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는 만나지 마

 

 

한두는 만나지 마

 

 

 

황현진

 

 

삽화-한두는-만나지마

 


 

 

    기어이 모텔이었다. 한낮이었다. 방은 깨끗했지만 허름했다. 방 안은 바깥보다 온도가 낮았다. 직전에 누군가 묵었다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에어컨의 전원을 금방 끈 듯 방 안에 찬 기운이 돌았다. 잠깐 소름이 돋았다가 이내 사라졌다. 춥지는 않았다. 사각거리는 이불 탓일지도 몰랐다.
    커튼이 젖혀 있었다. 방은 지나치게 환했다.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불이 너무 하얬다. 방에서 제일 새것이었다. 나는 침대 곁에 서서 이불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래 보고 있으니 하얀 이불 위에 내 모습이 비치는 것도 같았다.
    추접해. 이건 정말 더러운 짓이야.
    나는 손끝으로 이불 자락을 툭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보름 전쯤이었다. 한두가 전화를 걸어 잘 지내냐고 물어왔다. 대답 대신 너는? 이라고 되물었다. 그는 아주 들뜬 목소리로 나야 매우 잘 지내지라고 대답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잘 됐네.
    내 목소리도 평소와 다르게 활기가 넘쳤다. 한두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되물어 왔다.
    넌 잘 지내냐니까?
    나는 내가 잘 지내는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대답처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매우 잘 지낸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며칠 전에 받은 엽서 때문인지도 몰랐다. 문오가 보낸 거였다. 곧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엽서에 적힌 대로라면 문오는 9월의 첫째 날 도착할 예정이었고 내가 마중 나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얘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걸까, 고개를 젓다가 뜬금없이 취하고 싶어졌다. 취한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편의점에서 세일 행사 중인 술을 사다가 천천히 마셨다. 다음날에도 같은 술을 사다가 마셨다. 계속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밤 같은 일을 반복했다. 밤마다 맥주 세 캔을 마시고 트림을 하며 침대에 누워 살 찔 걱정을 했다. 허리 살을 꼬집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양치도 하지 않고 곯아떨어졌다.
    문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삼 년 전인데 자꾸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삼 년 전과 비교해 보면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입생 환영회가 있던 스무 살의 봄을 생각하면 나는 그때와 영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바란 적도 없었던 유형으로 말이다. 벌써 십 년도 훌쩍 지난 일이다. 엽서에는 이런 말들이 덧붙여 있었다. ‘시드니 시내에서 한인차별반대시위가 크게 열려. 한국에도 전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이곳에선 한국 사람들만 골라서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많아졌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었어. 우린 이게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해. 큰 집회가 열릴 거야. 내가 여길 떠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유일한 일이기도 해.’
    도대체 우리가 누구야?
    술에 취해 혼잣말을 하며 웃었다. 퇴근길에는 꼬박꼬박 편의점에 들렀다. 며칠 지나자 마시던 술은 더 이상 세일을 하지 않았다. 정상가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같은 술을 비싼 값에 사먹으면서 억울하다고 짜증을 부렸다. 문오가 돌아오는구나. 잠들기 직전 그런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문오가 호주로 떠난 지 얼추 삼 년이 지났고, 나는 문오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나도 참 변한 게 없어, 중얼거리며 실실 웃었다.

 

