거울’은 모두 잠의 세계의 복사본들이다. 이 물의 공간에 몸을 담글 때 불면으로 초래되었던 죽음은 삶의 모습으로 변주된다. 문제는 낮잠이라는 백일몽의 한계상황이다. 빛과 함께 깨어 있는 잡다한 소음과 밝음 때문에 온전히 잠들 수 없고 꿈꿀 수 없는 우리 삶의 실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시인은 시간을 주재하는 존재로 자처하고 있다. 아니 시간에 지배당하지 말고 자유롭게 여행할 것을 권유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미지 속에서 정지되어 있는 시간은 죽어가는 시간,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간이다. 시 「시간여행자-수화」는 소리가 부재하는 정지된 시간의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눈빛과 입 모양과 몇 가지 손짓과 흉내로밖에 대화할 수 없는 소통의 부재가 곧 죽어가는 시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죽음의 순간에 시는 태어난다. 시인은 정지된 시간에 소리를 주입함으로써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간의 지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잠은 늘 죽음의 이미지와 연계된다. 그런데 잠은 물의 족속에 속하기에 거울의 표면처럼 유동적이다. 그래서 ‘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시간’은 새로운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시간여행자로서 시인은 정지된 시간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김준현은 침묵하는 삶의 어둠과 그림자를 그리는 것이 시 쓰는 일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강가에서 몸을 씻는 사람들과 시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과 리듬이 그의 시를 시답게 만드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때 리듬이 만드는 시적 상황은 꿈의 세계다.
    꿈을 통해서만이 현실의 통제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할 수 있기에 시인은 부단히 꿈꾸는 자로서 익명의 공간을 찾아 나서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때 만들어진 시의 리듬은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어울려 내는 불협화음이다. 이 부조화의 낯선 리듬이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시에 도취하게 이끈다. 시 「낯선 곳」에서 시인은 꿈꾸고 있지만 깨어 있다. 이 상태는 의식의 세계도 무의식의 세계도 아니다. 한 마디로 알 수 없는 낯선 공간의 익명성이 바로 시인이 선택한 존재방식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 있다. 시는 늘 자아와 세계의 불일치와 부조화를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시인이 처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항시 ‘저편’으로 가는 것이다. 분명 낯선 곳은 그런 세계다. 김준현은 그 ‘저편’을 ‘밀봉된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그 안에 담긴 ‘달팽이집, 묶인 책, 낮달, 카레, 시계’는 종속의 이미지들이다. 집은 달팽이에 딸린 부속물이며, 묶인 책은 닫혀 있어 열린 책의 처음과 끝에만 존재하며, 낮달은 태양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카레와 시계 또한 시인에게는 낯선 사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저편’의 낯설음은 ‘이쪽’의 어둠과 상처와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그것이 예술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김준현 또한 ‘이쪽’의 비와 습기와 상처와 대화하려 한다. 이 또한 물의 이미지에 속하며 잠의 공간이다. 그리고 정지된 시간의 세계다.
    시 「남미의 아이」는 저쪽의 낯선 세계이기도 하지만 이쪽의 죽어가는 세계이기도 하다. 불면의 나날은 침묵과 죽음을 잉태했다. 정체성이 모호한 주체들의 연속적 제시를 통해 이미지는 여러 갈래로 요동치고 있다. 끝나지 않을 불협화음들이 쏟아내는 리듬이 숨죽인 타자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남미의 아이는 고정된 이미지를 거부하며 ‘숨죽인 사람들’이 재생하는 순간의 경이로운 탄성(모음)처럼 직관적이며 시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김준현은 지금 시간에 귀를 대고 죽음의 시간 사이에 떠도는 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그가 엿들은 이미지들은 때론 모호하고 비정상적이며 비인간적 속성을 띠고 있다. 어쩌면 핏기 없는 시의 온도를 누군가 시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노래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레비나스에 따르면 가장 뛰어난 시인은 세계의 이미지들이 걸어 논 마술 세계 속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수수께끼로, 인유로, 암시로,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불면을 거부하며 꿈꾸는 시인은 자신이 그림자의 세계에 속해 있고 일급 시인이 되지 못하고 열등한 것처럼 보이려 하고, 실재를 일깨우는 힘이 부족한 것처럼 엄살을 떨며, 흔들림 없이 실재로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신념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물의 절반을 엎지른 것과 같다. 앞으로 이어질 김준현의 시적 행로 또한 그러했으면 한다.

 

 

 

작가소개 /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비평서 『한국문학 첫 새벽에 민중은 죽음의 강을 건넜다』, 연구서 『흉포와 와전의 상상력』, 『김종삼의 시적 상상력과 텍스트성』이 있음. 현재 리얼리스트100회원,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주간, 《거와 미》 동인.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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