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선정작 리뷰] 절망의 나라에서 절망한 젊은이들

 

[2014년도 차세대 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리뷰 ]

 

 

절망의 나라에서 절망한 젊은이들

― 조우리의 「11번 출구」를 읽고

 

 

허희(문학평론가)

 

 

 

 

 

    이른바 ‘문학판’이 아닌 자리에 ‘문학평론가’로서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면 거의 빼놓지 않고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 “과도한 업무 때문에 신문 읽을 시간도 없다. 그냥 하루하루 살기도 벅찬데, 시간 내어 굳이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두 번 듣는 이야기도 아니고, 능숙하게 답변할 때도 됐다 싶지만, 나는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하는 일이 여전히 곤혹스럽다. 모범 답안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대학 1학년 때 수강했던 ‘문학 개론’ 수업에서부터, 문학의 역할과 의의는 반복적으로 보고 들어서 이제는 외울 정도가 되었다.
한데 질문을 한 사람들에게 배운 바를 그대로 설명하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적힌 내용만으로 그들이 원하는 충분한 답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이 깊었으나 결론은 단순하게 내렸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스스로 체감한 점을 솔직하게 밝히자는 것, 현재 나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지어 절실하게 느낀 점을 가감 없이 전하자는 것이다. 서툴더라도 그렇게 하는 편이 그 시간, 그 장소에서의 진실한 응답이 되리라고 여겼다. 그래서 동일한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항상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요새는 이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하여 언술한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느끼지 않고 동정도 하지 않으며, 부러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한편 그런 태도는 잘난 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라면 ‘나 자신’은 물론 ‘누군가’에 대해서도 책임과 동정,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내가 밀어낸 누군가에 대한 책임, 그곳에 있지 못한 자신에 대한 동정, 그리고 이곳보다 멋진 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부러움. 아마 내가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1)

   1)  후루이치 노리토시, 이언숙 옮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민음사, 2014, 319~320쪽.

 

    문학은 ‘나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여, ‘누군가’에 대한 상상을 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추동한다. 저곳에 있는 “모르는 사람”이 이곳에 있는 ‘나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인식, ‘그―나’의 행불행이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고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마음. 내밀한 서정과 서사로, 광대한 소통과 공감을 지향하는 문학은 ‘사람’이라는 단수와 ‘사람들’이라는 복수를 매개한다. 개인의 독존(獨存)이란, 모두의 공생(共生)이 전제되는 한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홀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칠 때 사람은 괴물로 변한다. 그러니까 “시간 내어 굳이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지금의 나는 답하고 싶다.
    「11번 출구」에 대해 쓰느라 이토록 긴 서두가 필요했다. ‘절망의 나라에서 절망한 젊은이들’을 형상화한 이 소설을 읽는 것과,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언급한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기에 그렇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다미”는 역과 지하상가의 경계에 있는 빵집에서 일한다. 근무한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휴가를 받은 적이 없고, 매일 첫차를 타고 출근해 막차를 타고 퇴근하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다. 다미는 빵을 굽고 커피를 타는 기본 업무는 물론이고, 정산 등의 일처리도 혼자 다 하는데, 사장은 가끔 가게에 들러 금고에 든 돈을 가져갈 뿐이다. 1970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이래, 노동 환경의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다미의 경우를 놓고 보면 노동 시간과 휴게 보장 등에 관한 근로기준법은 오늘날에도 똑바로 지켜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리 없는) 절규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다미는 빵집 기계로 길들여진다.
    가령 내일은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장의 말에 그녀는 “그러면 저 잘리는 건가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잠깐의 쉼이 해고로 이어질까 봐 다미는 출근을 자처한다. 해고의 공포가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 빵집에 “반죽을 배달하는 청년”도, 의류 매장 점원인 “제나 언니”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일한 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그들은 직장을 그만두지 못한다. 실업 상태에서는 아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탓이다. 젊은이들은 온종일 일해야만 근근이 생존할 수 있다. 상가 재정비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기자, 제나 언니는 “나한테까지 별일이 있겠어? 잘리기밖에 더 할까.” 하고 호기로운 척 굴지만, 식당에 가서 먹는 점심값마저 아껴야 하는 그녀가 다미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잘린다. 그 말이 문득 서늘하게 느껴져 다미는 목이 메었다. 급하게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만약 더 이상 빵집에서 일하지 못하게 되면 어떨까. 어떻게 될까. 다미는 갑자기 텅 비어 버린 하루에 당황할 자신을 떠올렸다. 에고, 천천히 먹어, 하고 제나 언니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빵집은 역에 있다. 상가에서 무슨 큰일이 있어도 빵집은 별일 없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고, 다미는 생각했다.

 

    상가와 상관없이 빵집에만 별일이 없으면 과연 다미는 괜찮을까? 그녀의 간절한 바람처럼 언뜻 보기에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미의 일터가 남아 있다고 해서 그녀가 괜찮아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다미는 휴일 없이 격무에 시달릴 테고, 그녀의 삶 자체가 피폐해질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감히 단언한다. 지속적으로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다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대신 살아 주지 않는 자기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왜 (빵집에서) 일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하는 본질적인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의 억압이 작용함으로써, 본인의 삶에 대한 사유를 멈춤으로써 다미는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빵집 기계가 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의 표제이기도 한, 없어진 ‘11번 출구’는 봉쇄된 ‘삶의 출구’에 대한 명백한 알레고리다. 많은 사람들은 예전에 분명히 존재하던 출구를 기억하고 그곳으로 나가고자 한다. “11번 출구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버릇처럼 걷다가 제나 안으로까지 들어와서 11번 출구를 찾았다. 11번 출구는 없다고, 없어졌다고 말하면 막막한 얼굴로 그럼 어떻게 하냐고 되물어왔다.” 다미를 비롯해 11번 출구가 폐쇄된 사실을 아는 이들은, 길을 물어보는 행인에게 차선책으로 그와 가까운 출구를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다른 출구가 아니라 바로 그 11번 출구가 중요하다. 11번 출구가 아니면 안 되는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결말부―어떤 사람이 11번 출구가 어디인지 물어 오기를, 11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말해 주기를, “그러다가 갑자기 불쑥 끼어드는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있기를 기다”리는 다미의 태도는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보인다. 그녀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되, 그것을 타개할 의지는 없다. 다미는 해결안을 갖고 있다고 짐작되는 남자와 조우하기를 바란다. 절망의 나라에서 절망한 그녀이기에, 그나마 이 정도가 꿈꿀 수 있는 가능한 소망이라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만 다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고, 미지의 누군가에게 미루고만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탈출구가 막힌 절망의 나라에서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격려가 오히려 실재를 기만하는 술책이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현상의 적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할 참이다.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할 수만은 없다. 불만과 분노를 갈무리한 (젊은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막힌 탈출구를 어떻게든 도로 열거나,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해 죽을힘을 다해 뚫어야 할 시기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영영 이렇게 살다가, 탄식하다 죽고 말 것이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황석영, 『객지』) 1971년 선언한 ‘동혁’의 비전을 40여 년이 흐른 이제는 이룰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전술한 대로 괴물이나 기계가 되지 않으려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려고,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니까.

 

 

 

작가소개 / 허희(문학평론가)

1984년 서울 출생. 2012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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