    잘 못 지내냐?
    수화기 건너편에서 한두가 장난기 어린 투로 다시 물어 왔다.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한두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정말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대화를 길게 할 요량으로 말이다.
    잘 지내지.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저 한두의 말을 따라한 것에 불과한 소리였다. 나는 얼른 그럭저럭, 이라고 덧붙였다.
    하긴, 괜히 물어봤다 싶었어.
    한두는 나를 잘 살펴보지 않는다. 아예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생각은 좀 해봤어?
    한두가 곧장 용건을 꺼냈다. 대답 대신 깔깔거리며 웃었다. 때때로 한두의 뻔뻔한 성격에서 비롯하는 행동들은 웃음을 자아냈다. 그의 뻔뻔함이 내 짐작보다 훨씬 노골적인 면이 강해서였다.
    웃네.
    한두가 놀리듯 말했다.
    아직도 웃고 있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랬다.
    계속 웃겠네.
    그는 내가 웃는다는 것에 대해서 늘 우스워했다.
    그러다 울겠네.
    한두는 기어이 한 마디를 더 하더니 크게 웃어댔다. 한두가 웃으면 따라 웃어야 한다. 그건 나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나는 부러 킥킥대며 웃었다. 한두는 툭하면 내가 웃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웃기다고 말했다. 그건 한두의 오래된 말버릇이다.
    할 거지? 할 거지?
    웃는 와중에도 한두의 재촉이 이어졌다. 내겐 이미 거절할 힘이 없었다. 거절할 이유야 쌔고 쌨지만 그 이유들을 일일이 열거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말이 길어지면 필요 이상으로 오래 웃을지도 몰랐다.
    몰라.
    투정부리는 티가 확 났다. 나도 내게서 그걸 느꼈다. 내가 지금 아주 유치한 방법으로 한두를 꼬드기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나는 한두가 나를 유혹하는 순간을 오래 끌고 싶었다.
    좋구나?
    아니거든.
    좋아 죽는데?
        그만 웃지.
좋다는 거네.
    한두의 말은 항상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그 모두를 상관하지 않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그가 옳은 말을 하건 틀린 말을 하건 아예 듣지 않을 자세가 갖춰져 있다는 뜻이다. 어차피 그가 꺼내는 말들 중 대부분은 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나를 위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나는 늘 그의 말을 따랐다. 한두는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 역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서른이 되기 얼마 전의 일이다. 한밤에 한두를 불러내 강가를 걸었다. 강의 가장자리가 하얗고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언 강을 건너오는 바람은 쌀쌀했다. 나는 목도리를 광대뼈 언저리까지 끌어올리며 갖은 푸념을 한두에게 늘어놓다가 요즘 너무 울적하다고 고백했다. 한두가 왜냐고 물어서 애인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한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단박에 이렇게 충고했다.
    여행을 떠나 보는 게 어때?
    밖에선 매사가 훨씬 쉬워진다고 했다. 한두는 다른 나라를 가리켜 꼭 밖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꼭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인 양, 자신은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인 양, 밖의 세상에 대해, 밖의 사람에 대해, 밖의 사랑에 대해 설명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나는 굳이 외국인을 만나고 싶진 않다고 대답했다. 한두가 코웃음을 쳤다.
    너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울적하고 우울하기만 했지, 외롭진 않은 거라고.
    한두, 그런 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한두는 일부러 짓궂게 굴었다. 내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자 한두가 짐짓 진지한 체 말을 이었다.
    울적하다는 건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나 있다는 거야.
    나는 정말로 화가 났다. 한두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런 다음 내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한두의 전적인 동의를 받아내고 싶었다.
    한두, 상상해 봐. 사랑해라는 말도 웃긴데 아이러브유라고 말하는 거 진짜 우습지 않아?
    아이러브유라고 말하면서 나는 일부러 바보 흉내를 냈다. 우습지 않아, 라고 말하면서 눈을 치켜떴다. 흥분하는 기색 없이 화를 낼 작정이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세련된 방식으로 화를 내고 있는지 한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 봐. 한두, 나는 화를 낼 때도 유머를 구사하지. 한두는 그런 내가 한심하다는 투로 혀를 끌끌 차고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너 바보야?
    한두, 왜 항상 그렇게 가볍게 말해?
    하나만 물어보자. 너 해보긴 했냐?
    한두!
    말문을 열 때마다 한두의 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는 화가 나고 억울할 때만 한두의 이름을 불렀다. 한두, 부르고선 얼토당토않은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가도 한두의 이름을 꼬박꼬박 불렀다.

 

    그즈음 한두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어린 여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다. 서른이 될 때까지 한두에게는 직업이 없었다. 돈이 없었다. 집도 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애인이 있었다. 한두에겐 애인이 어린 여자라는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굳이 그 사실을 자랑삼아 말한 적도 없었다. 능력도 없으면서 애인을 갖고 있다는 것, 한두가 늘 자신만만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두가 늘 강조하고 으스대며 말했던 바는 난 무능해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한두의 무능력은 그의 삶에 큰 해를 끼치지 않았다. 대화 말미에 한두가 내게 정색하며 물었다.
    너 혹시 또, 나 좋아하냐?
    나는 소리를 꽥꽥 질렀다. 오래전 일인데도 부끄러웠다. 한때 내가 한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학과에 나돌았다. 나는 애써 그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를 따라다니는 소문 역시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다른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다가 강가를 벗어날 무렵 한두에게 부탁했다.
    여행, 같이 갈래?
    이번에는 한두가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펄쩍 뛰어다녔다. 그러곤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나랑 하고 싶어?
    한두!
    나는 한두를 힘껏 뒤로 밀쳐냈다. 한두는 휘청거리며 넘어지는가 싶더니 용케 균형을 잡고 서선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가 금세 나를 놓아 주었다.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한두가 사뭇 비장한 투로 말했다.
    언젠가 한번은 꼭 해줄게.
    아주 비장하게 나를 놀리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한두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우체통에 엽서가 들어 있었다. 문오가 호주에서 보낸 첫 번째 엽서였다. 크리스마스 엽서였다. 크리스마스 지난 지가 언젠데, 투덜대며 엽서를 사납게 흔들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대충 눈으로 읽고 우체국 소인을 들여다봤다. 오스트레일리아. 울적한 김에 호주로 건너가 문오나 만나 볼까, 싶었다. 문오가 있는 곳이 밖이라면, 밖인데도 외국어로 말하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만만하기까지 한 지인이 거기에 한 명쯤 있다면 충분히 떠날 만하지 않을까.
    합리적이고 실속 있는 여행이 될 가능성이 커보였다. 게다가 낯간지러운 고백 없이도 손을 잡고, 끌어안고, 입을 맞출 용기마저도 무럭무럭 생겨날 것 같았다. 문오에게 너 나랑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고 문오가 그렇다고 하면 곧장 옷을 벗어 줄 용의도 없지 않았다. 한두의 말처럼 그곳이 밖이라는 이유만으로 머릿속에서 도무지 용납되지 않던 일들이 한결 쉽게 여겨지는 것은 과연 사실이었다.
    다 읽은 엽서를 서랍에 던져 넣었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뭐 대수라고, 계속 빈정댔다. 그 와중에도 나랑 하고 싶으냐고 묻던 한두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쟁쟁 울렸다. 한두가 했던 말을 곱씹다가 서른 살을 맞았다. 혼자서도 괜히 고개를 세차게 내젓곤 했다.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의 뒤늦은 제스처나 대답은 아니었다. 그 물음 자체를 내 머리 속에서 빠져나가게 하려는 몸짓이었다.
    해가 바뀌자마자 두 번째 엽서가 날아왔다. 칠월이 지나가기 전에 꼭 한 번 놀러오라고 쓰여 있었다. 그즈음 거기는 겨울이라고 했다. 단박에 그곳이 오스트레일리아든 오스트리아든 어디로든 가고 싶지 않아졌다. 꼭 한 번 놀러오라는 말이 꼭 한 번 해달라는 말처럼 읽혔다. 이 새끼도 별수 없다고 혼자서 코웃음을 쳤다. 호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문오가 나를 찾아왔었다. 다녀올 동안 꼭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의 말을 들었다. 우리는 친구 사이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 문오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신신당부했다.
    제발 한두는 만나지 마.

 

    문오는 봄에 태어났다. 문오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에 함께 점심을 먹었다. 한낮에 파티라니, 의아해하며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손님은 나뿐이었다. 미역국 파는 식당을 알지 못해 둘이 국수를 사먹었다. 생일에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대, 그런 말을 나누었다. 문오는 국수를 먹으면서 나이 제한을 넘기기 전에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해야겠다고 계속 말했다. 그 말을 하느라 입에 물고 있던 국수를 앞니로 자꾸 끊어냈다. 보기가 흉했다.
    국수 끊어먹으면 일찍 죽는다더라.
    나는 젓가락으로 국수를 휘저으며 이죽거렸다. 내 말을 못 들었는지 문오가 김치도 앞니로 질근질근 끊어 먹기에 제발 꼭 호주에 가라고 잔인하고 심드렁한 말을 죽 이어 나갔다. 호주도 인종차별이 심하다더라. 날계란을 던진다던데. 호주의 사막을 파헤치면 온통 시체라더라. 협박하듯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주구장창 늘어놓았다. 속으로는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말은 언제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너도 돈을 벌자고, 영어를 배우자고 거기를 가는구나.
    문오가 입안의 국수를 뱉어내며 나를 노려본 것은 그 말을 꺼낸 직후였다.
    취소해.
    문오가 정색하며 요구했고, 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긍했다. 그건 너무 쉬운 일이라는 티를 확연히 드러내면서 그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응. 취소할게.
    나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몇 달 후 문오는 호주로 떠났다. 첫 번째 엽서 이후로 문오는 한 달에 서너 통씩 꾸준히 엽서를 보내왔다. 까맣게 탄 상반신을 드러낸 사진을 함께 보낼 때도 더러 있었다. 만세를 하고 있거나 역기 드는 자세를 취하면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엽서는 죽 이어졌다.

 

    한두는 정말로 딱 한 번만 하자고 했다.
    우리가 몇 살인 줄 알기나 해? 서른두 살이야. 이런 대화, 너무 유치하지 않니.
    나는 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니까 하자는 거야. 만 서른 살을 넘기기 전에 유치한 짓을 모두 해치워야지.
    대답이 가관이었다.
    한두, 넌 이미 만 서른을 넘겼거든.
    나는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의 생일은 이미 지났다.
    넌 아직 만 서른 살이 아니잖아.
    나는 9월에 태어났다. 9월이 코앞이었다. 문오는 곧 귀국할 예정이었고, 한두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여긴 대한민국이야. 만으로 세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모르겠어? 우린 지금 아메리칸 스타일의 대화를 나누고 있어.
    나는 간만에 크게 웃었고, 그 역시 소리 내어 웃어댔다. 처음에는 웃겼으나 나중에는 우습지 않았다. 내가 뭘 몰라서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알겠어.
    나는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너 지금 알겠다고 했어!
    한두가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곧장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문오가 최근에 보낸 엽서를 다시 꺼냈다. 왜 문오는 간편한 이메일을 이용하지 않고 굳이 엽서를 보내는 것인지 곰곰 생각한 적 있다. 그러다 내 이메일 주소만 적어 짧은 답장을 보냈다. 얼마 후에 답장이 왔다. 추신란에 문오는 이렇게 썼다. 수신확인이 가능한 편지는 어쩐지 불안하다고. 그제야 나는 문오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한두와 연락하고 음담을 나누고, 심지어 한두와 밥과 술을 먹는 동안 그와 섹스 하는 상상을 했던 것에 대해 잠시 미안했다. 메일을 읽지 않음의 상태가 문오에게 어떤 상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얼추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문오가 알려준 귀국 날짜는 내 생일로부터 이틀 전이었다. 문오는 돌아오자마자 내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은 것 같았다. 문득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 오래전, 우리가 다 같이 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한두와 문오 그리고 나는 소속 학과는 달랐지만 같은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아직 1학년이었다. 2학년이 되기 전에 한두는 가장 먼저 동아리를 탈퇴했다. 탈퇴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저는 몸짓패가 댄스 동아리인 줄 알았어요.
    아무도 한두를 붙잡지 않았다. 한 선배가 이런 말을 건네기는 했다.
    몸짓이건 댄스건 넌 춤에 소질 없거든.
    문오만 킥킥 웃었다. 한두가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1학년 여름방학 때, 동아리 전체가 시외의 타 대학교에 갈 일이 있었다. 제법 큰 시위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 모두 시외버스터미널에 모였다. 한두는 마지못해 따라나선 기색이 역력했다. 문오는 머리에 커다란 두건을 쓰고 나타났다. 선배들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1학년인 우리를 한데 모아 놓고 어쩌면 시위가 며칠씩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통보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생리 중이었고 멀미약도 준비하지 못했다.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시간이 너무 이른 탓인지 터미널 내 약국은 문을 열지 않았다. 엉겁결에 선배가 나눠주는 차표를 받고 버스에 올라탔다.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1학년생들은 나란히 차창을 향해 섰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검은 창에 한두의 얼굴이 비쳤다. 한두는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에 기대어 눈을 붙이고 있었다. 나는 한두의 잠든 얼굴을 쳐다보며 계속 침을 삼켰다. 신물이 꾸준히 넘어왔다.
    버스는 정차할 때마다 급정거를 했다. 그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홱홱 쏠렸다. 자꾸 문오와 부딪혔다.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이 아찔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치밀어 오르는 구토기를 억지로 삼켰다. 문오의 시선이 내게 머무르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한껏 숙인 채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만 기다렸다. 그사이 해가 떴고 차창이 밝아졌다. 누구의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선배들은 앉은 자리에서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잠을 청했다. 나는 애써 먼 산을 바라보며 멀미를 가라앉히던 중이었다. 문오가 운전사에게 도착하려면 몇 분이나 남았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몇몇이 눈을 떠 문오를 쳐다보았다. 삼십 분은 더 가야 한다고 운전사가 대답했다. 문오는 잠깐 생각에 빠져있는 듯하더니 내 앞의 좌석에 앉아 있는 선배를 깨웠다. 선배가 눈을 치켜떴다. 나는 문오의 행동이 부끄러워서 한두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선배, 얘 얼굴 좀 봐요.
    문오가 고갯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잠들어 있던 모두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안색이 안 좋아요.
    선배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을 열면 토악질이 튀어나올 것 같아 고개만 계속 흔들었다. 선배가 일어섰다. 문오가 나를 의자 쪽으로 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리에 앉았다. 앞좌석의 등받이에 이마를 붙이곤 질끈 눈을 감았다. 한결 속이 편했다. 문오는 단 한 번도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문오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본 적 또한 전혀 없었다.

 

    시위는 삼박 사일 동안 이어졌다. 나는 항상 열의 뒤에 서 있었다. 앞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모두 앞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선두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하얀 두건을 쓰고 있는 머리를 금세 찾아냈다. 문오의 머리는 자주 앞뒤로,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문오가 돌아서면 나도 뒤돌아섰다. 문오가 앞으로 달려가면 나도 달려갔다. 내가 뒤돌아서면 내가 속한 열 전체가 돌아섰다. 내가 달려가면 내가 속한 열뿐만 아니라 내 뒤에 서 있는 사람들 전부가 앞으로 뛰었다. 곁을 지키던 선배들이 내게 굉장히 열심히 임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이틀째 되던 날, 한두는 허리춤에 기다란 쇠사슬이 달린 바지를 입고 나타나 열의 뒤쪽에 섰다. 몇몇 여자 선배들이 왜 앞줄에 서지 않느냐고 눈총을 줬지만 한두는 아랑곳하지 하지 않았다. 그저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건들거리며 행렬의 머릿수를 채우고 있었다. 갑자기 선두에서 몸싸움이 격하게 일어났다. 무리 전체가 한 목소리로 야유를 내질렀다. 열의 가운데 서 있던 사람들이 앞쪽으로 크게 고꾸라졌다.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서로 어깨를 걸고 구호를 외쳤다. 걸음이 빨라졌다. 가장자리에 서 있던 몇몇이 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앞쪽 상황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한두가 내 옆에 다가와 팔짱을 꼈다. 바짝 몸을 붙이고 조르듯 말했다.
    우리 먼저 집에 가자.
    나는 곤란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두가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얼렀다.
    너 몸도 안 좋잖아.
    몸은 어제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였다. 그날 밤 학교의 빈 강의실에 누워 잘 준비를 하는데 한두가 찾아왔다. 내 손을 잡아끌고 굳게 닫힌 교문을 피해 야산으로 나 있는 길을 찾아냈다. 이미 선배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한두와 나는 한밤중에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한두에게 나는 이제 아프지 않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한낮에 들었던 선배들의 칭찬을 되새기며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한두가 걸을 때마다 쇠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한밤의 국도변에서 한두와 나는 쭈그려 앉아 지나가는 차를 기다렸다. 버스는 끊긴 지 오래였고, 지나가는 차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CD 플레이어의 건전지가 다 된 모양인지 한두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며 내게 물었다.
    근데 너, 나 좋아해?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이 쏟아졌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 나를 울렸다. 한두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키스해 줄까?
    한두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물어 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국도변을 내달렸다. 한두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쇠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두가 숨에 찬 목소리로 내게 고함을 질러댔다.
    안 할게. 안 한다고.

 

    얼마 후 한두는 동아리를 탈퇴했고, 2학년이 되었을 때 나도 탈퇴했다. 선배들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동아리 내에선 이미 내가 한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는 그 소문에 부응하듯 가끔 학교 내 야외 강당에 죽치고 앉아 한두가 춤추는 모습을 구경했다. 문오는 2학년 말에 자퇴를 했다. 곧장 군대에 갔다. 집회법 위반으로 몇 번 구금된 이력 때문에 군 생활이 유난히 힘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끔 학과 사무실의 주소로 편지가 왔다. 몇몇 선배의 안부를 묻기도 했고 제대 후 계획에 대해서 길게 늘어놓을 때도 더러 있었다.
    한두도 곧이어 입대했다. 한두에겐 2학년이 되자마자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 새내기 후배였다. 학교 안에서 가끔 그녀와 마주쳤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그녀를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나는 편지지를 고르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와 내게 인사하곤 말없이 편지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국제우편봉투를 집어 들고 부랴부랴 빠져나왔다. 국제우편봉투라니, 어이가 없어 서서 웃었다.
    한두가 일병 휴가를 나왔을 때, 우연히 캠퍼스 안에서 마주쳤다. 한두는 나를 보곤 군홧발 소리를 쩌렁쩌렁 울리며 달려왔다. 호들갑을 떨며 아는 체를 했다.
    너 요즘 펜팔 한다며?
    나는 무슨 소린 줄 몰라 어안이 벙벙해져선 한두의 군복 입은 모습을 훑어보았다. 멀리서 한두의 여자 친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두는 뒤돌아서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다란 팔을 높이 치켜들고서 빠르게 질문을 쏟아냈다.
    토익 때문에? 아님 외국 남자 꼬시려고?
    한두의 여자 친구가 좀 전보다 더 새된 목소리로 한두를 불렀다. 한두는 팔을 더 크게 흔들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을 껌벅였다. 한두는 그런 내가 답답했던지 그건 토익에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다정한 선배처럼 충고했다. 여전히 내가 별 반응이 없자 한두는 두 손을 허리춤에 얹고 서서 명령하듯 말했다.
    나한테도 편지 좀 써라.
    그러곤 쏜살같이 여자 친구를 향해 뛰어갔다.

 

    더러워. 추접하고 부끄러워.
    발바닥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나는 우리가 지금 하려는 일을 맘껏 비하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옷을 벗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양말을 벗었다. 야구 모자를 벗어 안쪽에 양말을 넣어 두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사는 동네의 모텔을 골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두의 말마따나 정말로 딱 한 번만 하고 말 일이라면, 보다 성의 있게 오늘을 준비할 수 없었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자니 진심 아닌 나머지 절반의 마음마저 진심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
    그만 해줄래?
    한두가 커튼을 치며 빛을 가렸다. 그는 좀처럼 기분 나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만만했다. 한두가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보란 듯이 목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목의 한쪽 근육이 길게 당겨졌다. 한두는 지체 없이 거기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갖다 댔다. 길어진 목의 한쪽이 축축하게 젖었다. 나는 짧은 숨을 토해 냈다. 한두 역시 뜨거운 숨을 내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한두의 턱이 내 목덜미를 세게 눌렀다. 눈앞이 아찔했다.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거칠게 한두를 밀쳐냈다. 빗장뼈를 쓰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한두는 잠시 놀란 듯 보였지만 다시 웃음기를 찾았다.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심 한두의 평정심을 질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넌 정말 개새끼라고 욕하고 주먹질하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속이 불편해.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한두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등 뒤에 앉아 나를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여러 차례 내 등을 훑고 지나갔다. 한두의 입술이 다시 귓불 주위를 맴돌았다. 거기에 그러면 안 된다고, 네가 자꾸 그러면 한나절 동안 먹었던 음식을 모조리 게워낼 수도 있다고 경고라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나는 괜히 여러 차례 가슴을 두드렸다.
    한두의 두툼한 손이 옷 속으로 쑥 들어왔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기다란 두 다리로 나를 꼼짝 못하게 포박하곤 혀로 여기저기를 핥고, 커다란 손으로 주물럭거리면서 내내 웃었다. 확실히 한두는 즐거워 보였다.
    벗겨 줄까?
    한두가 내 젖꼭지를 살짝 비틀며 물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반바지를 벗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티셔츠를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브래지어를 풀어 침대 밑에 떨어트렸다. 한두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아직도 더러워?
    한두가 의뭉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추잡해?
    한두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도 부끄러워?
    한두의 얼굴이 배꼽 아래로 내려가기 직전, 나는 억지로 그의 얼굴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강제로 내 두 눈을 마주 보게 하고 요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말을 꺼냈다.
    문오가 돌아온대.
    한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래서? 다시 문오랑 사귀려고?
    그는 얼른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머리 밑에 두 손을 포개어 받치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문오랑 사귄 적이 있었냐?
    한두가 한 팔을 빼내 자신의 사타구니를 만지기 시작했다.
    너희 학교 다닐 때 사귀었잖아.
    아니야. 난 문오랑 사귄 적 없어.
    그럼 그때 왜 그랬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우리 1학년 때, 동아리 선배들하고 마지막으로 술 마시던 날, 네가 문오한테 키스했잖아. 그리고 둘이 먼저 나갔잖아.
    기억 안 나.

 

    한두가 알려준 일들이 내 기억 속에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나는 직감했다.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었다. 새하얀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고 한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두가 더 많은 사실들을 내게 말해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빨아 줄래?
    한두의 오른손은 여전히 자신의 성기를 쥐고 있었다. 나는 취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매일 밤마다 술을 사다 날랐지만 세 캔 이상 마시지 못했고 아침이면 어제보다 말짱해져 있었다. 한두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한두의 얼굴이 홱홱 꺾일 정도로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차라리 그냥 빨라고 벗으라고 만지라고 말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정말로 결혼할 거야?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한두에게 물었다. 한두는 당황하지 않았다.
    걔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매일매일 말하는 애야.
    한두는 죽을 때까지 나는 무능하다는 말을 자랑삼아 말할 사람이다.
    네가 원하는 게 나랑 한번 하는 거야?
    네가 원하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첫사랑은 나였잖아? 안 그래?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던 팬티를 주워 입었다. 검정 레이스로 직조된 팬티는 오늘 내가 몸에 걸쳐 입은 것들 중에서 가장 신경 써서 고른 물건이었다. 브래지어를 손에 든 채로 다시 한두 옆에 앉았다. 한두는 애인에게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 보였다. 그건 명백하게 한두의 애인 탓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녀가 함부로 남발한 말들 때문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그녀는 한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널 정말로 좋아했을 것 같아?
    한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각거리는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고 눈을 감았다.
    안 할 거면 낮잠이나 자자.
    한두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잠을 청했다. 나는 한두의 어깨와 목덜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옅은 기미가 목 아래 번져 있고 왼쪽 어깨에 나 있는 주사 자국은 짓무른 상처와 닮아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새치머리가 두어 가닥 비죽 튀어나왔으며 오래전에 귀를 뚫었던 자리는 여전히 빨갰다. 나는 한두의 등을 마주한 자세로 누웠다. 엉덩이가 살짝 닿았으나 피하지 않았다.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오래전 일들을 다시 꿰맞추기엔 기억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게다가 이제 한두의 등을 돌려 눕혀서 오늘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마저 진행시키기도 민망했다. 한두가 밉기도 했다. 옛일들을 더 이야기해 주지 않고, 한 번만 하자고 조르지도 않고, 도리어 내게 좀 더 뻔뻔해지라고 요구하는 듯 보였다.
    우울해.
    큰 소리로 나는 중얼거렸다.
    우울해.
    다시 한 번 말했다. 한두가 나를 위해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길 바라면서.
    너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마침내 한두가 입을 열었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실시간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버튼 음이 빠르게 이어지자 한두 역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건성으로 핸드폰 화면을 넘겼다. 그러다 눈을 사로잡는 기사를 발견했다. 속보였다. 네 줄짜리 단신이었다. 자세한 소식은 계속 이어진다는 문장까지 포함하면 겨우 다섯 문장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오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인차별반대시위에서 참가자들과 현지 보수주의자들과 거센 충돌이 일어나는 바람에 아시아계 남자가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나는 단박에 문오를 떠올렸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두.
    나는 침착하게 한두를 불렀다.
    만약에 문오가 죽으면 어쩌지?
    한두는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당기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더 우울하겠네.
    나는 점점 화가 났다.
    한두!
    한두가 두 눈을 치켜뜨고 내게 물었다.
    넌 그런 상상하는 게 재밌냐?
    한두가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났다. 바지를 꿰어 입고 티셔츠에 목을 넣었다. 나는 이불 위에 놓여 있던 브래지어를 서둘러 숨겼다.
    청첩장 보낼게. 유치하게 안 오거나 하진 말고.
    한두가 허리띠를 채우며 툭툭 던지는 말마다 약이 올랐다. 나는 콧방귀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웃어댔다. 한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역시 넌 웃겨.
    신발을 다 신은 한두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서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한두의 머리카락이 이마 아래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며 한두는 나긋나긋 말했다.
    그거 알아? 오늘 우리는 정말 좋을 수도 있었어.
    한두는 내게 손을 흔들고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나는 등 뒤에 괴고 있던 베개를 연달아 내던졌다.
    한두!
    떠나고 없는 한두를 불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내던질 베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계속 같은 문장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내가 널 정말로 좋아하긴 했었을까? 너무 어려운 질문이어서 재빨리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모텔은 어두웠다. 아직도 한낮이었다. 커튼을 열자니 부끄러웠다. 우리는 정말 좋아질 수 있었을까 곰곰 생각하다가 오늘 나는 절대로 추잡하고 더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반듯하게 침대에 누워 한두가 값을 치른 시간이 다할 때까지 퇴실하지 않고 머물렀다. 한두. 한두. 부끄러움은 조금 가셨지만 9월이 되면 나는 이제 그만 웃어야겠다고 혼자 결심했다. 대신 우울하다거나 울적하다는 말을 대체할 다른 단어를 찾는 데, 누워 골몰했다. 침울하다거나 고독하다는 말들을 떠올리면서 짐짓 세차게 고개를 내젓다가, 카운터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방을 나섰다. 집이 바로 근처였다.

 

 

 

작가소개 / 황현진(소설가)

2011년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 장편소설 『죽을만큼 아프진 않아』가 있음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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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현

잘 읽고 갑니다. 좋네요.